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

우희

[ 優戱 ]

정의 및 이칭

우희(優戱)는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배우(俳優)의 놀이라는 뜻으로, 특히 배우가 행하는 골계적인 성격의 연희를 의미한다. 우희는 동아시아의 총체적인 공연예술인 산악(散樂)·백희(百戱)의 한 종목이다.

중국에서 배우가 골계희를 연행했기 때문에, 흔히 골계희를 배우희(俳優戱), 창우희(倡優戱), 우희라고 불렀다. 골계희를 시사희(時事戱)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골계희가 시사풍자적인 내용을 많이 연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골계희에는 흉내 내기 연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배우가 우희를 의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의 여러 기록에도 역시 대부분 우희, 배우희, 창우희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우희를 소학지희(笑謔之戱), 조희(調戱), 화극(話劇) 등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우리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명칭이나, 중국과 일본의 예로 볼 때 우희가 가장 적당한 용어로 생각된다. 중국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미 우리의 이런 연희를 우희로 보고, 중국의 우희와 비교하여 논의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 흔히 우희를 가리키는 명칭은 소학지희였는데, 이 명칭은 조선 『문종실록(文宗實錄)』 즉위년 6월 10일 조의 기사에 단 한 번 등장하며, 이후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으므로 적절한 용어로 보기 어렵다. 『문종실록』의 기록에서 광대(廣大)와 서인(西人)의 주질(注叱, 줄타기), 농령(弄鈴, 방울받기), 근두(斤頭, 땅재주)와 같은 놀이를 '규식이 있는 놀이(有規式之戲)'라고 했는데 이를 '규식지희'로 잘못 고유명사화하고, 수척(水尺)과 승광대(僧廣大) 등의 웃고 희학하는 놀이를 역시 '소학이 있는 놀이((有)笑謔之戲)'가 아닌 '소학지희'로 잘못 고유명사화한 데서 명칭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이 용어가 고유명사라면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어야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조희는 그간 학계에서 고려시대의 우희를 칭해온 다른 명칭이다. 이두현은 고려시대 조희의 전통이 조선시대 소학지희로 이어졌으며, 소학지희는 가면이나 인형의 수단을 빌리지 않고 배우가 직접 나와서 일정한 인물과 사건에 관련된 주제를 전개하는 연극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조희는 결국 산악·백희를 놀던 연희자인 배우들에 의해 연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중국이나 조선시대의 우희와 동일한 주제와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우희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에서 우희라는 말이 보일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이미 이런 연희를 우희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극도 역시 우희를 칭하는 다른 명칭이다. 고정옥은 화극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화극은 가면이나 인형의 수단을 빌리지 않고 배우가 직접 연기하되, 노래나 춤 위주가 아닌 대사 위주의 연극으로 보았다. 손태도는 화극이란 한 명의 배우가 중심이 되어 가면이나 인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연극을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옛 기록에서는 우희, 배우희, 창우희라는 용어는 자주 나타나지만 화극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화극이라는 용어는 고정옥이 새로 만들어낸 용어라고 생각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서양연극의 영향을 받은 현대연극을 화극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전통연극들은 춤과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가무극이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현대연극은 대화 위주의 공연물이므로 화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진실은 『한국연극사 연구』에서 소학지희라는 용어가 부적절하지만 기존 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기 위해 소학지희라는 용어를 사용했음을 밝혔다. 이후 『공연문화의 전통』에서는 소학지희 대신에 골계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골계희를 배우가 직접 연기하며 일정한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하여, 재담으로 관중을 웃기고, 풍자적이고 비판적이면서 어느 정도 즉흥적인 연극이라고 규정했다. 전경욱과 서연호는 『고려사(高麗史)』의 여러 대목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 등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소학지희라는 용어 대신 우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유래 및 역사

우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중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 묘사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다섯 가지 놀이는 모두 산악에 해당하는 연희이다. 이 중 월전이 바로 우희이다.

월전(月顚)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고 머리털은 빳빳(肩高項縮髮崔嵬)
팔소매를 걷은 군유(群儒) 술잔 다툰다.(攘臂群儒鬪酒盃)
노랫소리를 듣고서 모두 웃어 젖히며(聽得歌聲人盡笑)
초저녁에 꽂은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네.(夜頭旗幟曉頭催)

인용시의 묘사를 통해 살펴볼 때 월전은 군유(群儒, 여러 난쟁이 또는 여러 선비)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주는 연희였음을 알 수 있다.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며 머리털은 빳빳하다는 묘사는 난쟁이의 외형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의 짧은 묘사만으로는 월전이 배우가 난쟁이를 흉내 낸 것인지, 실제 난쟁이의 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선 이 시에서 놀이꾼을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고'라고 묘사한 점에 주목하면, 놀이꾼이 난쟁이의 흉내를 내며 놀이를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시의 놀이꾼이 중국의 산악에서 골계희를 담당했던 놀이꾼 중의 한 부류인 주유(侏儒)나 척시(戚施, 꼽추)와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의 놀이꾼이 바로 주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헤이안(平安, 794-1192) 중기의 문인 후지와라 아키히라(藤原明衡)의 『신원악기(新猿樂記)』에서는 산악의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서 주유무(侏儒舞) 즉 난쟁이춤이 있는데, 이는 실제로 난쟁이가 등장해 춤을 추는 것이라고 한다. 월전의 연희 내용에 대해 이상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으로 보든지 간에, 양자 모두 산악의 종목인 우희에 포함된다.

고려시대에 우희의 공연은 길거리, 궁중연회, 사냥터, 절에서의 연회 등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그 형식과 주제는 중국의 우희와 매우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연희 내용은 고려시대의 정서와 배경을 반영하여 새롭게 창작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는 궁정에서 행해진 〈하공진(河拱辰)놀이〉, 상장군(上將軍) 정인경(鄭仁卿)과 장군 간홍(簡弘)의 주유희와 창우희(唱優戱), 외국인을 흉내 내는 우희 등이 있다. 또한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린 장사랑(將仕郞) 영태(永泰)의 우희는 굴원(屈原)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인데, 이는 『태평광기(太平廣記)』 권249 「고최외(高崔嵬)」 조의 기록에서도 발견되어 중국과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신인 하공진을 흉내 낸 우희는 일명 〈하공진놀이〉라고 불린다. 하공진은 고려 현종(顯宗) 1년(1010) 거란의 침입시에 철군 교섭을 위해 적진에 들어갔다가 포로가 되어 연경(燕京)에 억류되었으나, 거란 왕의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변절을 거부하다가 처형된 충신이다. 이러한 하공진의 이야기를 배우들이 우희로 공연했는데, 이는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 중 우맹(優孟)이 초(楚)나라 장왕(莊王)에게 재상 손숙오(孫叔敖)의 후손을 후대하라고 풍간한 내용과 유사하다.

고려시대에도 주유희가 나타나는데, 왕이 베푼 연회에서 상장군 정인경은 난쟁이놀이 즉 난쟁이를 흉내 내는 주유희를 했고, 장군 간홍이 창우희를 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외국인을 흉내 내는 우희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의종(毅宗) 19년(1165) 4월에 좌우번(左右番)의 내시들이 다투어 왕에게 놀이를 바쳤는데, 좌번은 모두 유사(儒士)였고, 우번에는 귀족 자제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번은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이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흉내 내는 놀이를 연출했다. 우번에 귀족의 자제들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놀이는 우번의 내시들이 원래 전문적 놀이꾼들이 연행하던 〈공물바치기놀이〉를 모방한 흉내 내기 연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우희의 공연은 궁중의 진풍정, 세시의 나례, 중국 사신 영접행사, 과거급제자 축하연인 문희연(聞喜宴) 등에서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궁정에서 행해진 우희에는 귀석(貴石)의 우희, 고룡(高龍)의 우희, 〈정평부사(定平府使) 말안장 사는 놀이〉 등이 있다. 민간에서는 흉내 내기 우희가 널리 인기를 얻었다. 또한 유학자와 유학의 경전을 풍자하는 유희(儒戱)가 널리 행해졌으며, 특히 문희연에서 반드시 연행되었다.

귀석은 조선시대의 우인(優人)으로 종실(宗室)의 종이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귀석이 진풍정에서 연행한 두 편의 우희를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귀석의 〈진상(進上)놀이〉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뇌물을 받고 벼슬자리를 추천하는 모습을 우희로 펼친 것이다. 〈진상놀이〉에서 지방 수령은 진봉색리(進奉色吏)에게 뇌물을 전달하도록 시키는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게 각각 큰 꾸러미를 하나씩 주고, 대사헌에게는 중간 크기의 꾸러미를 주고, 마지막으로 임금에게는 가장 작은 꾸러미를 주라고 한다. 이 놀이에서 왕은 승진을 원하는 지방 수령으로부터 이조판서, 병조판서뿐만 아니라 대사헌보다도 작은 꾸러미를 받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귀석의 〈시예종실(試藝宗室)놀이〉는 『사기』 「골계열전」 중 우맹이 초장왕에게 재상 손숙오의 후손을 후대하라고 풍간한 내용과 유사하다. 귀석이 동료 우인들과 함께 펼친 이 우희는 종실인 주인이 관직과 봉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냈다.

흉내 내기 우희로는 『세조실록(世祖實錄)』 14년(1468) 5월 17일 조에서 고룡(高龍)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고룡은 조선시대 야장(冶匠, 대장장이)으로, 궁시장(弓矢匠, 활을 만드는 장인)으로 구해 온 사람인데, 본래 놀이꾼(優人)으로서 장님이 술 취한 모습을 흉내 내는 놀이, 즉 〈맹인취인지상(盲人醉人之狀)〉을 잘했다고 한다.

〈정평부사 말안장 사는 놀이〉는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놀이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정평부사 구세장이 말안장을 사기 위해 흥정하다가 결국 관가의 돈으로 구입한 사건을 우인(優人)이 재현하여 만든 놀이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부패한 관원을 풍자했다.

민간에서도 민간 연희자의 흉내 내기 연희가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허균(許筠, 1569-1618)의 〈장생전(蔣生傳)〉에 의하면 장생은 양반층에서 몰락한 인물인데, 오랫동안 호남, 호서를 떠돌다가 1589년경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장생이 연행한 놀이는 이야기와 웃기, 노래,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의 흉내 내기, 악기와 새소리 흉내 내기 등이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우희의 하위범주에 유희(儒戱)라는 연희가 있었다. 이것은 선비를 풍자하고 유가(儒家)를 희롱하는 내용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에 의하면 과거급제자의 집에서 벌이는 축하잔치인 문희연에서 놀이꾼이 유학자를 조롱거리로 삼아 연행하는 '유희'가 있었다. 또한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기록한 『소재집(疎齋集)』의 〈만록(漫錄)〉에 의하면, 박남(朴男)이라는 광대가 문희연에서 유희를 연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도 박남(朴男)의 일화가 나오는데, 박남이 유희 연희자였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창자였음을 보여준다.

또 유희에 관한 자료는 우인 공결(孔潔)이 우희를 하면서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등을 논했다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5년(1499) 12월 조의 기록과, 우인 공길(孔吉)이 노유희(老儒戱)를 하면서 『논어(論語)』의 구절을 외웠다는 『연산군일기』 10년(1504) 12월 조의 기사가 있다. 이 두 기사의 시기로 볼 때, 공결의 우희와 공길의 노유희는 연말의 나례에서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특성

우희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연희 양상에 따라 (1) 인물과 소리 등을 흉내 내는 우희, (2) 왕과 관리 등 지배층과 각종 시사 사건들을 풍자하는 우희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인물을 흉내 내는 우희는 특이한 신체 외형 또는 어떤 인물의 특징을 흉내 내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에는 난쟁이, 외국인, 맹인, 술 취한 사람,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을 흉내 내기가 있다. 난쟁이를 흉내 내는 우희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향악잡영오수〉 중 월전과 고려시대 상장군 정인경이 놀았던 주유희를 통해, 이러한 형태의 우희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정인경의 주유희는 상장군인 그가 난쟁이였을 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난쟁이를 흉내 내서 추는 춤이거나 난쟁이 흉내를 내며 행하는 우희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외국인을 흉내 내는 우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먼저 『고려사』 권18 「세가」 18에서 공물을 바치는 외국인을 흉내 내는 놀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의종(毅宗) 19년(1165) 4월에 좌우번(左右番)의 내시들이 다투어 왕에게 놀이를 바쳤는데, 좌번은 모두 유사(儒士)였고, 우번에는 귀족 자제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번은 채붕을 설치하고 외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흉내 내는 놀이를 연출했다. 또한 『고려사』 권36 「세가」 36에서 충혜왕(忠惠王) 4년(1343) 조에서 〈걸호희(乞胡戲)〉를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호인(胡人)을 흉내 내는 놀이이다. 『고려사』 신우(辛禑) 10년(1384)에는 왕이 김원길(金元吉)에게 〈당인희(唐人戲)〉를 시키려 했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벌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술 취한 장님을 흉내 내는 우희는 조선시대의 『세조실록』에 전한다.

이에 앞서 강옥(姜玉) 등이 궁시(弓矢) 만드는 공인(工人)을 구하여,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문수덕(文修德)·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조준(趙俊) 등이 명(命)을 받고 역사를 동독(董督)했는데, 이에 이르러 문수덕이 와서 아뢰기를, "야장(冶匠) 고룡(高龍)은 본래 우인(優人)으로 장님이 술 취한 모습을 놀이로 하는데, 강옥(姜玉) 등이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여 자꾸 놀이를 시킵니다. 만약 그만 두지 않는다면 끝내는 잡희를 갖추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세조실록』

위 기사를 통해 야장(冶匠)인 고룡(高龍)이 술 취한 장님의 흉내를 잘 냈다는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민간에서는 연희자인 장생이 다양한 인물 흉내 내기 우희로 인기를 끌었다. 장생은 양반층에서 몰락한 인물로 전해지는데, 오랫동안 호남·호서를 떠돌다가 1589년경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허균의 〈장생전(蔣生傳)〉에 따르면 장생은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의 인물들을 흉내 냈다.

한편 인물 흉내 내기 우희에는 특정 계층의 인물을 모방하는 흉내 내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유학자를 풍자하는 유희가 있다.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과거급제자의 집에서 벌이는 축하잔치인 문희연에서 창우가 유학자를 조롱거리로 삼아 다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온갖 추태를 연출하는 유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유자(儒者)를 조롱거리로 삼다 : 지금 등과한 자들이 반드시 창우를 써서 낙으로 삼는다. 창우들의 놀이에는 반드시 유희(儒戱)라는 것이 들어 있다. 다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꾸며낸 이야기와 억지웃음으로 온갖 추태를 연출하여 축하연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대저 요새 벼슬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유(儒)로써 이름을 삼으면서도, 천한 사람들로부터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하니, 저 배우들은 책망할 것도 없으려니와, 요즘 사대부들이 태연히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괴이할 뿐이다.

『성호사설』

위 기록에 의하면, 문희연(聞喜宴)에서 창우가 유학자를 조롱거리로 삼아 연행하는 '유희'가 있었다. "다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꾸며낸 이야기와 억지웃음으로 온갖 추태를 연출"한다는 묘사를 통해 유희에서 유학자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물 흉내 내기 우희에는 특정 실존 인물을 흉내 내는 형태도 존재했다. 특정한 실존 인물을 흉내 내는 우희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줄거리를 갖고 있으며, 주로 풍자를 목적으로 연행되는 내용에서 연기의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예로는 고려시대 현종 때의 공신 하공진을 연기한 놀이를 들 수 있다. 〈하공진놀이〉는 왕에게 풍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놀이인데, 배우의 흉내 내기 재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맹이 손숙오를 흉내 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공진을 흉내 내기 위해서는 그의 외양, 말투, 동작 등을 흉내 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우인 귀석이 〈시예종실놀이〉를 통해 종실인 주인이 관직과 봉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연기했다. 귀석은 진풍정에서 동료 우인들과 함께 시예 종실인 주인과 재상의 대조적인 모습을 상황극을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흉내 내기 우희에는 인물 흉내 내기 이외에도 인물, 동물, 악기 등의 소리를 주로 따라하는 소리 흉내 내기가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소리 흉내 내기에 능했던 연희자 세 명이 등장한다.

우리 이웃에 동계(東界)에서 온 함북간(咸北間)이란 사람이 있었다. 피리도 좀 불 줄 알고 농담과 광대놀이를 잘했다. 매양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문득 그가 하는 흉내 내기는 진짜와 가짜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파와 거문고 소리 같은 것도 쟁쟁하게 내었으며, 절주(節奏)에 능해서 매양 궁궐에 들어가 상을 많이 받았다. 또 대모지(大毛知)란 사람은 거위·오리·닭·꿩 등의 소리를 흉내 내어, 소리를 내기만 하면 이웃 닭들이 날개를 치며 몰려들어왔다. 또 기지(耆之)에게는 불만(佛萬)이라는 종이 있었는데, 개 짖는 소리를 잘해 영동(嶺東) 지방에 유람했을 때, 어느 마을에서 밤중에 소리를 내니 이웃 개가 모두 모여들었다.

『용재총화』

위 기록에서 함북간, 대모지, 불만은 주로 민간에서 활약했던 연희자들로 생각된다. 함북간은 민간에서 유명한 연희자였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임금에게 불려가 그 재주를 보일 정도였다. 그는 특히 악기 소리 흉내에 능했다. 대모지 또한 민간의 연희자로 여러 동물의 소리 흉내에 뛰어났다. 불만은 개 소리 흉내에 능했다. 중국에서 소리 흉내 내기는 구기(口技)라는 독립 종목으로 발전했는데, 춘추전국 시대부터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었다. 송대에는 구기가 특히 발전하여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서로 다른 지역의 방언을 흉내 내는 연희자, 금을 연주하는 소리, 닭울음, 개소리 등 다른 형식의 소리를 함께 흉내 내는 연희자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대 구기는 말과 창, 골계, 교희 등이 결합되어 연행된 것이 특징이었다. 허균의 〈장생전〉에서는 구기의 연행에 능했던 장생의 연희를 소개하고 있다.

(장생은) 이야기와 웃기를 잘 했으며,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를 하면 애처로워서 남의 마음을 움직였다. ······ 그는 술이 반쯤 취하면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들의 시늉을 하되 가끔 실물에 가깝고, 또 가면으로써 십팔나한을 본받되 흡사치 않음이 없고, 또 입을 찌푸리며 호각, 퉁소, 피리, 비파, 기러기, 고니, 두루미, 따오기, 까치, 학 따위의 소리를 짓되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으며, 밤이면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면 이웃집 개와 닭이 모두 따라서 우짖었다. 아침이면 야시(野市)에 나가 구걸을 하는데 하루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이나 되었다. 몇 되를 먹고나면 다른 거지에게 흩어주었기에 나가면 뭇거지아이들이 뒤를 따랐다.

〈장생전〉

인용문을 통해, 장생은 사람, 동물, 악기 등 다양한 소리 흉내 내기에 능했는데, 노래와 인물 흉내 내기도 잘했음을 알 수 있다.

풍자하기 우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궁중과 민간에서 다양하게 연행되었다. 풍자하기 우희로는 왕에게 풍간(諷諫, 왕에게 풍자를 통해 깨우침을 주는 것)하는 우희,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우희, 시사를 풍자하는 우희, 유학자와 유학 경전을 풍자하는 유희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왕에게 풍간하는 대표적인 우희로는 선대의 공신인 하공진을 예찬한 놀이가 있다. 왕 앞에서 우인이 공신 하공진을 놀이를 통해 예찬하여, 왕이 그의 현손에게 벼슬을 내려주었던 사실을 『고려사』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종 5년(1110) 9월 갑술일에 천수전에서 연회를 배설하여 모든 종친, 재상들과 함께 놀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헤어지면서 각각 선물을 주었다. 이 날 왕이 시를 지어 유신들로 하여금 화답시를 바치게 하고 물품을 차등있게 주었다. 이때에 우인(優人) 한 사람이 놀이를 통하여 선대 적 공신 하공진을 예찬하자, 왕이 하공진의 공로를 회상하여 그의 현손인 내시 위위 주부 하준을 합문지후로 임명하고 그 자리에서 시 한 절을 지어 주었다.

『고려사』

이른바 〈하공진놀이〉라 불리는 이 우희는 중국에서 우맹이 손숙오의 자손들을 보살피도록 왕에게 깨달음을 준 우희와 비슷한 내용이다. 중국 우맹의 우희와 고려시대 〈하공진놀이〉는 연행 목적이 일치한다. 두 우희는 모두 왕이 선대의 공신을 떠올리고, 후손을 보살펴 줄 것을 간청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맹의 우희가 왕의 잘못을 직접 대사로서 전달한 데 반해, 〈하공진놀이〉에서는 공신 하공진의 업적을 예찬하여 왕에게 그를 상기시키도록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하공진놀이〉는 왕이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화답시를 받는 자리에서 연행되었기 때문에, 연희자가 왕에게 공신의 후손에 대한 포상을 요구하기에 적합했다. 반면 우맹의 경우에는 특정한 자리를 이용했다기보다는 일년여의 연습을 통해 마치 진짜 손숙오가 돌아온 것과 같은 환상적인 재회 상황을 만들어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직접적으로 간하는 것은 위험이 높은 일이다. 〈하공진놀이〉는 적절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왕에게 선대 신하의 공을 떠올리도록 한 풍간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왕에게 풍간하는 우희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린 귀석의 〈시예종실놀이〉가 있다. 귀석이 동료 우인들과 함께 펼친 이 우희는 주인이 관직과 봉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냈다.

귀석은 종실의 종이다. 그 주인은 시예(試藝)하는 데 참여하여 품계가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 실제 관직이 없었고 봉록도 더해지지 않은 채 주위에 거느리는 종도 없이 여러 능침의 제관으로 뽑혀 쉴 겨를이 없었다. 귀석이 진풍정에 들어가 여러 우인과 약속을 했다. 한 명이 시예 종실이라 하고 비루먹은 말을 탔고, 귀석은 그 종이 되어 고삐를 쥐고 갔다. 한 명은 재상이 되어 준마를 탔고 가마꾼들이 길을 옹위하며 갔다. 앞선 졸개가 길을 피하라고 외치는데 종실이 걸려들었다. 귀석을 잡아다가 땅에 엎드리게 하고 곤장을 쳤다. 귀석이 큰 소리로 하소연하며 말하기를, "소인의 주인은 시예 종실로서 관직이 대감보다 낮지 않은데 봉록을 받지 못해 거느리는 종도 없이 능이며 전에 제관으로 뽑혀 한가한 날이 없으니 오히려 시예가 되기 전보다 못합니다. 소인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재상을 맡은 배우가 경탄하여 그를 놓아 주었다. 얼마 안 있어 특명이 내려 그 주인에게 실제 관직이 주어졌다.

『어우야담』

귀석은 진풍정에서 동료 우인들과 함께 시예 종실인 주인과 재상의 대조적인 모습을 상황극을 통해 나타내며, 주인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극중에서 호소했다. 이것은 우맹의 고사나 하공진 놀이와 비슷하게 왕에게 신하의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자 풍간하는 목적에서 연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세부적인 차이점들이 나타난다. 형식적으로는 우맹의 우희와 하공진 놀이가 일인극이었다면, 귀석의 우희는 여러 명이 함께 참여하여 좀 더 복잡한 연극적인 형식을 보인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우맹의 우희가 손숙오의 모습을 하고 그 억울함을 그대로 전달했고, 하공진 놀이가 공신 하공진의 업적을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귀석의 우희는 동료 우인들과 불합리한 상황자체를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귀석의 경우에는 실제로 생존하고 있는 신하에 대한 처우를 개선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현실 변화의지를 반영한다.

왕에게 풍간하는 우희에는 배우가 우희를 통해 왕에게 깨우침을 준 예도 있었으나, 왕에게 노여움을 사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존재했다. 공길나례에서 늙은 유생으로 분장하여 왕 앞에서 펼친 〈노유희〉가 대표적인 예이다. 『연산군일기』 10년(1504) 12월 조에 공길이 〈노유희〉를 만들어 가지고 말하기를 "전하는 요순같은 임금이요 저는 고요(皐陶)같은 신하입니다. 요순과 같은 임금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지만, 고요와 같은 신하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한 『논어』를 외우면서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워야 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설사 쌀이 있은들 내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유학의 경전에 수록된 윤리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왕에게 폭로한 것이다.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우희는 궁중과 민간에서 널리 연행되었다. 탐관오리의 잘못을 풍자하는 우희는 왕 앞에서 연행되어 그 잘못을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민간에서는 백성들에게 탐관오리의 잘못을 폭로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정평부사 말안장 사는 놀이〉는 왕 앞에서 관리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내용의 우희이다.

중종 때 정평부사 구세장은 탐욕스럽기가 끝이 없었다. 어떤 말안장 파는 사람을 관가의 뜰로 끌고 들어가서 친히 값을 흥정하면서 싸다느니 비싸다느니 따지기를 며칠이나 하다가 끝내 관가의 돈으로 샀다. 우인이 세시에 그 상황을 놀이로 만들었는데, 임금이 묻자 대답하기를, "정평부사가 말안장을 산 일입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명을 내려 그를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 처벌을 했다. 배우 같은 자도 능히 탐관오리를 규탄하고 공박할 수 있다.

『패관잡기』

이와 같이, 연희자는 우희를 통해 정평부사가 사사로운 물건을 사는데 관의 돈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왕은 정평부사를 처벌했다. 이 놀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부패한 관헌을 비판한 시사풍자적 성격의 우희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린 귀석의 〈진상놀이〉도 탐관오리를 풍자한 우희이다. 서울의 우인인 귀석은 왕의 진풍정에서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놀이를 펼쳤다.

공헌대왕(恭憲大王)이 대비전을 위해 대궐 내에서 진풍정(進豊呈)을 펼쳤다. 서울의 우인인 귀석(貴石)이 배우희를 잘하여 진풍정에 나갔다. 풀을 묶어 꾸러미 네 개를 만들었는데 큰 것이 두 개, 중간 것이 하나, 작은 것이 하나였다. 귀석이 자칭 수령이라 하며 동헌에 앉아서 진봉색리(進奉色吏)를 불렀다. 한 배우가 자칭 진봉색리라 하고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왔다. 귀석이 소리를 낮추고 큰 꾸러미 하나를 들어 그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조판서에게 드려라" 하고, 또 큰 꾸러미 하나를 들어 그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병조판서에게 드려라" 했다. 또한 중간 것 하나를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대사헌에게 드려라" 했다. 그리고 나서 작은 꾸러미를 주면서 "이것은 임금께 진상하여라" 했다.

『어우야담』

귀석의 〈진상놀이〉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뇌물을 받고 관리의 승진을 추천하는 내용을 풍자한 것이다. 놀이에서 왕은 승진을 원하는 지방수령으로부터 이조판서, 병조판서뿐만 아니라 대사헌보다도 작은 꾸러미를 받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귀석의 이러한 우희는 관리의 승진에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간에서는 특히 시사를 풍자한 우희가 큰 인기를 끌었다. 『고려사』 권126 「열전」 39 「염흥방」 조에 기록된 다음의 우희는 민간의 거리에서 연행되었는데, 세도가의 노비가 주인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을 풍자했다.

염흥방(廉興邦) 집의 노비와 이림(李琳)의 사위인 판밀직(判密直) 최렴(崔濂) 집의 노비들이 부평(富平)에 살면서 권세를 믿고 방자하게 횡포가 심했다. ······ 흥방이 일찍이 아비가 다른 형인 이성림(李成林)과 함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말과 마부가 길에 가득 찼다. 어떤 사람이 우희(優戱)를 하며 극세가의 노비가 백성을 괴롭혀 조세를 거두는 모양을 보았다. 성림은 부끄러워 했는데, 흥방은 즐겁게 구경하면서 깨닫지 못했다.

『고려사』

인용문에는 직접적으로 관리가 백성을 수탈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세도가 노비의 행위를 통해 세도가 자체도 풍자하고 있다.

한편 배우들은 왕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풍자하는 우희를 공연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실린 〈무세포(巫稅布)놀이〉는 사회의 부당한 일을 풍자한 내용의 우희이면서 배우 자신의 삶을 풍자한 우희이기도 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稅布)를 너무 심하게 걷어 들였으므로, 매양 관원이 문에 이르러 외치면서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기한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했다"라고 했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혹은 연일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설이 되면 광대들이 이 놀이를 대궐 뜰에서 상연했더니, 임금이 명을 내리어 그 세포를 면제하게 했으니, 광대도 백성에게 유익하다하겠다. 지금의 광대들도 아직 그 놀이를 전하므로, 그것이 고사(故事)가 되었다.

『패관잡기』

인용문에 의하면,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를 너무 심하게 걷어 들였으므로, 매양 관원이 문에 이르러 외치면서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기한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하루 걸러, 혹은 연일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설이 되어 광대들이 이 상황을 흉내 낸 놀이를 대궐 뜰에서 상연했더니, 임금이 명을 내리어 그 세포를 면제하게 했고, 광대들이 그 놀이를 계속 전하여 그것이 하나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우희를 연희하던 연희자 가운데는 무당 집안 출신이 많았기에, 이러한 부당한 일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희는 유학과 그 경전을 희롱하고, 유학자인 선비를 풍자하는 우희이다. 유희는 조선시대에 널리 연행되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과거급제자의 문희연에서 놀이꾼이 유학자를 조롱거리로 삼아 연행하는 유희가 있어 다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온갖 추태를 연출했다. 또한 조선시대의 우인 공결과 공길은 유가의 윤리가 현실에서 작용되지 못함을 왕 앞에서 유희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다. 공결은 왕 앞에서 우희를 하면서 이신(李紳)의 〈민농시(憫農詩)〉를 외우고, 삼강령과 팔조목 등을 논했다. 그는 이신의 민농시를 통해 소반 위의 쌀밥이 모두 백성의 신고(辛苦)임을 이야기했다. 삼강령·팔조목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덕목이므로, 공결이 민농시와 삼강령·팔조목을 같이 이야기한 것은 왕에게 일종의 깨우침을 주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공길은 노유희와 논어의 낭송을 통해 유학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풍간했다.

우희는 가면극의 흉내 내기와 풍자하기, 골계적 재담에 영향을 주었으며, 판소리의 성립 및 재담과 만담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본산대놀이 가면극 대사의 구성이나 양반과장 중 양반의 모습 등은 특히 우희·유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말뚝이 :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거니 노론, 소론, 이조, 호조, 옥당을 다 지내고, 삼정승 육판서 다 지낸 퇴로재상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아지 마시오. 개잘양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요.
양반 : 이놈 뭐야아!
말뚝이 : 아아 이 양반 어찌 듣는지 모르겠오. 노론, 소론, 이조, 호조, 옥당을 다 지내고, 삼정승 육판서 다 지내고 퇴로재상으로 계시는 이생원네 삼 형제분이 나오신다고 그리 했오.
양반 : (합창) 이생원이라네에.

봉산탈춤 양반과장

봉산탈춤의 양반과장에서 위 대사는 양반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처음에는 점잖게 양반을 소개하다가 갑자기 개잘양(개가죽)의 양과 개다리소반의 반자를 양반과 연결시켜 양반을 조롱한다. 이는 유희에서 유자를 조롱하듯 양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양반과장에서 양반이 말뚝이에게 나랏돈을 떼어먹은 취발이를 잡아오라고 명령하는데, 취발이를 잡아온 말뚝이는 양반에게 "샌님 말씀 들으시오. 시대가 금전이면 그만인데, 하필 이놈을 잡아다 죽이면 뭣 하오. 돈이나 몇 백 냥 내라고 하여 우리끼리 노나 쓰도록 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양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이러한 양반의 태도는 우희의 부패한 관리와 일치한다.

강령탈춤 양반과장의 다음 대사에서 진한양반은 "개는 주인을 알아보고 짖지를 않으니, 군신유의요. 개는 어미와 새끼의 털색깔이 같으니, 부자유친이요. 개는 한 마리가 짖으면 여럿이 함께 짖으니, 붕우유신이요. 개는 새끼를 가진 후에는 수컷을 멀리 하니, 부부유별이요. 개는 덩치가 작은 놈은 결코 큰 놈에게 대들지 않으니, 장유유서라"라고 말한다.

진한 : 들어 봐라. 지주불폐(知主不吠)허니 군신유의(君臣有義)요, 모색상사(毛色相似)허니 부자유친(父子有親)이요, 일폐중폐(一吠衆吠)허니 붕우유신(朋友有信)이요, 잉후원부(孕後遠夫)허니 부부유별(夫婦有別)이요, 소부적대(小不敵大)허니 장유유서(長幼有序)라.

강령탈춤 양반과장

이 대사는 양반층에서 중시하던 유교적 도덕 덕목인 오륜을 개와 연관지어 한문으로 설명하면서 오륜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이처럼 유학자, 유학 경전, 삼강오륜 등 유학과 관련된 내용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 조롱하는 것은 바로 유희와 일치한다.

강령탈춤의 진한양반이 개가죽관을 쓰고 있고, 대부분의 가면극에서 양반들의 가면이 추한 모습이고, 의복이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다는 점도 바로 유희와 통하고 있다. 『성호사설』의 "다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꾸며낸 이야기와 억지웃음으로 온갖 추태를 연출한다"라는 기록과 같이, 유희에서는 놀이꾼이 유학자로 분장할 때 유학자를 조롱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치장했다. 그런데 가면극의 양반과장에 등장하는 양반들도 유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한편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에는 박남의 일화가 나오는데, 이는 그가 우희를 잘하는 연희자였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창자였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남은 유생인 척하고 한천이란 도학자를 방문하여, 『논어』 「무우」장에서 증자가 관자 5-6인, 동자(童子) 6-7인을 데리고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을 쐬며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내용에 나오는 관자와 동자의 정확한 숫자가 몇인지를 물었다. 한천이 별 특별한 뜻이 없고 단지 5-6인과 6-7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자, 박남은 관자는 30명이고 동자는 42명이 아니냐고 하면서 한천의 학문이 짐작할 만하다고 비웃고 나왔다고 한다. 즉 『논어』를 들먹이며 유자인 이재(李縡)를 비웃은 것으로서, 이는 유희이다. 후일 한천이 호남 사람을 만나 유생 박남에 대해 물으니, 그 사람의 대답이 "유생에 박남이란 이는 없고 명창(名唱)에 박남이란 놈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에서 박남은 판소리와 우희를 겸했던 인물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언어유희를 활용한 유사한 사례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다음 장면을 들 수 있다. 박남의 유희와 마찬가지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말장난 역시 정교한 언어유희로 만들어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양반 : 나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손인데 ······
선비 : 뭣이, 사대부? 나는 팔대부(八大夫)의 자손일세.
양반 : 팔대부는 또 뭐냐?
선비 :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양반 : 우리 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거든.
선비 : 아 문하시중, 그까짓 것. 우리 아버지는 바로 문상시대(門上侍大)인데.
양반 : 문상시대, 그것은 또 뭔가?
선비 : 문하(門下)보다 문상(門上)이 높고, 시중(侍中)보다 시대(侍大)가 더 크다.
양반 : 그것 참 별꼴 다 보겠네.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선비는 사대부(士大夫)의 사(士)를 숫자 사(四)로 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의 하(下)와 중(中)을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보아 문상시대(門上侍大)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유학자인 선비의 학식이 일개 말장난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상 가면극의 인용문들은 모두 양반이나 유학자를 조롱하는 내용이다. 양반의 가면은 대부분 추한 모습이고 의복도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아서,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조롱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또한 유가의 오륜과 경서, 그리고 문자 등 양반층의 문화조차도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통해 우희·유희와 가면극의 양반과장은 그 형식과 내용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판소리에서도 각 대목의 사설을 짜는 데 우희의 영향이 일정하게 작용했음을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춘향가〉에서는 이도령과 방자가 그네 뛰는 춘향의 정체를 확인하는 대목, 이도령과 방자가 춘향이 써 준 "안수해(雁隨海) 접수화(蝶隨花) 해수혈(蟹隨穴)"의 뜻을 해석하는 대목, 이도령이 춘향의 집에 가기 위해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 대목, 이도령 부친과 목낭청이 대화를 주고 받는 대목, 첫날밤 이도령과 춘향이가 수수께끼를 하여 지는 사람이 옷 벗기 내기를 하는 장면(이명선본 등), 사랑가 대목 중 글자풀이 형식의 사랑가들, 기생점고 장면에서 기생의 이름과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명선본 등), 어사가 옹상인(雍喪人) 모친의 무덤을 춘향의 무덤으로 잘못 알고 통곡하다가 옹상인 4형제에게 얻어맞는 대목(장자백 창본 등), 춘향에게 태형을 가하기에 앞서 신관사또와 허낭청이 대화를 주고받는 대목(장자백 창본 등), 어사가 농부와 함께 유음어와 동음이의어를 활용해 주고받는 대화(이명선본 등), 암행어사 출도 대목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흥보가〉에서는 놀보의 심술을 묘사하는 대목, 흥보가 박타는 대목, 놀보가 박타는 대목 등, 〈적벽가〉에서는 군사점고 대목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대학(大學)을 읽는데, "대학지도는 재명명덕하며, 재신민하며, 재춘향(在春香)이로다. 그 글도 못 읽겠다!" 주역(周易)을 읽는데, "원은 형코 정코 춘향이코 딱 댄코 좋고 하니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등왕각〉이라 남창은 옛 고을이요 홍도(洪都)는 신부(新府)로다. 옳다, 그 글 되었다."

맹자(孟子)를 읽는데, "맹자견양혜왕하신데 왕왈 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 춘향이 보시러 오시니까?"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위 대사에서 이도령은 "대학지도는 재명명덕하며, 재신민하며, 재춘향(在春香)이로다.-『대학(大學)』", "원은 형코 정코 춘향이코 딱 댄코 좋고 하니라.-『주역(周易)』", "맹자견양혜왕하신데 왕왈 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 춘향이 보시러 오시니까?-『맹자(孟子)』"처럼 경서를 패러디하여 육담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상층사회·유교사회의 숭고한 문자가 담겨 있는 경서와 유학과 관련된 내용을 조롱·풍자하고 있다.

〈흥보가〉에서는 흥보가 박 타는 대목과 놀보가 박 타는 대목이 바로 우희의 모습을 보인다. 그 중 일부만 살펴보자.

또 켜고 보니, 요령 소리 나며 상제 하나가 나오며, '어이 어이. 이보시오 벗님네야, 통자 운을 달아 박을 헤리라. 헌원(軒轅)씨 배를 무어 타고 가니 이제 불통코, 대성현(大聖賢) 칠십 제자가 육례를 능통하니 높고 높은 도통(道通)이라, 제갈량의 능통지략, 천문을 상통, 지리를 달통하기는 한나라 방통이요, 당나라 굴돌통, 글강의 순통이요, 호반(虎班)의 전통통(箭筒筒)이요, 강릉 삼척 꿀벌통, 속이 답답 흉복통, 호란의 입식통(立食桶), 도감포수 화약통, 아기 어미 젖통, 다 터진다. 놀부의 애통이야.'

경판 25장본 〈흥부전〉

조선조 당대의 유가 사회에서 가장 떠받드는 인물인 공자 같은 성인이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 같은 인물들이 꿀벌·도감포수·아기 어미와 한 반열에 서게 되고, 그들의 도(道)나 술(術)이 화약이나 젖과 어울려 비속화되고 있다. 대성현 공자의 도통(道通)이 마침내 유희(遊戱)의 대상이 되고, 꿀벌통과 아기 어미 젖통과 같은 차원으로 격하되기에 이른다. 또한 유가 사회에서 가장 중시하는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역시 유희의 대상으로 삼아 격하시키고 있다. 상제의 곡(哭) 소리인 '어이, 어이'를 여기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인접 국가 사례

중국의 선진(先秦) 시기에는 연희자를 우(優)와 령(伶)으로 구분했다. 창우(倡優)는 가무를 위주로 한 전문 예인의 칭호였고, 배우(俳優)는 골계와 조소(調笑)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예인의 호칭이었다. 령(伶)은 악곡을 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漢) 이후부터 송(宋) 전까지 우와 령을 '우령'으로 합쳐 부르면서, 우령은 가무·음악·백희·골계를 직업으로 하는 연희자를 총칭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골계희는 '배우'에 의해 연희되었으므로, 흔히 골계희를 배우희, 우희라고 부른다. 골계희를 시사희(時事戱)라고도 하는데, 이는 골계희가 시사풍자적인 내용을 많이 연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골계희에는 흉내 내기 연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우의 출현은 매우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국어(國語)』 「정어(鄭語)」에 의하면, 이미 기원 전 774년 서주(西周) 유왕(幽王)의 궁정에 주유(난쟁이)와 척시(꼽추)가 배우로 있었다고 한다. 배우는 골계를 주요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우스꽝스러운 난쟁이와 기형자(畸形者)가 많았다.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등장하는 우전(優旃)도 바로 진(秦)나라의 난쟁이 배우였다. 배우는 국왕과 귀족을 위해 우스꽝스런 언행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주요 직무였지만, 풍간(諷諫)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배우가 비록 무슨 말을 하더라도 죄를 받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사기』 「골계열전」에 보이는 우맹의 일화이다. 초나라에 손숙오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그는 장왕(莊王)을 패자로 만든 초나라의 명재상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 집이 무척 가난해서 자식들은 땔나무를 해서 연명해야만 했다. 당시 우맹이라는 배우가 이를 알고서 연기를 해서 장왕의 잘못을 일깨워 바로잡고자 했다. 그는 손숙오의 옷을 입고, 손숙오의 행동과 아주 흡사하도록 일 년 동안 연습했다. 어느 날, 그는 손숙오의 옷을 입고 장왕 앞으로 갔다. 장왕은 보자마자 깜짝 놀라 손숙오가 살아온 줄 알고, 그에게 계속 재상이 되어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우맹이 "좀 생각해 보고요. 돌아가 처자식과 의논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돌아오자 장왕이 또 물었다. "어떻게 됐소?" 우맹은 "마누라가 하지 말라고 하던데요"라고 대답했다. 장왕이 물었다. "왜?" 그는 "보십시오. 손숙오는 초나라를 위해서 평생을 바쳐 초나라를 부강케 했는데, 죽은 뒤에는 자식조차 먹여 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못하게 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우맹의 말을 듣고 깨달은 장왕은 손숙오의 아들에게 땅을 분봉해 주어 편히 살도록 했다.

춘추시대에 배우가 연행했던 풍자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참군희(參軍戱)라는 놀이로 계승된다. 참군희는 남북조시대에 발생해서 당대에 크게 유행했다. 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후조(後趙) 고조(高祖) 때 석륵(石勒)의 참군 주연(周延)에 대한 기사이다. 석륵에게 주연이라는 참군이 있었는데, 관도령(館陶令)을 지낼 때 관의 비단 수백 필을 착복해서 하옥되었다가 여러 번 논의 끝에 풀려났다. 이후 석륵은 잔치 때마다 배우들을 시켜 이 부정한 관리를 풍자하고 놀렸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명의 배우로 하여금 두건을 쓰고 누런 비단 홑옷을 걸치도록 분장을 시켰다. 다른 배우가 묻기를, "너는 무슨 벼슬을 했는데 우리들 속에 들어왔느냐?" 하면, "나는 원래 관도령이었습니다"라 하고, 또 자신의 옷을 흔들면서 "바로 이것을 착복했기에 당신들 속에 들어왔소"라고 대답해서 우스갯거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두 명의 배우가 연기를 하게 되었는데, 한 명의 연기자는 풍자를 받는 대상으로 분장했다고 한다. 이들이 분장하는 인물은 작품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들을 가리키는 명칭은 극중 인물의 이름보다도 역할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어서, 풍자되는 대상을 '참군(參軍)'이라 하고, 풍자하는 연기자를 '창골(蒼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명의 연기자가 출현한 것은 우희의 진일보로서, 통상 이를 '참군희'라고 부른다. 당대(唐代)에는 참군희가 매우 성행했다. 당대 전반기 참군희에 관한 기록에는 여전히 두 명의 연기자밖에 없다. 송 잡극은 기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골계희를 계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훗날 완숙한 잡극(雜劇)과 전기(傳奇) 등의 극종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삽과타원(揷科打諢)', 즉 '우스꽝스런 동작과 말'도 바로 이 골계희의 영향인 것이다.

한편 당송대에는 유희도 있었다. 유희는 선비를 풍자하고 유가를 희롱하는 내용으로, 이를 위해 유학의 경전도 자주 인용되었다. 『구당서(舊唐書)』 「문종기(文宗紀)」에는 잡희를 하는 연희자가 공자를 희롱했는데, 임금이 이를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여 연희자를 쫓아내는 내용이 있다. 송(宋) 황감(黃鑑)의 『양문공담원(楊文公談苑)』에서는 왕의 연회에서 공자를 소재로 삼아 연희를 했는데, 이것이 왕의 화를 사서 연희가 폐지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송대 『애일재총초(愛日齋叢鈔)』에서도 역시 공자로 연희를 만든 것을 비판하며 연희를 금할 것을 청하는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당대에서부터 송대에까지 유희가 연회에서 널리 연행되었으나, 일부 지배 계층에서는 이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奈良時代, 718-798)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산악이 사루가쿠(猿樂)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문적 연희자들에 의해 여러 행사에서 연행되었다. 일본의 산가쿠(散樂)는 기가쿠(伎樂), 부가쿠(舞樂)에 이어 혹은 병행해서 동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전래된 제3의 악무(樂舞) 예능이다. 부가쿠가 귀족 계급에서 귀족 계급으로 전래된 음악 무용이었던 데 반해, 대중적인 예능이었던 산가쿠는 일본 고유의 민속 예능과 재빨리 융합해 일본 연극의 토양이 되고 지하수가 되어 후세의 제반 연극과 예능의 기초를 이루었다. 노가쿠(能樂), 노교겐(能狂言),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 가부키(歌舞伎) 그 어느 것도 산가쿠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산가쿠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일본에서 후일 산가쿠의 산(散) 대신 사루(猿)를 써서 사루가쿠(猿樂)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산가쿠의 대표적인 예능은 우스꽝스럽고 비속한 흉내 내기였는데, 원숭이가 흉내를 내어 사람을 웃기는 것과 유사하여 산(散) 대신 사루(猿)를 쓰게 되었다. 또한 '散樂'도 그 내용으로 보아 히라가나로 쓸 때는 '사루가쿠(さるがく)'라고 쓰던 것을, 같은 음으로 흉내를 잘 내는 동물인 '사루(猿)'를 전용해 '猿樂'라고 쓰게 된 것이다.

일본 산악의 내용은 각 종목의 성격에 따라 곡예적인 것과 가무연극적인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중 가무연극적인 것이 바로 우희와 관련이 있다. 가무연극적인 것이란 음악과 춤을 볼거리로 하거나, 언어나 몸동작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연극적인 것을 말한다. 연극적인 것은 특히 웃음을 자아내는 흉내 내기나 골계희가 중심 종목이다. 헤이안(平安, 794-1192) 중기의 문인 후지와라 아키히라(藤原明衡)의 『신원악기(新猿樂記)』를 통해, 교토의 거리에서 연행된 사루가쿠를 살펴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악귀를 쫓는 주사(咒師)의 놀이, 난쟁이(侏儒)의 춤,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田樂), 인형극(傀儡子), 당나라에서 온 재주(唐術), 요술(品玉), 윤고(輪鼓), 방울을 놀리는 농환(八玉), 혼자 하는 씨름(獨相撲), 혼자 하는 쌍육(獨雙六), 뼈가 없는 듯이 흐물흐물하게 추는 춤(無骨), 뼈만 있는 듯이 뻣뻣하게 추는 춤(有骨).

점잖은 촌장 엔토우(延動)의 거드름 피우는 걸음걸이, 새우 잡는 사람처럼 능한 발놀림, 히카미(氷上)에 사는 절지기가 바지춤을 잡아 올리면서 달아나는 모습, 그 모습을 본 야마시로(山城)의 노파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웃는 모습, 비파법사(琵琶法師)의 이야기조의 노래(物語), 센슈만자이(千秋萬歲, 재담을 하는 떠돌이 연희자)가 부르는 축하 노래, 불룩 내민 배를 두드리지만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우스꽝스러운 모습, 목을 앞으로 쭉 뻗으며 버마재비 흉내 내기, 신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가사(袈裟)를 시주하라고 하는 복광(福廣)스님을 흉내 내기, 묘고(妙高)의 여승이 아기에게 덮어줄 강보를 구걸하는 모습 흉내 내기, 얼굴을 감추고 있어야 할 내시가 얼굴을 드러내놓아 웃음거리가 된 모습, 서두르다가 피리를 두고 와서 피리대신 휘파람을 부는 피리쟁이, 점잖게 해야 할 노악사의 우스꽝스러운 춤, 거룩한 제사에 임하는 무녀가 남자를 유혹하기라도 하는 듯이 짙은 화장을 한 모습, 입이 거친 교토의 젊은이들의 말장난, 처음 상경한 시골 사람의 어리둥절한 모습 흉내 내기.

뿐만 아니라 산악의 박자에 맞추어 춤추는 남자들의 흥겨움, 우두머리 연희자의 익숙한 손놀림, 이 모두는 산악이라는 예능. 주고받는 우스갯소리, 너무나도 우스워서 창자가 끊어지고 턱이 빠져버리지 않을 사람이 없구나.

『신원악기』

이 글에는 주사(咒師)를 비롯하여 '처음 상경한 시골 사람의 어리둥절한 모습 흉내 내기'까지 모두 28종목의 산악이 열거되어 있다. 이 종목은 크게 곡예적인 종목과 골계극적인 종목의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점잖은 촌장(村長)이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 흉내 내기나 갯가에서 빠르고 능숙한 동작으로 새우를 잡는 전문 새우잡이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는 종목부터는 모두 극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는 연희로서 바로 우희이다.

관객에게 긴장감과 웃음을 제공하던 산악 연희자들은 사회적 수요의 변천에 따라 차츰 쇠퇴하게 된다. 산악 가운데 우스꽝스러운 짓,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예능, 흉내 내기 예능 등은 확실한 줄거리를 가진 골계극으로 발전해 갔다. 골계극은 헤이안시대의 다음 시대인 가마쿠라(鎌倉, 1192-1333)시대에는 악극적인 요소가 첨가되고, 이어서 무로마치(室町, 1336-1573)시대에는 대사극에 가무극이 첨가된 고전연극으로 발전하여 갔다. 가마쿠라시대가 되면 종래 골계를 중심으로 했던 사루가쿠는 골계를 떠나 가무와 흉내 내기를 중심으로 하는 노(能)로 비약하고, 헤이안시대의 원래 사루가쿠는 교겐(狂言)이라는 한층 희극적인 공연물이 되었다. 남북조(1336-1392)시대에는 각 지역에 사루가쿠 놀이패가 생기게 된다. 이 중 야마토(大和) 사루가쿠의 유자키좌(結崎座)에서는 간아미(觀阿彌, 1333-1384)라고 하는 기예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 중심적인 존재였다. 간아미의 아들 제아미(世阿彌, 1361-1442)는 아버지를 이어 노를 대성했다. 산악이 변천되어 새로운 연희이자 본격적인 고전연극이라 할 수 있는 노와 교겐이 성립되자, 이전의 산악이라는 장르 자체는 독립적인 성격을 잃고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의의

우희는 가면극의 흉내 내기와 풍자하기, 골계적 재담에 영향을 주었으며, 판소리의 성립 및 재담과 만담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조선시대 나례도감에 동원되던 반인(泮人)과 무부(巫夫)들이 우희를 하고 있었고, 본산대놀이와 판소리가 성립될 때 그 연희 내용에 우희를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면극과 판소리의 골계적인 대목들은 우희의 형태로서 재담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런 재담들은 개화기 이후의 재담과 만담 등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따라서 이러한 우희의 전통은 구한말의 유명한 재담꾼인 박춘재의 재담, 일제시대 신불출의 만담, 1960년대까지도 성행했던 장소팔·고춘자 등의 만담과도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재석은 1930년대 유성기 음반에 "넌센스·희·스케취·촌극·만담" 등으로 표기된 연희들을 촌극이라고 부르면서 그 내용을 소개했는데, 가면극의 골계적 대목들과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사진실은 20세기 초 박춘재의 재담을 분석한 후, 그의 재담은 우리의 전통적 재담을 이어받고 있으며, 나아가 재담은 만담으로 전승된 축을 따라 방송 코미디물의 토대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중국에서는 우희가 당나라 때 참군희로 발전하고, 송잡극은 바로 이러한 골계희를 계승한 것인데, 이후 완숙한 연극에서 흔히 나타나는 우스꽝스러운 동작과 말도 바로 우희의 영향이다. 그러므로 우희가 중국 전통 연극의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나타난다. 일본에서도 우희 즉 사루가쿠는 전통연극인 노가쿠, 노교겐, 닌죠교루리, 가부키 등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유입된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불리던 연희들의 한 종목인 우희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희로 계승되고, 이 전통 속에서 우희가 가면극, 판소리, 재담, 만담 등에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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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고춘자(高春子), 배우희(俳優戱), 배희(俳戱), 시사지사(時事之事), 장소팔(張笑八), 창우희(倡優戲), 흉내내기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