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패
[ 社堂牌 ]
정의 및 이칭
사당패(社堂牌)는 주구성원이 여성으로, 일명 '여사당'으로 통하는 조선 후기 유랑예인집단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회사(回寺), 사당(社堂),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사당(捨堂),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사당(舍黨),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사당(沙),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사당(社堂)으로 표기되어 있다.
유래 및 역사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와 『중종실록』 8년 10월 3일 조의 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이 있었다.
10여 년 전부터 인심이 흐려지고 사설(邪說)이 횡행해도 금하여 바로잡지 못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칭하며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거사라는 남자들과 회사(절을 찾아다니며 붙여사는 여인을 방언으로 回寺라 한다)라는 여인들은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며 횡행하여 풍속을 그르치니, 법으로 금해야 합니다.
『중종실록』 8년 10월 3일 조조선 후기에는 현격하게 진행된 전제(田制)의 문란, 수취체제(收取體制)의 모순과 부패, 그리고 토지 집중 등의 현상으로 인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유민(流民)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사당이나 거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당을 회사라고도 불렀는데, 이 기록 역시 남녀를 거사와 회사(사당)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비구승(比丘僧)·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사중(四衆)이라고 일컫는다. 우리나라 풍속에 우바새를 거사라고 부르고, 우바이를 사당(捨堂)이라고 부른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당과 거사를 비구승, 비구니와 함께 사중(四衆)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당과 거사가 본래 불교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능화는 "항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당(社堂)은 사노비(寺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성군(安城郡)의 청룡사(靑龍寺)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경하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 노비가 상전을 섬기듯 한다고 한다"라고 하며,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사당이 절의 노비에서 나왔다는 말은 주목을 요한다. 일본의 경우도 재승이 있고, 이와는 별도로 절에 속한 노비이면서 연희를 하는 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아미타(阿彌陀)를 생각하여 떼어 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장마당이나 농어촌 마을을 활동무대로 삼고 순회공연을 하던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집결처이며, 새로운 공연 종목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지이고, 생활 본거지인 사찰을 본산으로 삼았다. 그러나 18-19세기에 사당패들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본산 사찰뿐만 아니라 그 근처의 일부 마을에도 근거지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사당골'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생겨났다. 이 중 널리 알려진 본산과 사당골은 경기도 안성 청룡사와 그 부근의 청룡사당골, 황해도 문화 구월산의 패엽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경상도 하동 쌍계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전라도 강진 정수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사당리), 경남 남해의 화방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등을 들 수 있다.
신재효본 〈박타령〉 중 놀보의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사당패들은 "소사(小寺) 문안이요. 소사 문안이요. 소사 등은 경기 안성 청룡사와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라 의론하면 함열의 성불암, 창평의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막(同福), 함평의 월량사, 여기 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 살 수 없어 강남으로 갔삽더니 ······"라며 자신들의 거처를 청룡사·성불암·대주암·월량사 등 절과 관련시켜 얘기하고 있다. 경남 하동 목골은 소위 사당골로서 쌍계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내용 및 특성
사당패는 가무희를 앞세우고 매음도 했다. 맨 위에 화주 또는 모갑(某甲)이라고 부르는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라는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춘다. 화주는 집단의 통솔, 집단 내부 질서의 확립, 단체의 대외교섭과 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조직 사업, 수입에 대한 분배를 결정하는 조직의 대표자였다. 거사의 우두머리는 수거사라고 불렸는데, 수거사는 가창예술의 총지휘자로서 사당패의 예술적 지도를 책임졌고, 공연에서 반복과 마감 또는 다른 곡으로 넘어갈 때 도창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모갑이인 남자가 이끄는 조직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들의 공연을 통해 생긴 수입으로 살아갔다. 사당패의 공연 종목은 사당벅구춤, 소리판(주로 산타령 등 민요창), 줄타기(재담줄이라 해서 곡예보다는 재담과 노래가 우세하다)의 세 가지였다.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1)에는 사당패에 대한 시가 전한다. 이 시에서는 사당을 음만 따서 사당(沙)이라고 표기했다. 이 시에 의하면, 사당들은 부채를 들고 춤을 췄고, 춘가(春歌)와 양산도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구경꾼들이 사당의 붉은 치마에 돈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춘가는 신재효본 〈변강쇠가〉 중 사당패가 부르는 "오돌또기 춘향(春香) 오돌또기 춘향 위월의 달은 밝으며 명랑한데 여기다 저기다 연저 바리고 말이 못된 경이로다 ······"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능화는 사당패의 공연을 직접 보고 그들의 조직과 공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지금(1927년 무렵, 필자)으로부터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남아 있었다. 내가 나이 어릴 때 괴산군(槐山郡)에서 사당패(社堂牌)를 보았다. 패에는 남녀가 있는데, 남자를 남사당(男社堂) 또는 거사(居士)라고 하고, 여자를 여사당(女社堂)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 되는 자를 모갑(某甲)이라고 했다. 한 모갑의 통솔 아래에 남자 8-9명과 여자 1-2명이 있었으니, 모두 묘령(妙齡)의 여자였다.
남자가 여자를 등에 업고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기예를 팔고, 몸을 파는 것을 업(業)으로 삼았다. 그 흥행에 있어 남자가 손에 소고를 잡고 공연장에 벌려서고, 여자가 마주서서 먼저 앞소리(時俗 雜歌)를 메기면 남자들이 일제히 뒷소리를 받는다. 혹 먼저 하기도 하고, 혹 뒤에 하기도 하며, 혹 소고를 두드리기도 하고, 혹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공연이 절정에 이르면 청중이 갈채를 보내며 돈을 던져서 상을 준다. 혹 동전을 입에 물고 "돈!" "돈!" 하고 외치면, 여사당이 와서 입으로 돈을 받으며 입을 맞추는 방식은 기묘하다고 할 만하다. 이것이 매개가 되어 밤에 몸을 주고 돈을 받는 것을 화채(花債) 또는 해의채(解衣債)라고 한다. 이것이 사당패의 영업이었다.
북한 학자 박은용의 조사에 의하면, 서도 지방에서 활동한 사당패들의 기본 종목은 〈산천초목〉, 〈놀량〉, 〈앞산타령(사거리)〉, 〈뒷산타령(중거리)〉, 〈경발림(경사거리)〉 등이었다. 이 기본 연주 종목에 이어서 〈산염불〉과 〈구영변가〉와 같은 서도민요나 사당춤도 첨부하여 공연 종목으로 삼았다. 경기 사당패들은 〈놀량〉, 〈사거리〉 다음에 〈양산도〉, 〈방아타령〉, 〈경복궁타령〉 등을 연결하여 불렀다. 사당패의 후신인 산타령패(선소리패)들은 〈놀량〉, 〈사거리〉 다음에 〈도라지타령〉, 〈잦은방아타령〉, 〈개고리타령〉, 〈도화타령〉을 연결시켜 불렀다. 남도 사당패들은 〈보념 사거리〉와 〈화초 사거리〉를 부른 다음 〈매화타령〉을 불렀다. 후대에는 남도 지방의 민요인 〈긴육자배기〉, 〈잦은육자배기〉, 〈날개타령〉, 〈흥타령〉을 첨가했다.
사당패들은 전통적인 농악의 춤동작과 소고를 가지고 춤추는 법고놀이를 공연했다. 거사가 먼저 소고를 치면서 장단에 맞춰 줄지어 늘어서면, 사당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했다. 먼저 수거사가 소리를 메기면 거사와 사당들이 받아 부르기도 하고, 두 패가 주고받으면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춤을 추면서 흥겹게 불렀다. 대열이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섰다 하며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기도 하고, 손에 쥔 소고는 노래와 춤의 흥취를 한층 돋우기 위해 재꼈다 엎었다 돌렸다 하면서 장단에 맞추어 매듭지어 쳤다. 사당패들에 의해 개척된 이러한 연주방식은 19세기 후반 이후 산타령패, 선소리패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당패 공연장면 〈수락산 흥국사 감로탱〉. 1868
사당패 공연장면 〈경국사 감로탱〉. 1887
정현석의 『교방가요』(1872)에서는 사당과 거사를 '舍黨'·'乞士'로 표기하고, "사당(舍黨) 남창여화(男唱女和)"라고 공연 방식을 설명했다. 그리고 "잡요 산타령·방아타령·놀량·꽃방아타령, 이것은 거사와 사당이 부르는 것인데 모두 음사(淫辭)와 비사(鄙詞)이다. 지금 가동(街童)과 머슴들도 이 노래들을 부를 줄 안다(雜謠 山打令 杵打令 遊令놀양 花杵打令 此乞士舍黨所唱 皆是淫辭鄙詞也 今街童厮隸亦解唱也)"고 하며, 사당패의 연희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신재효본 〈박타령〉 중 놀보의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사당패들 가운데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들은 춤을 추며 한 명씩 차례대로 〈산천초목〉, 〈녹양방초 다 저문 날에〉, 〈갈까보다〉, 〈오독도기 춘향〉, 〈사신 행차 바쁜 길에(방아타령)〉, 〈유각골 처자는 쌈지장수 처녀(잦은 방아타령)〉를 부른다. 이와 같이 사당은 춤을 추고 노래하며, 거사는 소고를 치면서 어울려 공연하는 것이 사당패의 기본 공연이었던 듯하다.
사당패의 공연장면은 〈수락산(水落山) 흥국사(興國寺) 감로탱〉(1868), 〈경국사(慶國寺) 감로탱〉(1887), 개인이 소장한 감로탱(19세기 후반), 〈불암사(佛巖寺)의 감로탱〉(1890) 등에 보인다. 이 그림들에는 사당들이 춤을 추는 모습, 줄타기를 하는 모습, 방울받기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심우성의 조사에 의하면, 사당패는 이밖에도 사당법고춤과 줄타기를 공연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공연 모습 역시 앞의 감로탱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의
사당패는 조선시대에 활동한 거사(남성)와 사당(여성)으로 구성된 남녀 혼성 단체로서, 본래 가무 활동을 통해 사찰의 불경 간행이나 법당 중수, 범종 주조, 사적비 건립, 후불 조성을 위한 시주에 참여했던 불교음악집단이었다. 그러나 이후 민가를 돌며 시주를 걷어 사찰의 제반 경비를 충원하는 예능집단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18-19세기 이후부터는 사찰에서 독립하여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하는 유랑예인집단으로 변모되었다.
사당패들에 의해 개척된 가무의 연주방식은 19세기 후반 이후 산타령패, 선소리패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봉산탈춤의 사당춤, 양주별산대놀이의 애사당법고놀이 등에 영향을 끼쳤다. 사당패는 20세기 초 급격한 공연문화의 변동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사당패 소리는 현재 경서도와 남도 입창(선소리 산타령)에서 부르는 소리와 잡가, 가면극, 판소리, 민요의 일부 소리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이렇듯 사당패는 한국 전통 예술 저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공연 문화 집단이다.
참고문헌
- 문성렵, 「중세기 사당패의 발생과 그 예술활동」, 『력사과학』, 평양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 박은용, 「사당패들의 활동정형」, 『고고민속』 4,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 손인애, 『향토민요에 수용된 사당패 소리』, 민속원, 2007.
- 윤광봉, 『한국연희시연구』, 박이정, 1997.
- 이능화, 『조선해어화사』, 東洋書院, 1927.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참조어
사장패, 애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