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무
[ 鶴舞 ]
학무(鶴舞)는 우리나라 정재의 하나로 조선시대 임금의 환궁행사 때 베풀어진 연희나 궁중의 잔치, 선농제와 같은 의례에서 연행되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 권5 「시용향악정재도의(時用鄕樂呈才圖儀)」에서 학무의 연희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음악이 연주되면 박(拍)소리에 맞추어 청학과 백학이 날개를 펴고 뛰며 나아가 지당 앞에서 동서로 나누어 북향하고 선다. 다시 박소리에 맞추어 두 걸음 나아가 안쪽을 돌아보고, 또 박소리에 맞추어 두 걸음 나아가 바깥쪽을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연통을 보고 그것을 쪼아 열면 두 동녀가 나오는데, 학이 놀라서 물러나면 음악이 그치는 방식으로 연희되었다.
김홍도(金弘道, 1745-?)가 그린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의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에는 연광정 바로 아래 청색과 황색의 학 한 쌍이 보인다. 『악부(樂府)』에 실려 있는 〈선루별곡(仙樓別曲)〉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평안도 성천읍 서쪽 비류강에 있는 누각인 강선루에서 학무가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 궁중의 진연에서 사용한 정재(呈才)의 무보를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도 학무의 연희양상이 전한다. 『정재무도홀기』 에는 고종 때의 각종 연회에서 사용된 홀기가 다수 전한다. 그 중 학무가 들어 있는 홀기로는 『정재무도홀기 계사(呈才舞圖笏記 癸巳)』, 『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 『여령각정재무도홀기(女伶各呈才舞圖笏記)』, 『여령각정재무도홀기 신축(女伶各呈才舞圖笏記 辛丑)』, 『무동각정재무도홀기(舞童各呈才舞圖笏記)』가 있다.
학무는 전승이 단절되었다가 1935년 한성준의 창작무용발표회에서 창작무로 선보인 이후,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백학 한 쌍의 학무로 전승되었다. 1993년에 다시 학무에 연화대무를 더하여 학연화대합설무가 되었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의 연희양상은 조선 초기부터 나타나는데, 공연형태는 학무와 연화대무, 오방처용무가 합설(合設)된 종합가무극이었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와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도의〉에 기록되어 있다. 학무와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향악으로 분류되어 있는 반면에 연화대는 당악정재로 전하고 있다. 세조 때 당악정재(唐樂呈才)인 연화대가 향악정재인 학무, 처용무와 합설되어 연희되었다. 음악에서 향악과 당악을 번갈아 연주하는 것을 '향당교주'라고 하는데, 향당교주의 기록은 성종대에 나타난다.
학무 김홍도. 〈평안감사향연도〉. 〈연광정연회도〉
『용재총화』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 내용을 보면, 처음에 쌍학인과 처용인이 모두 들어가서 춤을 추고, 학무와 연화대무가 이어진다. 연화대무가 끝나면 바로 이어서 처용무를 추는 방식이었다. 시작은 승도들이 불공하는 것을 모방하여 여기(女妓)들이 영산회상불보살을 노래하고, 처용무가 끝나면 다시 '나무아미타불'과 '관음찬'을 노래한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12월 그믐 하루 전날 나례 때에 악사가 여기와 여공(女工)을 거느리고 공연했다. 구나의식 뒤에 처용무를 두 번 추는데, 앞의 것을 전도(前度) 처용무, 뒤의 것을 후도(後度) 처용무라 한다. 전도에 처용무를 먼저 추고, 후도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나와 춤추다가 연꽃을 쪼아 두 동녀(童女)가 나오면 두 학이 놀라 나가고, 연화대를 춘 후에 다시 처용무를 춘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연희방식이 『용재총화』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무용뿐만 아니라, 봉황음(鳳凰吟), 삼진작(三眞勺), 북전(北殿)과 같은 음악 반주에 처용가와 같은 노래가 수반되는 종합가무극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학연화대합설무는 『고려사(高麗史)』나 『악학궤범』의 기록에 독립적인 정재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학무와 연화대무는 각 연향에 따라 독립적으로 상연되었는데, 학무와 연화대무가 학연화대무로 함께 상연된 기록은 고종 29년(1892) 대전 궁중전야진찬(宮中殿夜進饌), 고종 38년(1901) 명헌태후야진찬(明憲太后夜進饌), 고종 39년(1902) 내진연과 야진연에 보이기 때문에 학연화대무가 조선 후기에 생겨난 공연형태라는 사실을 전해 준다.
학무를 고려시대부터 연행했다고 전하는 이유는 연화대무와 관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사』 「악지(樂志)」의 당악정재에 연화대가 전하고 있는데, 연화대무의 연희방식을 보면 비록 학이 나오지는 않지만, 음악에 맞추어 연꽃이 터지면서 그 속에서 동녀가 나온다. 이러한 모습은 학무의 연희방식에서 학이 춤을 추다가 연통을 쪼면 안에서 동녀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학무 배열도 복원도 『악학궤범』. 향악정재. 교방가요
학연화대합설무는 학무와 연화대무를 합해 새로운 공연으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하게 학무에 이어 연화대무를 추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학무에 연화대무를 더하여 1993년 학연화대합설무로 명칭을 변경했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대동야승』Ⅰ, 민족문화추진회, 1971.
- 성무경·이의강 책임번역, 『정재무도홀기(완역집성)』, 보고사, 2005.
- 이혜구 역주,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이흥구·손경숙 역, 『조선궁중무용』, 열화당, 2000.
- 이흥구, 『학연화대합설무』, 도서출판 피아, 2006.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하을란, 「한국 동물가장가면희의 역사와 연희양상」,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참조어
학연화대처용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