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죽
[ 空竹 ]
정의 및 이칭
공죽(空竹)은 양손에 줄로 연결된 채를 들고, 손목의 힘을 이용해 줄의 탄력을 조절하면서 공죽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던졌다가 받는 연희이다.
공죽은 우리나라에서 '죽방울놀리기', '죽방울놀이', '실패놀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는 윤고(輪鼓)라고 불렀다. 중국의 공죽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칭이 존재한다. 명나라 때에는 '공종(空鐘)'이라 했고 청 이후에는 '공죽'이라 불렀다. 이후 공죽의 명칭은 북방과 남방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북방에서는 지령(地鈴), 공쟁(空箏), 풍호로(風葫蘆), 향호로(響葫蘆), 민호로(悶葫蘆), 옹자(嗡子), 우(牛), 지룡(地龍), 공종(空鐘), 지축(地軸), 호고(胡敲) 등으로 부른다. 남방에서는 차령(扯鈴), 야령(哑鈴), 향령(響鈴), 지령(地鈴), 전령(轉鈴), 천뢰공(天雷公) 등으로 부른다. 현재 남방의 대표적인 명칭은 '차령'이다. 쓰촨(四川) 청두(成都) 지방에는 '향황(響簧)'이라는 고유 이름이 있으며 아이들 놀이로 전해진다. 이외에 예령(拽鈴), 풍령(風鈴), 옹옹(嗡嗡), 옹향기(嗡響器), 뢰공공(雷公公) 등이 있다. 공죽은 재료의 변화, 모양, 소리 등이 더해지면서 다양한 이칭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옹(嗡)'은 공죽이 회전하면서 나는 소리를 모방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다양한 이칭을 가졌던 공죽은 2006년 중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두(抖)'의 '돌리다'라는 동사를 활용해 두공죽(抖空竹)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공죽은 대만과 동남아시아 화교 국가 일부에서 '차령'이란 명칭으로 연희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죽을 '디아블로(diabolo)'라고 하며, 플라스틱과 고무가 주재료이다. 쌍륜(雙輪) 공죽의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크기의 공죽을 선보이고 있다. 스위스 공죽은 지름 7㎝로 크기의 쌍륜으로 양쪽 윤반 안쪽에 8개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고, 끈(실)으로도 돌릴 수도 있으며 일반적인 공죽 크기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유래 및 역사
공죽이 정확히 언제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의 공죽놀리기 혹은 두공죽에 해당하는 연희가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죽방울놀리기를 죽방울 돌리기, 죽방울받기, 죽방울놀이, 죽방울치기 등으로 불렀다. 현재 우리나라의 공죽은 중국의 두공죽이나 일본의 윤고만큼 활발하게 전승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기산풍속도첩』의 '솟대쟁이패놀고'와 '쥭방울밧는모양'이라는 두 개의 그림에서 공죽의 연행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솟대쟁이패놀고'에서는 전문적인 유랑예인들에 의해 방울쳐올리기와 함께 공죽이 연행되고 있고, '쥭방울밧는모양'에서는 민간의 놀이로서 연행되고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의 공죽은 전문적인 예인집단과 민간의 놀이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을 것이다.
놀이로서의 죽방울놀리기는 '쥭방울밧는모양'에서와 같이, 민간의 놀이로도 연행되었다. 놀이로서의 죽방울놀리기는 조선시대까지는 전국 곳곳에 전승, 유포되었으리라 생각되나,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아이들은 누가 오랫동안 떨어뜨리지 않고 몇 번이나 쳐올렸다가 받았는지를 세어서 승부를 결정한다. 죽방울을 던졌다가 받을 때에 노끈으로 중심을 잘 잡아야 떨어지지 않는데, 여기에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아이들이 놀았다고 하는데, 죽방울의 크기가 작았으며 공중에 쳐올리기보다는 노끈으로 그냥 굴리며 놀았다고 한다.
전문적인 예인들에 의해 연행된 공죽에 대한 기록은 앞서 언급한 『기산풍속도첩』의 '솟대쟁이패놀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도판에서는 솟대쟁이패라는 전문적인 유랑예인 집단이 솟대타기, 방울 쳐올리기와 함께 죽방울놀리기를 연행하고 있다.
〈솟대쟁이놀고〉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조선 말.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죽방울 받는 모양〉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조선 말.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죽방울 받기에 대해서 "전라남도의 일부 지역에서 무당들이 굿할 때 활용했고 소포에서 추석날 농악을 칠 때 '쫑방울'을 논다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의 설장고 예능보유자 김동언(1942)은 15세 때 농악대의 이주완이라는 인물을 보았는데, "죽방울이라고 하늘로 쏘아 올려서 받아내는 솜씨가 기가 막혀"라고 제보했다.
1950년대 예천의 장에서 명재명이라는 약장수가 약을 팔기 위하여 클라리넷 등을 연주했으며, 만담에 이어 죽방울놀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현재 명재명의 죽방울놀이를 재현하여, 충청남도 향토지적재산 가운데 전례풍속의 하나인 예산 보부상 놀이의 세 번째 마당에서 죽방울놀이를 연행하고 있다.
2008년 진주탈춤한마당의 학예굿에서 진주오광대가 솟대쟁이패의 연희를 복원하여 죽방울놀이를 시연한 바 있다. 현재 진주 삼천포 농악 등에서 공죽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내용 및 특성
한국의 공죽은 기예와 줄의 변화가 적은 반면, 중국 공죽은 같은 기법이라도 속도와 줄의 길이, 줄을 당기는 힘, 줄을 감는 방법, 공죽을 받아내는 방향 등에 따라 다양하고 섬세한 동작의 변화를 연출한다. 때문에 연희자의 신체 조건과 줄을 다루는 기술은 연희자의 개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죽은 크게 쌍륜(雙轮) 공죽, 단륜(單輪) 공죽, 이형(異形) 공죽으로 분류한다.
중국의 전통 공죽은 형태에 따라 쌍륜 공죽과 단륜 공죽으로 나뉜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공죽은 쌍륜 공죽이고 가운데 축이 없는 게 특징이다. 단륜 공죽은 발견되지 않는다.
쌍륜 공죽은 작은 장구모양으로 양쪽으로 하나의 윤반(輪盤)이 있고 가운데 홈이 있어 이곳을 축으로 연결한다. 단륜 공죽은 한 개의 윤반을 갖고 있으며, 손잡이 형태의 막대기가 윤반 가운데에 붙어 있다. 윤반 쪽에 무게가 실려 있어 공죽을 돌리는데 균형을 잡기 어렵다. 공죽의 윤반 중량과 구심점에 일정한 간격과 균형을 맞추고 그 중심에 축을 연결한다. 이 축에 줄을 감아 돌리면 공죽이 회전하기 때문에 축은 중요한 연결선이다. 이때 축이 고정되어 있어 줄을 감는 방향과 풀어내는 속도에 따라 공죽의 회전이 달라지고 줄에 휘감기지 않는다.
쌍륜 공죽 베이징 공죽 박물관
쌍륜 공죽은 무게 중심이 양쪽 윤반에 균일하게 분산되어 있고 가운데 축이 있어 회전할 때 비교적 균형을 잡기가 쉽다. 공죽 속도가 약해지거나 줄에 말리면 오른손을 조절해 높이와 방향을 조절한다. 이때 왼손을 서서히 오른손 속도에 맞추어 움직이면서 회전 속도를 유지하면 공죽이 정방향으로 균형을 잡고 위치를 바르게 할 수 있다.
공죽은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윤반에 있는 여러 개의 소리 구멍을 통해 맑고 청량한 소리가 나온다. 공죽의 윤반은 소리판과 소리판을 덮는 뚜껑으로 이루어진다. 기본 윤반 둘레에 여러 개의 입구를 만들어 소리 구멍을 만들고 작은 대나무 조각을 일정하게 쪼개어 붙여 구멍의 크기와 간격, 두께를 균일하게 조절한다. 그 다음 아교를 칠한 윤반 안의 대나무 조각들을 2-3일 동안 건조해 습기를 완벽하게 제거한다. 윤반의 뚜껑을 덮고 소리 구멍의 윤반과 덮개 윤반이 떨어지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고 고정해 다시 건조한다. 양쪽 두 개의 윤반이 이렇게 완성이 되면, 윤반 중심에 축을 맞추어 끼워 넣고 고정한다. 윤반 둘레와 소리구멍이 고르게 평형을 유지하도록 대패를 이용해 결을 고르게 정리한다. 저울에 달아 두 개의 윤반의 무게가 평형이 되는지 확인한다. 완성된 윤반에는 그림을 그려 장식하고 마무리한다.
공죽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소리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소리 구멍은 고음부와 저음부로 나뉘는데, 작은 입구가 고음이고 큰 입구가 저음부가 된다. 이때 소리 구멍이 많을수록 소리가 청량하고 고음이 나며 좋은 공죽을 만드는 조건이 된다. 소리 구멍이 많을수록 고가의 공죽이 되기도 한다. 소리 구멍은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윤반의 둘레를 따라 붙이는데, 입구의 크기, 간격, 높이, 양쪽 윤반의 두께, 무게의 균형이 모두 균일해야 좋은 음향을 갖는다.
쌍륜 공죽은 비교적 쉽게 회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 연희자와 공죽을 처음 배우고자 하는 연희자에게 적합하다. 역시 손목의 힘을 이용해 공죽을 공중에 던져 받는 기본 동작에서 두 개의 공죽채를 동시에 겹쳐 잡아 다리와 허리를 굽혀 기예를 보이면서 회전하는 공죽을 받는다. 공죽채의 두 줄을 짧게 조절해 공죽을 신체 가까이 오게 하고, 혹은 줄 위에서 공죽을 회전시켜 신체가 얼마나 민첩한지를 보여준다. 동작의 섬세함과 유려함, 부드러움이 연희의 매력을 더한다.
단륜 공죽 베이징 차오양구(朝陽區)
단륜 공죽은 하나의 윤반을 갖고 있고, 윤반 가운데 손잡이 크기의 막대기가 붙어 있으며 축은 이 막대기 끝 부분에 위치한다. 윤반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기 때문에 축에 줄을 감아 회전할 때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 감겨진 줄이 풀리면서 쉽게 엉키거나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두 손목의 동작이 민첩하고 속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 단륜 공죽은 새로운 연희 방식이 개발되었는데, 축의 회전이 가능해지면서 생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사(盤絲)'이다. 반사는 '회전하면서 줄 위에 직립하는 공죽'이라고 할 수 있다. 수평으로 일정한 속도를 내면서 자유롭게 위치를 조정한다. 공중에서 공죽이 일정하게 수평을 유지하면서 줄을 가로질러 빠르게 회전할 수 있도록 줄을 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는 게 중요하다. 제작 방법은 쌍륜 공죽과 같고 음향을 갖는다. 역동성과 가속, '반사'를 통한 자유로운 위치 조정이 특징이다. 반사는 손목, 팔의 힘을 이용해 회전 속도를 높이고 공죽이 마치 공중에 수평으로 떠 있는 형상으로 보일 만큼 빠르게 팔 운동을 해야 한다.
이형 공죽 베이징 회룡 중학교. 공죽 예술제
목재 대신 플라스틱과 고무 공죽이 등장하면서 쌍륜 공죽은 소리 구멍을 만들지 않게 되었고 소리도 사라졌다. 이것으로 무음향 공죽이 출시되었고 목재에 비해 가벼워지면서 실내 연희로 주목받게 되었다. 목재 공죽과 비교하면 가격이 저렴해지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구매가 쉬워졌다. 학교에서 교육용으로 플라스틱 공죽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서커스단에서도 고무 공죽을 선호하는 추세이다.
이상의 전통적인 공죽 이외에 공죽의 크기를 대형으로 만든 공죽, 도자기 뚜껑·자전거 바퀴 등 생활용품을 활용한 공죽, 구리나 철을 이용한 소형 공죽, 채 없이 여러 개의 공죽을 연결해서 줄로만 돌리는 공죽 등 이형 공죽도 나타났다. 이들 이형 공죽은 크기, 무게, 축, 채 등에서 다양한 변화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공죽의 기본동작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공죽 두 윤반 사이의 축에 감긴 줄을 풀면서 양손을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여 공죽을 돌린다. 공죽이 감겼던 줄에서 풀려나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 공중으로 던져 받는다. 이때 공죽이 땅에 떨어지거나 줄에 감기지 않고 정면을 향하도록 오른 손목의 힘을 조절해 일정한 방향을 유지한다. 연희자는 공죽의 회전 속도와 거리,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손목에 힘의 강약을 조절한다. 공죽이 균형을 잡고 회전하기 시작하면 윤반에 있는 소리구멍에서 '웡' 하는 음향이 나온다.
첫째, 돌리기(繞)이다. 돌리기는 공죽 축(軸)을 중심으로 어떤 방향에서 줄을 감아 돌리느냐가 중요하다. 공죽을 회전시키지 않고 두 손잡이를 이용하여 공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린다. 손잡이를 수평으로 잡고 두 손을 공죽의 아래 방향에서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공죽을 왼쪽(혹은 오른쪽)에서 오른쪽(왼쪽)으로 돌린다. 돌릴 때 손잡이 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돌리고 난 후 바로 손잡이를 수평으로 놓이게 하여 줄과 손잡이가 엉키는 것을 방지한다.
둘째, 흔들기(擺)이다. 흔들기는 공죽을 좌우로 움직이고 휘젓는 연희 방식이다. 두 손에 힘을 동시에 주면서 공죽을 흔든다. 줄의 힘으로 공죽이 왼쪽(오른쪽)에서 오른쪽(왼쪽)으로 활모양의 타원형을 그린다. '돌리기'와 다른 점은 흔들기는 손잡이를 중심으로 공죽이 돌지만, 돌리기는 손잡이가 공죽을 중심으로 돈다. 공죽을 일정하게 속도를 유지하면서, 두 팔과 손목이 갖는 힘의 동력을 이용해 공죽을 좌우로 빠르게 이동하는 게 특징이다. 이때 가운데 줄을 헐겁게 해서 공죽이 일정한 높이와 간격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셋째, 공중 회전하기(旋)이다. 공죽의 줄이 수평이 되도록 하면서 두 손을 벌린다. 왼손을 높게 하면 공죽은 오른쪽 손잡이 가까이에 머물게 된다. 오른쪽 손잡이에 힘을 주어 공죽을 왼쪽으로 미끌어 내듯이 회전시킨다. 왼쪽 손잡이 가까이에 갔을 때 오른손에 갑자기 힘을 주어 공죽이 오른쪽으로 튀어 오르면서 가슴 쪽으로 원형을 그리며 회전하게 한다. 이러한 동작이 반복되면서 공죽이 마치 바퀴처럼 가슴 앞쪽에서 공중회전하는 모양을 한다.
넷째, 튕기기(繃)이다. 튕기기는 줄을 팽팽하게 잡아 공죽을 튕기는 것이다. 두 팔을 벌리고 왼손은 높게, 오른손은 낮게 하여 공죽을 오른쪽에 머물게 한다. 왼손으로 줄을 빠르게 팽팽히 당겨 공죽을 튀어 오르게 하고, 공죽이 줄에 닿을 때 다시 줄을 당겨 공죽이 줄 위에서 끊임없이 튕겨 오르게 한다. 튕기기는 어깨를 열어 양손의 위치를 위아래로 조절하는 동작이기 때문에 두 손을 빠르게 움직여 공죽이 줄 위에서 계속 튀어 오를 수 있도록 줄의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
다섯째, 던지기(抛)이다. 던지기는 공죽을 공중에 높이 던지는 것이 주 연행 종목이다. 던지기를 통해서 신체의 위치를 바꾸거나 줄의 긴장감을 재조정할 수 있다. 팔꿈치를 밖으로 향하게 하고 두 손잡이 끝은 아래로 약 45도 각도로 경사지게 한다. 두 손목의 힘을 이용하여 손잡이를 힘껏 위로 방향전환을 시켜 공죽이 높이 뛰어오르게 한다. 공죽이 떨어질 때 두 손은 위아래에 하나씩 있게 되며, 위에 있는 손은 곧게 펴고 손잡이 끝은 공죽의 중심축을 향한다. 공죽이 손잡이 방향을 따라 아래로 내려올 때 아래에 있던 손은 공죽이 있는 방향을 향하면서 공죽을 받는다. 던지기는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연희자가 같은 동작을 조율하거나 속도를 내면서 호흡을 조절할 때 유용한 동작이다. 이 같은 기본 동작을 통해서 공죽과 공죽채 그리고 신체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동작처럼 연결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완벽한 공죽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공죽이 회전할 때 속도의 완급으로 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인접 국가 사례
중국 공죽의 정확한 발생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과 『무림구사(武林舊事)』에 '농두(弄抖)'가 공죽의 유사 형태로 전해지고 있으며, 구체적인 놀이법과 명칭은 명대부터 전해지고 있다.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과 주밀(周密)의 『무림구사』에서는 사농잡기(耍弄雜技)의 하나로 '농두'를 소개하고 있다. 농두는 공중에 공을 던져 받는 놀이이다. 농두는 '구슬던져받기' 나 '공던져받기'의 한 형태인 타탄자(打彈子)의 한 유형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현재 중국 서커스단에서 연희되는 종목이다.
공죽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명대부터 전한다. 유동(劉侗)·우혁정(于奕正)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서 춘절(春節) 놀이인 '공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공종은 나무를 깎아서 가운데 구멍을 내고 공종 윤반 옆쪽으로는 실이 감길 수 있도록 홈을 판다. 공종이 회전하기 시작하면 탁한 소리에서 맑은 소리로 바뀐다. 공종이 축 위에서 평형을 유지해야 비로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축에 감겼던 줄이 풀리면서 공종이 회전한다. 대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이용해 공종을 공중에 던지며 속도를 조절한다. 실에 힘을 주어 당기면 오른쪽으로 향하고, 나무 막대기에 힘을 주면 왼쪽으로 움직인다. 힘의 강도에 따라 공종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크게 웅장한 소리를 낸다. 공종의 소리가 작아지면 '옹'하는 소리가 나면서 공종 돌기가 멈춘다. 공종의 직경은 약 30㎝의 길이다. 한 사람에서 세 사람까지 놀 수 있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장을 지냈던 진효의(秦孝儀)가 엮은 『해외유진(海外遺珍)·칠기(漆器)』 중 "척홍영희문원합(剔紅嬰戱紋圓盒)"이라는 탑본에도 두 아이가 공종을 노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두 아이가 마주 서있는데 한 아이가 공죽을 줄에 감아 돌리고 있다. 양손에 두 개의 막대기를 잡고 왼손을 아래로 오른손을 위로 올려 공죽을 돌리고 있다. 맞은편의 아이는 상대편을 바라보면서 손뼉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오늘날 공죽의 모양과 매우 유사하며 연희 방식도 비슷하다.
명대 정릉(定陵)에서 출토된 자수품인 백자의(白子依)에서도 두 아이가 공종 연희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백자의는 명대 효정(孝靖) 황후의 분묘에서 출토된 유품으로 당시 황족의 여성이 입었던 겹옷이다. 백자의에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혼자 혹은 조를 짜서 연날리기, 제기차기, 팽이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기는 풍경을 담고 있다. 백자의는 아이들의 놀이가 장수를 기원한 다는 의미에서 결혼한 황족의 여성에게 바쳐졌는데, 당시 유행하던 여러 민속놀이를 담고 있다. 자수에는 두 아이가 비교적 큰 크기의 공종을 잡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백자의 베이징 선무구 공죽 자료실
청대의 번영폐(潘荣陛), 부찰돈숭(富察敦崇)의 『연경세시기(燕京歲時記)』에서도 "공종은 바퀴모양을 닮았고, 중간에 작은 축이 달려 있으며, 아이들이 두 개의 막대기를 명주실에 감아서 돌리면서 승패를 정했는데, 멀리서 새벽종이 들리는 것과 같았다"와 같이 공종을 묘사했다.
공죽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희이다. 회전할 때 음향을 내는 완구로 특징을 명시하고 있다. 당시 공죽이 회전하면 소리를 내는 완구였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청말에서 민국(民國)초기에 집필된 『청대야기(清代野記)』에서도 공종에 대한 비슷한 묘사와 명칭을 찾아볼 수 있다.
베이징(北京) 성 밖에서 공죽이 '지령'이란 명칭으로 연행되었고 '공종'과 혼용되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작은 성 밖에서 이루어졌고 주재료로는 대나무로서 구체적인 모양과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으로 공죽이 음향을 지닌 아이들의 놀이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청대 쓰촨(四川) 청두(成都) 지역에서도 공죽이 아이들의 연희로 소개되고 있다. 청대 부숭구(傅崇矩)의 『성도통람(成都通覽)』에 의하면 당시 쓰촨에서는 공죽을 '향황(響簧)'이라 불렀다. 아이들 서너 명이 함께 모여 쌍륜 공죽을 돌리는 그림이 삽화로 들어있는데 남부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반적인 전통 공죽보다 양쪽 윤반의 지름이 2분의 1 정도의 크기이고, 긴 타원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가운데 축이 두 윤반을 연결하고 있다. 타원형의 대나무통에는 소리 구멍이 두 개가 있고, 좁고 작은 직사각형으로 파여 있다.
공죽은 춘절을 대표하는 겨울철 어린이 놀이이다. 청대에서 민국시대까지 서민 주거지역인 후퉁(胡同, 골목)에서 어린이 놀이로 활발하게 유행했다. 전통 공죽을 만드는 장인이 베이징(北京)에만 7-8개의 상점을 갖고 있었을 만큼 성행했으며, 묘회(庙会, 사원(寺院))에서 열리는 제례 의식에 연희와 풍물시장을 겸비한 축제가 가장 큰 공죽 판매 소비지였다. 이들 장인은 공죽을 판매하면서 구매자에게 연희 방식을 전수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단륜 공죽, 쌍륜 공죽이 모두 유행했고, 어른들이 묘회에서 공죽을 구매해 아이들에게 주는 춘절 선물로 이용했다.
베이징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공죽 상표는 '진구상회(眞久記)'이다. '진구상회'는 내구성이 뛰어나고 견고함은 물론 소리의 청량감이 우수해 묘회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 전통 방식으로 공죽을 제작했던 장인들은 국유화된 완구 공장의 노동자로 유입되면서 모든 상품의 권리를 국가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상호명은 물론 판매권 일체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시기 개인의 상업 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수공품으로서의 공죽 제작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개혁 개방 이후 후손들이 다시 대를 이어 전통적인 방식을 보존하려 했지만, 공죽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으면서 점점 쇠퇴했다. 1990년대 말까지 '진구상회'의 상표가 시판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중단되었다. 현재는 차오양구(朝陽區)를 대표하는 장만청(張万清) 장인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죽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차오양구 공원에서 공죽 동호인들과 함께 놀이를 상호 교류했으며, 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죽을 만들어 왔다.
성도의 향황 놀이 장면 부숭구. 『성도통람』
민국시대 전통적인 공죽의 전승 지역은 베이징의 천교(天桥) 거리이다. 선무구(宣武區)에 위치한 이곳은 전국의 유명한 잡기 예인들이 모이는 최고의 예능촌이다. 공죽은 민국시대에 천교의 예인들에 의해서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었던 대표적인 잡기 종목이다. 후퉁(골목)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민간놀이 공간이었다면, 천교는 직업적인 예인들이 생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전문적인 연희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50년 신중국 창립 이후 중국 서커스단이 성립되면서 천교의 많은 우수한 인력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서커스단은 전국에서 모인 예인들을 일정한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방식으로 배우들을 모집했다. 천교를 대표하는 예인으로는 왕우전(王雨田)이 있는데, 그의 두 딸인 왕계영(王桂英), 왕규영(王奎英)이 공죽 배우로 서커스단에 영입되었다. 이 두 배우가 주축이 되면서 중국 서커스단의 공죽 종목은 여성 중심의 무대 공연이 되었다. 왕우전은 고령의 나이 때문에 서커스단의 정식 배우가 될 수는 없었지만, 서커스단 내의 배우들을 지도하는 공죽 교련사로 활동했다.
진구상회 공죽 베이징 해정구
이것으로 중국 서커스단은 왕가공죽(王家空竹)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고 그의 네 딸을 중심으로 가계 구도를 형성했다. 왕우전의 넷째 딸인 왕계금(王桂琴)은 베이징 서커스단의 공죽 교련사로 있으면서 활발한 대회 활동을 이어갔다. 국제 서커스 대회에서 그녀가 이끈 공죽 연희 단체가 우수한 평가와 수상을 기록하면서 중국 서커스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히, 태양의 서커스단과의 1년여 국외공연은 중국 공죽의 서커스로서의 새로운 입지를 마련했다. 그녀는 2004년 중국 서커스단의 전문 공죽 예인단체인 소화단(俏花旦)을 만들어 대내외적으로 공죽의 우수성을 알렸다. 경극 무대 요소를 공죽 연희에 접목하면서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고, 우아한 여성의 미를 강조하는 새로운 연희방식을 시도했다. 특히 경극의 의상과 음악, 분장, 표정을 공죽 무대와 배우들에게 접목하면서 무대 예술로서의 세련미와 예술적 가치를 높였다. 이를 계기로 소화단은 외국 순회공연에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고, 세계국제서커스 대회에 참여해 우수한 평가를 받으면서 위상을 높였다. 그래서 서커스단 '소화단'의 공죽 연희는 민간에서 연희되는 공죽과 차별성을 갖게 되면서, 서커스의 대표적인 종목으로 부상했다. 서커스단 창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공죽은 여성 연희자를 중심으로 대내외 활동을 이끌었고, 남성이 중심이 되는 서커스 문화에서 여성전용이라는 개별 종목의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소화단 공연 베이징 천지극장
한편 1985년 전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묘회가 서서히 회복되면서 민속놀이에 대한 열망도 커지기 시작했다. 베이징 지단(地壇) 묘회에 공죽이 무대에 오르면서 시민 애호가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희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특히, 정저우(鄭州)와 뤄양(洛陽)이 공죽 활성화에 노력했다. 단륜 공죽을 중심으로 이 두 지역의 공죽 활성화는 베이징, 카이펑(開封), 바오딩(保定), 톈진(天津) 등의 여러 도시의 공죽 애호가들을 정저우로 몰려들게 했다. 정저우와 뤄양(洛陽)의 공죽 연희자에게 기예를 전수받으면서 '방문공죽교류'라는 새로운 연희 활동을 시작했다. 어린이 연희로서 단순한 기교밖에 없었던 공죽은 정저우·뤄양(洛陽)과의 교류를 통해 단륜 공죽의 유행을 가져왔고, 연희 방식에서도 난도를 높이면서 많은 남성 연희층을 확보했다. 정저우에서 무술을 공죽에 접목해 다양한 연희 방식을 개발하면서 연희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졌다.
2006년도 공죽이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2008년도 베이징올림픽 전야제를 위한 참가 종목 후보로 논의되면서, 국가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이 이어졌다. 여기에 지역 관청이 주도하는 시민 공죽 대회가 거행되면서 개인, 단체, 지역 사회와의 교류로 외연을 확대했다. 정부의 경제적 지원과 협조는 시민의 참여를 독려했고 연희자의 빠른 증가로 이어졌다. 여기에 서커스단의 일급 공죽 퇴역 배우들이 시민 공원에 유입되어 시민과의 공죽 교류를 시작하면서 기초적인 동작과 연희 방식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일단(日壇)공원, 조양(朝陽)공원, 단결(團結)공원 등이 공죽 대중화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공죽은 두 명의 국가급 보호 전승자가 있는데, 연희자인 이연원(李连元)과 제작자인 장국량(長國良)이다. 장국량은 현재 베이징 퉁저우(通州) 지역에서 공죽을 제작 판매하고 있다. 베이징 공죽 박물관 전시실에는 공죽 체험실습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장국량의 공죽을 직접 구매하거나 제작 과정을 견학할 수 있다. 공죽 박물관에는 연희 전승자인 이연원이 상근하고 있어서, 목요일마다 시민 공죽 교육 체험학습을 담당한다. 시민들은 목요일 외에도 박물관을 찾으면 언제든지 무료로 공죽을 배울 수 있다. 또 최근에는 베이징 시민들로 구성된 공죽 예술단을 만들어 베이징은 물론 전국과 외국을 잇는 공죽 전승과 홍보 교류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공죽 예술단원은 공죽 박물관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기도 하는데 시민들의 공죽 체험 학습을 위한 도우미로 나서기도 한다. 이들 예술단 소속의 연희자들은 인근 지역의 초등학교, 중학교, 사회시설, 정부 기관 등에서 공죽 교련사로도 활동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죽을 제작 보급하고 있는 지역으로는 톈진(天津), 장쑤(江蘇)의 루둥(如東)을 들 수 있다. 이 두 지역은 100여 년의 오랜 공죽 제작 역사를 갖고 있다.
톈진을 대표하는 공죽은 유해(刘海)이다. 청대 광서(光绪) 원년(元年)부터 공죽을 만들기 시작해 4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유해 공죽은 완성도 높은 공죽으로 인정을 받아 베이징에서도 유명하다. 유해의 일대 조상은 시짱(西藏) 라싸(拉萨) 지역에 조상의 성묘를 위해 길을 가던 중 아이들이 거리에서 공을 공중에 던져 받는 모습을 발견하고 톈진에 돌아와 그 모양을 흉내 내어 공죽을 만들었다. 유해 공죽은 베이징의 천교(天桥) 공죽 예인 왕우전 일가가 애용했던 공죽 제작의 명가로 왕씨 일가의 공연 전에 맞춤 제작을 맡기도 했다. 특히 균형과 소리가 뛰어나 베이징 묘회에서 인기 있는 완구제품으로 주목받았다. 현재 4대 장인 굴안휘(屈颜晖)가 전승자로서 유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부 지방을 대표하는 전통 공죽으로는 장쑤(江蘇) 루둥(如東)의 '차용아(撦籠兒)'가 있다. 루둥 사람들은 '차차용아(撦撦籠兒)'라고도 한다. 양쪽 윤반(輪盤)에 용을 조각해 넣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봉산(吳鳳山) 옹은 루둥현의 한 스승으로부터 공죽 제작을 사사했다. 16세에 차용아를 만들기 시작해 60여 년 가까이 차용아를 만들고 있는 3대의 장인으로 남부 지방을 대표한다.
한편 2008년 바오딩시가 공죽 예술제를 개최했고, 2012년도에는 '중국바오딩국제공죽예술제'를 개최하면서, 공죽 축제가 중국 국가 체육국의 후원을 받는 전국 최대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 대회는 외국인 최다 참여 기록을 세우면서 중국 기네스 기록에 오르는 명예를 안았다. 현재 중국에서는 5월 노동절과 10월 국경절을 전후로 전국적으로 다양한 공죽 활동이 열리고 있으며, 연희자들은 각 지역을 찾아 공죽 교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베이징과 바오딩 두 도시의 공죽 축제는 공죽 연희의 대중적인 지지와 전국적인 교류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공죽을 윤고(輪鼓)라고 하는데, 용자(龍子)라고도 부른다. 일본에 공죽이 언제 유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악(田樂)을 전문적으로 연행하는 전악법사(田樂法師)의 연희와 산악 종목 가운데 윤고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도 전문적인 예인집단에 의해 공죽이 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782년에 산악호가 폐지되면서, 산악 종사자 중 일부는 민간의 떠돌이 예능인이 되었다. 그 중 일부가 전악(헤이한 중기에서 가마쿠라막부와 무로마치막부에 걸쳐 연행되었으며, 모내기 때의 가무음곡이 예능화한 것)을 직업으로 공연했는데, 이러한 전문적인 연희자를 전악법사(田樂法師)라고 불렀다. 전악법사는 악기연주자, 곡예연희자, 연극연희자로 구성되었으며, 곡예연희자들의 연희 종목에 고족(高足, 일족을 거꾸로 한 십자형 막대기의 가로로 된 높은 디딤대에 올라타서 뛰거나 춤추는 연희)·일족(一足, 색칠한 나무로 만든 십자형 막대기의 가로로 된 디딤대에 올라타서 뛰거나 춤추는 연희)·이족(二足, 대나무 2개에 올라타고 돌아다니는 나무다리걷기와 유사한 연희)·도옥(刀玉)·품옥(品玉) 등과 함께 윤고가 있었다.
헤이안시대 중기의 문인 후지와라 아키히라(藤原明衡)는 『신원악기(新猿樂記)』에, 교토의 거리에서 연행된 산악을 본 소감을 적어 놓았다. 이 글에는 총 28개의 산악 종목 가운데 "악귀를 쫓는 주사의 놀이·난쟁이춤·풍년을 기원하는 놀이·인형극·당나라에서 온 재주·방울받기·윤고·팔옥·혼자 하는 씨름·혼자 하는 쌍육·뼈가 없이 흐물흐물하게 추는 춤·뼈만 있는 듯이 뻣뻣하게 추는 춤(就中咒師·侏儒儛·田樂·傀儡子·唐術·品玉·輪鼓·八玉·獨相撲·獨雙六·無骨·有骨)"처럼 윤고를 함께 나열하고 있다.
헤이안말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전악이 가마쿠라시대부터 무로마치시대 초반까지 융성하다가 노와 교겐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중 전악의 부속 잡기 가운데 도옥(刀玉), 품옥(品玉), 윤고 등을 연행하던 법사들이 독립하여, 곡수국(曲手鞠, 둥글게 뭉친 솜을 심으로 하고, 그 위를 색실로 감은 공을 놀리는 연희)과 축자(筑子, 일본의 민속악기로 20-30㎝의 대나무 막대를 양손에 한 자루씩 들고 쳐서 소리를 낸다, 현재 일본 각지의 민속예능에서 연행되고 있다)에 환희(幻戱)를 더하여 절과 신사(神社)의 경내(境內)나 항구거리의 십자로에서 모금 흥행(興行)을 했다. 이들을 세속의 방하승(放下僧)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출가를 하지 않은 속인이 포함되면서 일반적으로 방하사(放下師)라고 불렀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에는 전악법사의 윤고가 방하사에게 이어져 전승된 기록과 도판이 발견된다. 『간문일기(看聞日記)』 가길(嘉吉) 원년(1441) 4월 조에서는 방하가 수국(手鞠), 용자, 품옥을 연행했는데 매우 흥겨워서 세미포(細美布)를 하사했으며, 특히 용자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칠십일번직인진가합(七十一番職人盡歌合)』 가업(家業)의 상징으로 삼은 윤고 모양이 그려진 기모노를 입고 있는 방하사가 묘사되어 있다. 윤고가 옷의 문양이 되어 가업을 상징했다는 것과 간문일기의 저자와 같이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관람하고 하사품을 내렸다는 것을 통해, 윤고가 방하사의 대표적인 연희 종목이었으며 그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일본의 연중행사를 그린 두루마리(年中行事繪卷物)에서 윤고의 연행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1970년대 중반 윤고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목재로 만들어진 윤고는 가운데 축이 없어 오랜 시간 돌리면 끊어지거나 쉽게 마모되어 점점 쇠퇴했다. 1990년대 초반에 대만에서 플라스틱 공죽이 유입되고 중국의 공죽이 유입되면서 다시 유행했다. 일부 대학 동아리와 시민 단체에서 공죽을 연행하기 시작했고, 팽이 놀이의 한 유형으로 포함했다. 모양과 재료에 따라 끝에 '고마(ごま)'를 붙여 부른다. 현재 일본에는 나고야시(名古屋市)에 독락(獨樂)이라는 팽이 박물관이 있는데 공죽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전통 완구와 세계의 완구를 포함해 10만 점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공죽을 '공종고마'라 하고 대중적인 공죽을 '디아블로'라고도 하지만 대부분은 '고마'로 부른다.
팽이 박물관 일본 나고야
의의
한국에서는 공죽 즉 죽방울놀리기(죽방울놀이) 전승이 단절되었고, 현재 진주 삼천포농악 등에서 이 연희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세계적인 서커스단 등에서는 공죽이 전문적인 연희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 공죽은 재료의 변화, 공간의 확보, 자유로운 시간의 활용으로 인해 춘절의 놀이에서 대중적인 일상생활 놀이로 변했다. 베이징에 공죽 협회가 설립되고 정부의 지원과 정책의 보호 아래 체계적인 조직을 형성하면서 각 지방 도시로 확대·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연희가 농촌에서 도시로 발전되는 과정과 달리, 공죽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해 도시 외곽은 물론 전국 지방 그리고 농촌으로 보급되었다. 현재 베이징에서도 100여 개의 공죽 연희 단체가 협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도모하면서 활동하고 있고, 톈진(天津), 바오딩(保定), 스자좡(石家庄), 산둥(山東)·우한(武漢),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루둥(如東)·시안(西安)·정저우(鄭州), 뤄양(洛阳)·내몽골(内蒙古) 등지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공죽은 국가무형문화유산 등재와 2008년도 베이징 올림픽 전야제 참가 종목 후보로 선정되면서 대중화에 유리한 우위를 차지했다. 여기에 중국 서커스단의 퇴직 공죽 배우와 민간단체의 결합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베이징 민속원에서는 2010년부터 주말 상설 공죽 무대를 마련해, 공죽 연희자가 주말마다 자유롭게 고정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공죽은 다양한 계층에서 연희자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인 단위의 연희단체가 되었고 도시 놀이로 주목받고 있다. 도시 공간에서 전통문화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조하면서 성공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죽은 전문적 연희자에 의해 세련된 연희로 발전하여, 태양의 서커스, 중국의 여러 잡기단 등에서 여전히 전문적 연희로서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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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공종(空鍾), 농두(弄斗), 두공죽(抖空竹), 실패놀이, 차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