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타기

솟대타기

정의 및 이칭

솟대타기란 솟대타기 연희자(솟대쟁이)가 어릿광대를 대동하고, 솟대와 같은 장대 위에 올라가거나 신체의 일부로 솟대를 지탱하며 곡예를 하는 연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도로심장(都盧尋橦), 도로장(都盧橦), 상간(上竿), 간희(竿戱), 장간희(長竿戱) 등의 용어를 사용했으며, 명나라 동월의 〈조선부(朝鮮賦)〉에서는 솟대타기를 섭독교(躡獨趫)라고 표현했다. 조선 숙종대 간행된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는 솟대타기를 상간, 연간(緣竿)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 솟대쟁이패의 기예 가운데 쌍줄백이 역시 솟대타기를 일컫는다.

유래 및 역사

삼국시대 연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고분벽화에는 나무다리걷기, 방울받기(弄丸), 수레바퀴쳐올리기(舞輪), 말타기, 칼재주 부리기, 씨름, 수박희 등 곡예에 해당하는 연희종목들과 광수무, 호선무와 같은 무용, 동물재주부리기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뛰어난 예술성을 잘 알 수 있다. 솟대타기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나 도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곡예들은 어느 지역에서나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며, 앞으로 고분을 더 발굴하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솟대타기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고려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솟대타기는 임금 행차, 연등회(燃燈會), 수희(水戱)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문기장자(文機障子)〉라는 시에서는 연등회 때 관람한 솟대타기(緣橦)를 읊었다. 또 〈진강후 저택에서 성가를 맞이할 때 교방의 치어와 구호(晉康候邸迎聖駕次敎坊致語口號)〉에서는 고려시대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는 공식행사에서 솟대타기(尋撞)와 줄타기(走索)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이색의 『목은집(牧隱集)』에도 솟대타기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가 여럿 실려 있다. 9권에 실린 시 〈삼한이라 만 리 먼 나라에서(三韓萬里國)〉에는 "솟대 타는 건 처음 구경했으리(尋橦縱目初)"라는 구절이 있다. 조공을 하러 중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중국의 솟대타기를 구경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또 33권의 시〈동대문부터 대궐 문 앞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한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散臺雜劇前所未見也)〉에 나오는 "긴 장대 위의 연희자는 평지에서 걷듯 하고(長竿倚漢如平地)"라는 구절 역시 당시의 솟대타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색이 본 산대잡극에서는 봉래산 모양의 산대를 꾸미고 처용무와 솟대타기를 연행하고 있었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에도 솟대타기의 연행장면을 묘사한 구절이 나온다. 〈청산별곡〉 7절 "사imagefontimagefont대에 올아셔 imagefont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라는 구절은 '광대가 사슴으로 분장해 짐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것을 듣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슴으로 분장한 광대가 솟대에 올라 악기(해금)를 연주하며 기예를 펼친 것이다. 후대 감로탱에 묘사된 솟대타기 연희자들은 장구를 메거나(〈만월산 수국사 감로탱〉), 대금을 불고 있어서(〈운흥사 감로탱〉) 솟대타기와 악기연주가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일본에 전해졌던 고려악(高麗樂) 탁목(啄木) 역시 고려시대 솟대타기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 일본의 문헌 『호금교록(胡琴敎錄)』에 의하면, 탁목은 일본 아악(雅樂)의 우악(右樂) 즉 고려악에 속하고, 그 내용은 탁목조(啄木鳥)의 탈을 썼다고 추정되는 연희자(技人)가 아주 높은 나무 끝에 올라가 춤을 추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것이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전하는 '탁목장기(啄木橦技)'로 추정된다고 기술했다. 『문헌통고』에 따르면 남조의 양(梁)나라에서는 설날 아침 궁중의 연회 때, 49개의 음악과 잡기를 공연했는데 이 중 9가지가 솟대타기에 해당한다. 즉 고려악 탁목은 장대 끝에 연희자가 올라가 춤을 추는 무악(舞樂)이므로, 장대 끝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설명한 것이다. 탁목이 솟대타기의 일종이면서 아찔한 묘기를 연출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악 탁목은 남북조시대에 공연되었던 탁목장기와 연결되는 산악의 일종인 셈이다. 탈을 쓴 연희자가 음악반주에 맞춰 장대에 올라 기예를 연출하는 것은 후대의 솟대타기 기예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의 솟대타기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문희연 등에서 연행되었다. 조선 초 성현(成俔, 1439-1504)이 나례에서 연행된 공연을 보고 지은 시 〈관나희(觀儺戱)〉의 "백 척 솟대 위에서 잔 잡고 춤추네(長竿百尺舞壺觥)"라는 구절은 나례에서 방울받기(弄丸)·줄타기(步索)·인형극(傀儡)과 함께 솟대타기(長竿戱)가 연행되었음을 전해 준다. 그가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연희들을 묘사한 시 〈관괴뢰잡희(觀傀儡雜戱)〉의 "거꾸로 매달렸다 몸을 날리니 새가 나는 듯하네(跟絓投身條似飛)"라는 구절에서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도 솟대타기가 연행되었음을 전해 주는데, 연희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성종(成宗) 19년(1488) 3월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 의하면, 중국 사신 영접 시에 평양·황주(黃州)와 서울의 광화문에서 산대를 가설하고 백희를 공연했다고 한다. 백희의 내용 중 '섭독교(躡獨趫)'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섭(躡)은 '밟다, 오르다'라는 뜻이고, 교(趫)는 '나무에 잘 오르는 사람'을 뜻하니, 곧 솟대타기를 말한다.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는 당시 중국 사신 영접 행사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화첩의 제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가 묘사되어 있다. 솟대 양 옆에 각각 두 줄씩 매어 솟대를 고정하고, 연희자는 솟대 꼭대기에서 한 손으로 중심을 잡는 기예를 선보이고 있다. 솟대 바로 아래에 소고(혹은 작은 북)로 보이는 악기를 들고 장단을 맞추는 듯한 이가 보이는데, 솟대타기 연희자를 위해 음악반주를 해주거나 연희자와 재담을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솟대타기 장면

솟대타기 장면 아극돈. 『봉사도』. 1725. 제11폭

문희연에서 연행된 솟대타기는 안동 권씨 소장 〈문희연도(聞喜宴圖)〉(1683)와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1843)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안동 권씨 소장 〈문희연도〉는 권양(權讓, 1628-1697)의 아들 넷이 1687-1692년 사이에 모두 대과에 급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충남 서천에서 별도로 거행한 문희연 장면을 그린 것이다. 과거급제자의 집에서는 솔대(솟대)를 세우는데, 등용문(登龍門)의 의미를 담아 솔대 꼭대기에 용을 조각한 나무를 연결해 놓는다. 안동 권씨 문희연도에 묘사된 공연장면에는 두 개의 솔대 꼭대기에 용 조각이 보인다.

〈관우희〉에서는 문희연에서 펼쳐지는 여러 공연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솟대타기는 이 시 서두의 "제비처럼 갑자기 뛰어올라 줄을 타는 도로심장(衝燕躍而走索都盧尋橦)"과 33수의 "솟대 꼭대기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도로장(竿頭倒作都盧橦)"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의 도로심장과 도로장은 중국식 용어로서, 바로 솟대타기를 가리킨다. 제비처럼 갑자기 뛰어올라 줄을 탄다는 것은 솟대의 양쪽에 설치된 쌍줄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솟대타기 장면

솟대타기 장면 〈문희연도〉. 17세기. 안동 권씨 소장

한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각지에 상업 도시가 발달하고, 연희집단이 상인들의 상업 활동과 연계하여 흥행을 벌였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은 당시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라는 그림을 보고 임금의 명(命)에 의해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은 장사가 끝난 뒤에 배우들이 놀랍고도 괴이한 복색을 하고 솟대타기, 줄타기, 인형극, 원숭이 재주부리기 등의 공연을 펼친 것을 묘사했다. 박제가는 "우리나라 솟대타기 천하에 으뜸이라(東國撞竿天下無)"라고 하며, 당시 솟대타기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전하고 있다.

솟대타기는 여러 유랑예인집단에서 연행한 중요 종목 중 하나였다. 유랑예인집단의 연행 장면은 조선 후기 제작된 감로탱(甘露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감로탱은 원래 죽은 후에 '제사 지내 줄 사람 없는 외로운 영혼'인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천도하기 위하여 지내는 수륙재(水陸齋)에서 사용한 괘불탱(掛佛幀)이다. 이 감로탱 하단부에 묘사된 유랑예인들은 수륙재의 천도대상으로서, 감로탱에는 이들의 생전 공연 모습이 등장한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감로탱으로 알려진 일본 약선사(藥仙寺) 소장 〈감로탱〉(1589)과 조전사(朝田寺) 소장 〈감로탱〉(1591) 등 한국 감로탱의 하단부에는 이른 시기부터 전통연희 공연장면과 그 연희자들이 묘사되어 있다. 조전사 소장 〈감로탱〉에는 '쌍줄백이'라고 하는 솟대타기가 그려져 있다. 두 명의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솟대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솟대 꼭대기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솟대타기와 땅재주 장면

솟대타기와 땅재주 장면 〈감로탱〉. 1591. 일본 조전사 소장

조선 말기까지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대광대패 등이 솟대타기를 연행했다. 솟대쟁이패의 주요 공연 종목은 솟대타기로서, 연희자가 놀이판의 한가운데에 긴 솟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쌍줄을 늘여 놓은 다음, 솟대와 쌍줄 위에서 여러 가지 기예를 펼쳤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생겼다. 솟대쟁이패는 1930년대 이후 사라져 버렸다. 후에 남사당패의 일원이 된 송순갑(宋淳甲, 1912-2001)은 본디 솟대쟁이패 출신으로서 살판쇠(땅재주꾼)였다. 그에 따르면 솟대쟁이패의 공연 종목은 풍물, 땅재주, 얼른(요술), 줄타기, 병신굿, 솟대타기 등의 여섯 가지였다. 솟대타기는 쌍줄백이라고도 불렀는데, 높은 장대 위에 오늘날의 평행봉 너비의 2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떡고물 묻히듯이 줄 위를 빙글빙글 구르기) 등의 묘기를 연행했다.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에 그려진 솟대쟁이패는 솟대타기·방울쳐올리기·죽방울놀리기 등을 공연하고 있다. 죽방울놀리기를 중국에서는 공죽(空竹), 일본에서는 윤고(輪鼓)라고 부른다. 솟대쟁이패는 1910년대까지 광무대 등 근대식 공연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솟대타기, 방울쳐올리기 연희 장면

솟대타기, 방울쳐올리기 연희 장면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초라니패의 초라니도 솟대타기를 했다. 원래 '초라니'는 요사스럽게 생긴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라니패는 '초라니굿'이라 부르는 가면극을 위주로 하면서 풍물·얼른(요술)·죽방울받기 등을 공연하며 떠돌아다녔다. 초라니가 솟대타기를 연행하는 모습은 〈변강쇠타령〉 중 '변강쇠의 치상 장면'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초라니가 '짐대 끝에 앉아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요란한 복색을 한 모습으로 장구를 치면서 〈액막이 고사소리〉를 하는 장면은 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 〈만월산 수국사(守國寺) 감로탱〉(1832)에 묘사된 솟대타기 연희자와 매우 유사하다. 솟대타기 연희자는 얼굴에 가면을 착용하고 있는데, 초라니의 가면을 '도리도리 두 눈구멍 흰 고리테 두르고, 납작한 콧마루에 주석(朱錫)대갈 꼿꼿한 센 수염이 양편으로 펄렁펄렁'이라 묘사한 〈변강쇠타령〉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이다.

경남의 야류와 오광대의 발상지인 합천군 덕곡면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패가 공연한 공연종목 가운데도 솟대타기가 들어 있었다. 대광대패는 주로 각 지방의 장날에 맞춰 장터를 떠도는 유랑예인집단이었는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상수의 조사에 의하면 대광대패의 공연 종목으로는 풍물, 무동, 죽방울받기, 솟대타기, 오광대 가면극 등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 및 특성

솟대타기는 현재 전승이 끊어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솟대타기를 전하는 각종 문헌 및 감로탱, 풍속화 등을 통해 대강의 연행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솟대타기의 연행방식은 크게 중심잡기, 매달리기, 걷기, 물구나무서기, 줄에서 하는 기예, 악기연주, 재담, 다른 공연과의 결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초라니가 장구를 메고 솟대에 오르는 장면

초라니가 장구를 메고 솟대에 오르는 장면 〈수국사 감로탱〉. 1832

(1) 솟대타기 기예 중에는 솟대 위에서 몸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자세로서 중심잡기가 있다. 솟대 꼭대기에 서거나 손, 배 등으로 중심을 잡아 균형을 유지하는 자세 등을 모두 중심잡기로 분류할 수 있다.

청나라 사신 아극돈의 『봉사도』 제11폭에서 중심잡기를 하는 솟대타기 연희자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연희자는 솟대 꼭대기에서 한 손으로 중심을 잡고 다른 한 팔과 양다리를 공중에 띄우는 기예를 하고 있다. 솟대 아래에서 북을 치는 사람은 어릿광대로서, 솟대타기 연희자의 기예에 맞춰 장단을 두드리면서 서로 재담을 주고받으며 공연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을 것이다.

(2) 솟대타기 기예 중에는 매달리기, 솟대 꼭대기에 매달리는 것과 솟대 중간에 매달리기, 솟대를 연결한 줄에 매달리기가 있다.

솟대 꼭대기에 매달리는 것은 일찍이 일본 조전사 소장 〈감로탱〉에서부터 등장한다. 이 감로탱에 그려진 것은 쌍줄백이에 속하는 솟대타기인데, 두 명의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동시에 혹은 각각 기예를 펼치고 있다. 한 명은 솟대 꼭대기에 두 발을 걸치고 아래로 거꾸로 매달려 있고, 다른 한 명은 솟대를 연결한 줄 위에서 기예를 펼치고 있다. 솟대 꼭대기에 다리를 걸고 매달리는 기예는 후대에도 계속 이어져 왔다. 조선말 『기산풍속도』에서 동일한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솟대 꼭대기에 매달린 연희자가 솟대 아래의 어릿광대와 함께 재담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표충사(表忠寺) 감로탱〉(1739)에 보이는 솟대타기 연희자는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솟대 꼭대기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솟대 중간에서 다리를 꼬고 중심을 잡으면서 두 팔로 장구를 치고 있다. 솟대를 오르다 말고 중간에서 다리로 솟대를 휘감아 버티면서 장구를 연주하는 기예를 펼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다리로 매달리기와 악기연주를 결합한 기예로 볼 수 있다.

솟대 중간에 매달려 장구를 연주하는 장면

솟대 중간에 매달려 장구를 연주하는 장면 〈표충사 감로탱〉. 1738

(3) 솟대타기 기예 중에는 솟대 꼭대기에서 걷는 듯이 양 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있다. 고려시대 이색의 『목은집』 〈산대잡극(山臺雜劇)〉에 나오는 "긴 장대 위의 연희자는 평지에서 걷듯 하고(長竿倚漢如平地)"라는 구절은 솟대타기 기예의 걷기 동작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솟대타기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마치 걷는 듯이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연출하는 장면으로 이해된다.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몇 길 높이의 솟대 위에서 한 다리로 서거나 두 다리를 번갈아 서는 고난도의 솟대타기 기예를 보여주고 있다.

(4) 솟대타기 기예 중에는 솟대 꼭대기에서 물구나무서기가 있다. 물구나무서기는 도립(倒立) 혹은 양수도립(兩手倒立)이라고 하는데, 솟대 꼭대기 가로목 위에서 한 팔 혹은 두 팔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것이다. 솟대타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예이다. 감로탱에 보이는 물구나무서기는 대개 두 손으로 버티는 양수도립의 형태인데, 솟대 꼭대기의 가로목을 잡고 거꾸로 서 있는 것이 많다. 일본 조전사 소장 〈감로탱〉에도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솟대타기 연희자가 묘사되어 있다. 〈남장사(南長寺) 감로탱〉(1701)에는 솟대 끝에 Y자로 생긴 가로목 위에 솟대타기 연희자가 양손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Y자형의 가로목 위에는 새 모양의 장식물이 확인되며, 가로목 양 끝에 각각 줄을 매고 솟대를 고정했다.

(5) 솟대타기의 기예 중에는 줄을 이용한 것도 있다. 이른바 '쌍줄백이'라 불리는 기예이다. 솟대를 연결한 줄에 매달리는 기예는 한국 솟대타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솟대를 세운 다음 양쪽으로 각각 두 개의 줄을 늘어뜨려 놓고 솟대 꼭대기뿐만 아니라 줄 위에서도 공연하는 것이 바로 쌍줄백이이다. 한국의 쌍줄백이가 주변국의 솟대타기와 다른 점은 솟대를 매는 줄을 연희공간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는 솟대타기의 줄기예가 쌍줄백이로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 쌍줄백이는 일찍이 일본 조전사 소장 〈감로탱〉에서부터 보이는 기예로서, 〈봉서암(峰瑞庵) 감로탱〉(1759)에서 정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진주 솟대쟁이패였다가 후일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었던 송순갑의 회고담에 의하면, 솟대쟁이패의 쌍줄백이는 높은 솟대 위에 오늘날의 평행봉 너비의 2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떡고물 묻히듯이 줄 위를 빙글빙글 구르기) 등의 묘기를 연행했다고 한다. 쌍줄타기와 유사해 보이지만 쌍줄백이는 솟대 꼭대기가 십자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서, 쌍줄타기용 장대의 꼭대기는 두 장대의 교차점일 뿐이고 한 쪽 장대에는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기예를 보일만한 공간이 없다는 점에서 변별력을 갖는다.

(6) 솟대타기에서는 솟대 위나 줄에서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솟대타기의 연행공간을 솟대에서 줄 위까지 확장하여, 줄 위에서 악기연주를 하는 솟대타기 연희자의 모습을 여러 감로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솟대 꼭대기나 솟대를 연결한 줄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면서 솟대타기의 기예 수준을 한층 높였다.

솟대타기에서 사용된 악기는 대금, 해금, 장구가 대표적이다. 이 중 대금을 부는 장면이 제일 많다. 솟대를 타기 위해서는 몸이 가볍고 날렵해야 하므로 무거운 악기보다는 대금과 같이 가벼운 악기를 들고 오르는 편이 수월했을 것이다. 〈운흥사(雲興寺) 감로탱〉(1730)의 솟대타기 연희자는 쌍줄 위에 서서 대금을 불고 있다. 〈용주사(龍珠寺) 감로탱〉(1790)의 솟대타기 연희자는 쌍줄에 거꾸로 매달려 대금을 부는 기예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호암미술관 소장 〈감로탱〉(18세기말)의 솟대쟁이는 솟대 꼭대기에서 대금을 불고 있다.

장구를 연주하는 장면은 〈표충사(表忠寺) 감로탱〉 (1738)과 〈만월산 수국사 감로탱〉 등에 등장한다. 전자에는 솟대 중간에 다리로 솟대를 휘감고 매달린 연희자가 장구를 연주하는 모습이, 후자에는 장구를 메고 솟대를 오르는 초라니의 모습이 보인다.

고려가요 〈청산별곡〉 7절 "사imagefontimagefont대에 올라셔 imagefont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라는 구절은 솟대타기 연희자가 해금을 연주했음을 말해준다. '광대가 사슴으로 분장해 짐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것을 듣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슴으로 분장한 광대가 솟대에 올라 해금을 연주하며 기예를 펼친 것이다.

솟대에 연결한 쌍줄에 거꾸려 매달려 대금을 연주하는 장면

솟대에 연결한 쌍줄에 거꾸려 매달려 대금을 연주하는 장면 〈용주사 감로탱〉. 1790

(7) 솟대타기에서는 솟대쟁이와 어릿광대가 재담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재담은 한국전통연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줄타기땅재주에서도 재담이 발견된다. 본디 재담이란 광대가 자신의 묘기를 돋보이게 하고 담화내용을 관중에게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솟대타기의 재담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솟대타기가 줄타기와 유사한 공중기예이고 어릿광대를 동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솟대타기의 재담은 줄타기의 재담, 즉 줄재담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줄재담은 줄광대가 줄 위에서 행하는 재치있는 대사로서, 줄타기 기예 내용을 풀어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재담으로 전체적인 판의 분위기를 집중시키고 앞으로 전개될 기예에 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솟대타기 재담은 〈변강쇠타령〉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변강쇠의 치상장면에 등장한 초라니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요란한 복색을 한 모습으로 장구를 치면서 〈액막이 고사소리〉를 노래한다. 이 초라니를 '솔대 밋 친구'라 표현한 것은 그가 솟대타기를 연행하는 초라니패의 일원임을 짐작케 한다. 솟대타기 연희자인 초라니가 솟대에 올라 노래와 재담을 하면, 그 아래에서 악사나 어릿광대가 이에 응수하며 연희를 이어가는 모습을 여러 감로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로탱〉(18세기), 〈선암사(仙巖寺) 감로탱〉(18세기), 〈운흥사 감로탱〉 등에는 솟대쟁이와 함께 솟대 아래에서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춤을 추거나 부채를 들고 서 있는 어릿광대를 볼 수 있다. 어릿광대는 솟대쟁이와 재담을 나누고, 음악 장단에 맞춰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도사(修道寺) 감로탱〉(1786)에서는 솟대 아래에 두 명의 어릿광대들을 볼 수 있다. 한 명은 제대로 된 복색에 장구를 메고 흰 부채를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복색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찢어진 부채를 들고 있다.

(8) 솟대타기는 단독으로 연행되기도 했지만, 다른 전통연희와 함께 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솟대타기의 쌍줄백이는 솟대를 고정하기 위한 줄을 연행공간으로 확장한 만큼 두 줄을 사용하는 쌍줄타기와 영향관계에 있을 것이다.

일본 조전사 소장 〈감로탱〉을 비롯해 〈선암사무화기(仙巖寺無畵記) 감로탱〉(18세기), 〈수도사 감로탱〉, 〈용주사 감로탱〉, 〈백천사 운대암(白泉寺雲臺庵) 감로탱〉(1801), 〈동화사(桐華寺) 감로탱〉(1896) 등에서는 어릿광대가 탈을 쓰고 있다. 솟대 아래에서 어릿광대가 요상한 탈과 부서진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듯하다. 〈만월산 수국사 감로탱〉에서는 초라니탈을 쓴 연희자가 장구를 메고 솟대를 오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태평성시도〉에는 원숭이 두 마리가 솟대타기를 하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한 마리는 솟대 꼭대기에 앉아있고, 다른 한 마리는 솟대를 오르고 있다. 원숭이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솟대 아래에서 원숭이 목에 건 줄을 잡고 있다. 솟대타기와 동물재주부리기가 결합된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외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솟대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악기연주 등도 다른 연희와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솟대타기 연희자와 탈을 쓴 어릿광대

솟대타기 연희자와 탈을 쓴 어릿광대 〈감로탱〉.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접 국가 사례

중국의 솟대타기는 다양한 연출방식만큼이나 다양한 명칭이 존재했다. 한대(漢代)에는 도로심장(都盧尋橦)·장말지기(橦末之伎)·고장(高橦)·장제(橦梯)·목희(木戱) 등,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도로(都盧)·연장(緣橦), 수당대에는 도로연(都盧緣)·박간(拍竿)·대간(戴竿) 등, 송원대에는 상간(上竿)·연간(緣竿)·연장간(緣橦竿)·정장(頂橦)·비간(飛竿)·파간(爬竿) 등, 명청대에는 심장·연간·파간 외에 작간(雀竿)이나 배간(扒竿) 등으로 솟대타기를 지칭했다.

솟대타기가 심장(尋橦)이라는 공연종목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기원 전 2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도로심장은 도로국의 솟대타기라는 말로 풀이되는데, 도로국은 미얀마의 배간(Bagan) 지역에 있는 간푸토루우에 있던 나라이다.

중국의 솟대타기는 크게 장대를 받치는 기예와 장대를 타는 기예로 대별되며, 명칭에 따라서 어느 쪽을 강조했는지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심장, 연장, 상간, 파간 등은 타기에 주안점을 둔 것이고, 대간이나 정장은 받치기를 강조한 용어이다.

한대의 솟대타기는 장형(張衡, 78-139)의 〈서경부(西京賦)〉와 이우(李尤, 55?-155?)의 〈평락관부(平樂觀賦)〉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서경부〉에 묘사된 솟대타기는 두 종류이다. 즉 일반적인 솟대타기와 희거고장(戱車高橦)이다. 희거고장은 달리는 수레에 장착된 솟대를 타는 것이다.

한대 화상석에는 솟대타기의 각종 기예가 묘사되어 있는데 평지에 장대를 세운 형식, 이마나 손으로 받친 형식, 줄타기를 병용한 형식 등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희거 위에 장착한 장대 위에서 펼친 곡예는 솟대타기와 줄타기를 결합한 것으로서 허난성(河南省) 신예현(新野縣) 화상석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악무백희 장면

악무백희 장면 산둥성(山東省) 이난(沂南) 북채촌 화상석. 한대

후한 말 산둥성(山東省) 이난(沂南) 화상석에 그려진 솟대타기는 희거 위에서 연행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는 상반신을 벗은 역사(力士)가 머리에 십자형의 긴 장대를 세우고 있고, 꼭대기에는 배로 중심을 잡고 회전하는 연희자가 있다. 그리고 가로목 양끝에는 각각 한 명씩 물구나무서기 연기를 하고 있다. 아래 그림에는 거간(車竿)으로 용처럼 장식한 말 3마리가 끄는 전차 위에 2개의 높은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평대를 장치했는데, 그 위에 아이로 보이는 연희자가 양수도립(물구나무서기)을 하고 있다.

허난성 난양현(南陽縣) 화상전에는 전차 2대에 각각 장대를 세우고 연기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뒤 수레에 장치한 장대 꼭대기에 있는 가로목에 연희자가 앉아서 수레에 탄 사람과 줄을 맞잡고 있고, 그 위에서 연희자가 옷자락을 날리며 춤을 추고 있다. 앞 수레 위에서도 뒤와 마찬가지로 가로목이 걸려 있고, 연희자 한 명이 거꾸로 매달려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그 위에 연희자가 앉거나(오른팔) 서서(왼팔) 곡예를 하고 있다.

남북조시대가 되면 소수민족들이 정권을 수립하면서 유목민족의 공연예술과 서역 각국의 무용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북위시대에는 치상정간(齒上頂竿)과 같은 새로운 종목의 등장과 함께 솟대타기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업중기(鄴中紀)』에 따르면 후조 때는 액상장(額上橦), 치상장(齒上橦), 거상장(車上橦) 등이 있었다. 액상장은 이마 위에 장대를 올려 놓고 다른 연희자가 그 꼭대기에서 새처럼 좌우로 도는 재주를 펼치는 것이고, 치상장은 그 장대를 이로 받치는 것이다. 거상장은 마차 위에 2장 높이의 장대를 세우고 끝에 가로로 나무를 걸쳐서 두 명의 연희자가 가로목 양 끝에 올라가 새처럼 돌거나 거꾸로 매달리는 재주이다.

진양(陳暘)의 『악서(樂書)』(1101)에 〈삼조설악49절차〉가 있는데, 이 중 9개가 솟대타기 공연이다. 한 번에 아홉 종류의 솟대타기를 할 수 있도록 공연종목을 준비했다는 것은 남북조 시대에 이미 풍부한 솟대타기 기술이 연마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수당대에도 솟대타기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수나라 양제 때는 서로 다른 장대 위에서 춤추다가 자리를 서로 맞바꾸는 묘기도 연출되었다. 당대 현종대에 이르러 솟대타기에 새로운 측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 여성 연희자가 공연하는 대간(戴竿)이 등장했다. 대간은 여성 연희자가 100척 높이의 장대를 머리에 받치고 있고, 어린 연희자가 그 위에 올라가 다양한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당나라 때 교방 예인 왕대랑이 머리로 받치고 나온 장대 꼭대기에 나무산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연행양상이 다양해졌다. 솟대타기는 한 사람이 지탱하는 장대 위에 3-4명에서 수십 명을 태우는 기술로 발전했다. 어떤 연희자는 어깨와 머리로 24명이 타고 있는 100척이 넘는 장대를 받치기도 했다. 장대 꼭대기에 강궁을 부착하고 소녀가 활 위에 서서 손에 무기를 들고 파진악을 추는 기술도 있었다. 셋째, 장대의 장식이 화려해지고 연희자의 의상도 화려해졌다. 돈황 벽화 『송국부인출행도(宋國夫人出行圖)』를 보면 장대를 머리에 받친 연희자는 화려한 반소매 상의를 입고 요대를 차고 있는데 몸을 구부리면서 전진하고 있다. 십자형 장대 위에는 소녀 연희자가 4명인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연기하고 있다. 이들의 의상도 역시 화려하며, 아래에서 장대를 들고 이들을 보조하는 듯한 사람도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대간 장면

대간 장면 돈황 벽화. 〈송국부인출행도〉. 당대

송대 역시 솟대타기가 상당히 발달했는데, 송대의 솟대타기는 신기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여전했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8 「유월육일최부군생일이십사일신보관신생일(六月六日崔府君生日二十四日神保觀神生日)」 조에 의하면 편을 나누어 우열을 겨루기도 하고 신귀(神鬼)로 변해 불토하기와 같은 환술을 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대에는 장대가 짧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장대에서 떨어져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발간된 『삼재도회(三才圖會)』와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에 보이는 솟대타기는 그다지 높지 않고, 모두 땅에 고정시킨 장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가 솟대타기의 절정기였다면 송대는 솟대타기의 전환기로서, 기예의 초점이 '타기'로 집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대를 이마 등으로 받치는 정간은 사중번(耍中幡)으로 계승되었다.

연간희

연간희 『삼재도회』. 명대

명대 배간(扒竿)은 장대 꼭대기에서 배로 중심을 잡고 수레바퀴처럼 도는 기예를 말하는데, 장대를 이로 받치고 손과 발을 공중에 띄우는 기예를 포함한다. 명대의 솟대타기는 타기 위주의 기예가 펼쳐졌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요자번신(鷂子翻身)·금계독립(金鷄獨立)·종규말액(鐘馗抹額)·옥토도락(玉免搗樂)과 같이 한결 구체화된 점이 확인된다. 명대의 『삼재도회』에 묘사된 연간희(緣竿戱)는 넓은 곳에 장대를 수직으로 세우고 네 방향으로 줄을 늘어 뜨려 팽팽하게 당겨 묶어 고정했다. 솟대타기 연희자는 장대 꼭대기에서 다리로 균형을 맞추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예를 연행하고 있다.

등산제

등산제 『북경풍속도』. 청대

대간 장면

대간 장면 〈칠회탄궁도〉. 일본 정창원. 8세기

청대에 이르면 노간(老竿), 등산제(蹬山梯)와 같은 솟대타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등제는 한 사람이 누워서 두 다리로 사다리를 받치고, 그 위에 아이가 올라가 각종 재주를 펼치는 기예를 말한다. 사다리 대신 장대나 사람을 받쳐 드는 것을 등간(蹬竿), 등인(蹬人)이라고 한다. 송나라 때 등장한 투갱(投坑)은 장대 꼭대기로 올라간 다음 바닥에 파놓은 가시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리는 기예였다. 원래 거란족의 기예였던 투갱은 청대에 거정자(擧頂子)로 계승되었다.

서구의 서커스가 들어오자 중국의 공연예술은 이와 혼합하는 양상을 띠게 되고, 솟대타기도 서커스 곡예종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집체파간(集體爬竿), 배의도립(排椅倒立), 쌍파간(雙爬竿)이라 불리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솟대타기에 관한 이른 시기의 자료는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칠회탄궁도(漆繪彈弓圖)〉이다. 이것은 당나라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탄궁 안쪽에 그려진 공연의 내용 중 공중 기예 종목이 행해지는 장면에서 장대를 지탱하고 서 있는 연희자와 그 위에서 기예를 펼치는 연희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곡예 종목을 가루와자(輕業)라고 하는데, 솟대타기는 물론 줄타기(繩渡り), 대나무로 엮은 원통형 장애물 통과하기(籠脫け) 등 다양한 종목이 포함된다. 솟대타기는 잇본다케카루와자(一本竹輕業), 니혼다케카루와자(二本竹輕業)라 불렀다. 이는 대나무 숫자에 따라 달리 부른 것이고, 대개 장대를 신체 한 부분으로 받치는 정간(頂竿) 계통의 기예이다.

일본의 솟대타기는 에도시대부터 잇본다케(一本竹)라고 불리며 어깨에 장대를 올리는 견예(肩藝)에 속하게 되었다. 3칸 반 정도의 대나무를 어깨에 놓고서 연희자가 장대 위에 올라가 여러 가지 기예를 연행하는 것이다. 잇본다케에는 대나무 상부에 한 사람, 옆쪽에 한 사람씩, 세 사람의 아이를 태우는 '잇본산닌(一本三人)', 대나무 양쪽에 두 사람씩인 '잇본고닌(一本五人)' 등이 있다. 이 복잡한 잇본고닌을 특기로 하는 무구루마 신페이(六車シンペイ)는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에 걸쳐 견예의 명인으로 불렸고,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의 연희자를 태운 뒤 어깨뿐만 아니라 한 손, 이마, 치아로도 들어 올렸다고 한다.

아키타(秋田) 지방의 칸토마쓰리(竿燈祭り)는 솟대타기인 견예가 지방 민속 행사로 자리잡은 경우이다. 길이 20미터 이상의 대나무 양 옆에 수십 개의 등을 층층이 달고 이 장대를 어깨, 이마, 허리 등에 옮기면서 시내를 행진하는 행사이다. 장대에 얼마나 많은 등을 매달았으며,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이는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가 기예의 핵심이다.

1800년대 후반 일본 솟대타기의 명인 하야다케 토라요시(早竹虎吉)의 공연 포스터에서는 어깨 위에 장대세우기, 그 장대 위에서 곡예하기, 발로 사다리 세우기, 솟대타기와 줄타기를 혼합한 것 등이 나타났다. 당시 매우 발달한 고난도의 솟대타기 기예와 유사기예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제국일본예인단'이라는 단체를 구성하여 미국 공연에 오르기도 했다.

의의

서역과 중국의 전문적 공연예술이 전래되기 전부터 우리에게도 자생적인 전통연희 종목들이 존재했다. 다만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새롭고 다양하며 수준 높은 공연예술종목들이 다수 유입됨으로써, 기존에 존재하던 공연종목들도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솟대타기는 자생적인 공연예술로 시작되었지만, 중국과 서역에서 유입된 도로심장의 영향으로 크게 변화·발전했을 것이다. 도로심장으로 촉진된 솟대타기 기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임금 행차나 연등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공연예술 종목으로 연행되었고, 기예의 신기함과 우수함을 읊은 문헌이 다수 발견된다. 중국의 도로심장과 유사하던 솟대타기는 점차 한국적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일본 근대 곡마단 포스터

일본 근대 곡마단 포스터

솟대쟁이패의 연희 가운데 특히 쌍줄백이는 한국적 솟대타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쌍줄백이는 솟대뿐만 아니라 솟대를 양쪽으로 고정시킨 쌍줄 위에서도 다양한 기예를 펼쳤다. 솟대 위뿐만 아니라 솟대를 지탱하는 줄에서 공연을 하는 것은 한국적 솟대타기의 독자성을 잘 보여준다.

솟대타기를 하면서 악기연주를 하는가 하면, 솟대쟁이가 어릿광대와 재담을 나누는 것도 한국적인 특징이다. 솟대쟁이가 솟대 꼭대기는 물론 줄 위에서 대금을 부는 장면들이 여러 감로탱에서 발견된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한국의 전통연희가 자생적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과 서역에서 유입된 전문적 연희의 영향을 받은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솟대타기 역시 자생적 연희 전통 위에 도로심장과 같은 발달된 기예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음악, 우리의 정서에 맞는 공연예술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연희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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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덕재, 「古代 韓國과 日本의 樂曲 啄木에 대한 試論的 考察」, 『사학지』 43, 단국사학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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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樂泉, 『圖說 中國古代百戱雜技』, 世界圖書出版西安公司, 2007.

참조어

가루와자, 경업(輕業), 금계간, 니혼다케가루와자, 두간, 쌍파간, 잇봉다케가루와자, 작간, 정간, 정장, 치상정간, 파간, 파희, 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