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

산대

[ 山臺 ]

정의 및 이칭

산대(山臺)는 산 모양의 무대구조물로서 '오산(鼇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 이래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를 거행할 때 산대 앞에서 가무백희를 연행했다. 그래서 산대 앞에서 연행된 연희들을 산대희라고 부른다. 1725년 완성된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에는 소형의 산대 앞에서 줄타기, 접시돌리기, 땅재주, 그리고 가면을 쓴 사람 넷이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산대는 산천초목과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그 산의 형태만으로도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위에 고사를 형상화한 잡상들을 설치하여 움직이는 잡상놀이를 특징으로 한다.

오산의 일종인 등산(그림 중앙)

오산의 일종인 등산(그림 중앙) 『남도번회도권』. 명대

오산 부분도

오산 부분도 『남도번회도권』. 명대

오산은 중국 명대(明代)의 『남도번회도권(南都繁會圖卷)』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림의 중앙에 오산(鰲山)이라고 쓴 것이 바로 '등산(燈山)'이다. 중국에서 흔히 오산이라고 부른 무대 구조물을 우리나라에서는 산대(山臺)라고 불렀는데, 이와 같이 산대 위에 많은 등을 설치한 것이 등산이다. 이 오산은 누대 위에 산을 안치한 형태로, 중국에서는 이런 형태의 오산을 산루(山樓)라고 불렀다. 산루는 아래층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를 갖춘 2층의 구조물이다.

유래 및 역사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서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山臺結綴似蓬萊)"라는 구절 또한 산대의 모양이 산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말해준다.

성종 19년(1488) 3월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서 광화문 밖에 설치한 두 개의 산대에 대해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를 싸고"라며 그 주석에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성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鰲戴山 擁蓬瀛海日-光化門外東西 列鰲山二座 高如門等 極其工巧)"라고 했다. 이때의 '자라가 산을 이고 있다'는 표현은 산대의 외양을 짐작하게 한다.

오산은 '산대'와 자주 혼용되어 쓰이던 용어이다. 『중종실록』 34년 4월 2일 중국사신이 평양에서 산대희를 구경할 때 산대에 불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부터 10일까지 그 화재 사건에 관한 관리의 서상(書狀), 임금의 전교(傳敎), 중국 사신의 답사(答辭) 등이 오간 기록들을 보면, 같은 대상을 두고 '오산'과 '산대'라는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중국 사신은 어김없이 이 구조물을 오산이라 지칭한다.

특히 『봉사도(奉使圖)』에서의 산대는 예산대(曳山臺)로서 다른 장소에서 만들거나 보관하고 있다가 행사 장소로 끌고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광해군 이후에는 예산대만 사용되었는데, 이는 산대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목과 또 이를 만드는 인력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동궐인 창덕궁의 돈화문 밖에 산대를 설치해야 했는데, 돈화문 밖의 지형이 좁아 산대를 세울 만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산대

예산대 아극돈. 『봉사도』. 1725. 제7폭

헌가산대(軒架山臺) 또한 예산대와 같은 것이다. 원래 '헌가(軒架)'는 제향에 쓰이는 악기 편성을 가리키는데, "헌가를 내고들일 때 처마와 서까래를 뜯어내고 담장을 허물어야" 하며, "헌가산 위의 인물"인 잡상이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 기존의 악기편대 또는 악대가 아니라 커다란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헌가산대' 또는 '헌가산'이란 수레 위에 산대를 만들어 재인들의 연희에 사용한 무대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나례청등록』에 '헌가(軒架)'와 '윤거(輪車)'가 혼용되어 쓰이고, 『광해군일기』 권95 5장에 부묘 후 환궁 행사 때 "산거(山車)와 화대(花隊)가 매우 사치했다"는 기록을 통해, '윤거' 혹은 '산거'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대, 오산은 동일한 구조물을 지칭하며, 이것의 약식인 산거, 윤거, 예산대, 헌가산대, 오산, 오붕, 화산대 또한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성

산대는 산의 형태를 띤 구조물로서 산천초목과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그 자체만으로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산 위에 고사를 형상화한 잡상들을 설치한 잡상놀이를 특징으로 한다. 산대가 산의 형태를 갖추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형상화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재연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적 흐름에 따라 원래 가지고 있는 산의 상징적 의미가 약화되기도 했으나, 대개 그에 상응하는 잡상놀이를 통해 고사 재연을 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인형을 진열하여 구경하는 전통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고려 초까지는 인형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관습이 있었다. 아마도 신라시대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일찍이 일본에서 산거(山車)를 응용해서 인형을 전시하고 관람시켰던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고구려의 인형도 이런 관습과 동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하여, 이러한 잡상 진열의 전통이 전승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침향산

침향산 『악학궤범』

산대 위에서 이루어진 잡상놀이는 정지된 상황 연출만으로도 그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전형성을 띠는 상황이나 세간에 잘 알려진 이야기의 한 장면을 재현했을 것이다. 이는 침향산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지는데, 침향산 또한 산의 형태를 갖춘 구조물로 그 안에는 산대와 마찬가지로 각종 잡상이 진열된다.

(가) 침향산을 만드는 제도는 다음과 같다. 널빤지로 산 모양을 만들고, 전면·후면에 피나무(椵木)로 봉만(峰巒)을 조각하여 붙이고, 사탑(寺塔)·승불(僧佛)·미록(麋鹿, 고라니와 사슴)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산골짜기에 깃들이고 모두 색칠한다. 전면에는 지당(池塘)과 난간(欄干)을 설치하고, 좌우에 꽃병을 놓고, 온 떨기의 모란(비단으로 만든 꽃이다)을 꽂는다. 그 안에 큰 연화통(蓮花筒)을 설치하고, 밑에는 바퀴통(輪筒) 넷을 달아 침향산을 끌 수 있게 한다.

『악학궤범』 권8, 향악정재 악기도설

(나) 대열 앞과 뒤에 있는 취주악대가 한꺼번에 연주하며 산붕(山棚)을 끌고 앞서 가면서 잡희를 한다. ······ 연(輦)이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니, 여기(女妓) 담화지(擔花枝) 등이 침향산붕(沈香山棚)을 만들고 가요(歌謠)를 바쳤다. ······ 일본인(日本人) 64인도 또한 순청(巡廳) 길 서쪽에 차례로 서있었다. 연이 광화문 밖에 이르렀을 때 왼쪽과 오른쪽의 채붕에서 동시에 잡희를 했고 기생과 우인들이 함께 근정전의 뜰로 들어갔다. 임금이 근정문에서 연을 멈추고 그것을 구경했다.

『단종일기』 2년 7월 16일(을축)

침향산은 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산사(山寺)나 동물 등으로 꾸미고, 이를 밀고 당길 수 있게 제작했다. 이러한 침향산의 전통이 있었기에 산대 또한 그렇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 의하면 침향산과 산붕을 동시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물론 사용주체가 여기와 재인으로 쓰임새가 다르겠지만, 동일한 형태에 동일한 내용이었다면 함께 만들 필요가 없다. 즉 침향산의 잡상과 산붕에 진열되는 잡상의 성격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산붕의 잡상놀이는 단순한 진열이 아니라 고사의 재현임을 알 수 있다. 대개 산대잡상의 경우, 강태공이나 공자, 빈풍칠월 등을 형상화했다.

(다) 내농작(內農作)의 모든 기구를 후원에 배설했는데, 왼편은 경회지(慶會池) 북쪽 첫 섬돌로부터 북쪽 담장 소문(小門) 안까지 이르렀고, 오른편은 충순당(忠順堂) 앞 섬돌로부터 취로당(翠露堂) 앞까지 이르렀다. 모두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을 모방하여 오른편에는 주공(周公)이 무일편(無逸篇)을 드리는 형상을 만들고, 왼편에는 주공이 칠월편(七月篇)을 드리는 형상을 만들었으며, 그 글씨를 써서 건 족자는 해태(海苔)로 종이를 만들고 벚나무 껍질로 조각하여 글자를 만들었으며, 기산(岐山) 사시의 경치를 만들었는데, 모든 기화(奇花)·이초(異草)·충어(蟲魚)·금수(禽獸)·인물(人物)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상이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승지(承旨) 및 감조관(監造官) 등에게 선온(宣醞)했다.

『중종실록』 9년 1월 14일

(라) 전교하기를 "만세산(萬歲山) 가에 영충산(迎忠山)과 진사산(鎭邪山)의 두 산을 만들되, 영충산에는 군자가 득의하여 조정에 드날리며, 노래와 춤으로 연락하는 모양을 꾸미고, 진사산에는 소인이 먼지방에 쫓겨나 의복이 남루하고 용모가 초췌하여 초가집에서 궁하게 살며 굶주려 쓰러져 있고, 처자가 매달려 울부짖는 모양을 꾸미도록 하라" 하고 모든 원의 흥청과 운평을 모아, 풍악을 크게 벌이고 가서 관람하게 했다.

『연산군일기』 12년 5월 1일

이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당시 유행하는 레퍼토리로 바뀌기도 했는데, 『기완별록(奇玩別錄)』에 서술된 산대는 〈구운몽〉을 형상화했다. 『기완별록』은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그 작업현상인 경복궁 옛터를 친림할 때 그것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놀이를 보고 지은 것이다.

(마) 한 곳슬 바라보니 금강imagefont이 온다 imagefontimage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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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환녹운 두 귀 밋imagefont 귀에골이 흔들니image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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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붓imagefontimagefont가지로 반만 imagefontimagefont락말낙
션년히 고은 imagefontimagefont 구룸으로 나려온 듯
셩진의 놉품 도imagefont 속졀이 젼혀 업imagefont
윤회에 괴로옴을 한번 면키 얼여웨라
imagefont 일홈 금강imagefont이 번연히 의제로세
셩진과 팔션녀가 형imagefont에셔 만나쓰니
남악에 금강imagefont이 잇쓸 리가 만무image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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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완별록』

이 산대의 이름은 '금강산'인데, 소설 〈구운몽〉의 인기를 반영한 연희로서 성진과 팔선녀의 만남 부분을 형상화하고 있다. 우선 산대의 외양을 보면 네 면에 난간을 설치하고 그 위에 첩첩이 산이 들어서 있고, 기암괴석과 송죽 사이로 절과 홍문이 있다. 성진은 가사를 입고 팔선녀를 바라보고 있고, 팔선녀는 각 봉우리 위에 있다. 가화를 꽂고 화관, 금봉채를 하고 능라의상·금수원삼을 입었다. 『기완별록』의 필자는 성진이 팔선녀를 형산에서 만났으니, 이 산 이름이 금강산일리 만무하다고 했다.

"한 곳을 바라보니 금강산이 온다 하니 / 허황한 말이로다 산이 어이 움직이랴"라는 구절을 통해 이것이 산의 형태를 갖추고 움직일 수 있는 구조물, 즉 예산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인같이 섰는 거동"과 "산봉마다 섰는 선녀"라는 구절에서 여기에 묘사된 연희가 잡상놀이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특히 이러한 잡상놀이가 기계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특히 자격루와 흠격각을 통해 당시 기계를 이용한 인형의 제작이 세종대에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봉사도』의 산대잡상이 기계로 조작되는 인형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산대는 말 그대로 산의 형태를 본떠 만든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두루 알고 있는 고사 등을 잡상(雜像)놀이를 통해 재현하는 연희가 중심이 되었다.

의의

산대는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무대구조물이다. 그러므로 전통연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희 무대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 무대 공간으로서 '신성한 산'을 설행하는 전통은 동북아시아에서 삼신산(봉래산)과 곤륜산 등 중국 고대 신화에 기반을 둔 산을 형상화하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고대의 제왕들은 불로장생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신성한 산을 조성하여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했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환상이 점차 약화되면서 산대의 설행은 왕조의 영속성을 주지시키는 이념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인도, 중국에서 석탄일에 행해졌던 행상(行像)도 산대의 성립과 관련이 있다. 인도의 가두행렬은 고대 이래로 제장이나 사원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종교축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일부 특정한 주신을 모신 힌두사원의 경우에는 신상을 거대한 수레에 태워 시가를 순행함으로써 주기적인 신성현현(神聖顯現)을 실현하는 동시에 벽사진경을 도모하기도 한다. 신거(神車)나 신여(神輿)의 행렬의식이 수반되는 종교축제는 인도 전역에서 산견될 만큼 보편적인 관행이다. 불교의 행상은 불상을 보거(寶車, 화려하게 꾸민 수레)에 태우고 도시의 거리를 순행하는 의식으로, 이때 다양한 연희들도 공연하는데, 군중들에게 불상을 보여주며 불교를 선양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마을제사인 마쓰리에서 신을 잘 대접한 뒤에 신을 가마나 수레에 옮겨 모시고 가두행렬을 벌인다. 이 행렬은 마쓰리의 절정이자 장관을 이루는데, 행렬의 구성이나 모양은 각지의 특색을 잘 드러낸다. 이 가운데 7월 17일 교토에서 거행되는 기온마쓰리(祇園祭)의 산거(山車)행렬이 매우 유명한데, 32대의 산거들이 벌이는 가두행렬이다.

산대를 무대에서 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고,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하나는 산대를 무대로서 활용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산대를 무대 배경을 위한 설치물로서 활용한 경우이다. 전자는 산대 위에 잡상을 설치하고 연행하는 연희 등이 펼쳐졌으며, 후자는 산대 앞에서 가면극, 줄타기, 땅재주 등을 연행했다. 한국 전통연희의 주요 장치물이자 무대였던 산대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오늘날 현전하는 산대 관련 연희들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고, 나아가 새로운 공연 공간 탐구에도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다.

참고문헌

  • 김은영, 「산대와 채붕」, 『생활문물연구』 10, 국립민속박물관, 2003.
  • 박정혜,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 일지사, 2000.
  • 사진실, 「산대의 무대양식적 특성과 공연 방식」, 『구비문학연구』 7, 한국구비문학회, 1998.
  • 사진실, 『공연문화의 전통』, 태학사, 2002.
  • 사진실, 「동아시아의 신성한 산 설행에 나타난 욕망과 이념」, 『공연문화연구』 12, 공연문화학회, 2006.
  • 안상복, 「송·금대 잡극·원본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참조어

다정산대, 산거(山車), 산붕, 예산대, 오붕, 오산, 윤거, 침향산, 헌가산대, 화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