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

팔관회

[ 八關會 ]

정의 및 이칭

팔관회(八關會)는 불교의식의 하나로서, 팔관재회(八關齋會)·팔재회(八齋會) 등으로도 불린다. 팔관회는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헛된 말 하지 말며, 음주하지 말라"라는 불교의 오대계(五大戒)에, "사치하지 말고, 높은 곳에 앉지 말며, 때 아닌 때에 먹지 않는다"라는 세 가지를 덧붙인 여덟 가지 계율을 재가신도(在家信徒)들로 하여금 하루 낮·하루 밤 동안 지키게 하는 의식으로, 금욕(禁慾)과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지극히 종교적인 행사였다.

유래 및 역사

팔계재(八戒齋)가 중국에 도입된 후, 팔관재(八關齋)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중국의 '팔관(八關)'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온 것이다. 8이라는 숫자는 중국의 천하를 상징하고, '關'은 '막아 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팔관'은 외적 및 위험한 것들로부터 중국인들을 막아 주는 상징적인 방어의 개념으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전쟁에서 방어의 요새로 팔관을 설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팔관이라는 전통적인 액막이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팔계재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 중국인들은 팔관재라는 용어를 택했을 것이다. 중국의 팔관재는 두 가지 중요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액막이·치병(治病)·구명(救命)을 바라면서 설행(設行)되었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이가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위령제로 설행되었던 경우이다. 특히 팔관재의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은 미륵(彌勒) 신앙·약사(藥師) 신앙과 결합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러나 당대(唐代)로 내려오면서, 팔관재는 팔관재회(八關齋會)로 명칭이 바뀌고 성격도 변하게 된다. 재계적(齋戒的)인 성격보다는 재회적(齋會的)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세속적인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팔관회는 인도에서 기원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전래 연도의 추정은 어렵다. 다만 우리나라 최초의 팔관회 관련 기사가 신라 진흥왕대에 전할 뿐이다. 이후 팔관회는 신라와 태봉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는 중국 당대(唐代)의 팔관재회처럼 재회적(齋會的)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신라의 팔관회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세속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일종의 불교적 축제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팔관회의 성격은 태봉을 거쳐 고려 초까지 지속되었으나, 후대에는 점차 행사의 성격과 내용이 변모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팔관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다만 팔관회 때 연행되었던 포구락, 사선무 등 음악과 무용 가운데 일부가 조선의 궁중행사에 전해졌을 뿐이다.

신라에서는 진흥왕 12년(551)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승려 혜량(惠亮)을 승통(僧統)으로 삼아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함께 설행했다. 혜량은 고구려 승려로서 551년에 신라로 왔으며, 그 해에 신라의 팔관회를 주관했다. 신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팔관회를 고구려 승려 혜량이 주관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고구려에도 이미 팔관회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및 특성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진흥왕 33년(572) 10월 20일 조에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위해 7일간 팔관회를 설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사의 팔관회가 전사자(戰死者)의 위령제(慰靈祭)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편, 이때의 팔관회가 중국의 수륙법회(水陸法會)처럼 7일간 행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중국의 수륙법회 혹은 수륙재는 불교에서 망혼을 천도하는 의식인데, 보통 7일을 주야로 거행된다. 따라서 이는 이미 중국에서도 팔관재가 죽은 이를 위한 위령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사실과 일치한다. 또한 신라의 팔관회는 중국과 한국에서 행해졌던 수륙재와도 설행 목적이 통하고 있다. 수륙재도 영혼 천도 의식이다.

한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7 「산악(散樂)」 조에서는 진흥왕 때 설행한 팔관회의 연행양상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당시 설행한 팔관회 때 두 개의 채붕을 설치하고 가무백희를 연행했다고 한다. 여기서 가무백희는 바로 산악·백희이다. 그래서 『증보문헌비고』의 「산악(散樂)」 조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채붕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산악·백희를 연행하는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개국 후 최초의 팔관회는 태조 원년(918) 11월에 철원에서 개최되었다. 왕이 직접 위봉루(威鳳樓)에 나가서 관람했으며, 이후 연례행사로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서경을 중시하게 되자, 서경에서도 팔관회가 거행되었던 듯하다. 『고려사(高麗史)』에서 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태봉의 팔관회는 1월에 거행되었고 고려의 팔관회는 신라와 태봉의 팔관회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팔관회 연행 내용 중 "사선악부, 용·봉황·코끼리·말·마차·배는 모두 신라의 고사였다"에서 고려 초기의 팔관회가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공연내용은 백희가무·사선악부(四仙樂部)·용봉상마거선이었다.

이때 설행한 팔관회의 모습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 태조 원년 11월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여기에는 "태조가 위봉루로 나가서 관람한 그것을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했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앞선 두 문헌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의 팔관회에서는 위봉루 앞 격구장에 대규모의 연등을 설치하여 밤새도록 등불을 밝히고, 두 개의 채붕을 가설한 후 그 앞에서 백희가무를 연행했다. 두 개의 채붕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산악·백희를 연행하는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성종(成宗) 원년(元年)에 팔관회의 잡기들이 요란하고 불경하다는 이유로 팔관회가 폐지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산악·백희의 연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사선악부는 조선조까지 전해 내려온 사선무(四仙舞)이거나, 신라의 화랑들로 구성된 가무인의 일단이 고려조의 창건을 축하하는 팔관회에 참가한 것이리라고 추정되었다. 사선(四仙)은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祥)의 네 국선(國仙)을 가리키는 듯하다.

다음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팔관회에 화랑들이 가무로써 참가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우선, 『고려사』 권18 「세가」 18 의종(毅宗) 22년(1168) 3월 조에는 팔관회에 대한 고려 의종의 교서(敎書)가 있다. 여기서 신라의 팔관회에서 용신제와 천신제에 화랑이 중요한 참가자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고려의 팔관회는 날로 옛 격식이 줄어들고 유풍이 점차 쇠퇴하고 있다면서, 지금부터 살림이 풍족한 양반의 집을 선택하여 선가(仙家)로 만들고 옛날 풍속을 준수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바로 신라 때처럼 팔관회에 선풍을 살리겠다는 의도이다.

한편, 이인로의 『파한집』 권하(下)에서 1168년 의종의 교서에 의해 팔관회에서 선풍이 부활되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신라의 화랑들처럼 양가 자제 4명을 선발하여 팔관회에서 춤을 추게 한 것이다. 신라 때의 팔관회는 물론이고, 고려 태조 때의 기록과 같이 고려 초의 팔관회에는 신라의 고사인 사선악부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사선악부 같은 선풍이 쇠퇴했기 때문에, 의종은 위와 같은 교서를 내려 선풍을 부활하고 예전 격식과 풍속을 되살리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파한집』에 보이는 바와 같이, 양가의 자제 4명이 등장하여 춤을 추는 사선악부가 복원되어 연행된 것이다. 교서에서 양반가의 가산이 풍족한 자를 선택하여 선가로 만들라고 했고, 『파한집』의 내용과 같이 양가(良家) 자제 4명을 선발하여 춤을 추게 한 것은 이들이 바로 사선이고, 이들의 가무가 바로 사선악부임을 입증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사선무(四仙舞)도 바로 사선악부의 전승인 것을 알 수 있다.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은 그동안 채붕의 장식물일 것으로 보았는데, 산악잡희의 내용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용'은 용놀이로서 중국의 어룡지희(魚龍之戱)에 비교할 수 있고, '봉'은 학무(鶴舞)와 같이 봉황새 모양을 사람이 뒤집어쓰고 춤추는 봉황무일 수 있고, '상'은 장형의 〈서경부〉에 나오는 코끼리놀이처럼 일종의 가면희로 볼 수 있고, '마거'는 선차놀이 또는 무륜기(舞輪伎)와 같은 연희로 볼 수 있으며, '선'은 연희에 배를 등장시킨 것으로서 조선조 말까지 궁중의 연회 때 상연되던 선유락(船遊樂)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조는 즉위 26년(943) 4월에 대신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렸는데, 이 중 6조는 팔관회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러한 태조의 유지(有志)에 따라 팔관회는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인 공양왕(恭讓王) 3년(1391)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도중에 중단되거나 변화를 겪기도 했다. 가장 오랫동안 중단된 기간은 성종 6년(987) 10월에서 현종(顯宗) 원년(1010) 11월까지의 24년간이었다. 성종은 원년(981) 11월, 팔관회의 잡기들이 불경(不經)하고 요란하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성종 6년(987) 6월, 최승로(崔承老)는 〈시무(時務) 28조〉에서 팔관회의 폐단을 지적하며 금지하기를 요청했다. 고려의 팔관회는 금욕적이고 종교적이기를 요구하는 팔계율(八戒律)과는 달리, 화려하고 풍류적이며 향락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팔관회가 정통 불교의례와 전혀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팔관회에서도 등을 매달고 향을 피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정통 불교와는 달리 채붕을 설치하고, 불교 교리에서는 금지되었던 백희가무를 즐겼다. 즉 팔관회에 우리 고유의 풍습과 불교의례가 함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려사』 권71 악2 〈속악을 사용하는 절차〉에 의하면, 팔관회에서 교방악인 포구락과 구장기 별기가 연행되었다고 한다. 또한 팔관회에는 우인이 많이 등장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는 팔관회에서 여러 가지 우인을 만드는 데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지적하며, 팔관회의 폐지를 건의했다. 여기서의 우인은 인형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최승로의 〈시무 28조〉 가운데 "우인(偶人)은 흉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으니, 중국 사신이 일찍이 와서 보고 좋은 일이 아니라며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이렇게 함을 허락치 마십시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장례식에서 인형극을 공연하므로 흉례에서 우인을 사용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여기서 우인이 인형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팔관회에는 역대 공신들의 우상(偶像), 즉 사람 형상으로 만든 인물 잡상도 있었다. 『고려사』 권14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김낙과 신숭겸의 우상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김낙과 신숭겸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기리기 위해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두 사람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가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했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후대에 예종(睿宗)이 팔관회에서 김낙과 신숭겸의 우상을 보고, 두 공신을 추모해 지은 것이 〈도이장가(悼二將歌)〉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진흥왕 때부터 팔관회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팔관회에서도 김낙·신숭겸을 추모하는 행사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학자 김일출은 『평산신씨장절공유사』 중 "두 사람의 가상(假像)이 있어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자색 옷을 입고 홀(笏)을 잡고 금인(金印)을 차고, 말을 타고 뛰면서 뜰에 돌아다녔다"라는 내용에 주목하여, 이 광경은 가면을 쓰고 복식을 갖추어 말을 탄 연희자들이 김낙과 신숭겸이 분투한 모양을 보여 준 것이기에 가면극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앞에서 소개한 기록만으로는 김낙과 신숭겸의 우상에 가면을 씌웠는지 안 씌웠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두 공신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가면과 유사한 얼굴 형상을 표현했을 것이다.

신라와 고려 초기의 팔관회는 불교적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고려사절요』 권1, 태조 원년 11월 조에 "왕이 위봉루로 나가서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팔관회는 점차 토착 신앙적 성격을 띠면서, 음주 가무까지 포함하는 성대한 축제로 변모했다. 그 결과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불교 격식대로 설행된 의례라기보다는 각지에서 수시로 열리는 토속신들의 제사를 합사하여 행하는 최고(最古) 전례였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또한 신라 진흥왕 때부터 팔관회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불교적 위령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팔관회에서도 김낙·신숭겸을 추모하는 행사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

팔관회는 거행 시기로 볼 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추수감사제적 성격을 지닌 문화 축제이고, 신라 화랑적 요소와 고구려의 조상제사적 요소가 포함된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팔관회가 고구려의 동맹처럼 추수감사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고, 개경의 팔관회(11월 15일)와 별도로 서경의 팔관회(10월 15일)를 개최한 사실은 고려 왕조가 표방했던 고구려 계승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팔관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신라와 태봉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계승된 한국의 팔관회는 토착신앙적 성격을 띠면서, 음주가무까지 포함하는 성대한 축제로 변모했다. 고려 팔관회 때 행해졌던 포구락과 사선무 등 음악과 무용은 조선의 궁중행사에 전해졌다.

참고문헌

  •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연구』, 평양 : 과학원출판사, 1957.
  • 안지원, 「고려시대 국가 불교의례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안철현,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홍윤식, 「불교 행사의 성행」,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