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담
[ 才談 ]
정의 및 이칭
재담(才談)은 그 구조와 표현의 측면에서 웃음을 동반하는 독립적인 공연물을 말한다. 사건의 설정과 반전이라는 구조의 측면에서 웃음이 유발되며, 익살맞은 말과 행동이 중심이 되는 표현의 측면에서 웃음이 나오는 총체적인 공연물이 재담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조선 후기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주로 민간에서 전문적인 연희자들에 의해 벌어졌던 전통연희가 재담이다.
이러한 재담의 정의와 관련지어 일상어나 전통연희 종목 중 하나인 재담과의 변별 문제를 좀 더 상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재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흔히 재담은 '재미있는 말', '우스운 말', '재치 있는 말'의 의미로 쓰인다. 재미, 우스운 등에서 웃음이 강조되며, 재치 역시 다른 사람을 재미있게 하고 웃음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웃음과 연관된다. 일상에서의 재담이라는 말의 의미는 결국, '재치를 부려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말' 혹은 '재치를 부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재담은 그 일상적 의미에서도 웃음과 재미가 핵심을 이루고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재담은 전통연희의 여러 장르에서도 그 용례가 발견된다. 탈춤과 판소리, 줄타기 광대의 사설 등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말을 재담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연희 언어를 구성하는 바탕이 되어 여러 전통연희 장르에 삽입되어 온 것이다.
이렇게 재담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나 전통연희의 다른 장르에서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용되는 재담이라는 말은, 전통연희의 한 장르로서의 재담과는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상생활이나 어떤 장르의 구성 요소를 지칭하는 것으로서의 재담과, 일정한 장르를 의미하는 명칭으로서의 재담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글에서 재담은 장르적 의미 즉 독립적인 공연물로서 사용한다.
둘째, 재담은 독립적인 공연물이라는 점이다. 앞서 재담을 정의하면서 구조와 표현의 측면에서 웃음을 제공한다고 했다. 그런데 구조와 표현의 측면에서 웃음을 제공한다는 점은 재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연희 전반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전통연희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치는 대개 3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언어 표현의 측면으로, 속어·비어·사투리 등의 사용과 각종 말장난을 들 수 있다. (2) 표정과 동작의 측면으로, 유형적 인물의 특징을 흉내 내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 과장되거나 서툰 동작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3) 작품 구성의 측면으로, 특정한 사건의 설정과 반전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1)의 측면은 모두 언어로 전달되는 것으로, 장르로서의 재담이 아닌 일상어로서의 재담과 관련이 있다. 재치 있고 재미있는 말 정도의 의미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수사적(修辭的)인 재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사적인 재담은 일상생활에서 두루 쓰이고 가면극이나 판소리 등에서도 대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므로 독립적인 공연물이라 할 수는 없다. (2)의 측면은 표정과 동작 곧,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역시 우리나라 전통연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의 측면에서의 재담 역시 독립적인 공연물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3)의 측면은 사건의 구조를 통하여 웃음을 전달하므로 구조적인 재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구조적인 재담은 독립적인 공연물이 될 수 있다.
백영춘과 최영숙의 재담 공연 장면
박해일의 재담 공연 장면
재담을 독자적인 전통연희의 한 장르로 본다는 것은, 독립적 공연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재담은 구조적인 재담을 근간으로 하면서, 표현상으로는 수사적인 재담과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수반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재담은 우리 전통연희가 지니는 웃음 장치를 총체적으로 잘 활용하는 공연물이다.
셋째, 재담은 전문적인 연희자들에 의한 공연이라는 점이다. 재담은 본질적으로 이야기와 말하기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이야기는 스스로 경험했거나 보고들은 내용을 의미하며, 말하기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언어 활용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일상적인 언어생활의 기본이 되는 이야기와 말하기가 재담이 되기 위해서는 웃음과 풍자를 유발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하다. 전문적 연희자들이 일상적 언어생활의 이야기와 말하기에 웃음과 풍자를 유발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첨가한 것이 바로 재담이다.
넷째, 재담은 조선 후기 민간을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공연되기 시작한 전통연희이다. 바로 이 점이 재담과 우희(優戱)를 변별하는 특징이다. 전문적 연희자들의 말과 행동 및 구조를 활용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공연물을 재담이라 한다면, 우희와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배우가 공연하는 골계적 성격의 공연예술을 우희라 한다면, 사실 재담과 그 변별이 모호하다. 우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민간과 궁중을 막론하고 벌어진 전통연희의 하나이다. 앞에서 재담을 정의하면서, 시기적으로 본다면 조선 후기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주로 민간에서 전문적인 연희자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시공간적 제한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희와 재담을 변별하기 위한 제한이었다. 두 장르 사이의 관계는 우희 속에 재담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우희의 조선 후기적 양상이 재담이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우희는 궁중에서 두드러지게 벌어지던 양상이 약화되고, 민간을 중심으로 오락적인 공연물로 존재하게 된다. 여가를 통해 골계담을 주고받던 일상적인 오락의 양상을 넘어서서 전문성을 획득했고, 여러 가지 기예에 곁들여 행해지던 형태를 극복하여 민간의 독립적인 공연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민간에서 독립적인 공연예술의 지위를 획득한 우희를 재담이라 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간에서의 우희 공연은 가무 및 기악, 판소리 등과 나란히 독자적인 공연예술의 위치에 올랐다. 이러한 시공적 상황을 반영한 우희의 한 독립적 장르가 재담이다.
학자에 따라 재담을 재담소리, 재담극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재담소리는 대체로 한 명의 연희자가 간단하나마 재미있는 일정한 서사적 내용을 말과 노래를 교대해 가며 연출해 나가는 공연물을 말한다. 달리 재치 있는 표현으로 이루어진 민요나 수많은 타령을 재담소리라 주장하기도 한다. 재담극은 한 명의 광대에 의해 주로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이와 달리 재담극을 작품 외적 자아가 개입하지 않고 작중인물 간의 갈등 구조가 성립되는 재담으로, 보통 두 명 이상의 배우가 공연하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들을 보면, 우선 재담에서 소리에 주목하면 재담소리가 되고, 말과 행동에 주목하면 재담극이라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재담을 연행한 사람들이 직업적인 연희자들이라는 점이고, 그들의 예능이 전문적인 공연예술이라는 점이다. 연희자들은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우습고도 재치있는 상황을 연출했던 것이며, 그 연출에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소리나 기타 필요한 요소들을 활용했다. 또한 그들은 그 공연물의 세밀한 변별성에 대하여 인식하지도 않았다. 결국 재담의 개념 정의 속에는 재담소리나 재담극이라 불렀던 것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유래 및 역사
재담은 일상의 간단한 대화에서부터 이야기나 노랫말에까지 스며들어 언어의 묘미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재담의 기원은 사회가 형성되고 언어가 소통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재담의 역사는 우희의 역사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유입된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불리던 연희들의 한 종목인 우희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희로 계승되고, 이 전통 속에서 우희가 무당굿놀이, 가면극, 인형극, 판소리, 재담 등에 영향을 끼쳤다. 우희의 역사 속에서 재담과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담의 유래 및 역사는 우희의 유래 및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더구나 재담이 우희의 조선 후기적 양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우희의 범주는 시간적으로 보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포괄하고, 그 향유 공간적으로 보면 민간과 궁중을 모두 아우른다. 우선 신라시대에는 향악(鄕樂)인 〈월전(月顚)〉에서 우희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희는 길거리, 궁중연회, 사냥터, 절에서의 연회 등에서 다양하게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때 궁중에서 벌어진 우희로는 상장군(上將軍) 정인경(鄭仁卿)과 장군 간홍(簡弘)의 주유희와 창우희(唱優戱), 외국인을 흉내 내는 우희, 장사랑(將仕郞) 영태(永泰)의 배우희(俳優戱) 등이 있다. 고려시대 때 민간에서 이루어진 우희로는 『고려사』의 「염흥방(廉興邦)」 조에 실린 권세가의 노비가 백성을 괴롭혀 조세를 거두는 내용의 우희가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우희의 공연은 궁중의 진풍정, 세시의 나례, 중국 사신 영접행사, 과거급제자 축하연인 문희연(聞喜宴) 등에서 행해졌다. 그 공연의 공간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귀석(貴石)의 〈진상(進上)놀이〉와 〈종실양반놀이〉, 고룡(高龍)의 〈맹인취인지상(盲人醉人之狀)〉, 『패관잡기』에 실린 〈탐관오리놀이〉, 연산군 때 공결(孔潔)이 행한 우희와 공길(孔吉)이 행한 〈노유희(老儒戱)〉 등이 궁중에서 연출된 우희이다. 민간에서는 흉내 내기 우희가 널리 인기를 얻었다. 대표적으로 장생(蔣生)이 연행한 우희가 있다. 이야기와 웃기기, 노래, 눈먼 점쟁이·술 취한 무당·게으른 선비·소박맞은 여편네·밥비렁뱅이·늙은 젖어미 등의 흉내 내기, 악기와 새소리 흉내 내기 등이 그 레퍼토리이다. 덧붙여 조선시대에는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언급된 유희(儒戱) 역시 찾아볼 수 있는데, 앞서 살핀 공결과 공길의 우희, 박남의 우희 등이 이에 포함된다. (☞ 우희 항목 참조).
조선 전기에는 우희를 궁중우희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궁중에서 자주 연행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에 근거할 때, 궁중우희는 세종부터 명종 연간에 이르는 150년 이상 동안 동일한 양식적 특성을 유지해왔다. 동아시아 보편의 우희를 전승하되, 토착적인 언어문화와 시대적인 정황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 궁중우희이다. 전문적인 우희 배우가 궁궐의 마당이나 후원에서, 시사적 사건을 소재로, 임금에게 정치의 득실과 풍속의 미악(美惡)을 전달하기 위하여, 웃음과 풍자로서 연출하던 공연예술이, 왕실의 지속적인 후원 아래 조선 전기 동안 지속된 것이다.
하지만 연말의 나례가 폐지되면서 궁중 중심의 우희는 사라졌다. 궁정 관객의 수요가 사라지고 후원도 끊겨버린 결과이다. 하지만 우희 전통 자체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우스갯짓과 우스갯소리를 기본 장기로 하는 우희 연희자들은 새로운 공연 공간을 찾았고, 그 환경에 맞추어 갔다. 민간에서 공연을 하면서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이어가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갔다. 그 모색 중에 하나가 전문 공연물화된 재담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재담이 전문적이고 독립적으로 공연되었다는 사실과 그 현장을 보여주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가령 춘풍이 태탕하고 복사꽃 버들개지가 난만한 날 시종별감(侍從別監)들과 오입쟁이 한량들이 무계(武溪)의 물가에서 노닐 적에, 침기(針妓)들이 높이 쪽진 머리에 기름을 자르르 바르고 날씬한 말에 홍담요를 깔고 앉아 줄을 지어 나타납니다. 놀음놀이와 풍악이 벌어지는 한 편에 익살꾼이 섞여 앉아서 신소리를 늘어놓지요.
인용한 기록은 18세기 후반 해금의 명수 유우춘(柳遇春)의 일화 중 일부인데, 봄을 맞아 벌어지는 왈자들의 놀이판을 묘사하고 있다. 각종 노래와 춤, 악기연주가 어우러지는 놀음판에서 '익살꾼(滑稽之客)'이 등장하여 신소리(詼調)를 늘어놓는다고 했다. 여기서 '골계지객'이란 우스갯소리와 우스갯짓을 담당하는 전문적 연희자를 말한다.
18세기 후반의 자료로 추정되는 〈게우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문적인 재담 연희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때는 어느 땐고, 낙양성(洛陽城) 방화시(芳花時)로구나. ···(중략)··· 좌반에 앉은 왈자···(중략)··· 각전 시정(市井) 남촌 한량(南村閑良),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이야기 일수 외무릅이, 거짓말 일수 허재순이, 거문고의 어지창이, 일금 일수 장계랑이, 퉁소 일수 서계수며, 장고 일수 김창옥이, 젓대 일수 박보안이. 피리 일수···(중략)··· 해금 일수 홍일등이, 선소리의 송흥록(宋興祿) 모흥갑(牟興甲)이가 다 가 있구나
놀음에 초청된 명인들의 장기와 이름이 열거되는 가운데 '이야기 일수', 즉 이야기의 제일인자 외무릅과 '거짓말 일수'인 허재순이 등장한다. 〈게우사〉와 같이 판소리 작품 속에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한 시대를 대표할 만큼 이름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노래, 가사, 거문고, 퉁소, 장고, 판소리 등의 명인과 동등하게 이야기와 거짓말 일인자가 언급되고 있다. 이야기와 거짓말은, 곧 재담을 말하는 것이다. 재담이 놀이판에서 독립적인 오락물로 언급되고 있으며, 전문적인 영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독립적인 연희로서 재담의 존재를 살펴볼 수 있다.
배우(俳優)의 놀이, 괴뢰(傀儡)의 기예, 나악(儺樂)으로 시주(施主)를 청하는 일, 요언(妖言)으로 술수를 파는 자는 모두 금해야 한다.
남쪽지방의 아전과 군교들은 사치와 방종이 습속이 되어, 봄이나 여름 화창한 때가 되면 배우가 골회(滑詼)의 연행을 하고 굴뢰(窟儡)가 붕간(棚竿)의 놀이를 하여 밤낮으로 즐긴다. ······ 이런 일이 백성들에게 보여지니 백성들이 거기에 빠지지 않는 자가 없어 남녀 할 것 없이 들떠 방탕하여 절도가 없게 되니 ······
'백성들이 거기에 빠지지 않는 자가 없어 남녀 할 것 없이 들떠 방탕하여 절도가 없게'되었다는 언급에서 놀음판에 등장하는 연희들이 광범위하게 인기를 누린 사실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연희 중에 하나로 배우의 익살(俳優滑詼之演)이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 배우의 익살이란 언어를 중심적으로 사용한 익살, 곧 재담을 말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재담은 오락적인 연희로 존재했다. 일상에서 재치있고 재미있는 말을 주고받던 일상적인 오락의 양상을 넘어서서 전문성을 획득했고, 여러 가지 기예에 곁들여 행해지던 형태를 극복하여 독립적인 연희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재담의 연행은 가무(歌舞), 기악(器樂), 판소리 등과 함께 나란히 전통연희의 위치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문적인 재담 연희자들도 등장한다. 문헌 속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재담 연희자들로 앞서 언급한 외무릅과 허재순, 그리고 김옹, 김중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보다 앞서 18세기 전·중반의 광대인 광문(廣文) 역시 민간에서 재담으로 이름을 날렸다.
바로 보지 않고 눈을 흘기더니
비뚤어진 입에 나오는 대로 떠드는구나 ······
익살에다 속담을 섞어서
이러구러 반년을 놀다 보니 ······
시속에 헛소리 하는 아이 꾸짖을 때
달문이 닮았다 하는데 ······
별난 재주 익살스런 소리
이름이 벌써 온 나라를 들썩이다가
광문은 달문(達文)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익살과 신소리, 곧 재담의 대명사처럼 민간에서 인정받았다. 그런데 광문은 다른 여러 가지 연희에도 능한 연희자였다. 따라서 그의 재담 연행은 익살스러운 행동이나 춤 등과 함께 어우러졌을 가능성이 있다.
광문이 여러 가지 연희를 동시에 보여주었던 연희자라면, 외무릅과 허재순, 김옹, 김중진 등은 재담을 중심으로 한 재담 전문 연희자라 할 수 있다. 김옹의 경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이야기를 아주 잘하여 듣는 사람들이 다 포복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옹이 바야흐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 살을 붙이고 양념을 치며 착착 자유자재로 끌어가는 재간은 참으로 귀신이 돕는 듯했다. 가히 익살의 제일인자[滑稽之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재담 연희자들의 공연은 말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정조(正祖) 때 김중진(金仲眞)이란 이는 나이가 늙기도 전에 이빨이 죄다 빠져서 사람들이 놀리느라 별명을 '외무릅(瓜濃)'이라 붙여 주었다. 익살과 이야기(詼謔俚談)를 잘하여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묘사함에 당해서 곡진하고 자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중 삼사발원설(三士發願說)을 들어 보면 대개 이런 이야기였다.
김중진은 이빨이 죄다 빠져 '외무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비정상적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익살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는 본래 꼽추, 난쟁이 등 비정상적 외모를 지닌 경우가 많았으며, 우스갯짓과 우스갯소리를 본업으로 삼았다. 비정상적 외모가 연출하는 이야기와 흉내 내기는 웃음을 배가시키게 된다. 김중진 역시 자신의 외모를 재담 연행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로 하는 우스갯소리를 중심으로 하되 우스갯짓 역시 함께 어우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중진의 별명인 '외무릅'은 앞서 소개한 〈게우사〉에서도 이야기의 제일인자로 소개되었는데, 유사한 별명을 가진 재담 연희자 이야기가 『청구야담(靑邱野談)』에도 나타난다.
서울에 오(吳)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담(古談)을 잘하기로 유명하여 두루 재상가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는 식성이 오이와 나물을 즐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오물음이라 불렀다. 대개 '물음'이란 익힌 나물을 이름이요, 오씨와 오이가 음이 비슷한 때문인 것이다.
그때 한 종실이 연로하고 네 아들이 있었는데, 물건을 사고 팔기로 큰 부자가 되었지만, 천성이 인색하여 추호도 남주기를 싫어할뿐더러, 여러 아들에게조차 분재를 않고 있었다. 더러 친한 벗이 권하면 '내게도 생각이 있노라'고 대답하고 밍기적 밍기적 천연 세월하여 차마 나누어주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오물음을 불러 이야기를 시켰다. 오물음이 마음 속에 한 꾀를 내어 고담을 지어서 했다. ······ 대체로 종실 노인이 일언에 돌연히 깨달음도 쉽지 않지만, 보다 오물음은 골계류(滑稽類)에 들어갈 사람이다. 그가 순우곤(淳于髡)·우맹(優孟)의 세상에 났다면 어찌 그만 못했겠는가.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이와 익힌 나물을 즐겨하여 '오물음'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앞서 살펴본 김중진의 별명 역시 이와 유사하다. 김중진은 '외무릅'이라 불렸는데, 그가 늙기도 전에 이빨이 다 빠진 것을 놀리느라고, 이빨이 없는 노인들에게 알맞은 음식인 '외무릅(瓜濃)'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했다. 오물음은 고담을 만들어내어 인색한 종실 노인을 풍자하고 깨우쳤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싶어 하는 네 아들의 소원을 바탕으로 고담을 꾸며 아버지인 종실 노인 앞에서 연행했다. 이에 종실 노인이 깨우치고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오물음이 재산을 분배하지 않은 종실노인을 풍자했다는 재담은 〈장안갑부 이동지〉이다. 장안의 갑부인 이동지는 평생 인색하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재물에 얽매였던 삶을 뉘우치게 된다. 그는 두 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도록 유언했는데, 재물을 산같이 두고도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재담 연희자들은 나례 폐지 이후 궁정이라는 공연 공간과 관객 집단의 수요가 사라지자, 서울 시정의 개방공간에서 흥행을 벌이면서 작품 생산 비용이 적게 드는 말과 동작 중심의 비교적 단순한 연희를 연출하고 반복적으로 공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각종 가무와 기악, 판소리 등과 나란히 위치한 전문적 흥행물로서의 재담이다. 이 재담은 이전 궁정에서 벌어진 우희에 비해 축소되고 시사성이나 풍자가 사라지는 통속화의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빠르게 민간에 퍼져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피스(W.E.Griffis)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1882년 초판)을 통해 19세기 후반의 재담 공연을 살펴 볼 수 있다.
광대들은 사람이 붐비는 거리나 모퉁이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막을 친다. 그러고는 바닥에는 거적을 깔고 전면에선 해를 가려 그늘을 만들고 후면에 배경을 설치한다. 작은 책상과 입천장을 축일 생강차 한 잔과 함께 무대 그리고 광대들이 쭈그리고 앉아 기다릴 만한 터만 있으면 그것으로 준비는 충분하다.
관객을 위한 시설로는 몇 개의 조야한 의자나 거적이 있다. 입을 멀거니 벌린 관중들이 곧 광대의 주위에 몰려든다. 관중들은 담뱃대를 꺼내 물고 약장수들은 자기 약을 팔아먹을 기회를 노린다. 광대의 목소리가 여러 가지 음조를 띠면서 때로는 점잖게, 때로는 천박하게 뽑아 대는 목소리로서 대사를 외고 여러 가지의 몸짓을 흉내 낼 것이다. 사또 앞에서 벌어지는 송사(訟事)의 장면, 태형(笞刑)의 모습, 내외 싸움 등 상류 사회와 하층 계급의 장면들이 번갈아 가면서 연출된다. 사또의 근엄한 목소리나 표정이며 형틀에 매달린 죄수의 가엾은 간청과 울음과 신음과 몸부림, 남편의 분노와 불만, 아내의 찢어지는 듯한 가성(假聲)이나 눈물, 또는 가엾은 간청을 그는 흉내 낸 것이다. 미소와 찡그린 표정과 놀람과 비탄 등 온갖 감정을 표현하고, 농담, 재담, 명언, 비꼼, 또는 훌륭하게 묘사된 비통함이 그의 목소리로써 묘사된다.
미국의 주한 공사 서기관으로 1884년경 조선에 있었던 로웰(Percival Lowell)은 길거리에서의 재담 공연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로웰은 다음과 같이 재담 연행의 양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손님과 가희들 뒤로 많은 군중이 운집했고, 계단까지 사람의 얼굴로 홍수를 이루었다. 이들 중에는 악사들-배우이기도 했다-도 있었다. ······
연극이 시작되면서 나는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났다. ······ 연기자는 사실상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나 둘가량의 다른 사람은 그저 들러리로 참가해 밝은 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그림자 역할을 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
뭐니뭐니 해도 가장 훌륭한 연기는 담배 행상 흉내였다. 그는 물건을 팔려고 노력하지만, 완벽한 상술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거듭한다. 사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물건을 사라고 설득하다가 오해가 생기고 소동이 일어난다. 간신히 소란을 피한 그가 다시금 그 특유의 '담배 사려'를 외쳐댈 때, 이전의 모든 교활함은 습관적인 외침 속에 사라진다.
한 역할에 이어 또 다른 역이 뒤따르면서 공연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호랑이, 시골뜨기, 장님 등이 모두 지나갔을 때, 저녁은 벌써 오래 전에 달아나고 바야흐로 새벽이 돼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구경꾼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 준 배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대접받았다. 방에 들어와 잠을 자는 와중에도 나는 그 외침을 들었다. '담배 사려어.'
1882년에 나온 그리피스의 책에 묘사된 길거리에서의 재담 공연, 1884년경 미국 주한 공사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로웰이 찍은 길거리 공연 장면과 담배장사 재담 등의 사례는, 재담이 19세기말에도 공연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재담 연행은 20세기에도 이어진다. 특히 퍼시벨 로웰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담배장사 재담은 20세기까지 이어져 다음과 같이 『매일신보』 기사로 광고되기도 한다.
1884년경 길거리에서의 재담 공연 퍼시빌 로웰
박춘재 『무쌍신구잡가』
광무대 박타령 산옥 옥엽의 한량무 땅재주 새로운 담배장사의 웃음거리 줄타는 재주 계집아이의 선소리 산옥의 양금치는 모양 귀하다
『매일신보』 1914. 4. 24.광무대 심청가 산옥 옥엽의 판소리 연홍의 검무 잡가 땅재주 무당노름 담배장사 김인호 웃음거리
『매일신보』 1914. 6. 20.위의 『매일신보』 광고는 재담이 18-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극장무대의 중요 레퍼토리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19세기까지 시정에서 인기를 얻은 재담 공연은 20세기 초 극장문화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옥내 상설극장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명창이며 재담의 명수였던 박춘재(朴春載, 1883-1950)의 공연 활동으로 대표되는 재담의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박춘재는 많은 재담 사설들을 만들고 스스로 연행했다. 이러한 재담 자료는 1915년 출판된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본문 서두에 '광무대 소리'라 하여 광무대에서 불려진 노래를 채록했음을 밝히고 있다. 책표지에 광무대 무대 모양과 연주 현장의 그림이 있고, 책 끝에는 박춘재의 사진을 싣고 '조선제일류가객박춘재(朝鮮第一流歌客朴春載)'라 설명을 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가객으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사진까지 실었다. 이는 이 노래들이 박춘재를 위시한 유명한 가객들이 광무대를 중심으로 하여 실지로 부른 것을 채집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춘재가 연행한 유명한 재담들로는 〈장대장타령〉, 〈곰보타령〉, 〈장님흉내내기〉, 〈각종장사치흉내〉, 〈개넋두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재담은 이전 공연 공간인 장터나 잔치판, 길거리를 넘어서서, 극장무대에서 핵심적인 레퍼토리로 자리잡는다. 개화기에 공연장이 만들어지고 직업적 연예인이 등장하여 공연을 하면서, 사랑방의 우스개 이야기나 여러 행사나 판에서 사람들을 웃기던 재담이 극장 무대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전 시기의 재담은 소수의 특정 관객을 위한 맞춤형 재담의 특성을 지녔던 반면, 극장 무대에서의 재담은 다수의 불특정 관객을 위하여 공연되었으므로 더욱 보편적인 소재와 주제에 접근하게 되었다. 박춘재는 재담의 전통을 계승하되 극장의 무대 예술로 혁신한 성과를 내었다. 1900년대부터 박춘재는 재담을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하기도 했는데, 재담의 대중화라는 또 다른 차원의 성과를 내었다.
유성기 음반과 극장 무대를 통한 재담 공연은 이후 방송국이 설립되자 그 양상이 달라졌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방송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자 연희자들과 작가들이 협력하여 만담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20년대 박춘재를 필두로 하여 시작된 재담은 1930년대 신불출(申不出, 1908 무렵-?)에 의하여 만담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손일평, 김서정, 황재경, 김윤심을 거쳐 장소팔, 고춘자, 김영운 등으로 이어지는 만담의 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보다 다양한 언어유희로 이루어진 대중문화물로서 개그가 유행하고 있다. 코미디나 개그의 선조격인 재담과 만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의 이러한 언어문화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작업이 될 것이다.
내용 및 특성
재담은 연희자들의 말과 동작으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기에, 우스갯소리와 우스갯짓이 중심을 이룬다. 웃음이 두드러지는 골계희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소수의 연희자가 연행을 하며, 무대장치나 도구는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아주 단출하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노래와 춤이 삽입되거나 가면이나 인형 등의 표현매체가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재담은 연희자의 수를 기준으로 일인(一人) 재담, 이인(二人)의 문답식 재담, 세 사람 이상의 재담극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내용을 기준으로 할 때는 서사형 재담, 대결형 재담, 재담극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사형 재담은 혼자서 서사적인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고, 대결형 재담은 두 명이 문답하여 재치를 겨루는 유형이며, 재담극은 여러 명의 극중인물이 등장하여 인물의 성격과 사건이 더욱 복잡해진 유형을 말한다.
재담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기본은 인물과 사건과 풀어가는 서사(敍事)라고 할 수 있다. 서사형 재담의 사례로 정조 때 김중진(오물음, 외무릅)의 〈삼사발원설(三士發願說)〉, 〈장안갑부 이동지〉, 박춘재가 잘했다는 〈장대장타령〉 등을 들 수 있다.
김중진의 레퍼토리로 알려진 〈삼사발원설〉은 서사형 재담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기하고 있다. 세 선비가 하늘로 올라가서 옥황상제에게 제각기 소원을 말하게 되었는데, 관직을 원하는 첫 번째 선비와 부를 원하는 두 번째 선비는 옥황상제가 곧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세 번째 선비가 청복(淸福)을 바라자 옥황상제가 탄식하면서 '청복이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 모두 바라는 바요 하늘이 가장 아끼는 것으로, 만약 얻을 수 있다면 우선 자신이 먼저 차지하여 누렸을 것'이라 탄식을 했다는 내용이다. 청복이야말로 옥황상제도 탐내는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다. 〈삼사발원설〉은 세 선비가 차례로 돌아가면서 옥황상제와 주고받는 대사를 중심으로 삼으면서 서사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김종진의 〈삼사발원설〉은 『삼설기(三設記)』 중의 한글 단편인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黄泉記)〉와 줄거리가 거의 같다. 최운식(崔雲植)은 김중진이 설화를 재구성하여 만든 이야기가 〈삼사발원설〉과 한글 단편 『삼설기』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오물음이 재산을 분배하지 않은 종실노인을 풍자했다는 〈장안갑부 이동지〉도 서사형 재담에 속한다. 장안의 갑부인 이동지는 평생 인색하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재물에 얽매였던 삶을 뉘우치게 된다. 그는 두 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도록 유언했는데, 재물을 산같이 두고도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박춘재의 재담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 〈장대장타령〉 역시 서사형 재담이라 할 수 있다. 〈장대장타령〉은 장대장의 출생과 성장 과정, 혼인, 출세, 작첩(作妾)의 문제 등을 두루 다룬 재담으로 강한 서사성을 가지고 있다. 〈장대장타령〉의 서두 부분을 보면, 장대장의 아버지 장보령의 인물 치레에서 시작되어 부부가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기자(祈子) 정성을 들이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재담 연희자는 서사적 전달자로서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장대장의 출생 및 성장 과정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재담 연희자는 작중인물의 대화까지도 스스로 구사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재담 연희자는 '부인이 하는 말이', '······하니까' 등의 설명적인 어투를 쓰고 있다. 인물들 간의 대화 내용을 전달한다는 입장에 있을 뿐, 재담 연희자가 작중인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대결형 재담으로는 박춘재의 〈장님아이희담〉과 〈병신재담〉을 사례로 들 수 있다. 대결형 재담의 사례로는 조선 전기에 성행한 궁중우희 중 〈당상관놀이〉나 〈도목정사놀이〉에서도 발견된다. 대결형 재담에서는 두 명의 연희자가 각각 배역을 맡아 재담을 나눈다. 이들의 대화 사이에는 설명적인 어투가 개입하지 않는다. 두 명의 배역을 맡은 연희자가 직접적으로 말다툼을 벌이는 것이 핵심이 된다.
〈장님아이희담〉은 서두에서 노랫가락을 섞어 장님이 길을 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한다. 이어서 장님과 아이가 서로 만나 재담을 주고받는다. 아무런 서사적 전제 없이 장님과 아이는 다짜고짜 서로 곁말을 하며 재치를 겨룬다. 장님과 아이가 서로 만나 재담을 주고받는다는 사실 외에, 그들이 왜 만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따위의 서사적 줄거리 자체가 없다. 줄거리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말싸움으로 대결을 벌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병신재담〉에서도 나타난다. 방아타령 한 소절을 부르고 나서 곧바로 병신과 주인의 대결이 벌어진다. 아무런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두 명의 배우는 서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정체를 확인한다.
대결형 재담의 대화 사이에는 설명적인 어투가 개입하지 않는다. 작중인물이 직접 대화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장님아이희담〉에서의 장님과 아이, 〈병신재담〉에서의 병신과 주인의 역할은 두 명의 연희자가 나누어서 맡고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재담극 유형으로는 〈발탈〉을 사례로 들 수 있다. 〈발탈〉은 대결형 재담에서 더 나아가 극중인물이 탈과 의상 등으로 분장했다. 〈발탈〉에서 등장하는 인물인 탈은 앉은뱅이면서 팔도를 돌아다니는 유람객으로 설정된다. 탈이 주인을 상대로 유람 다닌 명승지를 두루 소개하고 사사건건 부딪치며 다툰다. 그 다툼은 곁말을 쓰며 재치를 겨루는 것이 중심이 된다.
그런데 〈발탈〉의 대결은 그 자체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연극적인 구성과 의미를 갖추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생선장수로 나선 여자가 등장함으로써 생활 현실이 나타나고, 극중인물들 사이의 인간관계를 통하여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여인이 등장하여 대결 구조가 더욱 복잡해진다. 뿐만 아니라 〈발탈〉은 다양한 매체 활용도 두드러진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소리와 춤이 활용되어 〈발탈〉의 양상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재담극의 양상은 궁중에서 연행된 우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진상놀이〉나 〈종실양반놀이〉가 그것이다. 의상과 소도구를 갖추어 배역으로 분장하고 동작 연기를 병행한 사실에서 그러하다.
인접 국가 사례
중국에서는 현재도 상성(相聲)이라 하여 우리의 재담과 유사한 연희가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학자들은 이것이 우희의 전통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성은 청대에 베이징에서 형성되어 전국 각지에서 유행했다. 전통적인 내용은 해학이 넘치는 재담으로 사회의 온갖 현상을 풍자하거나 각종 생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중국의 해방 후에는 이러한 풍자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인사(人事)를 칭송하는 작품도 있다.
상성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으로, 설(說, 우스갯소리·수수께끼·잰말놀이), 학(學, 새·짐승의 소리나 인물의 모습과 말씨를 흉내 내는 것), 두(逗, 서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 창(唱, 우스꽝스럽게 노래하는 것)을 그 주요한 예술 수단으로 삼는다. 공연 방식에는 혼자 하는 단구(單口), 두 사람이 일문일답하는 대구(對口), 세 사람 이상이 하는 군구(群口)의 3종이 있다.
우리나라의 재담이나 중국의 상성과 유사한 공연예술이 일본에도 있다. 일본에서는 연희자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관객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즐기는 방식의 예술인 와게이(話藝)라는 것이 있다. 와게이는 연희자가 몸으로 하는 동작이나 도구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연희자의 입담 능력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연희이다.
와게이에는 한 사람의 연희자가 무대 위에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라쿠고(落語), 영웅담이나 교훈적이며 서사적인 이야기를 혼자 앉아서 전개하는 고샤쿠(講釋)와 고단(講談), 두 사람이 서서 재담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만자이(萬歲, 혹은 漫才), 연희자가 항간의 소문이나 세태를 비평하거나 시종 좌충우돌하는 우스개로 끝내기도 하는 만단(漫談) 등이 있다. 와게이의 종류 가운데 우리의 재담과 유사한 것으로는 라쿠고, 만자이, 만단 등이다.
만자이는 본래 '萬歲'라고 표기했다. 그런데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 사이에 전통적 만자이(萬歲)를 현대적으로 개작하여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연희하는 새로운 재담을 전통적인 만자이(萬歲)와 구별하기 위해, 1930년 무렵부터 한자를 바꿔 만자이(漫才)라고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만자이(漫才)는 일본 관서지방에서 시작된 것이다. 두 명이 짝을 이뤄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해학적인 이야기가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1920년대 중반에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담당하던 변사(辯士)에 의해 시작된 만담을 1933년 요시모토 흥업 선전부에서 만자이(漫才)로 개명하며 최대 흥행을 거둔다. 1930년대에는 라쿠고(落語)를 누르고 최고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만단(漫談) 역시 20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 사이에 한 사람이 연희하는 재담도 생겨났는데, 이것을 만단(漫談)이라고 불렀다.
라쿠고의 경우 만자이나 만단에 비해 비교적 전통을 잘 지켜오고 있다. 그 형성 시기도 우리의 재담과 비슷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쿠고는 한 사람의 라쿠고가(落語家)가 무대 위에 앉아서 입담 좋게 재미있게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본의 전통적인 1인 공연예술이다. 짧은 이야기에서부터 1시간 이상 걸리는 긴 이야기까지 서민생활에서 따온 다양한 소재를 재치 있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손짓과 몸짓 그리고 표정으로 여러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내용 관객을 매료시킨다.
라쿠고가 발생한 시기는 우리나라의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에도시대이다. 주로 에도(현재의 도쿄)나 오사카 등 도시에 사는 서민들이 관객이었다. 오늘날에는 도시의 공연장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하여 전국에서 라쿠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폭넓은 향유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중요한 전통연희의 하나이다.
라쿠고의 연행 방식은 요세(寄席)라는 전문 공연장에서 재담이나 노래 혹은 요술 등과 함께 진행된다. 무대는 특별한 장치나 도구가 없고, 라쿠고가가 객석을 향하여 혼자 앉아서 극히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러한 도입부를 마쿠라(枕)라 한다. 이어서 점차 본론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부분에는 이야기가 엉뚱하게 반전되어 큰 웃음을 자아내며 끝을 내는 식으로 구성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반전되는 부분을 오치(落ち) 또는 사게(下げ)라고 부른다. 기대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결말을 이끌어 큰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의의
2012년 개봉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주인공은 연희자이다. 연희자가 주인공인 영화로는 2005년 개봉된 〈왕의 남자〉도 있다. 〈왕의 남자〉에서는 궁궐에서 공연을 하며 임금을 직접 풍자했던 연희자 공길이 나온다. 실제 역사서에서 그는 궁중우희를 연행했던 연희자였다. 〈광해, 왕의 된 남자〉에 등장하는 연희자는 몸져누운 광해군의 대역을 하며 백성들이 바라는 진정한 임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한양의 풍류방에서 임금을 소재로 웃음과 풍자의 공연을 하다 허균에게 발탁되었다. 그런데 〈광해, 왕의 된 남자〉에 등장하는 연희자는 허균이 쓴 〈장생전(蔣生傳)〉의 주인공 장생을 떠올리게 한다. 장생은 우스갯소리, 노래에 능통했으며 흉내 내기의 달인이었다. 명백한 재담 연희자였던 것이다.
실존인물로서 공길과 장생은 우희를 맡아했던, 더욱 구체적으로 궁중우희와 재담을 맡아했던 연희자들이다. 영화의 핵심이 된 인물이나 이야기는 간단한 문헌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영역의 연구를 통해 구축된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이 광범위한 토대가 되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우희와 재담 연구의 성과가 바탕이 되어 공길과 장생을 비롯한 연희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됐고 커다란 문화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재담의 전통은 20세기 초 극장무대에서 박춘재 등의 재담으로 전승되었고 촌극이나 만담의 시기를 거쳐 TV 코미디물로 성장하고, 요즘 한층 인기를 구가하는 개그로 이어졌다.
최근에 보다 다양한 언어유희로 이루어진 대중문화물로서 개그가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개그의 선조격인 재담의 정체와 역사를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의 관심과 언어문화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작업이 될 것이다. 개그맨들은 오랜 세월 전통연희사의 주역이었던 재담 연희자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재담의 연구는 인문학 연구가 영화나 개그 등 대중문화 산업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김종철, 「자료소개 : 게우사」, 『한국학보』 65, 일지사, 1991.
- 박전열, 『라쿠고』, 민속원, 2007.
- 사진실, 『공연문화의 전통 : 樂·戱·劇』‚ 태학사, 2002.
- 사진실, 「소학지희/배우희 연구의 쟁점과 전망」, 『구비문학연구』 35‚ 한국구비문학회, 2012.
- 서대석, 「전통재담과 근대 공연재담의 상관관계」, 『전통구비문학과 근대 공연예술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 손태도, 「서울지역 재담소리의 전통과 그 전승」‚ 『우리 무형문화재의 현장에 서서』‚ 집문당, 2007.
- 이우성·임형택 역편, 『이조한문단편집』 중, 일조각, 1982.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早稻田大學博物館 編, 『演劇百科大事典』, 東京 : 平凡社, 1990.
- W. E. 그리피스 저, 신봉용 역, 『은자의 나라 한국』, 집문당, 1999.
- 콜린 맥커라스 저, 김장환·하경심·김성동 역, 『중국연극사』, 학고방, 2001.
- 퍼시벌 로웰 저, 조경철 역,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의 사람들』, 2001.
참조어
개타령, 김계선, 김뻑국, 김영택, 김한량타령, 박천복, 이농주, 장사치흉내, 재담천하 강산유람, 최화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