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다리걷기
정의 및 이칭
나무다리걷기는 연희자들이 두 개의 긴 장대를 종아리에 묶고 걷기, 뛰기, 춤추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 다양한 기예를 보여주는 전통연희이다. 공연종류나 시기, 지역에 따라서 장대를 한 개만 사용하거나, 장대를 종아리에 묶지 않고 공연하는 형식도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인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1626)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다리를 쌍족죽(雙足竹)과 척족죽(隻足竹)으로 구분하여 불렀으며, 전문적인 연희자인 재인(才人)들이 중국사신 영접행사에서 쌍나무다리걷기(쌍족죽)와 외나무다리걷기(척족죽) 종목을 공연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지역에 따라서 나무다리걷기를 죽마(竹馬), 개고다리 또는 개우다리라고 부른다. 호남지역에서는 개고다리, 죽마 외에도 죽족(竹足)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죽족은 대(竹)로 만든 발(足)이라는 뜻이다. 영남지역에서는 나무다리걷기를 '개우다리를 탄다'라고 한다.
유래 및 역사
나무다리는 세계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일상생활과 생업의 도구이자, 놀이도구였다. 이러한 나무다리는 지역마다 그 지역의 지형적·문화적·역사적 특수성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나무다리는 긴 장대를 다리처럼 사용하여 신속하게 이동하거나, 늪지를 건너거나, 높은 곳의 과수를 채집하는 데 이용되는 도구였지만, 연희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준 높은 공연예술로 발전된 나무다리걷기는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그 지역 공연문화의 형식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중국을 거쳐서 혹은 직접 실크로드를 이용한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산악·백희를 받아들였다. 산악·백희 종목 중의 하나인 나무다리걷기도 이때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자생적으로 나무다리를 놀이나 생업에 사용하는 문화가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삼국시대의 벽화와 도상자료들에 의하면, 나무다리걷기는 당시 중요한 공연 종목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다리걷기의 전승이 거의 단절된 상황이다. 그리고 나무다리걷기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전통연희로서 연행되던 나무다리걷기의 유입과 발전과정은 고분벽화 등의 도상자료를 근거로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 수산리 고분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분의 벽화에 방울받기(농환), 수레바퀴쳐올리기(무륜)와 함께 나무다리걷기의 연행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 팔청리 고분벽화에는 행렬도가 그려져 있는데, 여러 연희와 함께 악사의 완함 반주에 맞추어 나무다리걷기 공연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도상자료들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5세기경에 나무다리걷기가 전통연희로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나무다리걷기는 악사의 반주에 맞추어 전문적인 연희자들에 의해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이러한 도상자료를 제외하면, 조선시대 이전까지의 나무다리걷기 공연 형태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으로는 인조 4년 중국사신 영접행사의 준비절차를 기록한 『나례청등록』(1626)이 전한다. 이 책에는 중국사신 영접행사를 위한 연희 관련 물품으로 척족죽(隻足竹) 2개, 쌍족죽(雙足竹) 3개 등이 기재되어 있다.
나무다리걷기 공연장면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
나무다리걷기 공연장면 고구려 팔청리 고분벽화의 행렬도
동달이 여덟 개, 긴 화죽 네 개, 척족죽 둘, 쌍족죽 세 개, 앞에 진배할 척족죽 하나, 긴 화죽 넷, 잡화죽 다섯, 해장죽 쉰 개, 누각 기둥 하나, 성조목 다섯 조에서 세 조, 송푼 스무 잎, 송진 두 근, 송연 다섯 되 ······
인용문에 나오는 '척족죽'은 오늘날의 스카이콩콩과 유사한 형태의 나무다리이고, '쌍족죽'은 일반적인 나무다리걷기에 사용하는 도구이다. 당시 중국사신 영접행사에는 전문적인 연희자인 재인청(才人廳) 소속의 재인(才人)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중국사신 영접행사에는 적어도 5명의 전문적인 나무다리걷기 연희자가 공연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의 공식행사가 위축됨에 따라 민간을 떠돌면서 연희를 공연하는 유랑예인집단들이 다수 발생했다. 이들 가운데 사당패, 남사당패, 솟대쟁이패, 광대패, 걸립패가 마을이나 장터, 파시 등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공연을 했다. 영남지방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걸궁패의 공연 중에 나무다리걷기 종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실군에서 채록한 설장구의 명인 신기남의 증언에 따르면, 나무다리걷기는 영남 걸궁에서 '개우다리 타며 쇠를 치는' 연희 형태로 근대까지 꾸준히 연행되어 오고 있었다.
현재 전통연희로서의 나무다리걷기는 거의 사라지고, 남부지방의 일부 지역에서 나무다리의 명칭이나 형식 그리고 사용방식에 대해 희미한 기억들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축제나 공연 분야 그리고 전통체험 프로그램의 하나로 나무다리걷기를 복원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나무다리걷기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내용 및 특성
나무다리걷기 공연에 사용하는 나무다리의 일반적인 형태는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발판이 고정된 두 개의 장대를 각각 양쪽 발에 묶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나무다리의 발판은 숙련도에 따라서 그 위치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숙련도가 낮은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나무다리는 장대의 하부에 발판을 만들어 장대의 상부를 손잡이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숙련도가 높은 어른들은 자유롭게 팔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통 장대의 꼭대기에서 착용자의 종아리 길이만큼 내린 부분에 발판을 만든다.
나무다리의 발판은 공연 형식에 따라서 그 위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일본의 전악(田樂) 공연에 사용되었던 나무다리는 발판이 장대의 아랫부분에 만들어져 있어서, 연희자들이 장대의 상부를 잡고 연행했다. 중국에서는 발판을 장대의 상부에 만든 나무다리와 하부에 만든 나무다리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고구려 수산리와 팔청리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나무다리걷기는 악사의 반주에 맞추어 연행되었으며, 상부에 발판을 만든 나무다리를 사용하여 중심잡기와 걷기, 춤추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을 공연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는 영남 걸궁의 나무다리걷기 공연처럼 연희자가 쇠(꽹과리)를 치고, 뛰는 등 기예와 연주를 함께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나무다리걷기가 단순히 나무다리를 걷는 기예로서 출발했겠지만, 기예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공연문화의 특성상 점차 나무다리를 걸으며 음악연주를 하거나, 다른 공연종목과 결합하여 고난도의 연희를 펼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접 국가 사례
나무다리를 공연에 사용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보편적 문화현상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유럽에서도 나무다리가 생업수단 또는 의례의 수단으로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1320년경 원시-게르만어(proto-Germanic)인 Steltijon으로부터 인도유럽어족 즉 현재 유럽의 모든 언어에서 사용되는 나무다리의 명칭이 파생되었다. 대표적으로 영어권에서는 스틸트(stilt), 그리고 불어권에서는 에샤스(echasse)라는 명칭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나무다리걷기의 기원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민간 설화나 전설에 근거하거나, 연행도구인 나무다리의 형태적 유사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다양한 기원설들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고증에 의한 역사성이 부족하다.
중국에서는 나무다리걷기를 죽마(竹馬), 죽족(竹足), 고교(高蹺), 장교(長蹺), 답교(踏蹺), 고족(高足)이라고 부르며, 한 개의 나무다리만 사용하는 종목은 단교(單蹺)라고 구분한다.
중국학자들은 나무다리걷기의 기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원설을 주장한다. 첫째, 나무다리걷기가 원시 씨족의 토템숭배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의 「해외서경(海外西經)」에 따르면 중국 요순시대에 학(鶴)을 숭배하는 단주씨족(丹朱氏族)이 나무다리걷기를 하며 학처럼 춤을 추는 것을 종교제례의식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나무다리걷기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 중 손작운(孫作云)은 〈설단주-중국고대학씨족연구, 설고교희출우도등도무(說丹朱-中國古代鶴氏族硏究, 說高蹺戱出于圖騰跳舞)〉(1946)에서, 나무다리를 밟고 춤을 추는 형상과 비슷한 갑골문자가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사실에 근거하여, 나무다리걷기가 이미 갑골문자 시기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둘째, 나무다리걷기가 잡기공연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다. 북위(北魏, 386-534)의 묘비에 새겨진 백희도(百戱圖)나 『열자(列子)』 「설부(說符)」 편에 묘사된 난자(蘭子)의 나무다리걷기 연행 장면을 근거로, 현재의 중국 나무다리걷기가 잡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설부」에는 송대(宋代) 원공(元公, 기원 전 531-517) 시기에 행해진 나무다리걷기의 연행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춘추시대 송나라에 난자(蘭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재주를 가지고 송(宋) 원공에게 잘 보이고자 했다. 송 원공이 불러서 그 재주를 보이도록 하니. 자기 키의 두 배나 되는 장대 두 개를 양쪽 발에 묶고 위로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일곱 개의 칼을 번갈아 던지면서 놀았는데, 칼 다섯 개는 항상 공중에 있었다. 송 원공이 크게 놀라 즉시 비단을 하사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미 송대에 행해진 나무다리걷기의 연희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나무다리를 걸으면서 동시에 일곱 개의 칼을 놀리는 것은 오늘날의 서커스에서도 고난도의 묘기로 간주된다. 이렇듯 수준 높은 연행 장면이 중국 문헌에 등장한 것이 기원 전 6세기이므로, 중국에서는 그 이전부터 나무다리걷기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나무다리걷기가 생업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원시인들이 다리에 긴 나무를 묶고 높은 곳의 야생과일을 채집하거나, 강이나 바다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때 사용하던 나무다리가 점차 변화하여 나무다리걷기 공연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생업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산해경』의 '장고지국(長股之國)'에 관한 기록과 오늘날 광시성(廣西省) 팡청(防城) 연해의 징족(京族) 어민들이 나무다리를 사용하여 어로행위를 하는 것의 형태적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산해경』에 따르면 장고지국은 웅상(雄常)의 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사람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하루 동안 다리가 길다고 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나무다리를 착용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무다리걷기 북위(北魏). 〈이회진악연경(李會進樂延慶)〉
그런데 어떤 기원설에 근거하든지, 현재의 중국 나무다리걷기는 송나라 난자(蘭子)의 수준 높은 공연에 대한 기록을 볼 때,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나무다리걷기가 전문적인 공연예술종목으로 연행된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도상자료는 북위시대의 〈이회진악연경(李會進樂延慶)〉이라는 석각이다. 이 석각에는 백희도가 조각되어 있는데, 나무다리를 착용한 연희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시대별로 다양한 나무다리걷기의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양나라 때 공연되었던 척교기(擲蹺伎)는 나무다리를 묶고 땅재주를 넘는 기예였다. 수·당시대의 나무다리걷기는 장교기(長蹺伎)라고 불렀는데 이미 오락성이 높은 공연형식이었다. 송대의 나무다리걷기는 산악·백희의 한 종목으로 연행되었는데, 당시에는 답교(踏蹺)라고 불렸다. 남송 린안(臨安)의 등(燈)축제에서는 답교(踏蹺)와 촌전악(村田樂), 박호접(搏蝴蝶)이 동시에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이 시기에 나무다리걷기가 민간무용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명·청대의 문헌에 의하면, 나무다리걷기는 자주 앙가(秧歌)와 결합하여 연희자가 연극인물로 분장했는데, 이것을 고교앙가(高蹺秧歌)라고 불렀다.
앙가는 중국의 북방지역에 주로 전승되던 연희를 지칭하는데, 원래는 농민이 모를 심거나 들에서 노동하면서 부르던 노래를 말한다. 민간에서는 가창, 무도, 희극의 3가지 형태의 앙가가 있었는데, 무도 양식의 앙가가 가장 폭넓게 전승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앙가라고 하면 앙가무도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앙가무도는 그 연희자들이 나무다리를 착용했기 때문에 고교앙가라고 불렀다. 청나라 때에는 나무다리걷기의 적용범위가 더욱 넓어져 주회(走會), 앙가(秧歌),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고교앙가는 난징(南京)의 정월 보름 행사를 묘사한 『남도번회도권(南都繁會圖卷)』과 『서호지적수보유해낭편람(西湖志摘粹補遺奚囊便覽)』 12권의 삽도 등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명대의 『남도번회도권』에는 수많은 연희자들이 나무다리를 착용하고 도시로 행진해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청대의 『경도풍속지(京都風俗志)』에 고교앙가의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앙가는, 여러 사람이 타두(행각승), 어옹(늙은어부), 초부(나무꾼), 어파(어부의 부인), 공자(公子) 등으로 분장하고, 요고(장구)와 수라(꽹과리)를 들고, 발에 모두 나무다리를 착용한다. 이것을 소위 '고교앙가'라고 한다.
秧歌以数人扮陀頭漁翁樵夫漁婆公子等相配以腰鼓手鑼足皆登竪木谓之高蹺秧歌.
청대에 들어와서 나무다리를 걸으며 갖가지 공연을 벌이는 주회(走會)가 크게 유행하여 명대를 능가했는데,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내용이 다양해졌으며, 그 활동 역시 더욱 빈번했다. 특히 청대 귀족 자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황회(皇會)는 청나라 황실의 인정을 받아 그 세력이 크고 설비 역시 대단했다. 명대의 주회가 무대 공연에 치중되었다면, 청대의 주회는 기예 공연에 편중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변화·발전하여, 현재 중국에서는 북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나무다리걷기가 전승되고 있다.
나무다리걷기 연희자의 모습 명대. 『남도번회도권(南都繁會圖卷)』
중국에서는 공연 내용에 따라서 나무다리걷기를 문교(文蹺)와 무교(武蹺)로 구분한다. 문교는 주로 연극의 인물로 분장하고 연행하는 것이며, 무교는 주로 난이도가 높은 기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교에는 준주(蹲走, 웅크려 앉아 걷기), 도탁자(跳卓子, 탁자 위로 뛰어오르기), 학자번신(鶴子翻身, 학처럼 몸 뒤집기), 월두도(越頭跳, 머리 위로 뛰어넘기), 후곤번(后滾翻, 뒤로 넘기), 단퇴도(單腿跳, 한 다리로 뛰어오르기) 등의 기교동작이 있다. 나무다리걷기 공연은 가두행렬 시에 대오형태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기본적인 가두행렬의 형식으로는 답가(踏街, 거리걷기), 차화(叉花, S자 모양으로 걷기) 일조룡(一條龍, 길게 한 줄로 걷기) 전자고(剪子股, 가위 모양으로 걷기), 대팔자(大八字, 팔자 모양으로 걷기) 등이 있다.
단교(單蹺) 공연장면 중국 허난(河南) 지방
문교(文蹺) 공연장면 중국 텐진(天津) 지방
한편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사용하는 나무다리의 길이는 모두 다르다. 길이가 작은 것은 몇 촌, 긴 것은 7-8척에 이른다. 대개 4척 정도 되는 나무다리를 사용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한족과 소수민족 등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나무다리걷기 공연이 활발하게 전승·연행되고 있다. 중국의 나무다리걷기 공연은 일반적으로 음악, 무용 그리고 여러 가지 곡예와 결합되어 단체행진이나 가면극, 무용 등에 활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나무다리걷기를 죽마(竹馬), 노족(鷺足), 고마(高馬), 고족(高足), 일족(一足)이라고 부른다. 일족(一足)은 한 개의 나무다리를 사용하는 종목을 지칭한다.
일본의 나무다리걷기는 산악·백희가 유입되던 시기인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악·백희 중 곡예(曲藝)에 해당하는 나무다리걷기가 다른 산악·백희 종목과 함께 전래되어 발전하다가 점차 다른 기예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에는 산악 종사자 중 일부가 전악(田樂)에서 고족(高足), 일족(一足)을 하면서 도옥(刀玉, 칼받기), 품옥(品玉, 방울받기), 윤고(輪鼓, 죽방울놀리기) 등을 연행하는 전악법사(田樂法師)가 되었다.
나무다리걷기가 일본 문헌에 처음 언급된 것은 10세기경의 『잡언봉화(雜言奉和)』인데, 여기에 언급된 나무다리는 어린아이들의 놀이기구로 보인다. 1096년의 『낙양전악기(洛陽田樂記)』에는 전문적인 연희도구로서 사용된 나무다리, 즉 '고족(高足)'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시기에 이미 나무다리가 전문적인 연희도구로 사용된 것을 볼 때, 일본에서도 이른 시기에 전통연희로서의 나무다리걷기가 정착된 듯하다.
영장 원년(1096) 여름, 낙양에서 커다란 전악이 있었다. 이것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모른다. 처음에 시종들이 시작했으나 공경들에게까지 미쳤다. 고족(高足), 일족(一足), 요고(腰鼓), 진고(振鼓), 동판자(銅鈑子), 편목(編木) 등이 밤낮으로 계속되어 그 시끄러움이 사람을 놀라게 했다.
『잡언봉화(雜言奉和)』일본 나무다리걷기 공연의 형태는 도상자료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14세기 말-15세기 초에 성립된 천만궁의 제례를 그린 『천만궁제례회권(天滿宮祭禮繪券)』에 고족과 일족이 그려져 있다. 전악(田樂) 행렬의 가장 끝 부분에 그려진 이 나무다리걷기 그림은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도상자료이다.
전악은 13세기부터 15세기 초까지 유행하다가 본좌(本座), 신좌(新座) 등으로 전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에서 전승되고 있는 고족은 하나의 장대만을 사용하는 일족 나무다리이다. 원래 고족은 두 개의 장대를 사용하는 나무다리걷기를 지칭했지만, 1112-1187년에 기록된 일기인 『병범기(兵範記)』의 내용에 근거하면, 이 당시에 이미 전승이 단절된 고족의 명칭을 일족 나무다리걷기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일족 나무다리의 발판은 대나무 장대의 낮은 위치에 만들어져 있으며, 따로 손잡이를 만들지 않고 장대의 상부를 세로로 잡는 것이 중국의 단교와 다른 점이다. 중국 하남지방의 단교는 발판이 달린 장대의 상부 끝이 연희자의 허리 부분에 위치할 만큼 짧고, 장대의 상부 끝부분에 손잡이를 가로로 만들어서 양손으로 잡고 연행한다. 현재 일본의 나무다리걷기는 우리나라의 나무다리걷기와 마찬가지로 전통연희로서의 종목전승이 어려운 상황이며, 그 중 일부가 서커스에 편입되어 전승되고 있다.
의의
나무다리걷기는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연희이다. 그러나 고려·조선시대에 이 연희를 어떻게 전승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드물다.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 가운데 나무다리걷기를 연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후 전승이 거의 단절되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다리걷기를 복원하거나, 이를 현대화하려는 시도가 축제나 연극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08 대한민국전통연희축제'에 참가한 'creative group 노니'가 연출한 그림자극 '도깨비불(燐)'의 한 코너에서 사용한 새로운 형태의 나무다리걷기라든지, 담양 대나무축제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개고다리걷기' 행사가 그 예이다.
참고문헌
- 사진실, 「나례청등록 1-4」, 『문헌과 해석』 1, 2, 4, 문헌과 해석사, 1997-1999.
- 송준, 「나무다리걷기의 전승사례와 창의적 전승방안」, 『남도민속연구』 37, 남도민속학회, 2008.
- 안상복, 『중국의 전통잡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 이기원, 「나무다리걷기에 대한 고찰, 역사적 전개를 중심으로」, 『생활문물연구』 14, 국립민속박물관, 2004.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傅起鳳·傅騰龍, 『中國雜技史』, 上海人民出版社, 1989.
- Boyrie-Fenie(B.), Les Landes, Bonneton, 2001.
- Jean-Luc Mayaud, Gens de la terre, La France rurale 1880-1940, Edition du Chene, 2002.
- Jean Claud Drouin et al., Landes, Bonneton, 2001.
참조어
개고다리걷기, 개우다리걷기, 고교(高蹺), 고마, 고족(高足), 노족, 스틸트워킹(stilt walking), 일족, 죽마, 죽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