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거사

[ 居士 ]

거사(居士)는 본래 속인(俗人)으로 불교의 법명(法名)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거사는 봉산탈춤 제3과장 사당춤 과장과 북청사자놀음 제3과장 사당·거사춤과장에 등장한다.

거사는 7세기경부터 조선시대까지 두루 문헌에 나타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문무왕 법민(法敏)」 조에는 668년 차득공이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로 변장하여 민간을 순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승복 차림에 비파를 연주하면서 민간을 돌아다니는 거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구체적인 연희 내용은 살펴볼 수 없으나, 일본에서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부터 활동한 비파법사(琵琶法師)와 유사했을 것이다. 일본의 비파법사는 비파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길거리의 연희자였다.

고려시대의 우란분재에서는 여러 연희들이 연행되었고, 절에 속한 연희자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를 하고 기생들과 뒤섞여 놀며,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공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행태는 조선시대의 사장·사당·거사와 흡사했다.

조선 『예종실록』 원년 6월조 양성지의 상소문에 "요즘 서울과 지방의 남녀노소 가운데 사장 혹은 거사(居士)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도사(道士)에 비교되는 것으로서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그 생업을 폐하고서 차역(差役)을 피할 것만을 엿보고 있습니다. 외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서 절에 올라가 향을 불사르고, 경중(京中)에서는 마을에서 밤낮으로 남녀가 섞여 거처하며, 징과 북을 시끄럽게 두들기면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를 통해 당시까지는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를 행하는 남녀의 무리를 사장 또는 거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장은 남녀 연희자를 모두 포괄하는 명칭이었다. 아직 여자 연희자를 사당, 남자 연희자를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에는 "10여 년 전부터 인심이 흐려지고 사설(邪說)이 횡행해도 금하여 바로잡지 못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칭하며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라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선조 40년(1607)의 것인데 이 시기에는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이 있었음을 전해 준다. 임진왜란 이후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이 무리를 이루어 떠돌아다녔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사당이나 거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사당패에는 맨 위에 모갑(某甲)이라는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居士)라는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추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모갑이인 남자가 이끄는 조직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에 붙어먹는 기생자들이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비구승(比丘僧)·비구니(比丘尼)·우파새(優婆塞)·우파이(優婆夷)를 사중(四衆)이라고 일컫는다. 우리나라 풍속에 우파새를 거사(居士)라고 부르고, 우파이를 사당(捨堂)이라고 부른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당과 거사를 비구승·비구니와 함께 사중(四衆)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거사가 불교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는 18세기 행해진 본산대놀이 가면극의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강이천이 기록한 상좌춤, 노장춤, 샌님·포도부장춤, 거사·사당춤, 영감·할미춤의 내용은 오늘날의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서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거사와 사당이 나오는데(居士與社堂)
몹시 늙고 병든 몸(老甚病癃痼)
거사는 떨어진 패랭이 쓰고(破落戴敝陽)
사당은 남루한 치마 걸치고.(纜縷裙短布)
선승(禪僧)이 웬 물건인고!(禪律是何物)
소리와 여색을 본디 좋아하여(聲色素所慕)
등장하자 젊은 계집 희롱하더니(登場弄嬌姿)
소매 벌리고 춤을 춘다.(張袖趂樂句)

이 인용문은 거사와 사당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현재는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 중 봉산탈춤에만 거사와 사당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시를 통해 거사춤과 사당춤이 현재 양주·송파별산대놀이에는 없지만, 원래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 선소리 산타령류의 노래를 부르면서 연희하는 사당·거사과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현석의 『교방가요』(1872)에서는 사당과 거사를 '舍黨'·'乞士'로 표기하고, "사당(舍黨) 남창여화(男唱女和)"라고 공연 방식을 설명했다. 그리고 "잡요 산타령·방아타령·놀량·꽃방아타령, 이것은 거사와 사당이 부르는 것인데 모두 음사(淫辭)와 비사(鄙詞)이다. 지금 가동(街童)과 머슴들도 이 노래들을 부를 줄 안다"라고 하며, 사당패의 연희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신재효본 〈박타령〉 중 놀보의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사당패들 가운데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들은 춤을 추며 한 명씩 차례대로 〈산천초목〉, 〈녹양방초 다 저문 날에〉, 〈갈까보다〉, 〈오독도기 춘향〉, 〈사신 행차 바쁜 길에(방아타령)〉, 〈유각골 처자는 쌈지장수 처녀(잦은 방아타령)〉를 부른다.

가면극에서 거사는 봉산탈춤 제3과장 사당춤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사당을 업고 나오지 않는 거사인 홀애비거사와 5명의 거사가 함께 등장한다. 시래기 짐을 진 홀애비거사가 타령곡에 맞추어 되지도 않는 춤을 함부로 출 때, 거사들이 사당을 업고 등장한다. 이때 홀애비거사는 사당을 희롱하고 장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정신없이 군다. 이 모습을 본 거사 한 명이 홀애비거사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면, 나머지 거사 5인이 일제히 각기 북·장고·징·꽹과리·소고 등을 들고 치며 엉덩이춤을 추면서 홀애비거사를 잡으려 한다. 이때 홀애비거사는 잡히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다가, 결국에는 장외(場外)로 도망가 버린다. 사당과 거사들은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경발림 등 서도잡가를 신나게 부른다. 봉산탈춤에서 거사탈은 따로 없고 먹중탈을 겸용한다.

사당(가운데)과 거사들

사당(가운데)과 거사들 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제3과장 사당·거사춤 과장에 거사 두 명이 나온다. 애원성춤이 끝나면 양반은 사당·거사를 불러들이라고 한다. 이때 퉁소가락은 사당·거사춤장단(내 딸 봉섬이)으로 바뀐다. 소고를 든 거사 2인이 등장하여 마주 보고 춤을 추다가 양쪽으로 벌어질 때, 사당 2인이 등장하여 4인이 십자형으로 왔다 갔다 하며 춤춘다.

거사는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어깨에 붉은 띠, 허리에 노란 띠를 매고, 손에 소고를 들었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두른다. 현재는 진한 옥색 바지저고리를 입는다. 이런 복식을 착용한 거사 2명은 사당 2명과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춘다. 거사는 남자춤꾼을, 사당은 여자춤꾼을 가리킨다. 현재는 여자가 거사춤을 추지만 북청 현지에서는 남자들이 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거사

거사 북청사자놀음

참고문헌

  •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연구』 평양 : 과학원출판사, 1957.
  • 박전열, 『봉산탈춤』, 화산문화, 2001.
  • 전경욱, 『북청사자놀음』, 화산문화, 2001.

참조어

홀애비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