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자
[ 傀儡子 ]
괴뢰자(傀儡子)는 괴뢰희(인형극)를 연행하는 연희자를 뜻하는 말로, 연희를 생업으로 삼은 유랑예인집단을 말한다. 괴뢰란 인형을 뜻하는데, 괴뢰자의 연희 중 인형극이 대표적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혹은 괴뢰자(魁儡子), 굴뢰자(窟礧子), 굴탄자(窟碳子)라고도 한다. 일본어로는 구구쓰시라고 한다.
한국의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가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고, 한국을 통해 그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제기된 후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중국·한국·일본의 인형극은 무대구조·연출방식·인형조종법이 거의 같고, 인형극의 주역들이 모두 해학적·풍자적·희극적 성격의 인물이라는 공통점과 외양의 유사성이 있고, 원시종교나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유랑예인집단에 의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기원설이다. 그리고 '꼭또' 또는 '꼭두'라는 말이 중국의 인형을 가리키는 말인 '곽독(郭禿)'에서 왔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구구쓰(クグツ)'로 되었다고 하는 데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어 왔다.
당나라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樂府雜錄)』 「괴뢰자(傀儡子)」 조에는 인형극이 한나라 고조 때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괴뢰자는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한 고조가 평성에서 모돈선우(冒頓單于)에게 포위당했을 때 생겨난 것이라 한다. 평성의 한 면은 모돈의 처인 연지(閼氏)가 맡고 있었는데, 병력이 다른 삼면보다 강했다. 성안은 양식이 떨어졌었다. 진평은 연지가 투기심이 새다는 것을 알고 곧 나무인형을 만들어 기계작동으로 성위 담의 사이에서 춤을 추게 했다. 연지는 이것을 보고 산 사람들이라 생각하여, 이 성이 함락되면 모돈은 반드시 저들을 기녀로 맞아들이리라 걱정이 되어 마침내 군대를 후퇴시켰다. ······ 뒤에 악가(樂家)들이 이를 놀이로 만들었는데, 그 중 가무를 인도하는 곽랑(郭郞)이란 자는 머리가 벗겨지고 우소(優笑)를 잘하여 민간에서는 그자를 곽랑이라 불렀는데, 모든 희장(戱場)에서 반드시 배우들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했다.
당나라의 두우(杜佑)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通典)』, 송나라의 진양(陳暘)이 12세기 초에 편찬한 『악서(樂書)』에서 모두 중국의 인형극을 얘기하면서 고구려의 인형극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인형극이 매우 유명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특히 송의 마단임(馬端臨, 1254-1323)이 13세기 후반에 편찬한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당나라 이적이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황제에게 인형극을 진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인형극이 중국의 것과 다르고, 그 수준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인형극의 연희자와 악사들이 함께 끌려가서 인형극을 공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인형극은 고구려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거나, 서역으로부터 유래한 인형극이 고구려에서 한층 발전된 것일 터인데, 어쨌든 고구려의 인형극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 대체로 산악잡희에는 환술이 많은데, 모두 서역에서 나온 것이다. 뛰어난 환인(幻人)이 중국에 옴에 따라 시작되었는데, 한나라 안제(安帝, 즉위 106년) 때 천축에서 바친 기예이다. ······ 가무희에는 대면(大面)·발두(撥頭)·답요랑(踏搖娘)·굴뢰자(窟礧子) 등이 있다. 현종(玄宗, 즉위 712년)은 그런 가무희들을 정성(正聲)이 아니라고 해서, 궁중에 교방(敎坊)을 설치하여 거기에 소속시켰다. ······ 굴뢰자는 괴뢰자(魁礧子)라고도 한다. 인형(偶人)을 만들어 연희했는데, 가무를 잘 했다. 본래는 상가(喪家)의 음악이었는데, 한말에 비로소 가회(嘉會, 즐거운 연회)에서 사용되었다. 북제(北齊)의 후주인 고위(高緯, 즉위 565년)가 이것을 몹시 좋아했다. 고구려에도 역시 인형극이 있었다. 현재 민간에서 성행하고 있다.
두우(杜佑), 『통전(通典)』, 굴뢰자(窟礧子)(나) 굴뢰자는 괴뢰자(魁礧子)라고 하고, 또한 괴뢰자(傀儡子)라고도 한다. 대개 인형으로 하는 연희로서 가무를 잘 했다. 본래는 상가의 음악이었다. 인형사가 목왕(穆王)에게 헌납한 기예(伎藝)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에도 이것이 있었다. ······ 한말에 이르러서는 가회(嘉會)에서 공연되었다. 제나라의 후주인 고위는 이것을 몹시 좋아했다. 진실로 왕이 즐겨야 할 바를 잃은 짓이다.
진양(陳暘), 『악서(樂書)』 권185, 우인희(偶人戱)(다) 괴뢰와 월조·이빈곡은 이적이 고구려를 파한 후에 바친 것이다.
마단임(馬端臨), 『문헌통고(文獻通考)』, 동이부(東夷部)이 기록들을 통해서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인형극이 고구려에서 독자적인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는 당나라의 두우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에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고구려에도 인형극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구당서』 「지(志)」 제9 음악2에도 (가)와 동일한 기사가 있다. (나)는 송나라의 진양이 12세기 초에 편찬한 『악서』에 있는 기록이다. (가)와 (나)에서 모두 중국의 인형극을 얘기하면서 고구려의 인형극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인형극이 유명했다는 증거이다. (다)는 송의 마단임이 13세기 후반에 편찬한 『문헌통고』에 있는 기록이다. 당나라 이적이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황제에게 인형극을 진상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인형극이 중국의 것과 다르고, 그 수준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인형극과 유사한 것이었다면, 굳이 승전기념물로 진상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형극의 연희자와 악사들이 함께 납치되어 가서 인형극을 공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인형극은 고구려의 자생적 연희 전통 속에서 생겨난 것이거나, 서역으로부터 유래된 인형극이 고구려에서 한층 발전된 것일 터인데, 어쨌든 고구려의 인형극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성현의 〈관괴뢰잡희〉,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괴뢰붕(傀儡棚)〉, 나식(羅湜, 1498-1546)의 〈괴뢰부(傀儡賦)〉를 통해서도, 조선시대에 인형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괴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괴뢰자(傀儡子)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시기를 1-2세기경 전한(前漢) 말에서 후한(後漢)에 걸친 시기로 보고, 이 괴뢰자의 연희자는 중앙아시아 방면 유랑예인으로서 후대에 그들의 일부가 한국과 일본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들은 7-8세기경인 나라(奈良)시대에 가족적 집단을 이뤄 일본에 넘어왔는데, 원래 이들은 집시(Gypsy)로서 인도 북서부에서 시작해 서역을 거쳐 중국·한국·일본으로 전래했다는 것이다. 일본 문헌 『괴뢰자기(傀儡子記)』에 의하면, 괴뢰희의 연희자들은 칼재주부리기·방울받기·환술 등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여러 연희 종목들을 공연하면서 떠돌아다녔다. 그 후 산악의 일부이던 이 괴뢰희가 발전하여 근세 닌교조루리(人形淨琉璃)와 오늘날 분라쿠(文樂)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헤이안시대 말기(12세기 초)의 기록인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의 『괴뢰자기』에서 구구쓰시라는 유랑예인집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국의 양수척과 매우 흡사하다.
괴뢰자(傀儡子, 구구쓰시)는 일정한 주거도 머무르는 집도 없다. 그저 포장을 두른 천막집에서 살고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는데, 북방인(北狄)의 풍습과 유사하다. 남자들은 모두 활과 말로 수렵생활을 하고, 어떤 이들은 쌍검(雙劍)을 던졌다가 받기와 일곱 개의 방울(공) 놀리기를 하며, 어떤 이는 나무인형을 춤추게 하거나 도경(桃梗, 인형의 일종)을 싸우게 했는데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어룡만연(魚龍曼蜒)의 연희와 같았다. 요술을 통해 모래와 돌을 금전으로 바꾸거나, 풀이나 나무를 새나 짐승으로 변화시켜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여성의 경우, 눈썹을 찡그리거나 슬픈 표정을 짓거나 허리를 꼬거나 흰 이를 내보이거나, 짙게 화장을 하고 음란한 음악으로 남자들을 유혹했다. 부모가 알아도 경계하지 않았다. ······ 한 뙈기의 밭도 경작하지 않았고 한 가지의 풀도 따지 않았다. 그래서 관(官)에 소속되지 않았다. 모두 토착민이 아니고 떠돌이들이었다. ······ 밤이면 온갖 신들에게 제사지내며 북을 치고 춤추고 떠들면서 복을 빌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괴뢰자는 수초를 따라 유랑했고, 남자들은 활과 말로 수렵생활을 했으며, 쌍칼을 던졌다가 받기, 일곱 개의 방울받기, 인형극, 환술 등의 연희도 연행했다. 여자들은 춤과 노래로 공연하고 몸을 팔았다. 그리고 밤이면 온갖 신들에게 제사지내며 북을 치고 춤추고 떠들면서 복을 빌었다는 내용은 이들이 종교활동도 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국의 양수척이 북방 유목민으로서 수초를 따라 유랑하며 사냥을 일삼고 여러 가지 연희를 연행한 것이나, 일본의 괴뢰자 집단이 북방인의 풍습과 매우 유사하게 수초를 따라 이동하며 사냥을 하고 인형극 등 여러 가지 연희를 연행한 것이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서는 이미 스기야마 지로(杉山二郞) 등 여러 학자들이 일본의 구구쓰시(傀儡子)와 한국의 양수척이 동일 계통의 사람들임을 지적한 바 있다.
13세기경이 되면, 일본의 괴뢰자(구구쓰시)는 유랑생활에서 정주생활로 변해갔고, 중세 무로마치(室町, 1336-1573)시대로 접어들면서 구구쓰가 많아졌다. 이 시대부터는 사원(寺院)이나 신사(神社)에 소속되어 데쿠구쓰(てくぐつ)라고 불렸다. 남북조시대(1336-1392) 초기에 지어진 『정훈왕래(庭訓往來)』에서는 구구쓰시를 비파법사나 사자무(獅子舞) 등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간문일기(看聞日記)』에는 아야츠리닌교(操人形)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나라(奈良) 지방의 대승원(大乘院)이란 사원의 기록에는 사자무, 사루가쿠(猿樂), 散樂 사이에 인형극이 들어 있으며, 데쿠구쓰가 오자 돈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아야츠리닌교(操人形)가 유랑집단의 연희로서 전승된 것이다. 당시 구구쓰는 종교 선전용으로도 이용되었는데, 정토종의 행자(行者)에게 전해진 것이다. 즉 구구쓰시가 행자가 된 것이다. 행자는 본래 선종(禪宗)에서 머리를 기르고 아내를 취하는 잡부(使役人)를 이르는 말인데, 정토종에서도 이를 사용했다. 그 행자 중에는 인형을 놀리는 자도 있었다. 유랑하던 구구쓰시는 정토종의 사원노비가 되었고, 유승(遊僧)과 같이 가무를 업으로 삼았으며, 사찰에 남아 있던 자는 나와서 염불종 선전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특기인 인형놀리기로 한층 교화의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불보살의 본연(本緣)이나 사원이나 신사의 기연(起緣), 부처의 화신을 이야기하는 설경(說經)과 결합했다.
또한 구구쓰가 정주생활을 하면서 효고현(兵庫縣) 니시노미야(西宮) 에비스신사(夷神社)에 인형놀이를 전문으로 하는 연희집단이 형성되었다. 이 연희패는 에비스신(夷神)을 본떠 만든 인형을 상자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다. 그래서 이들을 에비스카키(夷舁き)라고 불렀는데, 이 상자는 인형을 놀리는 무대가 되었으며, 오늘날 인형극 극장형태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이미 16세기 중반에 교토에서 활약했고 종종 궁정에서도 공연했다. 특히 1580년대에는 매우 빈번하게 교토를 방문하여 거리마다 활동했다. 이 무렵부터 교토에서는 인형놀리기가 매우 유행했다. 에비스카키는 충분히 도시인의 이목을 끌었으며, 구구쓰 무리 가운데 대표적인 집단이 되었다.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는 집집마다 찾아가서 축복하는 걸립예인인 카도즈케게(門付藝)가 되어, 목에 건 상자에서 인형을 꺼내서 놀렸다. 에비스카키의 인형극은 후에 조루리(淨瑠璃)와 결합되어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로 발전했다. 즉 에비스카키 가운데 한 사람인 히키다 아와지노조(引田淡路掾)가 17세기 초에 교토의 시조가와라(四条河原)에서 메누키야 조자부로(目貫屋長三郞)가 노래하는 조루리에 맞추어서 인형을 조종한 것이 닌교조루리의 시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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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굴뢰자, 구구쓰시(傀儡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