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악 입호무

신라악 입호무

[ 新羅樂 入壺舞 ]

신라악(新羅樂) 입호무(入壺舞)는 신라에서 유래된 전통연희의 하나로, 한 항아리로 들어가서 다른 항아리로 나오는 유술과 절묘하게 결합된 환술 공연을 말한다.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라 일컬어지는 『당무회(唐舞繪)』에 그려져 있는데, 이 공연을 '신라악(新羅樂) 입호무(入壺舞)'라고 기록하고 있다. (☞ 신서고악도 항목 참조) 안식오안(安息五案)이 고대 이란 지역에 위치했던 안식의 물구나무를 선 채 여러 개의 책상을 층층이 쌓는 잡기를 가리키고, 도로심장(都盧尋橦)은 미얀마에 위치했던 솟대타기를 가리키듯, 연희가 전래된 지역명을 병기하는 관습으로 보아 신라악 입호무 역시 신라에서 유래된 연희로 이해할 수 있다.

'입호무'는 사자춤인 '신라박(新羅狛)'과 더불어 산악·백희의 상호교류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 신라박 항목 참조) 고구려기(高句麗伎)가 중국 수나라의 칠부기(七部伎)와 구부기(九部伎)에 속해 있었고, 백제기(百濟伎)와 신라기(新羅伎)가 칠부기 외에 외국악으로 존재했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고구려기가 십부기(十部伎) 속에 포함되었고, 백제기가 십부기 외의 외국악으로 존재했던 사실을 근거로 하여 당대 중국에 끼쳤던 삼국악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신라악 입호무〉

〈신라악 입호무〉 『신서고악도』

그림에는 두 개의 탁자 위에 각각 둥글납작한 항아리가 놓여 있다. 연희자가 오른쪽 탁자 위에서 항아리 입구로 들어간 듯이 몸의 일부분을 항아리 안에 숨기고 두 다리는 하늘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 항아리에는 두 팔을 높이 든 연희자의 상체 부분이 그려져 있다. 왼쪽 항아리로 들어가서 오른쪽 항아리로 나온 것이다.

특히 연희자가 착용하고 있는 모자가 경각복두(硬角幞頭)로서 관모(官帽)라는 점에 주목할 때, 이는 신라 궁정 소속의 전문적 연희자가 중국에 파견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산악이 전래하자 산악호(散樂戶)를 두었다가, 782년 산악호를 폐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나라시대에 산악의 보호·육성을 위한 관립학교가 존재한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기가 수·당대에 칠부기·십부기에 속해 있었고, 백제기·신라기가 외국악으로 존재했던 사실을 볼 때, 고구려·백제·신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산악·백희의 연희자를 양성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입호무'와 동일한 공연이 중국에서 현재까지도 연행되고 있는데 청대에는 '둔신현법(遁身顯法)'이라는 명칭으로, 오늘날에는 '항둔(缸遁)'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환술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살필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희종목으로서의 둔술(遁術)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둔술의 전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방증 자료가 존재한다.

신라의 입호무의 발생 가능성을 다음 두 가지로 상정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겼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중국이나 서역과의 교류에 의해 생긴 것이 신라에서 더욱 활발하게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전통 환술은 신선사상을 연희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선약(仙藥)을 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방사는 자연의 이치를 알아 자유자재로 이용했으며, 이는 환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신선사상은 기원 전 3-4세기경 형성되었으며, 도교 속에 편입되어 핵심사상으로 자리한 것은 4세기경이다. 한국에도 이미 신선사상이 있었으며, 특히 신라의 풍류도는 신선사상과 아주 밀접하다. 김유신(金庾信)은 방술의 대가였으며, 김유신의 서손(庶孫)이자 둔갑술의 원조인 김암(金巖)은 신선으로 추앙받는다.

〈둔신현법〉

〈둔신현법〉 『점석재화보』

① 옛날에 신라에는 선풍이 대단히 유행했다. 그래서 용천이 기뻐했고 만물이 안녕했다.

『고려사(高麗史)』 권8 세가(世家) 제18 의종(毅宗) 22년 3월 무자(戊子)

② 또 김유신(金庾信)이 일찍이 한 노거사(老居士)와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인(世人)은 그 거사(居士)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때에 공(公)의 친척(親戚) 수천(秀天)이 오랫동안 악질(惡疾)에 걸려 앓으매 공(公)이 거사(居士)를 보내어 진단(診斷)케 했다. 마침 수천(秀天)의 친구 인혜사(因惠師)라는 이가 중악(中岳)에서 찾아와 거사(居士)를 보고 모욕(侮辱)하여 가로되 "너의 외양을 보니 간사한 사람이다. 어찌 남의 병(病)을 고치리요." 거사(居士)가 이르되 "내가 김공(金公)의 명(命)을 받고 마지못하여 왔을 뿐이다." 혜(惠)가 "너는 내 신통력(神通力)을 보아라"라고 하고, 향로(香爐)를 받들고 향(香)을 피우고 주문(呪文)을 외니, 잠시 뒤에 오색 구름이 그의 머리 위를 돌았고 하늘의 꽃이 흩어져 떨어졌다. 거사(居士)가 말하되 "화상(和尙)의 신통력(神通力)은 신기(神奇)합니다. 제자(弟子)도 변변치 못한 기술(技術)을 가지고 있으니 한번 시험(試驗)하여 보겠습니다. 원(願)컨대 사(師)는 잠깐 앞에 서 계십시오." 혜(惠)가 그대로 했다. 거사가 손가락 튕기는 일성(一聲)에 혜(惠)는 공중(空中)에 높이 일장(一丈)이나 거꾸로 올라가더니 얼마 만에 서서히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혀 말뚝과 같이 우뚝 했다. 옆의 사람이 밀고 잡아당기었으나 움직이지 아니했다. 거사(居士)가 떠나가니 혜(惠)는 거꾸로 박힌 채 날이 새었다. 이튿날 수천(秀天)이 사환(使喚)을 김공(金公) 유신(庾信)에게 보냈다. 공(公)이 거사(居士)를 다시 보내어 풀어 주게 했다. 이로써 혜(惠)는 다시 재주를 팔지 못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신주(神呪) 6 밀본최사(密本摧邪)

③ 윤중의 서손(庶孫)인 암(巖)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방술(方術) 익히기를 좋아했다. 젊었을 때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면서 간간히 스승을 찾아 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을 배웠는데, 한 가지를 배우면 세 가지를 이해했다. 저 혼자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지어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놀라서 말했다. "그대의 지혜롭고 통달함이 여기에까지 이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로부터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대력(大曆)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 세 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시랑(執事侍郞),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이 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돌보며, 삼무(三務, 봄·여름·가을 세 계절의 농사일)의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백성들이 모두 이를 편하게 여겼다. 한번은 메뚜기떼가 발생하여 서쪽으로부터 패강 부근까지 꾸물거리며 온 들을 뒤덮자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이때 암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 메뚜기떼가 다 죽었다.

대력 14년(서기 779) 기미에 그가 왕명을 받고 일본국(日本國)을 예방했는데 일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지로 머물게 했다. 그때 마침 대당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니, 왜(倭)인들이 이를 보고 암이 대국에까지 알려진 인물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감히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3 열전(列傳) 3 김유신(金庾信) 하(下)

위의 내용 중 ①을 통해 신라에서 신선을 추구하는 풍습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②에서는 김유신이 직접 방술이나 환술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유신과 친분이 두터운 거사와 김유신의 친척 수천의 친구 인혜사가 한바탕의 환술을 겨룬다. 인혜사는 순식간에 오색구름이 일게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입흥운무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꽃이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다. 자존심이 상한 그 거사는 단번에 인혜사를 공중 부양하게 했다가 거꾸로 박힌 채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게 한다. ③과 같이 김유신의 서손인 김암은 당(唐)에 들어가 숙위(宿衛)로 있으면서 음양가법을 자진해서 배웠다. 방술의 하나인 둔갑술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스이코천황(推古天皇) 10년 10월 조에 "무왕(武王) 3년(602) 백제승 권륵(權勒)이 역본(曆本)과 천문지리서와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니 일본에서는 서생 3-4인을 뽑아 이들 과목을 배우게 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에서도 둔갑술이 매우 발달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한 물건을 변화시키는 변희술(變戱術)과 둔갑술(遁甲術), 둔술(遁術)은 차이가 있다. 변희술과 둔갑술은 주체와 객체의 차이만 있을 뿐 그 형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같으나, 둔술은 몸을 숨기는 것이다. 또 변희술과 둔술의 경우 연희종목으로서 속임수를 기본으로 하지만, 둔갑술은 신통력을 다루는 것이니 둘의 차이점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방사들이 환술의 발생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듯이 둔갑술이 둔술의 발생을 촉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 김은영, 「한중 환술의 역사와 특징」, 『한국민속학』 50, 한국민속학회, 2009.
  • 김춘화, 「한·중 환술의 역사 및 연행양상」,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안상복, 『중국의 전통잡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傅起鳳·傅騰龍, 『中國雜技史』,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9.
  • 崔樂泉, 『圖說中國百戱雜技』, 世界圖書出版公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