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

수희

[ 水戱 ]

수희(水戱)는 물에 배를 띄워 놓고 백희(百戱)를 연행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위(魏) 명제(明帝, 205-239) 때 마균(馬鈞)에 의해 시작되었다. 남송대(南宋代, 1127-1279)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중 〈황제가 임수전에 행차하여 표기(標旗) 빼앗는 연희를 구경하고 연회를 베풀다(駕幸臨水殿觀爭標錫宴)〉라는 시에 수희가 묘사되어 있다.

어가(御駕)가 임수전에 납시어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임수전 앞에는 연못 물에 닿도록 채붕을 설치하고 의장들이 빙 둘러서며, 임수전 가까이에는 물속에 채색한 배 4척이 가로로 늘어서 있는데, 위에는 백희를 연행하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 이를테면 대기(大旗)·사표(獅豹)·도도(掉刀)·만패(蠻牌)·신귀잡극(神鬼雜劇) 같은 종류들이다. 또 두 척의 배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악부(樂部)이다.

작은 배 1척도 있는데, 그 위에는 작은 채루(彩樓)가 설치되었고, 배 아래에는 세 개의 작은 문이 있어서 마치 인형극무대 같다. 바로 맞은 편에는 악선(樂船)이 물에 떠 있는데, 위에는 참군색(參軍色)이 타고 있다가 치어(致語)를 하면 악대가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면 채붕의 가운데 문이 열리면서 작은 배와 조그만 나무인형이 나온다. 작은 배 위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 인형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배의 고물에는 어린아이 인형이 삿대를 들고 배를 젓는다. 배가 몇 바퀴 돌면 참군이 말을 하고 악대는 음악을 연주하며, 배 위의 나무인형이 낚시에 살아 있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린다. 악대가 또 음악을 연주하면, 작은 배는 채붕 안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다른 나무인형이 나와 공을 쌓아놓고 춤추면서 도는 종류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 역시 각각 치어에 맞게 화답하면서 음악이 연주된다. 이것을 수괴뢰(水傀儡)라고 한다.

또 2척의 그림을 그린 배가 있어서, 위에다 그네를 세우고, 배의 꼬리 부분에는 백희를 하는 사람이 장대 위에 올라가면, 좌우의 군원(軍院)들과 우후(虞侯)와 감교(監敎)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서로 화답한다. 또 한 사람이 위에서 그네를 뛰다가, 가로 댄 나무의 높이까지 올라갈 정도가 되면 곤두박질을 하면서 물속으로 몸을 던지니 이를 수추천(水鞦韆)이라 한다. 수희가 다 끝나면 백희를 하던 배와 음악을 연주하던 배가 나란히 나팔과 북을 울리며 음악을 연주하고, 깃발을 춤추듯이 휘두르며 수괴뢰를 하던 배와 함께 양쪽 가장자리로 물러난다.

남송대의 수희에서는 대기·사표·도도·만패·신귀잡극 등과 수괴뢰·솟대타기·수추천 등을 연행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탄 배도 있었다. 또 작은 배 한 척에는 인형극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인형들이 나와 여러 가지 연희를 펼치는데, 이를 수괴뢰라고 불렀다. 수괴뢰에 등장하는 인형은 낚시를 하고 있는 흰 옷 입은 사람 인형과 그 뒤에서 삿대를 움직여 배가 주위를 여러 번 돌게 하는 어린아이 인형, 공을 쌓아놓고 춤추면서 도는 나무인형이다. 수괴뢰에 이어 연희자가 배 위에서 연행하는 솟대타기가 있고, 연희자가 배에 설치된 그네를 타다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수추천이 있었다.

중국 명대(明代, 1368-1644)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俎)』 「인부(人部)」에는 다른 내용의 수희가 보인다. 『오잡조』에서는 곡예에 가까운 '배젓기 기술'도 수희의 일종임을 밝히고 있다.

진나라 회계현의 하중어는 수희를 잘했다. 키를 조종하며 노를 저어 물 가운데에서 맴돌게 하는데, 처음에는 '숭어뛰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돌고래끌기'를 하고, 나는 짐새의 머리인 듯, 짐승의 꼬리를 잡은 듯, 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똑바로 나아가기를 세 번 한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도 수희에 대한 기사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왕(의종)이 수희를 구경하려고 내시 박회준 등에게 명하여 50여 척의 배에다가 모두 색이 고운 돛을 달고 악기(樂伎)와 채붕과 고기잡이 도구를 싣게 했다. 왕 앞에서 여러 가지 연희를 하던 중 어떤 사람이 귀신놀이(鬼戱)를 하면서 불을 머금었다 토하다가 실수하여 배 1척을 태워버렸으므로, 왕이 크게 웃었다.

『고려사』

『고려사』 권122 「열전」 35 「백선연(白善淵)」의 수희에는 물 위에 50여 척이나 되는 많은 배를 띄워 놓고 배 위에 채붕을 설치했으며, 귀신놀이를 하면서 불을 머금었다가 뿜어내는 연희가 있었다. 그리고 고기잡이 도구를 실었던 점으로 볼 때, 어부가를 부르면서 고기잡는 모습도 연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대규모의 수희에서는 배 위에 채붕까지 설치하고, 전문적 연희자와 뱃사공·어부들이 동원되어 다양한 연희를 펼친 듯하다. 뱃사공은 『오잡조』의 기록처럼 곡예에 가까운 '배젓기 기술'을 발휘했을 것이다.

계축일에 왕(의종)이 장단현 응덕정(應德亭)에 가서 뱃놀이를 했는데, 배 안에 비단 장막을 치고 여악(女樂)과 잡희를 실어 강 중류에서 놀았다. 이때 배 19척을 모두 비단으로 장식했다. ···거기서 2일간 체류하면서 수희를 구경했다.

『고려사』

『고려사』 제18권 의종 21년(1167) 5월 조에는 수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나, 배 안에 비단 장막을 치고 여악과 잡희를 실었으며, 19척의 배를 모두 비단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수희의 내용 중에는 배 위에서 베풀어지는 여악과 잡희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사』 의종 을유 19년(1165) 여름 4월 무신일 조에 "(왕이) 예성강의 뱃사공과 어부들을 불러서 수희를 시키고 구경한 후 그들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수희는 소규모였고 뱃사공과 어부들이 주로 '배젓기 기술'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의 수희는 『오잡조』의 기록을 통해 보듯이 이미 중국에도 있던 것이다.

「백선연(白善淵)」의 수희에서 불을 머금었다가 뿜어내는 연희는 토화(吐火)라고 하여 산악·백희 종목 중의 하나인데, 귀희(鬼戱)를 하며 이 연희를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북송 때의 사적을 담고 있는 『동경몽화록』을 통해, 고려시대 수희에서 연행된 '귀희를 하며 불을 머금었다가 뿜어내는 연희'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이 크게 일어나자, 가면을 쓰고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입으로는 낭아(무기의 일종) 같은 불꽃을 내뿜으며 귀신 차림을 한 자가 등장했다.

권7 가등보진루제군정백희(駕登寶津樓諸軍呈百戱)

혹은 나무 꼭대기에 횡목을 세우고 그 위에 늘어서서, 귀신으로 분장한 이들이 불꽃을 뿜어대는데 매우 아슬아슬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권8 유월육일최부군생일이십사일신보관신생일(六月六日崔府君生日二十四日神保觀神生日)

『동경몽화록』의 기록에서 보듯이 북송 때의 연희에서 귀신으로 분장한 인물이 불을 내뿜고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 수희에서 연행된, '귀희를 하며 불을 머금었다가 뿜어내는 연희'도 결국 귀신 역할을 하는 인물이 귀신가면을 쓰고 불토해내기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중국의 수희에는 배 위에서 연행하는 솟대타기와 수추천과 같은 곡예적인 백희 종목들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의 수희에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여러 연희들과 함께 불토해내기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연희와 고려 때의 연희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송나라와 고려 사이에 연희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장정룡, 「고려시대의 연희 고찰」, 『역사민속학』 9, 한국역사민속학회, 1999.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참조어

수괴뢰, 수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