남성관희자

남성관희자

[ 南城觀戱子 ]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는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그가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연행된 인형극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지은 한시이다.

강이천의 〈남성관희자〉는 시의 앞부분에서 인형극, 뒷부분에서는 가면극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형극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낯짝이 안반 같은 놈, 노기를 띠어 흉악한 놈, 더벅머리에 귀신 가면을 쓴 두 놈, 얼굴은 구리쇠에 눈에 도금을 한 놈, 북방유목민인 달자(韃子, 달단), 귀신과 그 새끼 등 여러 인형이 등장한다.

남문 밖은 우리 집서 일 리 남짓(距家未一里)
나도 얼른 신발 신고 달려가니(吾亦理笻屨)
사람들 웅기중기 성을 쌓고(蔟蔟女墻頭)
일만 눈 한 곳에 쏠렸더라.(萬目一處注)
멀리 바라보니 과녁판을 매단 듯(遙望似縣帿)
푸른 차일 소나무 사이로 쳐진 데(靑帳張松樹)
아래선 풍악을 울려(衆樂奏其下)
불고 켜고 두드리고 온갖 소리(鏗轟雜宮羽)
바다가 다하니 갑자기 산이 튀어나오고(海盡陡山出)
구름이 열려 달이 황홀히 비치듯(雲開怳月吐)
사람 형상 가는 손가락만큼(人像如纖指)
나무로 새겨 채색을 했구나.(五彩木以塑)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오니(換面以迭出)
어리둥절 셀 수가 없더라.(炫煌不可數)
문득 튀어나오는데 낯짝이 안반 같은 놈(突出面如盤)
고함 소리 사람을 겁주는데(大聲令人怖)
머리를 흔들며 눈을 굴려(搖頭且轉目)
왼쪽을 바라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다(右視復左顧)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홀연 사라지니(忽去遮面扇)
노기를 띠어 흉악한 놈(猙獰假餙怒)
휘장이 휙 걷히더니(巾帷倏披靡)
춤추는 소맷자락 어지럽게 돌아가누나(舞袖紛回互)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忽然去無蹤)
더벅머리 귀신의 낯바닥 나타나(鬅髮鬼面露)
두 놈이 방망이 들고 치고받고(短椎兩相擊)
폴짝폴짝 잠시도 서 있지 못하더니(跳梁未暫駐)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忽然去無蹤)
야차놈 불쑥, 저건 무언가?(夜叉驚更)
얼굴은 구리쇠, 눈에 도금을 한 놈이(蹲蹲舞且躍)
너풀너풀 춤추고 뛰더니(面銅眼金鍍)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忽然去無蹤)
달자가 또 달려나와(imagefont子又奔赴)
칼을 뽑아 스스로 머리를 베어(長劍自斬首)
땅바닥에 던지고 자빠지니(擲地仍偃仆)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忽然去無蹤)
귀신이 새끼 안고 젖을 먹이며(有鬼兒乳哺)
어르다가 이내 찢어 발겨(撫弄仍破裂)
까마귀 솔개 밥이 되게 던져 버리네.(遠投烏鳶付)

사람의 형상을 가는 손가락만 하게 나무로 새겨 채색을 했다는 설명에서 이 부분이 인형극임을 알 수 있다. 인형들이 퇴장할 때는 "홀연 사라져 자취가 없다"는 말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장면 전환이 매우 빠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인형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홀연 사라지는 모습은 오늘날의 꼭두각시놀이에서 박첨지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퇴장하는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관희자〉의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들과 연희 내용은 현존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와 전혀 다르다. 이는 〈남성관희자〉의 가면극 부분이 현존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특히 현존 꼭두각시놀이의 마지막 과장인 건사거리가 〈남성관희자〉나 〈괴뢰부〉에는 없다. 현존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는 박승임의 〈괴뢰붕〉, 나식의 〈괴뢰부〉, 강이천의 〈남성관희자〉에서 묘사한 인형극과는 다른 계통인 것이다. 연희자도 〈남성관희자〉의 연희자는 가면극인 산대놀이와 인형극을 함께 공연한 반인으로 보인다. 반면에 현존 꼭두각시놀이는 남사당패에 의해 전승된다.

조선 후기에는 강이천의 〈남성관희자〉를 통해 1770년대 서울에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어 있었고, 그 연희 내용이 현재의 별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등)나 해서탈춤(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등)과 거의 같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별산대놀이와 해서탈춤 등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서는 상좌·팔먹중·취발이 등 많은 등장인물들이 소매에 긴 한삼이 달려 있는 의상을 입고, 한삼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데, 이런 춤도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긴 소매춤은 이미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에서부터 발견되고 있는데, 당나라의 십부기고구려기에 호선무와 함께 들어 있는 광수무도 바로 긴 소매춤을 가리킨다.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모두 소매가 길고 넓은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소매가 춤동작을 연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가) 평평한 언덕에 새로 자리를 펼쳐(平陂更展席)
선녀 하늘로부터 내려왔나.(仙娥自天降)
당의(唐衣)에 수고(繡袴)를 입었으니(唐衣復繡袴)
한수(漢水)의 선녀 구슬을 가지고 노는 듯(漢女弄珠游)
낙수(洛水)의 여신 푸른 물결에 걸어나오듯.(洛妃淸波步)

(나) 노장스님 어디서 오셨는지?(老釋自何來)
석장을 짚고 장삼을 걸치고(拄杖衣袂裕)
구부정 몸을 가누지 못하고(龍鍾不能立)
수염도 눈썹도 도통 하얀데(鬚眉皓如鷺)
사미승 뒤를 따라오며(沙彌隨其後)
연방 합장하고 배례하고(合掌拜跪屢)
이 노장 힘이 쇠약해(力微任從風)
넘어지기 몇 번이던고?(顚躓凡幾度)
한 젊은 계집이 등장하니(又出一少妹)
이 만남에 깜짝 반기며(驚喜此相遇)
흥을 스스로 억제치 못해(老興不自禁)
파계하고 청혼을 하더라.(破戒要婚娶)
광풍이 문득 크게 일어나(狂風忽大作)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즈음(張皇而失措)
또 웬 중이 대취해서(有僧又大醉)
고래고래 외치고 주정을 부린다.(呼號亦恣酗)

(다) 추레한 늙은 유생(潦倒老儒生)
이 판에 끼어들다니 잘못이지.(闖入無乃誤)
입술은 언청이 눈썹이 기다란데(缺脣其眉)
고개를 길게 뽑아 새 먹이를 쪼듯(延頸如鳥嗉)
부채를 부치며 거드름을 피우는데(揮扇擧止高)
아우성치고 꾸짖는 건 무슨 연고인고?(呌罵是何故)
헌걸차다 웬 사나이(赳赳一武夫)
장사로 뽑힘직하구나.(可應壯士募)
짧은 창옷에 호신수(短衣好身手)
호매하니 누가 감히 거역하랴!(豪邁誰敢忤)
유생이고 노장이고 꾸짖어 물리치는데(叱退儒與釋)
마치 어린애 다루듯(視之如嬰孺)
젊고 어여쁜 계집을(獨自嬰靑娥)
홀로 차지하여 손목 잡고 끌어안고(抱持偏愛護)
칼춤은 어이 그리 기이한고!(舞劍一何奇)
몸도 가뿐히 도망치는 토끼처럼.(身輕似脫兎)

(라) 거사와 사당이 나오는데(居士與社堂)
몹시 늙고 병든 몸(老甚病癃痼)
거사는 떨어진 패랭이 쓰고(破落戴敝陽)
사당은 남루한 치마 걸치고.(纜縷裙短布)
선승(禪僧)이 웬 물건인고!(禪律是何物)
소리와 여색을 본디 좋아하여(聲色素所慕)
등장하자 젊은 계집 희롱하더니(登場弄嬌姿)
소매 벌리고 춤을 춘다.(張袖趂樂句)

(마) 할미 성깔도 대단하구나(婆老尙盛氣)
머리 부서져라 질투하여(碎首恣猜妬)
티격태격 싸움질 잠깐 새(鬪鬨未移時)
숨이 막혀 영영 죽고 말았네.(氣窒永不窹)
무당이 방울을 흔들며(神巫擺叢鈴)
우는 듯 하소하듯(如泣復如訴)
너울너울 철괴선 춤추며(翩然鐵拐仙)
두 다리 비스듬히 서더니(偃蹇植雙胯)
눈썹을 찡긋 두 손을 모으고(竦眉仍攢手)
동쪽으로 달리다가 서쪽으로 내닫네.(東馳又西騖)

이와 같이, 가면극에서는 상좌, 선녀, 노장, 젊은 계집(소매), 취발이, 늙은 유생(샌님), 포도부장, 거사, 사당, 할미 등 여러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나온다.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동일한 배역이 상당수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이 시는 애오개(아현)의 본산대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는 상좌춤과 팔선녀춤이다. 현재 상좌춤과장은 별산대놀이와 해서탈춤에서 전승되고 있다. 팔선녀춤은 야류와 오광대에 전승되고 있다.

(나)는 노장과장이다. 노장이 젊은 여자에게 반해 파계하면서 청혼하는 내용이다. 노장의 가면에 대해 수염과 눈썹이 온통 하얗다고 묘사하며 늙은 중임을 말한다. (나)의 뒷부분에서는 '술 취한 중' 즉 취발이가 등장해 주정을 부린다. 지금도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 등의 노장과장에서 노장이 소매를 차지한 후 취발이가 나와서 노장으로부터 소매를 뺏기 위해 노장과 싸우는데, 이 시에서도 노장이 소매를 차지한 후 술 취한 중 즉 취발이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취발이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다)는 샌님과 포도부장춤이다. 샌님(늙은 유생)이 소매(젊은 여자)를 차지하고 있는데, 칼을 찬 젊은 포도부장이 등장해 소매를 뺏고 칼춤을 추는 내용이다. 이는 현재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봉산탈춤 등의 '샌님 포도부장과장'과 동일한 내용이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예전에 정한규(鄭漢奎)라는 연희자 당시까지만 해도 포도부장이 검무를 추었으나, 그 뒤 전수를 못하여 검무가 단절되었다고 한다. (다)에서 샌님의 가면은 긴 눈썹에 언청이 모습으로, 1929년에 수집된 양주별산대놀이의 샌님가면(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과 현재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봉산탈춤·강령탈춤의 샌님가면이 긴 눈썹에 쌍언청이 모습인 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샌님이 부채를 부치며 거드름을 부리는 모습까지도 완전히 일치한다.

(라)는 거사와 사당춤이다. 현재는 봉산탈춤에만 거사와 사당춤이 있다. 이를 통해 거사춤과 사당춤이 양주·송파별산대놀이에는 없지만, 원래 본산대놀이에는 이 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원산대놀이를 복원하는 데 고증한 백황봉(白黃鳳, 1911년생)에 의하면, 양주별산대놀이와 퇴계원산대놀이는 서로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연희 내용도 거의 같았지만, 퇴계원에서는 애사당이 먹중들과 선소리 산타령을 부르며 노는 내용이 양주와는 다른 차이점이었다고 한다. 이는 바로 봉산탈춤 등의 사당·거사과장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 본래 선소리 산타령류의 노래를 부르면서 연희하는 사당·거사과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는 할미과장을 묘사한 것이다. 할미가 첩을 질투해 싸우다가 죽자, 무당이 등장해 방울을 흔들며 굿을 거행하는 내용이다. 이는 현재도 양주·송파의 별산대놀이와 해서탈춤에서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내용이다. 야류와 오광대에서는 이 장면이 할미의 죽음 후에 무당굿을 하는 것이 아니고, 상두군이 상여소리를 부르는 것으로 변이되어 있다. 가산오광대에서는 영감과 할미의 싸움에서 영감이 죽고, 무당이 등장해 굿을 거행하는 내용으로 변이되었다.

이 시는 1770년대에 상좌춤과장, 노장과장, 샌님 포도부장과장, 거사 사당과장, 할미과장을 갖춘 본산대놀이 가면극이 현존하는 별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 오광대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서울 근교에서 전문적 연희자에 의해 연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한편 강이천의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에는 관객으로 홍의를 입은 액정서 하예의 모습도 보인다. 액예는 주로 별감이나 무예별감을 지칭한다. 별감은 액정서(掖庭署) 소속의 하예(下隸)로 양반의 관직이 아닌 잡직이다. 이들은 궁중의 잡역에 종사하는 자들로 왕명(王命)의 전달, 왕의 일상용품, 궐문(闕門)과 궐정(闕廷)의 관리를 담당한다. 무예별감은 왕·왕비·세자를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기 때문에, 그 신분은 낮지만 실제로는 제법 권세를 부리는 자들인데, 이들을 별감과 함께 액정서 소속의 액예라 한다.

들리는 소리 남문 밖에(聞說南城外)
무대를 가설하고 한판 논다는구나.(設棚爲戱具)
노인 부축하고 어린애 끌고들(扶老更携幼)
구경꾼 구름처럼 몰리는데(觀者如雲霧)
홍의 입고 뽐내는 건 액정서 하예(下隸)요(紅衣掖庭隸)
백발로 앉았으니 떡 파는 할미라네.(白髮賣餠嫗)

인용문에 의하면 인형극과 가면극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액정서 하예가 이 공연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 내용만 가지고는 그가 이 공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액정서 하예인 액예들도 조선 후기 서울 유흥문화의 주역이었던 왈짜 집단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액예가 이 공연을 주선하거나 관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왈짜들은 서울 시정의 풍류객이면서 놀이패의 흥행 활동을 장악한 자기들의 기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러한 볼거리를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후대로 갈수록 서울 시정에서의 공연 수요가 증대했기 때문에, 그 공연 활동에 대한 통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더욱이 서울 시정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 정도의 행사였다면, 서울의 순라(巡邏)와 포도(捕盜)를 담당했던 의금부나 포도청의 허가 내지 협조가 필요했을 것인데, 액예들은 이런 허가 내지 협조를 구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윤주필, 「조선 전기 연희시에 나타난 문학사조상의 특징」, 『동양학』 25,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5.
  •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하), 창작과 비평사, 1992.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