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술
[ 幻術 ]
정의 및 이칭
환술(幻術)은 산악(散樂)·백희(百戱)의 한 종목으로서 전문적 연희자가 신체, 재빠른 손놀림, 특수도구, 과학적 원리 등을 활용하여,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기예이다. 환술은 곡예와 묘기, 가면희, 인형희, 구기(口技) 등과 결합하여 연행된다.
환술은 요술(妖術), 마술(魔術), 기위지희(奇偉之戱), 기희(奇戱), 기술(奇術), 기기이능(奇技異能), 신선방술(神仙方術), 신선희술(神仙戱術), 요술(妖術), 희술(戱術), 희법(戱法), 변희법(變戱法)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기위지희, 기희, 기술, 기기이능은 '신기하다'는 기교적 특징에 중심을 둔 것이다. 신선방술과 신선희술은 신선세계를 추구하는 방사(方士)나 도사(道士)들이 자신들의 신통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환술을 연행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요술(妖術)이란 명칭에는 환술을 연행할 때 나타나는 변화들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요괴나 귀신의 농간일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마술은 일본과 서양에서 매직(Magic)이 대대적으로 중국에 유입되자, 중국 환술가들이 Magic이란 단어의 의미와 발음을 고려하여 '마술(魔術)'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한 것이 점차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마술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곧 환술이 현대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래 및 역사
삼국시대에 공연예술로서 연행된 환술은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그려진 〈신라악(新羅樂) 입호무(入壺舞)〉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중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환술인 항둔(缸遁)으로, 둔술(遁術)과 유술(柔術)의 절묘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색 있는 연희이다. 두 개의 탁자 위에 각각 둥글납작한 항아리가 놓여 있다. 연희자가 오른쪽 탁자 위에서 항아리 입구로 들어간 듯이 몸의 일부분을 항아리 안에 숨기고 두 다리는 하늘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 항아리에는 두 팔을 높이 든 연희자의 상체 부분이 그려져 있다. 왼쪽 항아리로 들어가서 오른쪽 항아리로 나온 것이다. 특히 연희자가 착용하고 있는 모자가 경각복두(硬角幞頭)로서 관모(官帽)라는 점에 주목할 때, 이는 신라 궁정 소속의 전문적 연희자가 중국에 파견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라악입호무〉 『신서고악도』
또 공연예술로서의 환술은 아니지만 환술에 가까운 각종 도술담을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노거사(老居士)와 승려 인혜사(因惠師)가 재주를 겨루는 기록이 보인다. 노거사는 사람을 공중부양시킨 다음 땅에 거꾸로 박히게 했으며, 인혜사(因惠師)는 오색 구름을 일구고 꽃이 흩날리며 떨어지게 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암(金巖)이 둔갑술(遁甲術)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둔갑술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몸을 감추는 술수이다. 그 외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백제에서도 둔갑술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교들은 연희로서의 환술 종목이라기보다는 신선술이나 도교 방술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신선사상과 둔갑술의 전통은 공연예술로서의 환술을 촉발할 수 있는 토양으로 작용했다.
환술의 여러 종목 중에 공연예술로서 지속적으로 연행된 종목은 칼을 삼키는 탄도(呑刀)와 불을 토하는 토화(吐火)이다. 『고려사(高麗史)』 권122 「열전」 35 「백선연(白善淵)」 조에 수희(水戱)를 연행하던 중 귀신놀이를 하면서 불을 토하던 연희자가 실수로 배 한 척을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말 이색(李穡, 1328-1396)의 〈구나행(驅儺行)〉에도 "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칼을 삼키기도 하네(吐出回祿呑靑萍)"라는 구절이 있어, 공연예술로서 탄도와 토화의 연행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둔신현법〉 『점석재화보』
왕(毅宗)이 수희를 구경하려고 내시 박회준 등에게 명하여 오십여 척의 배에다 모두 색이 고운 돛을 달고 악기(樂伎)와 채붕과 고기잡이 도구를 싣게 했다. 왕 앞에서 여러 가지 연희를 하던 중 어떤 사람이 귀신놀이(鬼戲)를 하면서 불을 머금었다 토하다가 실수하여 배 한척을 태워 버리자, 왕이 크게 웃었다.
王欲觀水戲 命內侍朴懷俊等 以五十餘舟 皆掛彩帆 載樂伎 綵棚及漁獵之具 張戲於前 有一人 作鬼戲 含火吐之 誤焚一船 王大噱.
이외에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와 있던 외국인이 환술을 행했다는 기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 문종 정유 11년(1057) 7월 임진일 조에 송나라 귀화인 장완(張琬)에게 그가 공부한 둔갑삼기법(遁甲三奇法)과 육임점술(六壬占術)을 시험하고 태사감후(太史監候)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97 「열전」 10 「유재(劉載)」 조에도 송나라 사람 호종단(胡宗旦)이 잡술에도 통달하여 자주 염승(厭勝, 귀신에게 기도하여 남에게 화를 주게 하는 것)의 요술을 보였는데, 예종의 특별한 총애와 우대를 받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권직한림원(權直翰林院)을 거쳐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등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남만(南蠻)사람 왕삼석(王三鍚)이 음양환술을 잘하여 왕으로부터 벼슬을 얻은 내용을 『고려사』 권124 「열전」 37 「왕삼석(王三鍚)」 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행한 환술은 주술이나 방술의 성격이 강하다. 불교와 도교가 성행한 탓에 둔갑, 음양환술 등을 부릴 줄 아는 외국인이 다수 있었으며, 이들은 조정의 중심에서 일정 정도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만연어룡지희(曼衍魚龍之戱)와 탄도, 토화가 연행되었다. 성종(成宗) 19년(1488) 3월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 의하면, 중국 사신의 영접시에 평양·황주(黃州)와 서울의 광화문에서 산대를 가설하고 백희를 공연했다고 하는데, 이 중에 만연어룡지희가 보인다.
〈탄도〉 『삼재도회』
연속해 모여드는 거마(車馬) 소리가 울리고, 만연어룡지희(曼衍魚龍之戱)가 나온다.(이하는 모두 백희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는 광경을 말한 것이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래산과 영주산이 있는 바다 해를 싸고(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성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 원숭이는 아들을 안고 무산협(巫山峽) 물을 마신다.(사람의 두 어깨에 두 어린아이를 세우고 춤을 춘다) 땅재주를 넘으매 상국(相國)의 곰은 셀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울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훌륭한 말이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리매 가볍기는 능파선자(凌波仙子, 미인의 모양으로 가볍게 걷는 자)와 같고, 외나무 솟대를 타는 모습(躡獨趫)에 날뛰는 산귀신인가 놀라며 본다. 사자와 코끼리를 장식했는데, 모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썼고, 원조(鵷鳥)와 난조(鸞鳥)의 춤을 추매, 들쑥날쑥한 꿩 꼬리를 모았도다.
동월이 본 백희의 내용은 만연어룡지희·무동·땅재주·솟대타기·각종 동물춤 등이었다. 이 시만으로는 만연어룡지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 어떻게 연행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중국의 경우 만연어룡지희는 비목어(比目魚)에서 용으로 변하는 대규모의 환술 연희였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만연어룡지희(蔓延魚龍之戱)는 황금을 토한다고 해서 함리(含利)라고 불리던 상서로운 동물이 외눈박이 물고기인 비목어로 변신한 후, 비목어가 다시 용으로 변신하는 대형환술이다. (☞ 만연어룡지희 항목 참조)
토화와 탄도도 여전히 연행되었는데, 우리나라 연희자에 의해 연행된 것이 아니라 중국 사신과 동행한 놀이꾼에 의해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정동(鄭同)이란 자의 두목(頭目)이 갈고리를 삼키고(呑鉤) 불을 뿜는 연희를 연행한 사실이 『성종실록(成宗實錄)』 12년 6월 21일 조에 보인다.(☞ 토화, 탄도 항목 참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맹현(李孟賢)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 대저 갈고리를 삼키고 불을 토하며 익살부리고 희롱하는 것은 다 눈을 속이고 협잡하는 요술이므로, 쫓아서 멀리해야만 할 것인데, 전하께서 번번이 청연(請宴)하던 날에 정동의 두목(頭目)이 앞에서 잡희를 벌이도록 허가하고, 혹 그 요술을 다시 부려 보게 하시며 즐겁게 구경하는 빛을 짐짓 보이고 상으로 베(布)를 넉넉히 주십니다. 그래서 그 요술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상이 후한 것을 이롭게 여기니, 기희(技戱)가 날마다 늘어가고 상도 많아집니다. 저들이 어찌 전하께서 실은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나 억지로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임을 알겠습니까?
정동(鄭同)은 중국 사신으로 조선에 온 사람인데, 정동의 두목은 정동과 함께 조선에 온 중국 연희자이다. 위 상소문은 성종이 그에게 잡희를 벌이도록 허락하고, 연희를 보고 상으로 베까지 넉넉히 주는 모습을 비판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연희자가 환술 종목을 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환술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사가 『영조실록(英祖實錄)』 39년 1월 30일 조에 보인다. 태학(太學)의 전복(典僕)인 주영흥(朱永興)이 손재주로 노끈을 만들어 묶은 뒤 순식간에 풀고, 보이지 않는 글자를 알아맞혔으며, 돈의 양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궤술(詭術)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공연예술로서의 환술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의배가 공술(供述)하기를, "신이 임채우의 집에 갔더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고, 이웃 사람 정창욱(鄭昌郁)도 또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창욱이 신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저기 와 있는 자는 지극히 수상하다. 처음에 돈을 빌려 달라 청했고, 또 요술이 있으니, 매우 괴이하다' 하길래, 신이 그 시말(始末)을 물었더니, 정창욱이 '그 사람이 처음에 돈 천 꿰미를 빌려 줄 것을 청했는데, 주인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을러대기를, 6월 무렵에는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것이니 앞으로 나를 따라 마전(麻田)·적성(積城) 사이로 간다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라고 했습니다. 또 칼로 종이를 잘라 노끈을 만들어 단단히 묶어 주인의 앉은 자리 밑에 넣어 두었는데, 조금 있다가 꺼내 보니 죄다 풀려 있고 묶은 곳이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 '능히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써서 봉한 글자를 알 수 있다'고 했으므로, 과연 '금도(金刀)'란 두 글자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써 가지고 손으로 문질러 와서 그 앞에 두었더니, 그 사람이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다가 곧 연적(硯滴) 위에 그 글자를 썼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이 또 주머니를 열고는 더듬어 보게 했으므로 손을 넣어 더듬었더니 단지 5문(文)의 돈만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맨 손으로 그 주머니를 열고 움켜낸 것이 50전(錢)에 가까웠고, 그 돈을 거두어 그 주머니에 넣게 한 뒤 사람을 시켜 다시 더듬어 보게 했더니 단지 5문의 돈만 있었습니다. ······"
임채우에게 물으니, 공술하기를, "이달 10일 무렵에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하는 주영흥(朱永興)이라 이름하는 자가 갑자기 찾아와 천 냥의 돈을 빌려 줄 것을 청했는데, '5백 냥은 오늘 빌리고 5백 냥은 또 3월 16일에 빌려 장차 공주(公州)의 도인(道人)에게 주어 액막이(度厄)를 할 것인데, 이와 같이 하면 5월 무렵에 비록 난리가 있더라도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했습니다. 신이 듣고 매우 두려운 나머지 돈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주영흥이란 자가 또 묶인 노끈이 저절로 풀어지는 법과 주머니 속의 돈이 가득 찼다가 줄어드는 술수와 글자를 써서 스스로 알아내는 재주로 그 재능을 자랑했습니다. 또 '난리' 등의 말로 을러대기도 하고, 또 관상술로 꾀기도 했습니다."
인용문과 함께 『영조실록』에서 주영흥과 관련된 일련의 기사를 살펴보면 그가 임채우라는 자에게 앞으로 난리가 날 것인데 천 냥을 주면 공주(公州)의 도인에게 액막이를 하여 화를 면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돈을 청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사기치는 데 그가 가진 재주를 사용한 것인데, 주영흥의 신분이 주목된다. 주영흥은 반인(泮人)이다. 태학은 성균관을 말하며 태학의 전복이라면 잡역을 맡아 하는 노복(奴僕)으로 반인이라고도 했다. 반인이 가면극과 산대잡희 등의 공연예술을 연행하던 담당층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행했던 모습은 당대 암암리에 연행되던 환술 공연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편 공연예술로서의 환술에 대한 연행 기록으로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민간에서 주술화되고 사기행각에 이용되었던 사례들은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그 원리가 환술 공연과 동일하여 주목된다. 『선조실록(宣祖實錄)』 34년 4월 3일 조에 중국인 섭정국(葉靖國)이 요술을 부려 "수탉의 눈에 못을 박았다가 뽑았으나 멀쩡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2년 12월 25일 조에는 이영필(李英弼)이라는 자가 "붉은 글씨로 쓴 글과 부적들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시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로 갈라놓기까지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화학의 원리를 응용한 환술도 있었으니 『성종실록』 4년 11월 14일 조에 이계생(李戒生) 등이 "사람의 젖으로 재(灰)를 개어 종이에다 혹은 글자를 쓰거나 혹은 불상(佛像)을 그려서, 그것을 물에 담그면 백문불상(白文佛像)이 되고, 불에 비치면 적문불상(赤文佛像)이 되는" 요술을 부렸다는 기사가 있다. 서부술(書符術)은 종위 따위에다 글이나 그림을 그려서 실물로 바꾸거나 없어지게 하는 환술인데, 화학적 변화를 이용했다. 또한 『고종실록』에는 죄인 이필제(李弼濟)가 천만가지 변신술을 쓰면서 법망을 빠져나갔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 기사 중 대부분은 죄인을 벌하기 위해 국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환술을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문헌설화 등 문학적 공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환술이 확인된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양한 환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전우치가 행한 환술 중에는 중국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 권5 「투도(偸桃)」 편에 기술된 천궁투도(天宮偸桃)와 완전하게 같은 내용이 있고, 전우치가 밥알을 씹다가 뜰을 향해 내뿜으니 하얀 나비로 변했다는 변희법(變戱法)도 보인다. 곽치허(郭致虛)는 씨를 뿌려 순식간에 열매를 맺게 하는 종과(種果) 환술을 잘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타난 도술담은 비록 공연예술로서의 기록은 아니지만, 당시 환술에 대한 다양한 일화가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 문헌 중 연행록에는 많은 환술 공연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조선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에서 보고 지은 것이다. 조선은 예와 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예악사상에 기반한 왕조국가였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에 맞게 비교적 느슨하게 다양성을 인정하며 통치하는 체제를 유지했다면, 조선은 비교적 강하게 사회문화 전반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공연예술 역시 사회통합을 위한 '악(樂)'의 개념에 부합하는 대상만 연행되었으며, 이는 환술이 공연예술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 환술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 대광대패, 솟대쟁이패의 공연종목 중에 얼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술이다. 얼른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남사당패의 일원 중 얼른쇠가 있었다고 하니 얼른의 연행 여부는 확실한 듯하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당시 일본에서 매우 유명했던 여류 마술사의 공연이 궁궐에서 연행되기도 했다. 1911년 9월 8일에는 고종을 모시고 중화전(中和殿)에서 쇼쿄쿠사이 덴카쓰(松旭齋天勝, 1886-1944)의 공연이 연행되었다. 1913년 11월 17일에는 순종이 창경궁 식물원에서 일본 고위 관료를 접견하고 만찬을 하사한 뒤, 창덕궁 인정전에 돌아와 덴카쓰 일행(天勝一座)의 기술(奇術)을 참관했다. 1915년 10월 24일에도 만찬회(晩餐會)의 여흥으로 불꽃놀이(烟火) 및 덴카쓰 일행의 연예를 관람했다. 일본의 여류 마술가인 쇼쿄쿠사이 덴카쓰는 쇼쿄쿠사이 덴이치(松旭斎天一)의 제자로 입문하여 17세부터는 극단의 인기 스타가 되었으며, 스승의 사후에도 극단을 이끌었다. 타고난 미모와 대대적인 연출로 마술의 여왕이라 불렸다. 이처럼 궁궐에서 덴카쓰 일행의 공연이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적 기술이 접목된 마술의 유입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내용 및 특성
한국에서 연행된 환술은 비교적 많지 않지만, 다른 나라의 기록을 참고해 볼 때 매우 다양한 종목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술 공연의 원리는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표면적으로는 같은 연희로 보이지만 다른 연출방법에 의해 연행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칼을 삼키는 탄도의 경우 연희자에 따라서 실제 삼킬 수도 있고, 특수 제작한 칼로 삼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은 기법들로 이루어진 종목들을 환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기묘한 변화를 통하여 헛보이도록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환술의 본질 때문이다. 따라서 환술은 그 변화양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거나 여러 개로 만들기
빠른 손놀림과 도구를 이용하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종류의 환술을 말한다. 씨를 뿌려 순식간에 과일을 따는 종과(種瓜)류의 환술이나, 오색 구름을 일구고 꽃이 흩날리며 떨어지게 하는 환술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 돈의 양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변전(變錢)도 있다. 빠른 손기술이 요구되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하여 부채나 막대기 등의 보조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종과(種果)는 씨를 심어서 즉석에서 순식간에 자라게 하여 열매를 먹는 환술이다.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은 종수(種樹)라 불렀고, 과일을 심어서 자라게 하는 것은 종과나 식과(植果)라고 불렀다. 그 대상은 흔히 참외나 오이 등이며, 대추를 심어서 자라게 하면 식조(植棗), 배를 심어서 자라게 하면 종리(種梨)라고 불렀다.
『한서(漢書)』 권61 「장건(張騫)」 전에 "현(眩)은 환(幻)과 같은 말인데, 지금의 탄도(呑刀), 토화(吐火), 식과(植果), 종수(種樹), 도인(屠人), 절마(截馬)의 술(術)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본래 서역에서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식과·종수가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국 한대에 이미 환술의 대표종목으로 자리잡았다.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의 고승 불도징(佛圖澄)은 바리때(승려의 밥그릇) 안에 맑은 물을 부으면 연꽃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환술인 '발내생연(鉢內生蓮)'을 행함으로써, 후조(後趙)의 두 폭군인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를 감복시켰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당대(唐代) 마상(馬湘)이 종과 재주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진남북조 시기 좌자(左慈)가 보여준 환술 중에 생강을 심어서 나게 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 또한 종과로 볼 수 있다. 『수신기(搜神記)』 「서광(徐光)」 조에도 참외를 심어서 자라게 하는 환술이 적혀 있다. 종과의 레퍼토리는 씨 구해서 심기→순식간에 자라서 열매 맺기→주변 사람들에게 대접하기 등의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종수(種樹)는 종과처럼 묘목을 심은 후 순식간에 큰 나무로 자라나게 하는 환술로 생각된다. 한대 화상석에서 공작의 앞에 나무를 붙들고 서 있는 사람 역시 종수를 연희하는 연희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신선 세계를 묘사하는 여러 신수(神樹)는 별도의 배경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저 배경으로 처리되는 여러 무대장치와는 달리 환술가가 일정한 연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형체 변화시키기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훼손된 것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는 환술을 말한다. 대표종목으로는 어룡만연(魚龍曼延)처럼 비목어가 용으로 변하는 환술이나 손을 묶은 뒤 스스로 푸는 자박자해(自縛自解) 등이 있다. 어룡만연을 연행할 때 중국에서는 대나무 따위로 사물의 틀을 만든 후 그 위에 종이나 천을 덧발라 놓은 모형인 채찰(彩扎)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한국도 특수한 도구를 사용했으리라 추정된다. 어룡만연 외에 둔갑술이나 변신술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환술에는 순식간에 얼굴 모습을 바꾸는 변검(變臉)도 있다. 일찍이 당나라 때 장과로(張果老)는 머리카락과 치아가 새로 나게 하여 젊은 얼굴로 바꿀 수 있었으므로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한다. 원대(元代) 잡극(雜劇)에는 다음과 같이 얼굴 모습을 바꾸는 환술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경극(京劇) 〈지격미후황(智激美猴王)〉에서는 손오공이 공중제비를 하면서 공주(公主)에서 손오공으로 변신하는데, 변신술로 손오공의 신통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은 후대 변검이라는 종목이 생겨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변검은 연희자들이 고개 돌리기, 팔 쳐올리기, 다리 차기, 몸 비틀기 등의 동작을 하는 순간 얼굴 모습이 바뀌는 것이다. 변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기법은 가늘고 질긴 끈으로 조종하여 원래의 얼굴을 찢어 내는 차검(扯臉)이다. 중국의 변검왕으로 불리는 왕도정(王道正)은 변검을 하려면 "몸통, 가슴, 손발 모두가 순서대로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끈이 몸통, 가슴, 손발 등 몸의 곳곳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작과 함께 끈을 잡아당기면 자연스럽게 얼굴 천이 찢어지면서 모습이 바뀐다.
칼 감추기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큰 칼을 꺼냈다 감추었다 하는 환술이다. 칼 감추기는 장도(藏刀)라고도 부르는데,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지방극인 천극(川劇)에서는 흔히 이용하는 환술기법 중의 하나이다. 칼 감추기는 인물의 음흉하고 교활한 이미지를 잘 부각시킨다. 천극 〈소방살선(蕭方殺船)〉에서 강낭(康娘)의 미모를 탐내는 소방이 허리에서 칼을 빼내어 김대용(金大用)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발각될까봐 순식간에 칼을 감춘다. 「금자(金子)」에서는 대성(大星)의 아내 금자를 빼앗은 추호(虎)가 대성과 결투를 벌이려고 한다. 검을 빼들었던 추호는 금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바로 옷 속으로 검을 감추며 아닌 척한다. 이 두 극에서는 장도를 통하여 소방과 추호의 음흉한 진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사람이나 동물 신체의 일부를 훼손시킨 다음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는 분형(分形)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혹형술은 대개 서역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칼로 혀를 긋거나 잘랐다가 다시 원래대로 잇는 단설부속(斷舌復續), 사람의 창자를 빼냈다가 다시 잇는 추장속단(抽腸續斷) 또는 자장위(刺腸胃) 등은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일부분을 잘랐다가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도인(屠人), 박인(剝人), 칠성법(七聖法), 자지해(自支解)는 사람을 토막 내어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것이다. 당나귀를 죽였다가 살리는 박려(剝驢), 말을 죽였다가 살리는 살마(殺馬)·절마(截馬)는 동물을 토막 내어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환술이다. 그 외 소와 말의 머리를 바꿔 놓았다가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역우마두(易牛馬頭)와 사람이 말의 항문을 통해 뱃속에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입마복무(入馬腹舞)도 분형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천심인(穿心人)은 사람의 가슴을 장대로 꿰서 메고 가는 환술이다. 송대에는 천심입공(穿心入貢)이라 불렀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효당산(孝堂山) 출토의 화상석에서 천심인을 발견할 수 있다. 세 사람이 한 팀인데, 장대로 한 사람의 가슴 부분을 꿰뚫고, 두 사람이 그 장대를 어깨에 메고 가는 모습이다.
천심인(穿心人) 산둥성(山東省) 효당산 화상석
칠성법은 사람을 토막 냈다가 원래 모습으로 환원시키는 환술이다. 송대 『서호노인번승록(西湖老人繁勝錄)』과 『무림구사(武林舊事)』에 의하면 칠성법 환술이 유행했다. 송대의 전문공연장인 와사(瓦肆)에서 공연한 연희자 중 장칠성(張七聖)이란 유명한 환술 연희자가 있었는데, 그는 칠성법에 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칠성법의 비밀은 칼에 있다. 진짜 칼과 가짜 칼 두 개를 준비하며, 가짜 칼 손잡이에 피를 넣어두고, 칼날 부분은 움직일 수 있게 장치를 해놓는다. 공연할 때 진짜 칼로 관객들에게 확인시키고, 적당한 기회에 칼을 바꾸어서 사람을 토막 내는 시늉을 한다. 나중에 다시 진짜 칼을 집어 들고 관객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조 34년(1601) 중국인 섭정국이 수탉의 눈에 못을 박았다가 뽑았으나 멀쩡했다는 기사와 광해군 12년(1621) 이영필이 시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로 갈라놓았다는 기사는 이러한 종류의 환술로 여겨진다.
입마복무는 『신서고악도』에 보이는 환술 종목이다. 키가 큰 말 한 마리를 준비하고, 공연이 시작되면 연희자는 말 뒤에서 말의 배로 들어간다. 연희자의 하반신은 밖에 말의 엉덩이 쪽에 나와 있는데, 상반신은 말 입으로 나오고 있다. 도판에서 보면 말과 사람의 비례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대나무로 말 형상의 틀을 만든 후 그 위에 종이, 흙, 천 등 재료를 붙여 만든 모형인 채찰(彩扎)로 된 가장 도구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환술종목은 후대의 백희 잡기 중 분신술의 초기 형식이다.
(3) 위치 변화시키기
사람이 사라졌다가 다른 위치에서 다시 나타나거나 공중부양(空中浮揚)하는 환술을 말하며, 몸을 숨기는 둔술(遁術)과 공중부양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라악 입호무(入壺舞)는 둔술의 대표적인 종목이다. 항아리나 상자 등에 빈 공간을 만들거나 다른 공간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두 연희자가 한 사람인 것처럼 연출하여 감쪽같이 속이는 수법으로 연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비슷한 모습으로 가장한 두 사람이 두 항아리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가서, 한 사람은 항아리로 들어가는 연희를 하고 그 항아리에 숨어 있는다. 그리고 반대편 항아리 속의 사람은 항아리 밖으로 나오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공중부양은 장치를 숨겨서 사람이나 물건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술이다.
(4) 화학적 변화 이용하기
자연과학의 원리에 뛰어난 연기력을 더하면 멋진 환술을 연출할 수 있는데, 불을 토하는 토화(吐火)나 종이 따위에다 글이나 그림을 그려서 실물로 바꾸거나 없어지게 하는 서부술(書符術) 등이 대표적이다.
토화는 입 안에서 불을 내뿜는 환술로 두 가지 방법으로 연출이 가능하다. 하나는 불씨를 잘 포장해서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불씨를 내뱉는 동시에 불을 지피는 방법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기름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있다가 불을 붙일 수 있는 송향분(松香紛)을 이용하여 타오르도록 할 수 있다. 현재 충청도 지방에서 행해지는 미친굿에서도 불 토하기가 귀신을 쫓는 수단으로 연행된다. 미친굿은 귀신이나 도깨비로 인해 병이 든 환자를 치유하기 위한 굿으로, 이 과정 중 가장 강렬한 축귀의식인 화전치기는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환자에게 씐 도깨비를 위협하고 석유를 입에 물고 있다가 불을 토해내는 것이다. 또 성종 4년(1473) 이계생이 재(灰)를 젖으로 개어 종이에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물에 담그면 흰색으로, 불에 비치면 붉은색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는 화학적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초석(硝石)을 물에 섞은 후 붓에 그 물을 묻혀 글자를 쓰거나 그린다. 글자와 도판이 마르면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그것을 향불에 쬐면 글자와 도판이 다시 나타난다. 색깔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도 종이와 물에 비밀이 있다. 종이는 보통 종이가 아닌 강황지(薑黃紙)를 사용하고, 물은 소다수를 사용한다. 강황이 소다를 만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화학적 변화를 이용한 것이다.
끓는 솥에 손을 넣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식초와 기름의 화학적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먼저 식초 10근을 가마솥에 넣고 기름 15근을 다시 넣는다. 기름은 물 위에 뜨는 성질이 있으므로 식초의 표면에 있을 뿐 식초와 섞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마솥 안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보면서 아주 뜨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식초의 온도는 아주 높지만 그 위에 있는 기름은 아직 그다지 뜨겁지 않다. 손을 넣었을 때 온도는 60도쯤 밖에 되지 않아 따뜻할 뿐이다. 무당이나 방사, 도사들은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신통함을 과시하며 사기행각에 이용하기도 했다.
토화는 등유, 소금, 용뇌향(龍腦香)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연소 가능한 물질을 만든 후 새지 않게 잘 싸서 입속에 머금고 있는다. 토화를 연출할 때 연소 물질을 내뱉는 동시에 재빠르게 성냥으로 그으면 커다란 화염을 내뿜는 토화를 연출할 수 있다.
(5) 고행(苦行)의 결과
수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 환술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칼이나 창, 침 등 날카로운 물건을 삼키는 탄도 류의 환술이 있으며, 현재 무속 등에서 신통력을 보여 주기 위해 작두나 칼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는 등의 행위도 여기에 해당한다.
입안에 칼이나 바늘, 긴 창을 넣었다가 빼내는 탄도류의 환술은 가짜를 진짜와 적절한 때에 교묘하게 바꿔치는 수법으로 연행되기도 한다. 반면 실제로 수년 동안 입 속으로 칼, 바늘, 창 같은 것을 넣는 훈련을 통하여 공연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오랜 시간 동안 단전(丹田)의 기(氣)로 칼을 천천히 식도로 넣는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이물감을 느끼지 않도록 단련한다.
작두나 칼 사다리를 밟는 환술은 중국과 한국의 무당들이 굿에서 자주 보여 주는 재주이다. 칼 사다리 밟기는 오랜 기간 고된 훈련을 거쳐서 완성된다. 먼저 대나무조각으로 반복적으로 훈련한다. 그 다음 무딘 칼날로 연습하다가 평형을 잘 유지할 수 있으면 칼을 날카롭게 갈아서 훈련한다. 칼날을 갈 때는 호형(弧形)이 아닌 직선으로 갈아야 한다. 앞으로 내디딜 때 숨을 들이쉬고, 두 발이 칼날에 닿았을 때 숨을 내쉬면서 고도로 집중해서 칼날 위에 올라선다. 이때 살이 두터운 용천혈(湧泉穴)쪽으로 밟으며, 발이 칼에 닿았을 때 방향을 틀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방향을 틀다 보면 칼에 베이기 쉽기 때문이다. 칼 사다리를 밟기 전에 발에 간수를 바르면 발이 단단해지면서 칼날을 밟아도 덜 아프게 된다.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구마라집(鳩馬羅什, 344-413)은 숟가락으로 바늘을 먹는 환술인 식침(食針)을 행했다고 한다.
와검상무(臥劍上舞)는 칼을 세우고 날카로운 칼끝 위에서 춤추는 환술이다. 이것은 원래 바라문(婆羅門) 기예의 하나로, 당(唐) 예종(睿宗) 때 천축(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이다. 『신서고악도』의 와검상무에서 연희자는 끝이 예리한 칼끝에 누워서 춤을 추고 있다. 또 티베트 쌍연사(雙鳶寺) 대회랑(大回廊) 벽화에서도 두 칼 위에 배를 대고 반듯하게 엎드려 동작을 취하고 있다.
주화(走火)는 불 위를 마음대로 걸어 다니는 환술로 이화(履火)라고도 한다. 『열자(列子)』에 의하면, 주나라 목왕 때 서극지국(西極之國)에서 온 환술사가 물이나 불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명대의 『삼재도회』 〈주화도(走火圖)〉와 청대의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마피신술(馬皮神術)〉에서 주화의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주화도(走火圖)〉 『삼재도회』
인접 국가 사례
중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환술의 전통이 활발하게 전하여 다양한 환술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 한대(漢代) 이전에는 무당과 방사들이 신통력을 보여 주기 위하여 환술을 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열자』 「주목왕(周穆王)」 편에 서극(西極)에서 온 화인(化人)이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고, 쇠와 돌도 뚫었으며, 산천을 바꾸고 성읍을 옮겼다. 허공을 타고도 추락하지 않고 실체에 부딪쳐도 장애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유흠(劉歆)이 기재한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동해황공이 구름과 안개를 즉시 일으키는 입흥운무(立興雲霧)와 앉은 자리에서 산천을 만들어내는 좌성산천(坐成山川)에 능했다는 내용이 있다.
한대에는 서역에서 유입된 환술과 함께 중국의 자생적인 전통 환술이 한층 발전하면서 산악·백희의 중요한 종목으로 자리잡았다. 문헌에 의하면 한대의 환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장형의 〈서경부(西京賦)〉 등을 통해 신화적 장면의 연출이 환술의 발전에 이바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행 종목은 대체로 어룡만연, 획지성천(劃地成川), 입흥운무, 좌성산천, 역모(易貌), 분형(分形), 탄도, 토화, 자지해(自支解), 역우마두(易牛馬頭)와 자박자해 등이 있었다. 특히 토화, 탄도, 자지해 등은 서역에서 유입되었는데, 종교의 포교를 위한 수단으로 연행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에는 불교와 도교의 성행으로 내용과 공연 형식에 신비한 색채가 많이 수용되었다. 대형 환술인 황룡변(黃龍變)은 어룡만연에서 한층 발전하여 규모가 더 크고 변화무쌍해졌다. 또 좌자가 보여 준 네 가지 환술은 대규모 궁정 환술 외에 소규모 환술도 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좌자는 빈 쟁반에서 고기를 낚고, 빈 접시에 생강을 심어서 나게 했으며, 조조가 준비한 술과 육포를 날라 관리들에게 나누어 먹이고, 조조의 위협에 순식간에 몸을 숨기는 둔술(遁術)을 행했다. 이렇듯 관객과의 거리도 가깝고,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는 환술은 친밀감을 통해 환술의 대중화와 보편화에 큰 역할을 했다.
수당오대(隋唐五代) 시기에는 서역에서 전래된 탄도와 토화가 주요종목으로 자리잡아 『악부잡록(樂府雜錄)』 「고가부(古架部)」에 대표 종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종과, 변전(變錢), 입마복무, 와검상무(臥劍上舞) 등 다양한 환술 종목이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특히 변전은 복잡한 장치 없이 빠른 손놀림으로 신기한 변화를 연출하여 순수한 수법(手法) 형식의 체계가 상당히 갖추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 환술에 정통한 방사와 도사들도 많았는데, 특히 한상자(韓湘子)가 즐겨 연행했던 순식간에 술을 빚는 경각양주(頃刻釀酒)와 불 항아리에 화분을 재배하는 화항재분(火缸栽盆)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송대에 편찬한 『태평광기(太平廣記)』에서는 당대의 도사 마상(馬湘)이 펼친 종과, 둔술, 서부술 등 여러 가지 환술을 소개하고 있다.
송원(宋元)대에는 자석, 화약 등의 발명에 힘입어 과학기술을 접목한 환술이 발달했으며, 수법환술(手法幻術)·촬롱(撮弄)·장협(藏挾)으로 대표되는 분류화·체계화 경향이 나타났다.
수법환술은 환술의 기본기능으로, 연희자가 민첩한 손동작에 의하여 작은 물건을 마음대로 생겼다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특별한 기계 장치 없이 전적으로 빠르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연행되는 수법환술로는 이환(泥丸)이 대표적이다. 이환은 작은 사기그릇을 교묘하게 뒤집었다 엎었다 하는 사이에 진흙알이나 팥알이 끊임없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환술이다. 이는 도가의 '무중생유(無中生有)', 즉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는 철학이론에 근거해서 창작된 것으로서 연희의 표현이 한층 풍부해졌다. 송대 『번승록(繁勝錄)』에 이환 종목의 구체적인 공연형식이 소개되어 있는데, 탁자 위에 두 개의 작은 대접을 엎어 두고 그 안에 다섯 개의 진흙알이나 팥알을 넣어둔 다음, 대접을 뒤집었다 엎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진흙알이나 팥알이 나왔다 들어간다. 또한 '일립하종(一粒下種, 씨 하나를 심는다)'부터 열 알의 '주환합포(珠還合浦)', 심지어 진흙알이나 팥알이 그릇 가득한 '추수만과자(秋收滿顆子)'로 변하게 할 수도 있다.
촬롱은 빠른 손재주나 일부 간단한 기계장치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변하게 하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촬롱을 수기(手技)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작희법(作戱法), 변희법(變戱法)이라 부른다. 촬롱은 때로 기계장치를 갖춘 도구들을 사용해야 하고, 공연 중에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연출해야 하므로 수법환술과 다르다. 촬롱은 당대(唐代)에 이미 공연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대에는 일정한 체계를 갖춘 대표적인 환술 종목으로 자리잡았다. 이 시대에 성행한 촬롱 종목 중 유명한 것은 화분의 꽃이 약재로 변하는 성화촬약(聖花撮藥), 빈 그릇 안에서 술이 나오는 촬미주(撮米酒), 크고 작은 빈 상자에서 작은 새와 작은 짐승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놓아 주는 촬방생(撮放生) 등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촬롱 공연에 종사하는 연희자는 뛰어난 기교로 잡기계에서 오랫동안 명성이 자자했다. 『무림구사(武林舊事)』 권6 「제색기예인(諸色技藝人)」 「촬롱잡예」 조에 임우선(林遇仙), 조십일랑(趙十一郞), 장새가(張賽哥), 왕소선(王小仙), 김봉선(金逢仙), 시소선(施小仙) 등 19인이 기재되어 있는데, 전문적으로 촬롱을 업으로 삼은 유명한 환술가들이다. 이런 연희자들을 대부분 소선(小仙), 봉선(逢仙) 등으로 부른 것은 그 공연의 기예가 매우 특색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동작이 빨라서 기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송나라 오자목(吳子牧)은 『몽량록(夢梁錄)』에서 그들의 공연을 "공연은 확실히 신기하고 특별하다. 숨겨서 사라지게 하는 기술은 손재주가 빠르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장협은 사물을 몸에 감추어 관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옮겨서 보여 주는 환술이다. 장협은 일종의 운반환술인데 장액환술(藏掖幻術), 장엽(藏擫)이라고도 불린다. 명·청대에는 당채(堂彩)라 부르기도 했고, 현재는 속칭 고채희법(古彩戱法)이라고 부른다. 장협은 관객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옷이나 소도구가 필요하며, 야외보다는 실내에서 공연되었다. 채소, 장난감, 작은 생물 외에 무겁고 커다란 물건을 옮기기도 했다.
이 환술은 명청대에 이르면 희법(戱法)이라 불렸으며, 종목이 풍부해지고 성숙해지면서 『신선희술(神仙戱術)』과 『아환휘편(鵝幻彙編)』 등 학문적 체계성을 갖춘 저작이 나왔다. 환술은 비교적 신체에 의한 묘기나 곡예적 색채가 적어 다른 잡기에 비해 높게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궁정에서 매년 권농을 위해 행한 권농의례(耕籍筵宴)에서 환술을 공연 종목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이나 부잣집에서 하는 행사 때 마루나 대청 등에서 연행했다. 다른 기예를 하는 연희자도 생존을 위해서 환술을 함께 연행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환술종목으로 통자(筒子), 천궁투도(天宮偸桃)가 있다.
명대에 출현한 통자는 바닥이 없는 빈 통 두세 개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는 환술이다. 통자(筒子)는 바닥이 없는 두세 개의 텅 빈 통을 천 또는 수건으로 이리저리 씌운 후, 통 안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물건을 가득 변환하여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청대에는 나권당당(羅圈當當)이라고도 불렀다. 명대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책상 위에 세 개의 통을 두고 모든 물건을 안보이게 숨긴다. 속이 빈 것을 확인시키고 숨겨둔 것을 뽑아 책상 위를 가득하게 하는데, 비둘기가 날아가기도 하고 원숭이가 뛰어가기도 한다. 보여주기가 끝나면 다시 감추어서 텅 비게 한다"라는 자세한 기록이 있다. 또 명대의 『명헌종원소행락도(明憲宗元宵行樂圖)』에 통자 공연이 그려져 있다. 연희자는 통 위에 수건을 덮어놓고, 통 안에서 물건을 꺼내려고 하고 있다. 현대 마술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청대에 이르러 통이 두 개로 바뀌고 통의 크기의 수배에 달하는 물건들을 변화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청대에 유행한 대표적인 레퍼토리로는 수많은 쌀을 쏟아냈다가 사라지게 하는 만미귀창(萬米歸倉), 술자리를 만들어냈다가 한꺼번에 사라지게 하는 일석전비(一席全飛) 등이 있다. 나권당당은 다양한 물건들을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보여줬다가 나권(羅圈, 보자기) 안으로 사라지게 하고 사라졌다가 또 다시 나타나게 하는데, 변화가 훨씬 다양하다.
〈통자(筒子)〉 『명헌종원소행락도(明憲宗元宵行樂圖)』
천궁투도(天宮偸桃)는 포송령(蒲松齡)이 쓴 『요재지이(聊齋志異)』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환술사가 복숭아를 가져오라는 윗분들의 분부에 서왕모(西王母)의 반도를 훔치고자 하늘로 새끼줄을 던졌다. 새끼줄을 타고 올라간 환술사의 아들은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고, 얼마 후 복숭아와 토막난 아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환술사는 궤짝에 아들의 시체 조각을 주워 담고 애끓는 어조로 장례비용을 보태달라며 호소했다. 돈을 받은 환술사가 궤짝을 치며 아들더러 나오라고 소리치자, 궤짝에서 사지가 멀쩡한 환술사의 아들이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천궁투도는 사지를 잘랐다가 다시 살아나는 자지해, 공중에 매달린 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줄타기, 서왕모가 심은 복숭아를 훔쳐 먹는 이야기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공연이다.
〈투도(偸桃)〉 청대풍속화
파승상천(爬繩上天)과 자지해가 결합한 연희는 원나라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 인도, 중국을 여행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연희는 파승상천과 자지해가 결합되기는 했으나 아직 서왕모의 천도와 결합하기 전 단계를 보여준다.
서왕모는 곤륜산에 살면서 불사약을 관장하는 것으로 믿어졌는데, 동방삭이 서왕모가 심은 복숭아를 훔쳐 먹고 인간계로 내려와 삼천갑자, 즉 1만 8000년을 살았으므로 '삼천갑자동방삭'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동방삭투도(東方朔偸桃)〉가 전해진다.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서왕모의 반도 고사를 차용함으로써 서역에서 전래한 사지를 자르는 자지해는 중국만의 색채를 띤 우수한 환술 공연으로 거듭났다.
청대에는 남북으로 유파가 나뉘었는데, 북파에서는 주연인 사활(使活)과 조연인 양활(量活)이 짝을 이루어 연행되는 반면, 남파에서는 한 명이 주도하고 몇 명의 조수가 도와주는 방식으로 연행되었다. 또 서양과 일본의 마술사들이 중국에 와서 공연하면서 무대장치, 음향효과, 도구, 마술사의 화장과 옷차림 등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일본에서는 환술을 기술(奇術), 데지나(手品) 또는 데즈마(手妻)라고도 한다. 곡예와 통하는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속인다는 점에서 곡예와 다르다. 그러므로 눈속임이라는 뜻의 '메쿠라마시(めくらまし)'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나라 산악 중 환술을 당술(唐術)이라 칭하기도 했으며, 중국에는 없는 단어인 시나다마(品玉)는 에도시대까지 기술(奇術)·요술(妖術)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산악잡희는 성무(聖武) 천황 천평(天平) 연간(729-749)에 일본에 전래되었는데 이때 환술도 함께 들어왔다. 나라시대의 환술은 주문(呪文)을 읽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형태로 주사(呪師)라고 불렸다. 헤이안시대가 되면 산악이 일본화하면서 사루가쿠(猿樂)라 불리고, 주사를 비롯하여 여러 잡기가 맛보기 공연(前藝)으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주사가 사루가쿠에서 독립하여 연행되기 시작하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에서 벗어난 외법(外法)의 술이라는 의미로 외술(外術)이라 불렸다. 이 당시 외술 중에는 나막신을 개로, 짚신을 잉어로 만드는 변수화어술(變獸化魚術), 말이나 소의 엉덩이에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는 마복술(馬腹術), 오이씨를 심고 바로 오이를 맺게 하는 생화술(生花術) 등이 있다.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 1041-1111)의 『괴뢰자기(傀儡子記)』에는 "돌과 모래를 금전으로 바꾸며, 초목에서 새와 짐승이 출몰케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외술은 당시 음양가에 의해 많이 행해졌는데, 아베 세이메이(安部晴明, 921?-1005)라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금석물어(今昔物語)』에 그가 주문을 외워 풀잎을 던지니 두꺼비가 큰 돌에 얻어맞은 듯이 납작하게 죽어버린 일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헤이안시대에 성행한 외술은 가마쿠라시대가 되면서 쇠퇴했다가 무로마치시대에 이르러 다시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이 시대에 많은 명인들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카신거사(果心居士)의 환술은 긴키(近畿) 지방 전설이나 에도시대 개정된 괴이소설에 실려 있다. 그는 치아를 모조리 없앴다가 다시 되살리기도 하고 갑자기 홍수가 나게 했다고 한다. 서옹(恕翁)의 『허실잡담집(虛實雜談集)』에 카신거사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데, 형틀에 묶여 있다가 갑자기 쥐로 변한 카신거사를 매가 낚아채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에 이르러 환술은 기독교도의 마법(魔法)과 동일하게 여겨져 함께 금지되었다. 이에 빠른 손기술과 속임수로 연행되는 평범한 술법만이 방하사(放下師)에게 전해져 연행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데지나로 이어졌다. 이즈모(出雲) 지방의 오쿠니(阿國)가 시죠가와라에서 가부키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 같은 교토 시죠가와라의 가건물에서 다키가와 덴노죠(瀧川傳之丞)가 미세모노(見世物, 공연물)로서의 환술을 흥행시킨 최초의 연희자라고 한다.
〈입마복무〉 『신서고악도』
환술은 에도시대부터 절정을 이루었는데, 대표적으로 줄을 도구로 연행하는 '줄 속이기(繩たらし)'와 '줄 끊기(繩切り)'가 있다. '줄 속이기'는 묶은 줄이 순식간에 풀리는 환술로, 중국의 자박자해와 동일한 원리인데 배역을 나누어 특정한 상황을 연출했다. 일꾼(役人)과 도적으로 분장한 자가 나타나, 일꾼이 도적을 줄로 묶은 다음 소리를 지르면 줄이 저절로 풀렸다. 줄 끊기는 긴 줄을 칼로 끊은 다음, 다시 이어서 관객에게 던지면 원래의 긴 줄이 되는 환술이다. 이 줄 끊기 환술은 중국에서는 속단(續斷)이라고 불렸다.
모모야마시대에 기독교의 마법과 함께 금지되었다고는 하나 요환술(妖幻術) 역시 단절되지는 않았다. 18세기 초 소금상 나가지로(長次郞)라는 방하사가 탄마술(呑馬術)을 연행하여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다. 그는 말을 삼키고 소로 방울받기를 하기도 하는 기괴한 환희를 연행했다. 그를 노래하는 유행가가 거리에서 불리고, 그의 이름을 빌린 가짜 극장이 나타날 정도로 인기였다. 대개 이러한 탄우마술(呑牛馬術)이나 출수술(出水術)과 같은 변화무쌍한 기술(奇術)은 아마도 무로마치시대 환술의 유풍이라 여겨진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이런 종목의 환술이 단절되었는데, 18세기 후반 교토 니조(二條)에 살던 이쿠타 나카즈카사(生田中務)가 기괴한 술법을 행해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단절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초 데지나의 명인으로 에도의 요시가와 슌조(芳川春藏)와 나고야의 사다케 센타로(佐竹仙太郞), 야나가와 잇쵸사이(柳川一蹀齋) 등이 있다. 특히 잇쵸사이는 타니가와 마사요시(谷川定吉)에게 배운 '신난 나비(浮かれの蝶)'로 이름을 날린 후, '용궁(龍宮) 우라시마(浦島)'와 '요괴 인형 데지나' 등 새로운 환술을 선보였다. '신난 나비'는 백지를 잘라 나비를 만들고 부채 바람으로 살아 있는 듯이 조종하는 환술이다. '용궁 우라시마'는 우라시마와 용궁에 사는 선녀인 오토히메(乙姬)가 이별하는 장면 속에 각종 환술을 연출한 것이다. 특히 '요괴 인형 데지나'는 코하다 코헤이지(小幡小平次)라는 가부키 배우의 이야기를 환술 공연으로 엮은 것이다. 유령 역으로 유명했던 코하다 코헤이지는 부인과 내통하던 남자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귀신이 되어 그 남자에게 돌아왔다. 이 시기에는 인기 있던 가부키(歌舞伎)나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 가라쿠리닌교(からくり人形, 태엽 인형·꼭두각시 인형) 중에 환술의 원리를 사용한 것이 많아서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요괴 인형 데지나'는 인접 공연예술의 이야기를 환술 공연에 끌어들여 더욱 볼만한 공연으로 승화시킨 경우이다.
1866년 쵸주로(蝶十郞)와 스미다가와 나미고로(隅田川浪五郞)는 미국인에 고용되어 서양에서 공연했는데, 그 내용이 『등강옥일기(藤岡屋日記)』에 실려 있다. 태엽장치를 단 계란이 비익조(比翼鳥)로 바뀌거나 각종 인형이 높이 2척의 건물이나 용등(龍燈) 등으로 바뀌기도 하고 폭포 등 물을 이용한 환술을 연행했다. 이들은 모두 기계장치를 이용한 공연이며, 요환술류는 거의 절멸했다. 게다가 1876년 영국인 존 말콤과 1878년 청나라 장세존(張世存)이 일본에 와서 참신하고 기발한 서양 마술이나 남경 마술을 연행하여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환술은 점점 쇠퇴해갔다. 키텐사이 세이치(歸天齋正一)는 당시 유행하는 외국 마술과 일본 환술의 결합을 시도했는데, 이후 쇼쿄쿠사이 텐이치(松旭齋天一)에 의해 통일된 후에는 기술(奇術) 혹은 마술(魔術)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의의
환술은 평화의 상징물로 사신들이 가는 곳에서 연행되었으며, 그것은 곧 국가 간의 문화 교류로 이어졌다. 환술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계기는 바로 한무제(漢武帝)의 명을 받아 장건(張騫)이 한나라와 서역의 교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안식(安息)이라고 불리던 페르시아(이란), 선국(撣國)이라고 불리던 미얀마 지역, 그리고 여헌(黎軒)이라고 불리던 로마 및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서역 여러 나라들의 사신들은 한나라 황제를 알현하러 와서, 동행한 환술사가 한나라 황제 앞에서 공연하게 했다. 이런 현상은 환술 역사 전반에 걸쳐 빈번히 나타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술을 요술이라고 지칭하고 환술을 행하는 사람들을 처벌했던 조선시대에도, 중국 사신과 함께 조선에 온 연희자가 환술을 연행했던 기록이 있다. 따라서 뛰어난 환술사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환술은 종교를 널리 포교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등 역사적으로 복잡한 전개 양상을 지닌다. 천축, 곧 인도는 환술고국(幻術古國)이며 불교 발상지로, 중국과 천축의 교류는 대부분 환술 쪽으로 이루어졌다. 위진(魏晉)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이와 더불어 그들의 환술 또한 유입되었던 것이다. 천축에서 중국으로 기예를 바치러 온 사람은 승려와 유랑예인의 두 부류가 있었다. 승려들은 포교를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찰에서 불교 음악을 연주하는 동시에 백희도 공연했다. 이외에 중국의 자생적인 환술은 신선사상과 도교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으며 방사와 도사들 가운데 뛰어난 환술사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백제의 승려인 권륵(權勒)이 둔갑방술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승려로서 불교의 포교가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술은 승려, 도사 외에 무당들도 적극 이용하고 있는데, 그들 또한 신통력을 보여 줌으로써 신도들에게 믿음을 주려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각종 기계장치가 발명됨에 따라 종교적 믿음은 약해졌지만 대신 환술은 공연예술로 승화되었다. 환술은 본질적으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공연예술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환술 공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고, 환상성에 기초한 현실화는 창조를 위한 기폭제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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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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