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쟁이패
솟대쟁이패는 조선 후기에 발생한 유랑예인집단의 하나로, 장터를 찾아 떠돌아다니던 곡예 중심의 예인집단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세습무계의 재인(才人), 북방 유목민 계통의 수척과 반인, 재승 계통의 연희자와는 별도로, 남사당패·사당패·대광대패·솟대쟁이패·초라니패·풍각쟁이패·광대패·걸립패·중매구·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집단이 발생했다.
솟대쟁이패였다가 후에 남사당패의 일원이 된 송순갑(宋淳甲, 1912-2001)은 솟대쟁이패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경상도 진양이 우리나라 '솟대쟁이패'의 본거지로서 내가 8세 때 고아로 이 패거리에 들어갔을 때 이우문(진주사람)이란 사람으로부터 살판(땅재주)을 배웠는데, 이우문은 전4대에 걸쳐 대대로 내려오는 솟대쟁이패의 꼭두쇠(두목)였다. 이우문의 밑으로 사자(성은 김씨)라 불리던, 지금껏 살았으면 100세쯤 되었을 사람과 경기도 사람 박희철(역시 생존했으면 100세가 넘었음), 그리고 이우문의 동생인 이재문(생존했으면 70세 전후) 등과 같이 버나, 살판(땅재주), 새미놀이(어름), 병신굿(탈놀음), 풍물, 얼른, 솟대타기(쌍줄백이) 등을 가지고 팔도를 떠돌았으며 만주땅에도 두 번 간 적이 있었다. 쌍줄백이라 하는 것은 솟대처럼 높은 장대를 하나 세우고 그 꼭대기로부터 두 가락의 줄을 평행으로 늘여 (양쪽으로) 밑에 두 개의 말뚝을 박아 고정시키고는 그 위에서 '팔걸음', '고물무치기' 등의 묘기를 보이는 것이고, 살판은 두 사람 내지 세 사람(솟대쟁이패의 경우)의 살판쇠(땅재주꾼)가 5-6닢의 멍석위에서 '앞곤두', '팔걸음', '살판'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살판쇠가 솟대쟁이패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남사당패로 불려 가게 마련이었다. 내가 '이우문패'에 들어갔을 때 솟대쟁이패로는 하나밖에 없다고 했으며 남사당패는 세 패가 있었다.
송순갑에 의하면 경상도 진양이 솟대쟁이패의 본거지이며, 그가 8살에 진양 출신 이우문패에 들어가던 때에, 이미 솟대쟁이패는 전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1910년대 후반 솟대쟁이패가 전국을 유랑하며 인기를 구가하던 사실은 1916년 11월 19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황금유원안에셔 흥 광무에셔 이번에 령남디방에셔 고로 유명던 솟장이 일 닐곱명을 골나다가 밤마다 각됴를 구경케 젼에 보지 못던 구경이라 한번 볼것이라 소문이 우 놉흐며 그동안 환영을 신구파연합연극과 박츈의 담 가곡도 아울너 흥 고로 막시간을 오후 여셧시반으로 뎡얏슨즉 관람 사은 아모됴록 일즉이 입장기를 바란다더라
이 기사는 당시 솟대쟁이패의 활동상황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송순갑의 증언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솟대쟁이패는 장시만이 아니라 근대식 극장 건물인 광무대에서도 공연을 했다. 기사에 나오는 '영남지방에서 자고로 유명하던 솟대쟁이 일행'은 당시 진양 출신 이우문패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밤마다 각색 재주를 구경'시켜 주었으며 이는 '전에 보지 못하던 구경'이었다. 광무대에서는 솟대쟁이패의 공연과 신구파연합연극, 박춘재 재담, 가곡을 함께 흥행하기 위해 개막시간을 바꾸었다.
송순갑의 회고에 따르면 솟대쟁이패는 놀이판의 한가운데에 반드시 솟대와 같은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두 가닥씩 네 가닥의 줄을 늘여 놓고 그 위에서 갖가지 재주를 부렸다고 한다. 솟대쟁이패의 공연 종목은 풍물, 땅재주, 얼른, 줄타기, 병신굿, 솟대타기 등의 여섯 가지였다. 풍물은 농악·무동 등 곡예에 가까운 체기(體技)가 돋보였다. 땅재주는 불이 담긴 화로를 양손으로 들고 공중회전을 할 정도로 숙달된 재주를 보였다. 얼른은 마술이다. 줄타기는 새미놀이라고도 했는데, 재담보다 곡예 위주였다. 병신굿은 지주와 머슴 두 명이 엮는 무언극으로서,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면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병신이란 내용의 아주 해학적인 연희이다.
솟대타기는 쌍줄백이라고도 불렀는데, 높은 장대 위에 오늘날의 평행봉 너비의 2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떡고물 묻히듯이 줄 위를 빙글빙글 구르기) 등의 묘기를 연행했다. 『기산풍속도』에 그려진 솟대쟁이패는 솟대타기·죽방울놀리기(空竹)·방울쳐올리기 등을 공연하고 있다. 한편 솟대쟁이패는 되도록 낮에 놀았다고 한다. 물론 밤에도 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솟대타기를 하는 데는 밤이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일 경우에는 역시 횃불을 밝히는데 되도록 그을음이 쌍줄에 오르지 않도록 놀이판 밖에서 밝혔다고 한다. 솟대쟁이패의 연희에서 쌍줄은 솟대를 지탱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연희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불이 붙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신근영, 「솟대타기의 역사적 전개와 연희양상」, 『민속학연구』 20, 국립민속박물관, 2007.
-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화출판공사, 1974.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