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 鳳山- ]
정의 및 이칭
봉산(鳳山)탈춤은 원래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서, 1967년 중요무형문재로 지정되었다. 1915년 무렵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이전하자, 가면극도 함께 사리원으로 옮겨가 전승되었다. 북한에서는 1960년대 중반에 봉산탈춤의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1988년 무렵 다시 복원되었다.
유래 및 역사
봉산탈춤은 강령탈춤과 함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해서탈춤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특히 1936년 8월 31일 사리원 경암산 아래 마당에서 백중날 거행한 공연이 경성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봉산탈춤은 주로 단옷날 놀았고, 그 외에 중국 사신의 영접이나 신임사또의 부임을 축하하는 등 관아의 행사로도 연행되었다. 봉산 구읍은 동북 직로에 위치한 봉산군 관아의 소재지였고, 중국 사신의 내왕에 머무르는 곳이었다.
놀이꾼은 관아의 하급 관속·상인·마을주민이었다. 하급관속의 참여로 인해 가면극의 공연이나 연출이 유리했고, 연기의 수준도 향상될 수 있었다. 특히 봉산탈춤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래로 황해도 가면극의 최고봉을 형성한 것은 이성구(李聖九)·이장산(李獐山) 부자(父子)와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있다. 이성구는 봉산 관아에서 집사(執事)라는 하급 관속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가면극에 종사하여 첫먹춤의 명인으로 알려졌으며, 가면극의 모갑이를 담당했다. 모갑이는 가면극에서 으뜸가는 역을 담당하면서 전체 연기의 연출·감독을 맡는 사람이다. 당시 봉산에는 이성구보다 나이가 30-40년 위인 배한량(취발이역)·이춘강(노장역) 등 연기가 뛰어난 놀이꾼이 많았다. 또한 1900년 무렵까지는 관아의 악사청으로부터 반주음악을 담당할 악사들을 쉽게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악사청이 해산된 이후에는 가창리의 재인마을에서 악사들을 초청하여 공연했다.
원래 봉산 길양리에서는 경수대 아래 마당에서 낮에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벌였고, 밤에 가면극을 연행하며 밤새도록 놀았다. 사리원에서는 경암루 앞마당에 28개의 구획을 가진 반원형의 다락을 매고, 그 안쪽의 마당에서 낮에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하고, 밤에는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가면극을 놀았다.
예전에는 밤의 가면극에 앞서 오후에 길놀이를 했다. 악사의 반주를 선두로 사자·말뚝이·취발이·포도부장·소매(무)·양반·영감·상좌·노장·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했다. 이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익살을 떨었다. 일주하는 도중 마을의 넓은 마당에 이르면 모두 어울려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일주했다. 예부터 단오놀이를 위해 봉산의 주민들은 일정한 비용을 헌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상인들은 매년 단오절 경기를 이용하여 왔으므로, 상대적으로 놀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시장경기의 활성화에 가면극이 큰 몫을 한 셈이다. 기부금을 낸 상인들 가운데 일부는 놀이마당 둘레에 다락을 매고 음식을 팔아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내용 및 특성
놀이 내용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팔먹중춤(제1경 먹중춤, 제2경 법고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영감·할미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자춤과장은 1913-1914년경부터 비로소 놀기 시작한 것이다.
제1과장 상좌춤은 동서남북의 사방신(四方神)에게 놀이의 시작을 알리고, 놀이판의 사악한 기운을 쫓아 깨끗하게 만드는 춤이다. 즉 벽사(辟邪)의 의식무(儀式舞)이다.
제2과장 팔먹중춤에서 첫째먹중부터 여덟째먹중까지 차례로 등장하여 각각 기존가요에서 차용한 유식한 대사를 한 구절씩 낭송한 다음, 이런 좋은 풍류정을 만났으니 한바탕 놀고 가겠다면서 활달한 춤을 춘다. 봉산탈춤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남성적인 힘이 돋보이는 춤이다.
제3과장 사당춤에서 시래기짐을 진 홀아비거사가 등장하여 제멋대로 춤을 춘다. 이때 거사 7인이 사당을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등장한다. 홀아비거사를 발견한 거사들은 그를 붙잡으려고 장내를 돌아다닌다. 홀아비는 쫓겨 다니다가 결국 퇴장한다. 사당과 거사들은 가면을 위로 제껴 쓰고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경발림 등 서도잡가를 신나게 부른다.
제4과장 노장춤은 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누어진다. 노장춤은 살아있는 부처(生佛)라는 칭송을 받던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되어 파계하는 내용이다. 신장수춤은 노장이 소무의 신을 외상으로 사자, 신장수가 신발값을 받기 위해 원숭이를 보낸다. 그러나 장작으로 때리겠다는 노장의 협박 편지에 놀라 급히 도망간다. '취발이춤'은 취발이가 노장과 대결하여 노장을 물리치고, 소무와 사랑을 나눈 뒤, 아이를 얻어 글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제5과장 사자춤에서 여덟 먹중·노장·취발이가 승려의 신분을 벗어나 파계를 하므로, 부처님이 이를 벌하려고 사자를 보낸다. 놀이판에 등장한 사자를 보고, 먹중들은 처음에 이것이 어떤 짐승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사자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존재를 알게 된다. 먹중들은 취발이의 사주에 빠져 스승인 노장을 파계하도록 유혹했다고 하며 용서를 빈다. 사자는 먹중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먹중들과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춘 다음 퇴장한다.
제6과장 양반춤은 말뚝이가 양반들을 인도하고 등장하여, 양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패·부정·비리와 양반들의 생활상을 해학과 풍자로 고발하는 내용이다. 양반들은 언청이, 또는 코나 입이 비뚤어져 있는 비정상적인 모습 등 외모에서부터 풍자의 대상이 된다. 말뚝이는 새처 정하는 놀이, 시조 짓기와 파자(破字)놀이, 나랏돈 잘라먹은 취발이를 잡아오는 과정에서, 양반들을 실컷 조롱하고 풍자한다.
제7과장 영감·할미춤에서 미얄할미는 원래 무당이고 영감은 땜쟁이이다. 미얄할미와 영감은 난리통에 헤어졌는데, 서로 찾아다니다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영감이 데려온 첩인 돌머리집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고, 할미는 영감한테 맞아죽는다.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무당을 불러서 진오귀굿을 해준다. 서민생활의 가난한 모습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부당한 횡포를 잘 보여 준다.
종합연행예술인 봉산탈춤은 춤이 위주가 되기 때문에 '탈춤'이라 한 것이 분명한 만큼, 다양한 춤사위가 발달했다. 장삼춤 위주의 느린 사위로 긴 장삼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춤이 많은 해주형과 달리, 장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뿌리면서 두 팔을 굽혔다 폈다 하고, 발은 높이 뛰면서 활달하게 추는 춤이 발달했다. 몸 전체로 크게 공간을 확장해 가면서 추는 춤은 봉산탈춤이 독보적이다. 취발이의 깨끼춤, 말뚝이의 두어춤, 미얄의 궁둥이춤 등이 유명하다.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가면은 상좌(4), 목(먹)중(8), 거사(7, 목중탈 겸용), 노장, 소무,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생원(맏양반 혹은 샌님), 서방(둘째양반), 도련님(셋째양반), 말뚝이, 영감, 미얄할미, 돌머리집, 남강노인, 무당(소무가면 겸용 가능), 사자 등 모두 27개가 사용된다. 특히 팔목중탈은 비사실적인 귀면형(鬼面型)으로 요철 굴곡이 심하다.
반주악기로는 피리, 젓대, 북, 장고, 해금 등의 삼현육각에 꽹과리와 징이 함께 쓰인다. 염불, 타령(긴타령·잦은타령), 타령시나위, 굿거리(잦은굿거리·아주잦은굿거리) 등을 기본장단으로 한다. 이 지방의 삼현육각은 피리가 중간음을 격렬하게 떨어서 연주하는 특징이 있다.
역대 명 연희자
봉산탈춤이 발전하게 된 데에는 향리(鄕吏)들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하급 관속의 참여로 다른 지역의 가면극보다 공연이나 연출이 유리했고 연기 수준도 향상될 수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인물로 안초목이 있다. 봉산탈춤의 중흥자로 알려진 안초목은 봉산의 아전 출신으로 18세기 중엽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고, 탈춤을 개변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엽에 첫째먹중춤의 명수였으며, 가면극 전체의 연출과 감독을 하는 모갑이 노릇을 했던 이성구(李聖九) 역시 봉산 관아에서 하급관속인 집사였다. 신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놀이꾼으로, 1830년경 말뚝이역에 능했던 이익보(李益輔), 양반역의 김여집(金汝輯), 취발이역의 배학림(裵學林) 등이 있다. 1850년경에는 취발이역의 갈부손(葛扶孫)이 유명했다. 1870년경의 유명한 놀이꾼으로는 노장역의 안면조(安冕朝), 노장과 취발이역의 이춘강(李春岡) 등이 있었다. 1910년대 전후에는 노장역의 임재현(任在鉉), 먹중과 신장수역의 정순조, 먹중과 상좌역의 김봉학(金鳳鶴), 사자와 미얄할미역의 정석일(丁錫一), 상좌와 소무역의 남학진(南學鎭) 등이 유명한 놀이꾼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봉산탈춤의 전승과정으로 보아 대체로 하급 관속 출신이거나 그 후예들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김일출은 1955년 8월 재인촌인 봉산군 천덕리 가창마을에서 봉산탈춤의 미얄 역을 맡았던 한성근(당시 67세)을 만났는데, 그는 통인(通人) 출신이라고 한다.
경성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던 1936년 8월 31일 사리원 공연에 참여한 인물들 가운데 김경석(金景錫), 이윤화(李潤華), 임덕준(林德濬), 한상건(韓相健), 김진옥(金振玉), 나운선(羅雲仙) 등이 주목할 만한 연희자로 알려져 있다. 김경석(1884-?)은 노장춤의 명수였고, 이윤화(1890-?)는 모든 춤에 두루 뛰어났다. 임덕준은 둘째먹중, 거사, 영감 역할을 맡았는데 소리를 잘했다. 한상건(1892-?)은 취발이춤을 잘 추었다. 김진옥(1894-1969)은 김경석 대신 노장춤을 추었으며, 첫째먹중과 사자춤에도 능했다. 나운선(1894-?)은 여덟째먹중역을 잘했다. 이밖에도 첫째먹중과 취발이역을 잘했던 이성구의 아들 이장산(李獐山), 경기도 출신으로 여덟째먹중과 마부역을 잘했던 박천만(朴千萬, 1889-?)이 유명한 연희자로 알려져 있다.
봉산탈춤은 1930년대 말까지 봉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다가 시대적 상황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봉산탈춤은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일부 놀이꾼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봉산탈춤의 복원과 그 이후의 전승 과정에서도 여러 뛰어난 연희자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김진옥을 비롯하여, 민천식(閔千植), 이근성(李根成), 김용익(金龍益), 최경명(崔景明), 김유경(金裕慶), 윤창석(尹昌錫), 오명옥(吳明玉), 김선봉(金先峰), 양소운(梁蘇云), 윤옥(尹玉), 김기수(金琪洙), 김애선(金愛仙) 등이 봉산탈춤의 전승에 기여한 연희자들이라 할 수 있다.
김진옥은 어린 시절부터 고향 사리원에서 탈춤을 익혀 왔으며, 이윤화와 박천만에게 탈춤을 배우기도 했다. 춤사위, 가면극의 진행, 가면 제작법 등의 전승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67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민천식(1898-1967)은 사리원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탈춤을 배웠고, 이윤화와 박천만에게 탈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소리꾼으로 유명했는데, 놀량가를 잘 불렀다. 1967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근성(1895-1978)은 송화군 출신으로, 15세부터 해주에서 오순옥, 이치호 등에게 탈춤을 배웠다. 먹중, 취발이, 사자 등의 역할을 맡았고, 1967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김용익(1907-1979)은 사리원 출신으로, 김진옥에게 탈춤을 배웠다. 취발이, 먹중, 거사, 마부 등의 역할을 맡았고, 1970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최경명(崔景明, 1906-1987)은 신천의 재인촌 출신으로서 악기를 연주할 뿐만 아니라 탈춤도 매우 뛰어나게 잘 추었다. 원래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복원된 봉산탈춤의 취발이역은 해주 출신인 이근성이 맡았는데, 이는 월남해온 봉산 출신 연희자 중에 취발이춤을 맡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9년 무렵 새롭게 나타난 최경명이 취발이춤을 잘 추었기 때문에, 이후부터 최경명이 취발이역을 맡았다. 그의 취발이춤은 손과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당기면서 힘차게 걷는 동작과 크게 뿌리는 춤사위가 특징인데, 현재 봉산탈춤의 전수조교 장용일이 추는 춤이 바로 최경명의 춤을 이어받은 것이다. 신천은 봉산탈춤형에 속하기 때문에 오히려 최경명의 취발이춤이 봉산탈춤의 취발이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제3과장 사당·거사춤에서 거사 역으로 맨 앞에 나오면서 북을 치며 서도잡가를 반주했는데, 그 북 연주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그는 춤 외에 서도소리도 잘 했고, 피리와 해금도 잘 연주해서 악사가 없을 때는 해금을 반주했다. 1971년에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김유경(1906-1996)은 사리원 출신이다. 1927년 신천에서 이무연에게, 그리고 월남한 이후 김진옥에게 탈춤을 배웠다. 말뚝이, 사자 역을 맡았다. 윤창석(1900-1970)은 봉산군 구연면 출신이다. 월남 이후 김진옥에게 탈춤을 배웠다. 먹중, 사자역을 주로 맡았으며, 가면극 의상과 가면 제작에 특히 힘을 쏟았다. 오명옥(1906-1987)은 서울 출신으로, 피리와 해금에 능통했다. 봉산탈춤의 악사 역할을 맡았다. 1971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선봉(1922-1997)은 상좌, 소무, 무당 역할을 잘했다. 1971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양소운(1924-2008)은 재령군 출신으로 서도소리와 춤에 두루 능통했다. 1967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윤옥(1925-2004)은 상좌와 덜머리집, 먹중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김기수(1936-2020)는 노장, 첫째먹중, 양반 역할을 담당했다. 1987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2020년 별세하여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 김애선(1937- )은 소무, 상좌, 먹중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1989년 봉산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외에 전수조교로 장용일(張鏞逸, 1946- / 먹중춤), 김종엽(金鍾燁, 1947- / 신장수춤), 최창주(崔昌柱, 1950- / 먹중·마부), 박상운(朴商運, 1948- / 먹중·신장수), 김호석(金浩錫, 1957- / 피리), 박용호(朴龍浩, 1947- / 대금)가 활동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사례
본산대놀이의 영향을 받은 가면극은 서울과 경기 지역의 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 황해도 지역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남 지역의 수영야류·동래야류·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 등이 있으며, 남사당패의 덧뵈기도 본산대놀이의 영향으로 발생했다.
사상좌춤 봉산탈춤
팔먹중춤 봉산탈춤
사자춤 봉산탈춤
취발이가 버드나무 가지로 노장을 때려서 쫓아내는 장면 봉산탈춤
미얄춤과장 중 할미의 죽음 후에 거행하는 굿 봉산탈춤
특히 황해도 일대의 가면극을 '해서(海西)탈춤'이라고 부르며, 1930년대까지만 해도 봉산·사리원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지대인 기린·서흥·평산·신계·금천·수안, 북쪽지대인 황주, 서쪽지대인 안악·은율·재령·신천·송화, 남쪽지대인 강령·옹진·연백·해주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해서탈춤은 가면·의상·춤사위·대사의 유형으로 보아, 기린·서흥·봉산·재령·신천·안악 등지의 가면극을 대표하는 봉산탈춤형과 옹진·강령·해주 등지의 가면극을 대표하는 해주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 자세한 내용은 해서탈춤 항목 참조)
김일출은 1955년 8월 재인촌인 봉산군 천덕리 가창마을에서 통인(通人) 출신이었던 미얄 역의 한성근 등 해주탈춤 관계자들을 현지 조사했는데, 그들은 "해주탈춤은 경기의 산대놀이와 부단한 교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산대놀이의 영향이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두 지역 가면극 사이의 영향 관계를 명확하게 증언했다.
한편 마을굿에서 발생하여 발전한 가면극으로는 하회별신굿탈놀이, 강릉관노가면극이 전하며, 이외에 하회의 이웃 마을인 병산별신굿탈놀이와 경북 영양군 주곡동의 가면극 등도 마을굿놀이에서 유래한 가면극이다.
연희본
그동안 채록된 봉산탈춤의 중요 연희본은 다음과 같다.
(1) 〈오청본〉(「가면무용 봉산탈각본」, 『한국가면극연구』, 월인, 2002)
(2) 〈송석하본〉(「봉산가면극 각본」, 『문장』 2권 6·7 합호, 문장사, 1940)
(3) 〈봉산탈춤 대본〉(물질문화 유물보존회, 『조선의 민간오락』, 평양 : 국립출판사, 1955)
(4) 〈김일출본〉(「봉산탈놀이 대본」, 『조선민속탈놀이연구』, 평양 : 과학원출판사, 1958)
(5) 〈임석재본〉(「봉산탈춤 대사」, 『국어국문학』18, 국어국문학회, 1958)
(6) 〈이두현본〉(「봉산탈춤 대사」,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1) 〈오청본〉은 현존하는 봉산탈춤 연희본 중 최고(最古)의 연희본이며, 〈임석재본〉과 〈송석하본〉의 원본에 해당한다. 〈오청본〉은 1936년 8월 31일 사리원에서 김경석, 나운선, 이윤화, 임덕준, 한상건의 구술을 오청(吳晴)이 채록한 대본이다. 봉산탈춤 오청 채록 원본은 1936년 10월 19일에 발표되었고, 이 원본은 1937년 2월에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표되기도 했다. 이 대본이 구자균에 의해 필사되었다가, 김흥규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었다.(「가면극 봉산탈각본」, 『최정여박사 회갑논문집』, 계명대출판부, 1983) 오청 채록 원본은 오청에 의해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 조사 촉탁이었던 다카하시(高橋)에게 기증되었고, 1964년 4월 다카하시의 텐리대학 제자인 오타니(大谷)에게 이관되었다가 2001년 11월 서연호가 입수하여 공개했다. 〈오청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즉 한자 어휘는 공연 당시 연희자들의 사투리 발음 그대로 기술하지 않았고 고유 어휘는 사투리 발음 그대로 기술하여, 1930년대 철자법에 근거한 통일성이 부족했다. 채록과정에서 오기와 오자가 상당히 있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제1장 사상좌무, 제2장 팔묵승무, 제3장 사당무, 제4장 노승무, 제5장 사자무, 제6장 양반무, 제7장 미얄무 과장으로 되어 있다.
(2) 〈송석하본〉은 〈오청본〉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몇 개의 한자 어휘를 수정하거나 애매한 어휘를 다르게 기술했다. 〈오청본〉에 있는 서두, 개설, 배역 부분은 모두 삭제되었고 봉산탈춤 발달에 관한 개설을 첨부했다.
(3) 〈봉산탈춤 대본〉은 북한에서 이장산의 구술을 채록한 것이다.
(4) 〈김일출본〉은 1953년 박성찬, 김수정의 구술을 김일출이 채록한 대본으로 재담의 전개만을 간략하게 기술했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팔목춤, 제3과장 법고춤, 제4과장 사당춤, 제5과장 로승, 제6과장 신장사, 제7과장 취발이, 제8과장 량반, 제9과장 포도비장, 제10과장 미알, 제11과장 남극로인으로 되어 있다.
(5) 〈임석재본〉은 1936년 8월 31일 사리원에서 김경석, 나운선, 이윤화, 임덕준, 한상건의 구술을 임석재가 채록하여, 『국어국문학』 18호에 「봉산탈춤대사」(1958)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 대본은 전경욱에 의해 주석과 해제 작업이 이루어져 『민속극』 (1993)에 실렸다. 〈임석재본〉은 〈오청본〉을 거의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청본〉의 애매한 부분들을 수정했고, 배역과 장소에 따라서 변경되는 일부 대사를 〈오청본〉의 대사와 함께 적어 놓았으며, 〈오청본〉의 장황한 지문들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팔먹중춤, 제3과장 사당 거사춤, 제4과장 노장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영감, 할미춤으로 되어 있다.
(6) 〈이두현본〉은 「봉산탈춤대사」라는 제목으로 『한국가면극』(문화재관리국, 1968)에 수록되어 있다. 〈이두현본〉은 1965년 8월에 월남한 김진옥, 민천식의 구술을 바탕으로 이두현이 채록한 대본으로, 1967년 무형문화재 지정의 근거가 되었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제1과장 사상좌춤, 제2과장 팔먹중춤(제1경 먹중춤, 제2경 법고놀이),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 과장으로 되어 있다.
의의
봉산탈춤은 사회 풍자의 성격을 지닌 대표적인 전통가면극이다. 사회적 불평등에서 파생된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웃음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비판적으로 다룬다. 등장인물의 명칭에서부터 봉산탈춤에서 다루는 주제를 암시한다. 등장인물들의 명칭은 노장, 소무, 신장수, 양반, 말뚝이, 영감, 할미 등 신분이나 부류를 나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구체적인 개인의 이름은 거의 없다. 봉산탈춤에서 문제 삼는 것이 등장인물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이나 계층, 부류 사이의 문제임을 등장인물의 명칭을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다. 봉산탈춤에서는 양반의 신분적 특권, 노장의 관념적 허위, 영감의 남성적 횡포 등을 전면에 내세워 문제 삼고 있다.
봉산탈춤은 주로 오월 단오의 즐거운 축제판에서 연행되었다. 단오 축제판에서의 봉산탈춤 연행을 통해 사람들은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구가했다. 일상세계에서라면 마땅히 금기시되었던 문제들을 탈춤판을 통해 드러내어 다룸으로써, 평소 억압되었던 갈등과 불만을 발산하고 해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가면극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했다. 이는 봉산탈춤이라는 축제적 연행을 통해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봉산탈춤은 가면의 형태, 춤사위의 독창성, 연기적 표현 방식, 다양한 의상, 노래와 규모를 갖춘 악사들 등 여러 측면에서 풍부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전통가면극이라 하면, 봉산탈춤을 떠올릴 정도로 국내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봉산탈춤은 다른 가면극과 함께 우리의 민족 주체성 확립을 위한 구체적 표상이 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적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데 요긴한 예술 매체로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전문적 연극단체의 마당극, 민족극 등으로 불리는 창작극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봉산탈춤의 활용 양상들은 봉산탈춤이 새로운 연극의 창작, 나아가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연구』, 과학원출판사, 1958.
- 물질문화 유물보존회, 『조선의 민간오락』, 평양 : 국립출판사, 1955.
- 박전열, 『봉산탈춤』, 화산문화, 2001.
- 서연호, 『황해도탈놀이』, 열화당, 1996.
- 서연호, 『한국가면극연구』, 월인, 2002.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 이두현, 『한국가면극선』, 교문사, 1997.
- 전경욱 역주, 『민속극』,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참조어
김기수, 김선봉, 김애선, 김용익, 김유경, 김종엽, 김종해, 김진옥, 김호석, 민천식, 박상운, 박용호, 안초목, 양소운, 오명옥, 윤옥, 윤창석, 이근성, 이동벽, 이성구, 이장산, 장용일, 장준석, 조운용, 최경명, 최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