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극

인형극

[ 人形劇 ]

정의 및 이칭

인형극(人形劇)은 인형을 주된 표현 도구로 삼아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공연예술이다. 인형극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인형연희‚ 인형연행‚ 인형놀이‚ 인형놀음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각각의 명칭에 따라 포함되는 영역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흔히 꼭두각시놀음‚ 만석중놀이‚ 발탈 등을 전통인형극의 범주 속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이것들이 위의 정의에 꼭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발탈의 경우에는 인형과 인간배우가 함께 등장한다. 오히려 인간배우가 더 많이 등장한다. 만석중놀이 역시 입체적인 인형들이 직접 눈앞에서 연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막 뒤의 그림자를 통해 평면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인형극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한국의 전통인형극은 사실상 꼭두각시놀음 계통 이외에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인형극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꼭두각시놀이‚ 꼭두각시놀음‚ 꼭두극, 덜미, 박첨지놀이 등의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현재 꼭두각시놀음 계통의 인형극은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 서산박첨지놀이, 장연꼭두각시극 등이 있다.

유래 및 역사

인형극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공연예술로서의 인형극뿐만 아니라, 인형을 주된 표현 도구로 삼아 연행하는 여러 공연예술을 고려해야 한다. 인형극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근 장르와 유사 연행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인형극은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그 기반이 마련되고 제의적 인형극과 오락적 인형극이 존재했다. 상고시대에서 삼국 시대 그리고 남북국 시대로 이어지는 동안 인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인형이 신격화되어 사당에 모셔졌는가 하면, 상·장례에서 망자를 의미하는 인형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 망자가 저승에서 영화와 행복을 누리도록 망자의 봉사자, 지킴이 등의 의미를 갖고 함께 묻히기도 했다. 때로는 전쟁에서 적군을 속이기 위한 위장용 병사로, 또는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술책의 하나로 인형이 이용되기도 했다. 인형 이용의 상황이 제의적 성격과 전쟁적 성격이 복합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인형 이용의 양상은 인형극을 위한 기반이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인형극 역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 이전에 인형극이 연행되었음을 추론하게 하는 사례들은 많다. 신라에서는 탈해왕의 뼈로 만든 인형을 신격인 동악신(東岳神)으로 여겨 제사를 드렸고, 고구려에서는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부여신(扶餘神)과 고등신(高登神)이라 칭하며 국중대회(國中大會)나 제천의식(祭天儀式) 때 제사를 드린 상황이 포착된다. 신격화된 인형을 대상으로 제사를 올린 사람들은, 비록 인형들이 움직임이 없고 말도 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기원이나 움직임에 반응하여 그 초월적 역량을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 하에 이루어지는 제의적 인형극은 현재에도 찾아볼 수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별신굿이 그 사례가 된다. 별신굿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허수아비 한 쌍에게 절을 하고 기원을 하며 제사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한 쌍의 허수아비를 토지신 할아버지와 토지신 할머니라 여기며 마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두 허수아비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고 각 집안의 평안을 기원한다.

한 쌍의 허수아비에게 제사를 올리는 방촌 마을 사람들

한 쌍의 허수아비에게 제사를 올리는 방촌 마을 사람들 방촌마을 별신굿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신격화된 인형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제의적 인형극뿐만 아니라, 오락적 인형극 역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여러 문헌에서, 즐거운 잔치에서 벌어지는 고구려 인형극의 존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점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진상품 중에 하나로 바쳐졌다는 점은 고구려 인형극의 독특함이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름의 독특함과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음은 인형극이 성행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인형극은 이전 시기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제의적 인형극에서는 모셔지는 신격이 아닌 나쁜 기운을 한 몸에 품은 희생물의 의미를 가진 인형이 등장한다. 궁중 나례에서의 황소 인형(黃土牛)이 이에 해당한다. 황소 인형은 나례에서 말을 하거나 구체적인 움직임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악귀 구축이라는 나례 참여자들의 기원과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받고 쫓기어 가는 대상물로 등장한다. 나쁜 기운을 온 몸에 품는 것은 염매(魘魅)에 쓰인 인형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고종 때 나타난 염매라는 제의적 인형극에서 인형은 손이 묶이고 이마에 못이 박힌 채로 땅에 묻히거나 우물에 넣어진다. 여기서의 인형은 해를 입기를 바라는 저주의 대상이다. 팔관회에서 벌어진 신숭겸과 김낙의 추모 행사에서 두 공신의 우상(偶像)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말을 타고 뜰을 돌아다닌다. 이는 이전 시기 자료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동적 인형(動的人形)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적 인형이 등장하는 제의적 인형극의 전통은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요사귀 인형과 몽달귀 인형이 등장하는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 마을 별신제, 대장군 인형이 등장하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 홍가 마을 장군제 등이 그 예가 된다.

대장군 인형(축귀대장군)

대장군 인형(축귀대장군) 홍가 마을 장군제

고려시대 오락적 인형극 역시 이전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면모들이 나타난다. 우선 민간에서의 연행이 포착된다. 혜민국 남쪽 거리에서 벌어진 인형극 사례는 민간까지 확장된 인형극 향유층의 존재를 말해준다. 인형극을 대상으로 한 이규보의 〈부답병서(復答幷序)〉와 〈관농환유작(觀弄幻有作)〉에서 보이는 작자의 태도 역시 고려시대 인형극이 활성화되었다는 추론의 근거가 된다. 두 시에서 인형 조종사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인형조종술의 뛰어남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의 존재, 그리고 단청을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거두어 버리는 내용 역시 고려시대 오락적 인형극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움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전 시기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양상의 인형극 유형이 포착되는 동시에 이전 시기 비해 한층 발전된 면모들이 인형극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제의적 인형극은 다섯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 이전 시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격화된 인형에게 어떤 기원과 일정한 행동을 하고 나아가 인형을 놀리기도 하는 유형이다. 목멱산 사우(祠宇)에 모셔져 섬겨지는 목우인(木偶人)의 존재는 적어도 고구려 때부터 비롯된 제의적 인형극의 역사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신상(神像)을 메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고성(固城) 지방의 성황사(城隍祠) 관련 기록이나, 입춘날 목우(木牛)에게 제사를 지낸 후 끌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김해·함경도·제주도의 사례들은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특징을 보여준다.

천왕봉에서 김종직이 경험한 지리산 산신 성모천왕(聖母天王) 앞에서 국사신(國師神)을 놀리는 내용의 제의적 인형극은, 고려시대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낙 우상을 놀렸던 제의적 인형극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신격화된 인형을 모시거나 놀리는 제의적 인형극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전통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백월산 정난사 신당, 경상북도 안동시 수동 마을 구신당,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도둔리 각시당 등에서 신격화된 인형을 모시고 섬기는 제의적 인형극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신격화된 인형을 놀리는 동적인 제의적 인형극의 전통 역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홍가 마을 장군제에서는 마을의 재앙을 몰아내는 장군 인형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닌다. 장군애비가 장군을 매고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군 인형을 대접하고 각 가정과 마을의 재앙을 몰아내는 연행을 벌인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두 번째 유형은 기우제와 관련이 있다. 비를 불러오는 존재로 인식된 용 인형을 만들어 경건하게 기원을 하거나 아니면 위협과 매질을 가하는 것이다. 비를 불어오는 초자연적 존재인 용에게 경건한 기원을 하는 것은 이전 시기 신격화된 인형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는 양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초자연적 존재인 용에게 위협적인 언사와 직접적인 매질을 가하며 무례하게 욕보이는 양상은 이전 시기에는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장군애비의 등에 업혀 각 가정과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는 장군 인형(축귀대장군)의 모습

장군애비의 등에 업혀 각 가정과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는 장군 인형(축귀대장군)의 모습 홍가 마을 장군제

인형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적 행동을 보이는 제의적 연행 방식은, 세 번째 유형인 제웅치기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 제웅치기에서 연행자는 위협의 수준을 훨씬 넘어 제웅의 몸을 파헤치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기까지 한다. 제웅은 고려시대 나례에서 등장했던 황토우(黃土牛)와 유사하다. 악귀구축(惡鬼驅逐)이라는 나례 참여자의 기원을 한 몸에 받고 희생양으로 사용된 황토우와 같이, 제웅치기의 제웅은 인간의 액운을 대신하여 품은 희생양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제웅에 대한 연행자들의 인식은 황토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황토우는 그야말로 희생양이어서 약간의 연민의 감정이 남아 있는 반면, 제웅은 인간의 액운을 한 몸에 품고 없어져야 할 존재일 뿐이다. 인형이 희생양 또는 재앙 그 자체로 인식되어 위협과 폭행을 당하는 제의적 인형극의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제주도 칠성새남굿, 제주도 불찍굿, 오티 마을 별신제, 아산 우환굿, 충청도 미친굿, 충청도 개비잡이, 경기도 도당굿 등이 그 사례가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형들은 하나같이 재앙의 원흉 그 자체 혹은 대수대명(代數代命)으로 인식되어 극 속에서 위협과 폭행을 당하고 있다.

재앙의 원흉으로 인식되어 쫓겨나는 몽달귀 인형과 요사귀 인형

재앙의 원흉으로 인식되어 쫓겨나는 몽달귀 인형과 요사귀 인형 오티 마을 별신제

인형에게 위협적 언사와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연행 방식은 네 번째 유형인 염매(厭魅)에서도 나타난다. 인형에게 가하는 연행자들의 위협과 폭력은 제웅치기에서보다 훨씬 강력해지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염매의 사례들을 보면, 해를 입거나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저주의 대상으로 의미화된 인형들이 저주의 말과 함께 땅에 묻히거나 공중에 목이 매달리고 있다. 심지어 사지가 절단되어 그 형체가 훼손되거나 파손되기까지 한다. 제의적 인형극의 부정적 면모와 더불어 연행자들의 일방적인 저주와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인형의 존재가 염매 사례들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의 다섯 번째 유형은 궁중내농작(宮中內農作)이다. 궁중내농작은 진열이라는 연행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인형의 진열이라는 방식을 통해 궁중내농작에서 표현하는 것은 『시경(詩經)』의 「빈풍칠월(豳風七月)」 편 내용이다. 일 년 농사를 미리 예견하고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인형의 진열을 통해 표현한다. 『시경』이라는 문자 텍스트를 통하여, 또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라는 회화 텍스트를 통하여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진열이라는 상황 연출만 가지고도 그 전하는 바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조선시대 제의적 인형극 못지않게 오락적 인형극 역시 다양함을 드러낸다. 한발 더 나아가 그 다양함이 인형극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궁중과 민간을 막론한 인형극의 확산과 성행, 개성적 외양을 한 다양한 모습의 인형 등장, 다양한 인형 형태의 존재와 연행술의 발전, 유언 인형(有言人形)의 본격적인 등장과 극적 구조를 갖춘 인형극의 등장, 산대잡상놀이의 성행 등이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을 특징짓는다.

성현(成俔, 1439-1504)의 〈관나시(觀儺詩)〉와 〈관괴뢰잡희시(觀傀儡雜戱詩)〉는 조선 전기 궁중 및 상층에서 벌어진 오락적 인형극의 양상과 수준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반면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괴뢰붕(傀儡棚)〉은 조선 전기 민간에서 벌어진 오락적 인형극의 양상과 수준을 보여준다. 성현과 박승임의 시들은 조선 전기에 궁중과 민간을 막론하고 인형극이 확산되고 성행했음을 추론케 하는 자료들이다. 성현의 시 두 편을 통해 포장무대로 나타나는 궁중 오락적 인형극의 무대, 줄을 통한 인형 조종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박승임의 〈괴뢰붕〉은 민간 인형 조종사의 뛰어난 조종술과 말을 하는 유언 인형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조선 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다양하고도 발전된 모습은 나식(羅植, 1498-1546)의 〈괴뢰부(傀儡賦)〉에서 절정을 이룬다. 〈괴뢰부〉에는 연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연행이 끝난 후 마무리하는 상황까지 인형극의 제반 양상 거의 모두가 묘사되어 있다. 개성적인 외양의 등장 인형들과 세상살이의 제반 문제를 두루 다루는 연행 내용, 말을 하는 유언 인형에 의한 연행 전개 등이 〈괴뢰부〉에 나타나 있다. 막대 인형적 조종 방식, 손 인형적 조종 방식, 주선 인형적 조종 방식, 줄 인형적 조종 방식이 두루 이용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는 사항이다.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흥성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 영조 때 김기석(金箕錫)의 상소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을 통해 민간 오락적 인형극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의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는 조선 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채로운 모습의 개성적 인형들, 다양한 연행 내용, 진전된 연행 방식 등은 조선 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 못지않다. 등장 인형들의 개성적 모습과 이들에 의해 전개되는 연행 내용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인형 연행자들의 다양한 연행 방식은 현전하는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과 유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목 베기와 신체 분할과 같이 한 발 더 나아간 연행술을 보이기도 한다. 민간 오락적 인형극이 조선 후기까지 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음을 〈남성관희자〉는 보여준다.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양상은 산대잡상놀이의 성행이다. 인형 연행자의 인형 조종과 목소리 연기가 중심이 되는 인형극과는 다른 차원의 인형극이 산대잡상놀이이다. 정교하게 꾸며진 인형들이 이미 널리 공유된 전형적 상황을 표현하는 볼거리 중심의 연행이다. 산대잡상놀이는 세밀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의 진열을 통해 전형적 상황의 전형적 장면을 표현한다. 연산군 때의 궁중에서의 산대잡상놀이, 『봉사도(奉使圖)』에 나타난 산대잡상놀이, 『기완별록(奇玩別錄)』의 〈금강산놀이〉, 〈팔선녀놀이〉, 〈신선놀이〉, 〈상산사호놀이〉 등이 확인된 산대잡상놀이들이다. 산대잡상놀이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일부 부분적 움직임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움직임이 없는 정적 인형(靜的人形)이다.

감로탱에 표현된 조선 후기 인형극 무대

감로탱에 표현된 조선 후기 인형극 무대

그동안 한국 인형극의 기원에 대해 외래기원설과 자생설, 그리고 양자의 절충설 등이 주장되었다. 연구 초창기에는 꼭두각시놀음 계통 인형극의 외래 기원설이 주장되었다. 한국의 인형극은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외래기원설의 근거로, '중국‚ 한국‚ 일본의 인형극이 무대구조와 연출방식‚ 인형조종법 등에서 유사하다'‚ '인형극의 주역들이 모두 해학·풍자·희극적 성격의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형의 형태가 유사하여‚ 원시 종교나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유랑예인집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등이 제시되었다.

이와는 달리 인형극의 자생설이 주장되기도 했다. 우리의 인형극이 삼국 시대 또는 그 이전의 목우(木偶) 인형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의 악곡괴뢰(樂曲傀儡)‚ 고려의 인형놀이와 만석중놀이‚ 조선시대의 꼭두각시놀음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주장이다.

최근에는 우리의 자생적 기반에 외래적 요소의 영향이 결합하여 수세기 동안 독자적인 변화와 발전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절충설이 제안되었다. 고대의 각시놀음과 나무인형‚ 6세기 이후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된 토우와 토용‚ 상여의 장신구인 목우 등의 존재에서 드러나듯, 우리나라에는 이미 꼭두각시놀이의 자생적 기반이 있었고‚ 거기에 외래적 요소의 영향이 결합하여 수세기에 걸친 변화와 발전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외래기원설‚ 자생설‚ 절충설 중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의 자취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꼭두각시놀음과 연행방식이 유사한 인형극의 자취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연희 내용이 꼭두각시놀음과 유사한 인형극의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의 〈괴뢰붕〉‚ 〈괴뢰부〉‚ 〈남성관희자〉 등의 자료들에 나타난 인형극은 오락적 문맥에서 공연된다는 점과 목소리 연기와 조종이라는 연행방식만 유사하고, 그 내용에서는 현전하는 꼭두각시놀음 과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인형극 자료들은 현전하는 꼭두각시놀음과 다른 계통인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꼭두각시놀음 계통 인형극과는 다른 인형극이 과거에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등장인물‚ 연희 내용‚ 연희자 등을 고려할 때‚ 한국의 인형극은 적어도 두 계통 이상으로 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성

현전하는 꼭두각시놀음 계통의 인형극은 크게 (1) 남사당 꼭두각시놀음, (2) 서산박첨지놀이, (3) 장연꼭두각시극으로 나눌 수 있다.

(1) 남사당 꼭두각시놀음은 예인집단인 남사당패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인형극으로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에 속해 있다. 꼭두각시놀음은 고정된 대본이 없이 전승되어 온 인형극이기 때문에 연행시기, 연행장소, 연희자 등에 따라 변화가 심하다. 그래서 기존의 채록본들을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과장구성과 등장인물 및 대사 등에서 많은 차이가 발견된다. 현재 남사당패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꼭두각시놀음은 심우성이 채록한 보존회본을 바탕으로 공연이 이루어진다. 보존회본은 심우성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인형연행자들의 구술을 받아 채록한 것으로 비교적 충실한 채록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존회본은 크게 박첨지마당과 평안감사마당으로 나뉜다. 그리고 각각의 마당은 다시 3-4개의 거리로 나뉜다. 먼저 박첨지마당은 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첨지유람거리는 박첨지가 등장해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꼭두패가 논다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며 익살스러운 재담을 늘어놓고 유람가를 부르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피조리거리는 박첨지의 딸과 며느리가 등장하여 뒷절 상좌중들과 어울려 놀다가 홍동지에게 쫓겨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상좌중들의 행위와 이시미거리에 나오는 묵대사를 통해서 종교인의 관념적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꼭두각시거리는 오랫동안 헤어져 지냈던 박첨지와 그의 처 꼭두각시가 첩인 덜머리집 때문에 다툼을 벌이고 헤어지게 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부당한 횡포를 드러내 비판하고 있다. 이시미거리는 새를 쫓으러 나왔던 여러 인물들이 차례로 이시미에게 잡아먹히다가, 홍동지가 이시미를 때려잡는 내용이다.

평안감사마당은 매사냥거리상여거리건사거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사냥거리는 평안감사의 매사냥과 그 전후의 길을 닦고 꿩을 파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상여거리는 평안감사의 급작스런 죽음과 이에 따른 장례식 광경을 보여준다. 장례에 어울리지 않는 상주의 경박한 행동과 벌거벗은 채로 상여를 밀고 가는 홍동지의 파격적 모습이 이 대목에서 나타난다. 평안감사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벼슬아치의 신분적 특권을 비판하고 있다. 매사냥을 통해서 백성을 괴롭히는 평안감사‚ 이에 대해 일탈적·파격적으로 대응하는 홍동지‚ 그리고 평안감사의 희화화된 죽음과 장례식 등이 이 주제의 맥락 속에 있다. 건사거리에서는 상좌중들이 절을 짓고 허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면서 그 수입으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그러므로 건사거리에서 절을 지어 그동안 진행되어온 갈등을 극적으로 승화하여 화해를 이루고, 시주를 해준 관중들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주었던 것이다.

홍동지가 이시미를 때려잡는 장면

홍동지가 이시미를 때려잡는 장면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마당. 이시미거리

상여거리의 한 장면

상여거리의 한 장면 꼭두각시놀음. 평안감사마당

(2) 서산박첨지놀이는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4리에서 전승되는 인형극으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서산박첨지놀이 채록본은 김동익 채록본과 허용호 채록본이 있다. 김동익 채록본은 서산박첨지놀이의 형성자인 주연산의 구술을 받아 연희자인 김동익이 채록한 것이다. 허용호 채록본은 1998년 11월 28일 서산시 음암면 탑곡4리 마을회관 안에서 벌어진 연행을 채록한 것이다. 허용호 채록본은 연행의 전 과정을 비교적 세밀하게 채록했다는 특징이 있다. 허용호 채록본을 대상으로 서산박첨지놀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면 전환의 지표로 기능하는 악사들의 '떼루 떼루아 떼루야'라는 구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서산박첨지놀이는 20장면으로 나눌 수 있다. 20장면으로 이루어진 서산박첨지놀이의 내용은 다시 크게 세 과장으로 나눌 수 있다. 박첨지유람과 가족갈등마당, 평안감사매사냥과 장례마당‚ 절짓기와 소경 눈뜨는 마당이 그것이다. 이렇게 3마당 20장면으로 이루어진 서산박첨지놀이의 내용은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남과 여‚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종교인과 세속인 등으로 정리되는 각 마당 속 등장인물간의 역학 관계 역시 꼭두각시놀음과 서산박첨지놀이는 유사하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연희 내용에서는 서산박첨지놀이만의 특징도 발견된다.

박첨지유람과 가족갈등마당은 집안을 돌보지 않고 축첩을 일삼는 박첨지에 대한 다른 가족들의 비판이 주된 내용이다. 큰마누라는 물론이고 처남, 동생 등이 박첨지의 무책임과 축첩을 비판하고 웃음거리로 만든다.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에서처럼 남성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큰마누라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박첨지 가족 모두가 박첨지의 횡포를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는 축첩을 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며, 집안이 어지럽게 된다는 마을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평안감사매사냥과 장례마당은 벼슬아치와 일반 서민의 갈등을 통해서 나타나는 신분적 특권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꼭두각시놀음에 비해 홍동지의 역할이 많이 축소되어‚ 상층계급에 대한 풍자의 정도가 감소되기는 하지만‚ 하층민들에게 피해만 주는 평안감사의 행태에 대한 비판의식은 그대로 살아 있다.

절짓기와 소경 눈뜨는 마당은 서산박첨지놀이의 내용이 갖는 독특함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대목이다. 지배층인 평안감사의 횡포로 시력을 잃게 된 소경이 불공을 통하여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 전개는‚ 종교인과 세속인의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불교적 해원이라는 주제를 만들어낸다. 이는 종교인과 세속인의 갈등을 통해서 관념적 허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꼭두각시놀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서산박첨지놀이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기보다는 불교적 기적 혹은 불교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3) 장연꼭두각시극은 황해도 장연지방에 전승되던 인형극이다. 이 인형극은 모두 열 개의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과장의 제목이 따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각 과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과장은 박첨지 유람과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과장에서는 박첨지의 두 딸‚ 상좌중‚ 상전중‚ 목랑청‚ 현묵대사 등이 등장한다. 제3과장은 삼천갑자와 박첨지가 등장해서 나이 자랑을 하는 내용이다. 제4과장은 장안활자와 목랑청이 서로 싸운 후에 춤을 추는 내용이다. 제5과장은 평안감사가 꿩 사냥을 하는 내용이다. 제6과장은 박첨지의 딸과 장안활자가 도라지타령을 부르면서 춤을 추는 내용이다. 제7과장은 산몽혜 곧, 이시미가 사람들을 잡아먹고 박첨지까지 잡아먹힐 뻔하다가 박첨지 아들에게 구출되는 내용이다. 산몽혜는 박첨지 아들에게 잡혀 껍질이 벗겨진다. 제8과장은 꿩의 모가지를 먹다가 죽은 평안감사의 장례와 관련된 내용이다. 제9과장은 박첨지의 식구가 모두 나와 춤을 추는 내용이다. 제10과장은 상좌중 둘이 나와서 절을 짓고 허무는 내용이다.

장연꼭두각시극은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과 그 내용이 유사하면서도 다른 대목이 많다. 제1과장은 박첨지유람거리와 유사하다. 제2과장은 피조리거리와 유사한데, 장연꼭두각시극의 내용이 더 확장되어 있고 상세하다. 제3과장과 제4과장은 꼭두각시놀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다. 제5과장은 매사냥거리와 유사하다. 제6과장은 꼭두각시놀음에는 없는 대목이다. 제7과장은 이시미거리와 유사하다. 그런데 홍동지가 아니라 박첨지 아들이 산몽혜를 때려 잡는다는 설정이 다르다. 제8과장은 상여거리와 유사하다. 제9과장은 꼭두각시놀음의 맨 마지막 장면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일단 없는 대목으로 보인다. 제10과장은 건사거리와 유사하다.

박첨지유람과 가족갈등마당에서 박첨지 가족이 다투는 장면

박첨지유람과 가족갈등마당에서 박첨지 가족이 다투는 장면 서산박첨지놀이

평양감사매사냥과 장례마당에서 평양감사가 매사냥을 하는 장면

평양감사매사냥과 장례마당에서 평양감사가 매사냥을 하는 장면 서산박첨지놀이

절짓기와 소경 눈뜨는 마당에서 소경이 눈뜨는 장면

절짓기와 소경 눈뜨는 마당에서 소경이 눈뜨는 장면 서산박첨지놀이

첫 번째 차이점은 우선 꼭두각시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꼭두각시놀음의 꼭두각시거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꼭두각시가 없으므로 자연히 덜머리집과 박첨지까지 포함되어 전개되는 부부 혹은 남녀 간의 갈등 전개가 시작되지 않는다. 두 번째 차이점은 홍동지 역할을 박첨지 아들이 대신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홍동지에 비해 그 역할이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꼭두각시놀음에서 홍동지가 수행해 내는 파괴적이며 반사회적이고 저항적인 여러 역할의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특히 양반층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세 번째 차이점은 장연꼭두각시극은 인형들이 나와서 춤추고 노는 장면이 확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형연행자들이 전문성을 보이는 연극적 갈등보다는 농촌의 오락으로서의 유희적 요소가 확장된 면모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인접 국가 사례

중국에서는 인형극을 괴뢰희(傀儡戱) 또는 목우희(木偶戱)라고 한다. 과거에는 산악(散樂)·백희(百戱)에 속한 종목의 하나로 괴뢰희라고 불렀던 것이, 오늘날에는 주로 목우희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중국 인형극은 한대(漢代)에 기원했고, 늦어도 남북조인 북제(北齊)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줄로 인형을 조종하는 제선목우(提線木偶)가 나타난다. 인형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아교와 옻으로 칠한 다음, 아름다운 옷을 입힌 인형을 줄로 조종하는 인형극이 이 시기에 연행되었다. 제선목우가 등장하는 인형극 이외에도 반령목우(盤鈴木偶)가 등장하는 인형극이 전승되었다. 반령목우가 등장하는 인형극은 반령(盤鈴, 악기의 일종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동전으로 추정하기도 함)을 악기 반주로 한 인형극으로 추정한다.

중국 인형극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더욱 다양해진다. 북송시대(北宋時代)에는 제선목우, 장두목우(杖頭木偶), 약발목우(藥發木偶), 수괴뢰(水傀儡) 등의 인형이 등장한다. 장두목우는 장두괴뢰(狀頭傀儡)라고도 부르는데, 인형의 하부가 나무 막대기로 되어 있어 이를 잡고 조종하는 인형이다. 약발목우는 약발괴뢰(藥發傀儡)라고도 부르는데, 화약을 이용해 움직이는 인형이다. 수괴뢰가 등장하는 인형극은 주로 궁궐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물 위에서 그 연행이 벌어진다. 구체적인 수괴뢰 조종 방식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가행임수전관징표석연(駕幸臨水殿觀徵標錫宴)」 조를 보면, '낚시하기', '배젓기', '공을 던지거나 빙빙돌면서 춤추기' 등의 내용이 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송시대(南宋時代)에 이르러서는 육괴뢰(肉傀儡), 전장괴뢰(全場傀儡), 청악괴뢰(淸樂傀儡) 등의 인형이 추가된다. 육괴뢰는 어린아이를 인형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우리의 풍물굿에서 무동타기를 연상시킨다. 전장괴뢰는 아직 그 실체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인형이다. 청악괴뢰가 등장하는 인형극은 방향, 생황, 피리 등 악기의 반주에 맞춰 인형이 미인으로 분장해서 연행하는 것이다. 송대에는 인형극의 내용 역시 더욱 풍부해졌고, 인형극을 전문적으로 하는 인형 연희자도 생겨났다. 송대에 이르러 인형극은 농촌에서부터 궁중에서까지 벌어졌다. 일반 백성에서부터 왕에게까지 사랑을 받는 공연 종목이 된 것이다.

원대(元代)의 인형극은 송대만큼 성행하지 못했지만 원잡극(元雜劇)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인형극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때에는 주로 제선목우를 이용한 인형극이 성행했으며, 지역적 특색을 가진 인형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명대(明代)와 청대(淸代)에 중국 인형극은 새로운 발전 과정을 보인다. 인형의 조종 기법과 연출 내용, 인형 조형 등에 걸쳐 전성기라 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 이 시기 동안 수괴뢰가 궁중에서 크게 발전했고, 민간의 인형극이 곳곳에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 시기에 민간에서 유행했던 인형극은 주로 장두인형극(杖頭木偶戱), 제선인형극(提線木偶戱), 포대인형극(布袋木偶戱), 철지인형극(鐵枝木偶戱) 등 4가지가 있었다. 포대인형극은 천으로 만든 인형 몸통 속에 손을 집어넣어 조종하는 포대목우(布袋木偶)가 등장하는 인형극이다. 철지인형극은 철로 된 조종간으로 조종하는 철지목우(鐵枝木偶)가 등장하는 인형극이다. 또한 명·청대에는 지역적인 특징을 띤 인형극이 유파(流派)별로 전승되었다. 인형극이 민간에서 전파되면서, 지역의 지방 언어와 희극곡조 등 양식을 흡수하여 다양한 인형극 음악을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형극 유파를 형성한 것이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전승되는 지역 인형극들 대부분이 이때 형성된 것들이다.

중국에서는 피영희(皮影戱)라 부르는 그림자 인형극도 존재한다. 그림자 인형극은 가죽이나 종이로 만든 평면적인 인형의 그림자를 이용해서 공연을 한다는 독특함이 있다. 중국의 그림자 인형극 역시 한대에 기원했고 당대(唐代)에 발전했다. 불교 승려들이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변상(變相, 부처와 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 보이는 형상)을 연출했고, 원소절(元宵節)에 여러 장소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대에 이르러서 그림자 인형극을 전문적으로 하는 연희자가 생겼고, 다양한 그림자 인형과 도구가 마련되었다. 원대에는 다양한 색깔의 종이를 이용해서 만든 그림자 인형이 나타났다. 당대에 양가죽을 이용해 인형을 만든 것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명대 전기의 침체기를 지나, 명대 후기부터 그림자 인형극은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여 청대에 그 절정을 맞이한다. 전국 곳곳에 지역 특징을 띤 그림자 인형극 유파가 나타나고, 전문적으로 그림자 인형극을 공연하는 집단이 활동한다. 얼굴, 복식, 음악, 대본 등의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모습이 그림자 인형극이 공연된 것도 이때이다.

포대인형극 공연 장면

포대인형극 공연 장면

가죽으로 만든 그림자 인형

가죽으로 만든 그림자 인형 중국 윈난성(雲南省)

현전하는 중국 인형극은 그 지역에 따라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무 인형을 조종해 공연하는 푸젠성(福建省)의 제선인형극과 포대인형극, 광둥성(廣東省)의 포대인형극과 철지인형극, 후난성(湖南省) 소양의 포대인형극(紹陽布袋木偶戱), 하이난성(海南省) 린가오의 인형극(臨高木偶戱), 쓰촨성(四川省) 북천의 대인형극(北川大木偶戱), 구이저우성(貴州省) 석천의 장두인형극(石阡杖頭木偶戱), 산시성(陝西省) 합양의 제선인형극(合陽提線木偶戱), 산시성(山西省)의 그림자 인형극(皮影戱) 등이 대표적인 중국 전통인형극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의 인형극은 다채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과 비교해 볼 때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들의 다양함이 두드러진다. 제선목우, 장두목우, 포대목우, 철지목우, 수괴뢰, 약발괴뢰, 육괴뢰, 그림자 인형 등의 다양한 인형이 존재해 왔다. 이들 인형을 이용해서 보여주는 섬세하고 다양한 기교와 연행 내용도 중국 인형극을 특징짓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인형극은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 발생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분라쿠(文樂)가 대표적이다. 분라쿠는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라고도 하며 세련된 인형극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닌교조루리란 말은 닌교(人形), 즉 인형을 조루리(淨瑠璃)라는 노래 형식에 맞추어 놀린다는 뜻이다. 한두 사람이 간단한 이동식 장치로 된 인형을 들고 각지를 유랑하며 소규모로 하는 인형극과 장편 서사시를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조루리 형식, 그리고 여기에 샤미센(三味線)을 연주하는 예능까지 결합되어 비교적 규모가 큰 새로운 인형극을 만들어 냈다. 이전의 인형극이나 이전의 조루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극이라 하여 이를 닌교조루리라 불렀다. 에도 말기에 인형극단인 분라쿠좌(文樂座)가 흥행에 성공하면서부터, 닌교조루리를 분라쿠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 제선인형극의 공연 장면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 제선인형극의 공연 장면

쓰촨성(四川省) 인형극에서 불을 토하는 장면

쓰촨성(四川省) 인형극에서 불을 토하는 장면

분라쿠는 인형의 섬세한 동작과 짜임새 있는 줄거리를 볼거리로 하며, 일본 근세의 서민들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는 전통 문화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분라쿠의 두드러진 특징은 산닌즈카이(三人遣い), 즉 인형 하나를 세 사람이 조종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인형의 두 발을 조종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인형의 왼손을, 또 다른 한 사람은 인형의 얼굴과 오른손을 담당한다. 세 사람이 인형 조종을 분담함으로써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한 개의 인형을 세 사람이 놀리는 것은 분라쿠의 특징이다.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인형극으로 보통 분라쿠를 꼽지만, 그 밖에도 일본 각지에는 여러 인형극 양식이 존재하고 있다. 일본 동북 지방(東北地方)에서는 이타코(いたこ)라는 하는 무녀가 스스로 노래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막대기 모양을 한 소박한 인형을 움직인다. 이를 '오시라 인형' 또는 '오시라사마(おしらさま)'라고 부른다.

이 오시라사마보다 인형의 구조가 발전한 것으로 후쿠오카현(福岡縣)의 고효신사(古表神社)와 오이타현(大分縣)의 고요신사(古要神社)에 전하는 씨름 인형(相撲人形)이 있다. 이 씨름 인형은 역사(力士)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꼭두각시놀음홍동지 인형과 상통한다. 사실 일본 신사에서의 인형극과 한국의 꼭두각시놀음은 그 무대 형식, 인형조종 방식, 음악 등에 있어 유사한 점이 많다. 한국의 꼭두각시놀음은 밤에 야외에다 화톳불을 놓고 그 불빛 속에서 벌어졌다. 사방에 기둥을 세워 놓고 휘장을 둘러 만든 무대에서 인형조종사는 인형을 높이 쳐들고 인형을 놀린다. 이런 방식은 고요신사의 신씨름(神相撲)과 고효신사의 세이노춤(細男舞)에서도 유사하게 이루어진다.

고요신사와 고효신사의 인형극에서 등장하는 인형은 다리가 없는 막대 인형으로 인형조종사들이 놀리기 쉽도록 하부가 가늘게 되어 있다. 양팔은 상하로 잘 움직이도록 어깨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끈이 붙어 있어 이 끈을 잡아 당겨 팔을 조종한다. 한국 꼭두각시놀음의 홍동지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막대 인형으로, 양팔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일본의 신씨름에 등장하는 인형과 같은 계열인 것으로 생각된다. 나체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도 유사하다. 일본의 고요신사와 고효신사의 인형연행에서는 징, 북, 피리를 쓴다. 꼭두각시놀음도 장고, 북, 피리, 꽹과리 등을 사용하는데, 그 악기 구성이 유사하다. 그 장단이 3박자 중심이라는 점도 유사한 점이다.

일본의 전통인형극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에비스가키(夷かき)' 또는 '에비스마와시(夷舞わし)'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있다. 이것은 걸립을 하며 집집을 찾아가서 축원을 하는 방식의 인형극이다. 에비스는 칠복신(七福神) 중의 한 신으로 복덕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믿어진다. 에비스가키는 일본 중부 효고현(兵庫縣) 니시노미야(西宮)에 있는 에비스 신사를 본거지로 삼고, 목에 건 상자 속에 넣은 에비스 인형을 놀리면서 봄철에 집집마다 찾아가서 에비스 신의 모습을 그린 부적을 돌리며 축복을 하는 종교적 연행자를 말한다. 원래 에비스 신은 도미를 낚는 모습으로 어부들의 신앙 대상이었다.

일본에서는 역사적으로 적어도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에는 인형을 놀리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유랑예인집단이 있었다. 12세기 초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의 〈괴뢰자기(傀儡子記)〉에 의하면, 일본의 구구쓰시(傀儡子)라는 유랑예인집단이 수초를 따라 유랑했고, 남자들은 활과 말로 수렵 생활을 했으며, 쌍칼을 던졌다가 받기·일곱 개의 방울받기·인형극·환술 등의 연희를 행했다. 여자들은 춤과 노래를 공연하고 몸을 팔았다. 이러한 유랑예인집단의 모습은 한국의 경우와 동일하다. 한국의 경우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며 사냥을 일삼고 여러 가지 연희를 연행한 것이나, 일본의 괴뢰자 집단이 수초를 따라 이동하며 사냥을 하고 인형극 등 여러 가지 연희를 연행한 것이 유사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3세기경이 되면 구구쓰는 유랑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 변해 가고,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로 접어들면서 그 수가 많아져 갔다고 한다. 당시는 예인들의 활동이 신사나 사찰과의 관계가 깊었는데, 특히 현재의 효고현 니시노마야의 에비스 신사와 계약한 패가 세력이 컸다고 한다. 그들이 바로 '에비스가키'이다. 이들은 에비스 인형을 놀리면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축원하는 걸립 예인들이었다. 인형의 크기는 40-50㎝ 정도의 작은 것으로 상자 속에 넣어서 목에 걸고는 혼자서 또는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걸립 예인들은 스스로 노래 같은 것을 부르며 인형을 놀렸다. 그러던 중에 이 에비스가키 출신자에 의하여 인형이 조루리와 결합하게 되었다. 조루리와 결합함으로써 인형극은 길거리 또는 야외에서 공연하던 것에서 가설 극장에서의 공연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처음엔 극장은 이름뿐이고 사람 키만 한 막을 치고는 그 속에서 인형을 내미는 형식이었고, 물론 조루리도 막 뒤에서 연주했다. 인형도 발이 없었고, 인형조종사는 옷자락 속으로 손을 들이밀어 놀리기 때문에 인형의 손은 움직이지만 간단한 동작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양식의 인형극으로 대표적인 것이 사도섬(佐渡島)에 전승된다.

일본 서쪽 사도섬에 있는 노로마인형놀이는 한국의 꼭두각시놀음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 노로마인형놀이는 노(能)를 공연할 때 그 중간에 곁들이는 희극으로 전승되었다. 이 놀음에 등장하는 익살쟁이 기노스케는 극의 끝에서 장안부자인 시몬초와 맞붙어 싸우다가 알몸이 된다. 기노스케의 다리가랑이 사이로 커다란 남근이 달려 있고, 남근 가운데 구멍이 뚫려 객석을 향해 소변을 본다. 인형사가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뿜어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홍동지인형과 동일한 연행 양상이다. 인형을 조종만 하는 조종사가 따로 있고 대사는 기다이후(義大夫)가 한다. 구전되어 왔고, 외설스러우며, 임기응변에 의존하는 방식이 한국의 꼭두각시놀음과 같다. 그러나 기노스케는 처음에 옷을 걸치고 등장했다가 마지막에 알몸이 되지만, 한국의 홍동지는 애초부터 알몸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다르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아와지(淡路) 인형극이다. 일본 각지에 전해지고 있는 인형극은 대부분이 아와지 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아와지 닌교조루리의 기원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500년대 초기에 효고현 니시노미야에 있던 에비스 신사(戎神社)에 봉사하던 구구쓰가 아와지에 인형극을 전했다. 무로마치시대 후반, 정월이 되면 당시 서울인 교토에 찾아와서 축원을 해주는 인형극을 놀리는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의 본거지가 아와지였다. 에도시대에는 영주의 비호를 받고 발전해, 18세기 전반에는 인형극단의 수가 약 마흔 개 정도에 이를 만큼 성행했다. 아와지 인형극은 야외의 가설극장에서 공연되는 것이 보통으로, 넓은 광장에 무대를 꾸미고 많을 때는 천 명 정도의 관객 앞에서 하루 종일 인형을 놀리며 즐겼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의 인형극 하면 분라쿠를 가리키지만, 분라쿠의 원조는 아와지 인형극이다. 분라쿠를 특징짓는 삼인조종인형 역시 아와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와지 인형극은 원래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인형극으로 축하 의식용이었다. 또한 아와지 인형극은 인형이 주(主)가 되고 조루리 가락은 종(從)이다. 이는 조루리 가락이 중심이 되는 분라쿠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인형의 모양 역시 분라쿠와는 달리 섬세하지 않고 소박하고 거친 면이 많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일본의 경우 한국과 유사한 방식의 인형극이 존재한다. 그 역사적 전개 역시 한국과 유사하게 전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인형극을 연행하는 유랑예인집단의 정체, 종교적 문맥에서 벌어지는 인형극의 존재, 꼭두각시놀음과의 유사성 등이 그 증거가 된다. 다만 일본의 경우, 분라쿠라는 독특한 방식의 섬세하고 독특한 인형극을 발전시킨 것이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 인형극의 사례를 염두에 둘 때, 한국의 인형극은 고대 동양 인형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나무막대를 이용하여 조종하는 막대인형(장두목우), 천을 자루같이 혹은 장갑같이 만들어 조종하는 주머니인형(포대목우), 신체 부위에 줄을 매어 조종하는 줄인형(제선목우), 몸통에 줄을 꿰어 조종하는 줄타기인형 등이 고대로부터 전승되었다. 현재 전하는 한국의 꼭두각시놀음 계통 인형극은 이상과 같은 인형들이 지닌 거칠고, 단순하고, 박력있고, 소박한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형들은 막대기인형과 줄인형의 복합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런 형태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을 이루었다. 이 공통된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은 다양하고도 다채롭게, 일본은 섬세하고도 독특하게, 한국은 소박하게 인형극을 전승해 온 것이다.

의의

꼭두각시놀음 계통의 세 인형극은 그 연행 주체를 기준으로 할 때 마을 주민들 가운데 선발된 연희자들이 연행하는 인형극과 전문적 연희자인 유랑예인집단이 연행하는 인형극으로 나뉜다.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이 전문적 연희자인 유랑예인집단이 연행하는 인형극이라면, 서산박첨지놀이장연꼭두각시극은 마을 주민들 가운데 선발된 연희자들이 전승하는 인형극이다. 그런데 유랑예인집단의 인형극과 마을 주민의 인형극은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주민의 인형극은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문적인 유랑예인집단 인형극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서산박첨지놀이는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의 영향 아래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장연꼭두각시극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독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의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내 주는 요소들이 나타난다.

꼭두각시놀음 계통의 세 인형극은 나름의 특징에 따라 그 주제의 심도가 달리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관념의 허구성 비판, 남성의 횡포 비판, 계급적 특권의 비판이라는 공통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인형극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인형연행자의 조종을 통한 움직임은 투박하다. 말 역시 자연스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인형극은 여전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인형극이 인간의 일탈적 욕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형극은 인간이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 인형극이 갖는 너른 표현의 가능성은 거의 제한이 없다. 인간의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들을 인형극에서의 인형은 능히 해낼 수 있다. 더구나 그 너른 가능성 속에서 여러 표현들의 교배가 이루어지며, 상상 그 이상의 표현까지도 가능한 것이 인형극이다. 따라서 인형극은 곧 상상력의 바다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인형극에서 언제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무제한의 상상력과 그 실현이다. 이는 인형극이라는 장르가 새로운 상상력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인형이 갖는 주제 전달의 용이함 역시 인형극의 전망을 밝게 한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여러 교육·예술 활동에서 인형은 효과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글이나 말로만 표현하는 것보다 인형을 통한 표현이 주제 전달력에 있어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권택무‚ 『조선민간극』‚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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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철‚ 『조선연극사』‚ 학예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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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이경화, 괴뢰, 김동익, 김재원, 송복산, 이수영, 이호경, 최성구, 홍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