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탈
정의 및 이칭
〈발탈〉은 인간 배우와 인형 배우가 함께 등장하여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며 재담으로 서로 다투는 전통연희이다.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발탈〉은 '발작난', '족(足)탈', '족가면(足假面)', '발탈춤' 등으로도 불린다. 이 명칭들은 모두 발에다 가면을 씌우고 조종하는 독특한 연행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발탈 공연 장면
〈발탈〉은 가면이 이용된다는 점에서 가면극의 일종으로 보인다. 〈발탈〉이라는 연희 명칭 역시 탈, 곧 가면을 강조하고 있어서 그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가면극과는 다른 점이 너무 많다. 발탈은 가면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다른 가면극에서처럼 얼굴에 쓰는 것이 아니라 발에다 씌우는 것이며, 등장하는 인형 배우의 머리 부분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만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고 인형극이라 할 수도 없다.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처럼 인형 배우만 등장하여 연행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배우가 인형 배우와 함께 등장하여 연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반신만을 가진 기형적인 인형 배우와 정상적인 인간 배우가 함께 등장하여 춤을 추기도 하고 한 치 양보도 없이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는 연행의 전개 양상은 전통적인 재담과 닮았다.
유래 및 역사
〈발탈〉의 유래와 형성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단편적인 구술 기록과 증언을 접할 수 있다. 이 구술 기록과 증언들은 대체로 '신라 진중(陣中)에서 놀던 것이 그 시초', '고려 나례잡희에서 기원한 것', '남사당패에 의해 비롯된 것', '박춘재가 창작하여 궁중에서부터 놀던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신라 진중놀이 유래설'은 남사당패 연희자였던 남형우의 증언을 근거로 삼는다. 그에 의하면, 1920년 경 당시 스승이었던 오명선이 '발탈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특히 진중에서 놀던 놀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신라 진중놀이 유래설'은 〈발탈〉 예능보유자였던 박해일도 주장한 바 있다. 물론 뚜렷한 근거는 없다.
신학균과 손태도의 '고려 나례잡희 기원설'은 고려시대에 팔관회나 연말 궁중 나례에서 온갖 놀이가 행해졌는데, 여기서부터 〈발탈〉이 기원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 역시 '신라 진중놀이 유래설'과 마찬가지로 그 근거가 막연하다.
'남사당패 기원설'은 정병호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전통 예술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탈〉이 남사당패로 대표되는 떠돌이 광대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른다면, 〈발탈〉 전승 계보 맨 윗자리에 남사당패가 자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사당패가 〈발탈〉 혹은 〈발탈〉과 유사한 연행을 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는 정병호의 주장 이외에, "옛 남사당패 중에는 〈발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으레 한두 사람 있었는데 비가 오거나 너무 날씨가 추워 마당놀이를 못할 때 방안에서 구경꺼리로 놀았다"는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사당패로 대표되는 떠돌이 광대패 연행 종목의 하나로 〈발탈〉 혹은 〈발탈〉과 유사한 연행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발탈〉이 남사당패로 대표되는 떠돌이 광대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는 '남사당패 기원설'을 제기한 정병호가 "남사당 쪽의 여흥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추정했지만 남사당이 이러한 놀이를 놀았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덧붙여 〈발탈〉 관련 증언이나 기록에서 남사당패 기원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남사당패마저도 자신들의 고유 연행 종목으로 〈발탈〉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도 주변 근거가 될 수 있다.
정병호는 스스로 '남사당패 기원설'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박춘재가 처음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손태도 역시 '궁중 나례희 기원설'을 주장하면서도, 그 형성에 있어 박춘재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렇게 〈발탈〉과 박춘재를 연관시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 本社 主催 端午 府民 慰安大運動會에서 運動競技以外에 興味津〃한 餘興은 一〃이 列擧키 어려울만치 만흔 中 一般市民들의 興味를 도읍게할 것은 勸相場 光武臺 朴春載 以外 三十餘名의 出演이니 朴春載▲特의 장님노리, 굿노리와, ▲絶할 추춤과 奇拔한 발탈은 府民이 항상 朴春載의 出演을 볼 수 잇다하더도 當日만큼 朴春載의 모든 才談을 한번에 어더 볼 수는 업슬 것이다.
『매일신보』, 1929. 6. 10.(나) 재담에는 이미 발표한 맹인 재담 외에 은퇴 중인 사게의 대가 박춘재(朴春載)씨가 특히 본사의 계획에 찬성하여 최후의 봉사로 특별 출연하고, 그의 장기인 〈발작난〉도 아울러 공개할 터로······
『조선일보』, 1938. 4. 21.(가)는 1929년 6월 11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단오 부민 위안 대운동회'의 여흥으로 박춘재의 '기발한 〈발탈〉'이 연행될 것임을 알리는 기사이다.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발탈〉이 연행될 것임을 알리는 기사는, 행사 당일인 1929년 6월 11일자 『매일신보』에도 나온다. "運動及餘興 種目"이라는 제목 아래 아홉 번째로 "朴春載一派立唱才談"을 오전 11시부터 한다고 되어 있으며, 그 연행 종목이 "장님노리, 굿노리, 발탈, 추춤, 기타 ○○"로 나와 있다.
(나)는 1938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조선 특산품 전람회'의 부대 행사로 열리는 '향토 연예 대회'에서 박춘재가 참여하여 '발작난', 곧 〈발탈〉을 연행할 것임을 알리는 기사이다. 인용된 두 신문 기사는 직접적으로 〈발탈〉을 언급한 것으로, 박춘재와 〈발탈〉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발탈〉과 박춘재의 관련성은 여러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창배(1916-1983), 이동안(1906-1995), 고설봉(1913-2001), 이은관(1917-2014), 박해일(1923-2007)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면, 박춘재에 의해 〈발탈〉이 형성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박춘재가 언제부터 〈발탈〉 연행을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략 1910년대를 전후해서 박춘재에 의해 〈발탈〉이 형성된 것으로 그 시기를 올려 잡을 수도 있다. 비록 〈발탈〉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매일신보』 기사가 1929년에 발견되지만, 그 이전에도 〈발탈〉 연행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 ······ 박츈의 됸 나올록 더욱 신긔야 그 익살, 그 몸짓은 만쟝의 손님을 웇치지 안이면 말지 안이는 즁에도 난장이노름에 더욱 우슴소가 이지 안이며 부인네들은 ▲ 너무 우슈어셔 허리 펴지 못 갈에
『매일신보』, 1915. 10. 4.(라) 그 뒤에 「박츈」의 「판슈노리」와 「난장이노리」 등 실로 ▲텬하 일픔의 미잇 우슴거리로 만쟝에 우슴쇼가 일이가 업 즁
『매일신보』, 1915. 10. 8.(마) 경셩 광무 졍월 초하루날부터 연다지오 그러 광고도 보앗지오만은 박츈의 별 이샹 노름노리와 로 올나온 남녀우가 만하셔 아죠 볼만요 초삼일낫부터 씨름이 잇답듸다. 「劇狂生」
『매일신보』, 1916. 2. 4.인용문 (다)와 (라)에서 박춘재의 신기한 재주 중에 하나로 "난장이노름" 또는 "난장이노리"를 언급하고 있다. "난장이노름"이나 "난장이노리"는 꼽추춤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발탈〉일 가능성도 높다. 〈발탈〉에서 탈(유람객)로 등장하는 인물의 외양이 상반신만 존재하기에 이를 보고 "난장이노름" 혹은 "난장이노리"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용문 (마)에서 밑줄 친 "박츈의 별 이샹 노름노리" 역시 〈발탈〉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손이 아닌 발을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독특한 연행 방식과 등장하는 인형 배우의 모습이 '별 이샹 노름노리'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은 1908년에 개설된 극장인 "원각사 시절"에 박춘재가 〈발탈〉 연행으로 유명했다는 이창배의 증언도 방증이 된다.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발탈〉 형성의 시기를 추론해 본다면, 대략 1910년대를 전후해서 박춘재가 〈발탈〉을 성립시킨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발탈〉이 궁중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은 가무별감을 했다는 박춘재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궁중에서부터 놀던 것', '가무별감의 그 시대에도 발탈 등 각종 재담 소리를 했던 것'이라는 견해가 피력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탈〉이 실제 궁중에서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이는 발을 이용하는 〈발탈〉의 독특한 연행 방식 때문이다. 아무리 오락 유흥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임금이나 왕족 앞에서 발을 내밀며 연행을 한다는 것이 허용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발탈〉의 궁중 기원설 혹은 궁중 연행설은 박춘재의 경력에서 비롯된 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발탈〉의 기원이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10년대를 전후로 해서 발에다 가면을 씌우고 움직이며 노래하고 재담하는 연행이 형성되어, 나름의 실험과 모색 과정을 거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발에다 가면을 씌우고 놀리는 연행 방식은, 현재로서는 이전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주요 등장인물 2명이 서로 재담 경연을 하며 연행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은 조선시대 우희나 재담 연행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따라서 〈발탈〉은 조선시대 우희나 재담 연행 전통을 바탕으로, 발에다 가면을 씌우고 놀리는 등의 독특한 인형 조종 방식을 덧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우희나 재담 연행 전통의 바탕 위에 발로 조종하는 인형 배우와 인간 배우의 재담 경연이라는 새로운 연행의 창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박춘재이다. 〈발탈〉이라는 새로운 연행 종목의 형성에는 박춘재라는 재능 많은 전통 예술인의 역할이 돋보인다. 앞서 살폈듯이, 관련 구술이나 신문 기사에서 〈발탈〉과 박춘재는 거의 한몸처럼 등장한다. 적어도 박춘재는 현전하는 〈발탈〉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발탈〉의 시작은 연행자 한 사람에 의한 발인형 조종 중심의 연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점차 2인 연행, 나아가 2인 이상의 연행자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박춘재가 가지고 있던 전통 재담과 소리 능력이 적절하게 발휘되었다. 특히 박춘재의 전통 재담 능력과 초기 〈발탈〉의 결합은, 〈발탈〉에 주목하게 하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형 배우와 인간 배우가 공존하며, 티격태격하고 재담을 겨루는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발탈〉의 특징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발로 가면을 놀리며 노래도 하고 재담도 하는 〈발탈〉은 한 가지 계통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박춘재라는 개인은 물론이고, 남사당패로 대표되는 여러 유랑 광대패에서 주요 연행 종목 중의 하나로 조금씩 다르게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에다 가면을 씌우고 움직이며 재담과 노래를 하는 기본적 연행 방식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연행 방식은 조금씩 다른 〈발탈〉이 존재했던 것이다. 박춘재와 남사당패로 대표되는 유랑 광대패의 〈발탈〉 사이에, 그 선후 관계나 영향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당대의 반응이나 이후의 전승 양상으로 보아, 대략 박춘재에 의해 형성된 〈발탈〉이 유랑 광대패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발탈〉 역시 박춘재 계열의 것이며, 남사당패 계열은 그 전승이 단절된 상태이다.
내용 및 특성
발탈의 놀이판은 가로 2m, 세로 1m 정도로 사각의 검은 포장막을 치고, 연희자가 그 속에 들어가서 발탈 인형을 조종한다. 포장 안에는 연희자가 앉아서 연희할 수 있는 의자가 있다. 포장 앞면의 중심부를 잘라 내어 발을 포장 앞으로 내놓는다. 발에 가면을 씌우고 대나무로 만든 인형의 팔을 옆으로 벌린 다음, 그 위에 저고리와 마고자를 입혀 어수룩한 모습의 인물로 만든다.
현재 연희되고 있는 발탈은 발바닥에 가면을 씌우고 발목을 사용해 움직이게 하는 것과 대나무로 조종하는 팔놀음, 이렇게 두 가지의 기본기를 기초로 하여, 발탈 인형의 양손에 실을 연결하고 그것을 대나무에 연결하여 조종한다. 그리고 꼭두각시놀이와 같이 어릿광대(산받이)가 포장막 밖에서 발탈을 상대하면서 재담과 노래, 춤으로 공연을 진행한다. 삼현육각의 반주를 곁들인다.
〈발탈〉의 연희본에는 〈심우성본〉, 〈무형문화재조사본〉, 〈박해일본〉, 〈허용호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무형문화재조사본〉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본다.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는 생선 거간꾼 노릇을 하는 발탈 인형, 생선 도가를 운영하는 주인(어릿광대), 생선을 받아가기 위해 나오는 생선 소매상 여자 등 세 등장인물이 연희를 진행한다.
인형을 조종하는 모습 발탈
〈무형문화재조사본〉에는 무엇을 잡아먹는 이야기, 조기를 헤아리는 재담, 약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발탈은 "피라미·조개·치리·비둘기·까투리·맹꽁이 등을 잡아먹고, 말도 잡아먹고 돼지도 잡아먹고 닭도 잡아먹고 굼벵이도 잡아먹고 네 불알도 떼 먹는다"며 위세를 부린다. 그리고 조기 장사의 재담으로 조기를 헤아리는 방법과 "곰의 쓸개·노루·사슴·백구영단·불알이 두 개인데 너 하나 나 하나 먹는다"는 등 약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대사는 다른 민속극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인데, 재담을 통해 해학적 웃음을 유발한다. 발탈꾼과 어릿광대 사이에 욕지거리가 오고가지만 그것도 익살스럽게 들린다.
한편 연희의 내용이 간단한 것에 비해서 삽입 가요가 많이 발견된다.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는 〈팔도유람가〉, 〈쑥대머리〉, 〈개성난봉가〉,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고사창〉, 〈파연곡〉 외에도 잡가 등 기존 가요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박해일본〉에서는 발탈 인형이 팔도강산을 무른 메주 밟듯 유람하고 다니는 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조창이나 평양의 〈추풍감별곡〉, 황해도의 〈몽금포타령〉, 강원도의 〈소 모는 소리〉, 〈만고강산〉, 〈한오백년〉, 〈고사 덕담〉 등을 부른다.
다른 지역의 사례
〈발탈〉은 발을 이용하여 인형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발인형연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발탈〉과 같이 발을 이용하여 인형을 조종하는 사례가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어 주목된다.
첫 번째 사례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우미내 마을에서 조사된 〈구리박첨지놀이〉이다.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 밤에 마을 여자들이 모여 노는 놀이 종목 중에 발로 인형을 놀리는 것이 있다. 발에다 보자기를 씌우고 모자를 씌워 사람 머리 모양을 꾸미고, 두꺼운 종이로 사람 얼굴을 그려서 '박첨지'라 불리는 인형을 만들어 놀리는 연희가 그것이다. 인형 조종자는 다락 위에 앉아서 이리 저리 발을 흔들면서 노는데, 관객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이를 쳐다보며 발 놀리는 구경을 한다. '박첨지가 나온다. 박첨지가 나온다. 때루와 때루와 박첨지, 때루와 때루와 박첨지'라고 노래를 부르며 발을 놀리면, 구경하던 사람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춘다. 이 발로 인형을 만들어 놀리는 놀이는 남사당패가 마을에 와서 하던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끼리 흉내 낸 것이다. 우미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연행된 '발인형연행'은 장기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토박이 연행 종목의 하나로 논 것이 확인된다. 그 연희의 유래에 주목해 보면, 남사당패 계열의 '발인형연행'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례는 〈완도발광대놀이〉를 들 수 있다. 〈완도발광대놀이〉의 형성에는 〈구리박첨지놀이〉와 유사하게 떠돌이 광대패의 영향이 자리한다. 남도남사당패의 발인형연행을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자신들의 민속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완도발광대놀이〉는 마을 당제를 지내는 기간에 밤굿 또는 파방굿을 하면서 논농사를 모방하여 농요를 부르고 노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세시풍속의 일환으로 논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핀 〈구리박첨지놀이〉와 유사하지만, 오직 오락적인 목적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풍년을 빌고 새해의 번영을 축원하는 의미'로 논다는 점이 다르다. 〈발탈〉의 오락 지향성과도 변별된다.
연행 내용 역시 〈완도발광대놀이〉는 〈구리박첨지놀이〉나 〈발탈〉과 다르다. 〈발탈〉의 경우 다양한 소재에 걸친 유람객과 어물도가 주인 사이의 티격태격식 재담 싸움이 주된 내용이 된다면, 〈구리박첨지놀이〉는 단순한 노래에 맞춘 발인형의 움직임이 중심이 된다. 이에 비해 〈완도발광대놀이〉는 악사들의 풍물 반주와 농요에 맞추어 농사짓는 흉내를 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논농사의 핵심 과정인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등과 그 일에 참여하는 풍물패의 동작 흉내를 내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형의 외양 역시 〈완도발광대놀이〉는 다른 두 '발인형연행'과 변별된다. 〈완도발광대놀이〉의 경우 종이 가면에 눈, 코, 입을 그려 넣고 귀 부분에 끈을 달아 발등에 묶어 고정시킨다. 종이 가면을 이용하는 방식은 〈구리박첨지놀이〉와 유사하며, 〈발탈〉의 초기 모습과도 유사하다. 그리고 〈완도발광대놀이〉는 발인형 연행자 발끝에 농악대의 상모나 고깔을 씌운다. 두 발을 두툼하게 천으로 감고 거기에 탈과 상모를 고정시키고, 그 아래에 옷을 걸치고 양 팔 부분에 막대기를 끼워 고정하면 발인형이 완성되는 것이다.
〈완도발광대놀이〉는 〈발탈〉처럼 인형연행자의 목소리 연행과 움직임 연행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형연행자는 주로 움직임 연행에만 주력한다. 발광대꾼이 누운 채로 자신의 하체에 만들어진 인형을 놀리기만 하는 것이다. 인형을 조종하는 방식은 발로 머리짓을 하고 양손에 잡은 막대기로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 조종 방식은 단지 발에 씌워진 발인형만을 놀리는 〈구리 박첨지놀이〉와는 변별되지만, 대나무를 이용하여 인형의 팔을 움직이게 하는 〈발탈〉의 현재 조종 방식과 유사하다.
〈발탈〉이나 〈구리박첨지놀이〉와 비교해 볼 때, 〈완도발광대놀이〉만이 갖는 독특함은 발인형을 조종하는 이가 양발을 모두 쓴다는 것이다. 〈발탈〉이나 〈구리박첨지놀이〉의 경우 한쪽 발에만 가면을 씌우고 외양을 꾸민다. 반면에 〈완도발광대놀이〉에서는 양쪽 발을 모아서 그 위에 가면을 씌우고 외양을 꾸민다.
2000년 이후에 조사·보고된 두 사례를 통해서, 〈발탈〉과 유사한 연행이 존재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국을 무대로 한 떠돌이 광대패의 '발인형연행'이 다양하게 벌어졌으며, 이를 마을 토박이들이 자신들 나름의 연행으로 바꾸기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롭게 조사된 한국의 '발인형연행' 사례는 〈발탈〉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발을 이용하여 인형을 조종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두 사례 모두에서 나타나듯이 사람들에게 발로 인형을 조종한다는 것은 낯설지만 흥미로운 연행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 명 연희자
〈발탈〉은 하나의 계열과 형태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900년대 전반까지의 〈발탈〉 연희자로 거론되는 이들로는 박춘재 이외에, 김덕순, 조갑철, 오명선, 남형우, 이동안 등이 있다. 이 〈발탈〉 연희자들은 크게 남사당 계열과 박춘재 계열로 대별할 수 있다. 김덕순, 조갑철, 오명선 등은 모두 남사당패 계열의 연행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남형우 역시 오명선의 제자로 남사당패 계열이다. 반면에 박춘재와 이동안은 박춘재 계열이다.
이렇게 〈발탈〉은 크게 두 계열로 대별되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사당패 계열의 〈발탈〉은 현재 그 전승이 끊긴 상태이다. 1967년 남형우가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발탈〉 연행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 이어지지 못했다. 반면 박춘재 계열의 〈발탈〉은 이동안·박해일에서 박정임·조영숙 등으로 그 전승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예능보유자로 이동안(발탈 조종), 박해일(어릿광대), 박정임(발탈 조종), 조영숙(어릿광대) 등이 인정되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발탈〉은 바로 박춘재 계열의 발탈이다. 따라서 박춘재 계열의 발탈 연희자들인 (1) 박춘재, (2) 이동안, (3) 박해일, (4) 박정임, (5) 조영숙 등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박춘재(朴春載, 1883-1950)는 〈발탈〉을 처음 창작한 이로까지 일컬어진다. 그는 비단 〈발탈〉 전승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 연행 예술사에 있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전통극과 근대극을 잇는 교량적 역할', '경기 명창으로서 가객의 계통을 이은 인물', '우희와 굿놀이에서 18·9세기 시정의 재담 연행으로 이어지는 전통과 1930년대 만담류의 재담극을 이어준 인물', '이전 시기 궁정배우의 전통을 이은 인물' 등의 평가는 박춘재라는 인물의 위상을 말해준다.
1883년 지금의 서울 독립문 근처에서 태어난 박춘재는 '조선 제일류 가객', '조선 명창', '대명창', '구파극의 중심', '우리나라 만담의 시조', '가무별감 중에 일등' 등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찬사가 괜한 말이 아니었음은 당시의 수많은 신문 기사와 전통예술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서 입증된다.
다재다능한 연행 예술인으로서의 박춘재는 〈발탈〉 연행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대략 1900년을 전후해서 시작된 박춘재의 〈발탈〉은, 그 자신의 재능과 발을 이용하는 독특한 연행 방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박춘재는 서울 극장 무대와 지방 순회공연 무대에서 발탈 연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협률사, 원각사, 광무대, 만리재 흑룡 극장, 마포 도화 극장, 왕십리 광무 극장, 신당동 신부좌 등의 서울 극장 무대는 물론이고, 멀리 만주 지역까지 포함한 순회공연을 하면서 환영받은 연행 종목이 〈발탈〉이다. 박춘재는 1900년대 초반부터 1950년 죽기 이전까지 〈발탈〉 연행을 지속했다. 이 〈발탈〉 연행은 박춘재의 연행 종목 중에서 빠지지 않는 종목이었으며, 관객들에게 아주 환영받은 연희였다. 죽기 전까지도 〈발탈〉을 통해 계속 관객의 인기를 모아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박춘재 하면 당연히 〈발탈〉을 생각했다.
박춘재가 연행했던 〈발탈〉은 '탈(유람객)', '어릿광대(주인)', '여자(아낙네)' 등이 등장하며, 인형 조종자인 발탈꾼이 재담 사이사이에 많은 소리들을 하기 때문에, 그 연행 내용은 고정되지 않고 즉흥적이고 소리 기량이 있는 박춘재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발탈〉 전승 계보에 있어, 박춘재는 현전하는 〈발탈〉의 형성자로서 자리한다. 그는 박춘재 계열 〈발탈〉의 틀을 형성해 내고 실제 연행을 하면서, 당시에는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전 〈발탈〉의 형성 및 전성기로 박춘재 시대를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2) 이동안(李東安, 1906-1995)은 처음 〈발탈〉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인물이다. 그는 비단 〈발탈〉뿐만 아니라 줄광대, 춤꾼 등으로 이름 높은 전통연희자이다. 그는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화성 재인청의 세습 광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하실(李下實)은 단가(短歌)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 할아버지 이창실(李昌實)은 줄을 탔다고 한다.
이동안과 전통연희와의 만남은 남사당패를 따라 가출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열두 살경(1919년 전후)에 동네에 들어온 남사당패를 따라 가출하여 땅재주와 줄타기를 익힌 것이다. 남사당패를 따라다니던 그는 황해도 황주의 놀음판에서 아버지에게 붙들려 집으로 끌려왔지만, 그 이후에도 당시 줄타기의 명인 김관보(金官寶)에게서 줄타기를 배웠다.
줄타기를 삼년 동안 익힌 이동안은 1922년경에 서울 황금정에 있던 광무대로 진출하여 줄타기로 그 명성을 드날렸다. 당시 광무대에는 대금, 피리, 해금의 명인 장오보(張吳寶), 전통 민속 무용과 장단의 대가 김인호(金仁鎬), 태평소의 방태진(方泰鎭), 남도 잡가의 조진영(趙鎭英), 재담의 명인 박춘재 등 당대 전통 예술의 대가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동안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 유명한 스승들에게서 전문적 수준의 예능을 체계적으로 전수받은 것이다. 춤과 소리, 기악과 줄타기, 〈발탈〉 등에 이르는 이동안의 다재다능한 예능은 집안 내림의 재주에다가 좋은 스승을 만났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이동안이 〈발탈〉을 접하게 된 것도 광무대 시절이다. 당시 재담과 〈발탈〉로 명성을 떨치던 박춘재를 만나 〈발탈〉을 배운 것이다. 〈발탈〉을 처음 배운 때는 스물두 살 전후이고, 공식적으로 첫 〈발탈〉 연행을 한 것은 스물네 살 경에 함경도 고무산(古茂山) 극장에서였다. 대역으로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로는 〈발탈〉 연행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유랑 극단에서 다투어 데려가려 했고, 만주와 일본에까지 진출하여 〈발탈〉을 비롯한 여러 연행 종목을 선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박춘재에서 이동안으로 이어진 〈발탈〉은 해방과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전과 같이 활발하게 연행되는 종목이 되지 못한다. 1950년 박춘재가 죽고, 유일한 〈발탈〉 전승자로 이동안이 남았지만, 그 누구도 〈발탈〉을 찾지 않는 상황이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59년 전후에 화성여성연예단의 진주 공연에서 〈발탈〉 연행을 한 뒤, 공연이라기보다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끔 보여 주는 정도에 머물렀다. 1970년에 부산 민속회관에서 〈발탈〉 공연을 하기도 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동안 역시 이 시기 동안 〈진쇠춤〉, 〈태평무〉, 〈신칼대신무〉, 〈살풀이〉 등의 다른 연행 종목에 힘썼고, 애써 〈발탈〉을 연행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2년에 심우성이 마지막 남은 발탈꾼 이동안, 그리고 소문난 재담꾼 박해일과 함께 박춘재류 〈발탈〉을 복원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지막 남은 〈발탈〉 연행자 이동안이 주목받게 된다. 아울러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공간사랑 등에서 발표 공연도 이루어지면서 〈발탈〉 전승을 위한 활동이 활성화된다. 1982년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를 했고. 1983년 6월 1일 〈발탈〉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발탈〉 예능보유자로 이동안이 인정되었다. 이처럼 〈발탈〉 복원에 큰 공헌을 한 이동안은 박정임과 조영숙 등의 제자를 키워내고 1995년 운명을 달리 한다.
(3) 박해일(朴海一, 1923-2007)은 서울 이태원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재담꾼으로 유명했던 조하소와 고준성에게서 재담과 타령을 배웠다. 두 스승에게서 재담을 배운 박해일은 해방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재담 공연을 했다. 그는 고준성에게서 여러 재담을 배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장님타령〉을 좋아했고 잘했다. 그래서 고준성이 지방 공연을 갈 때는 꼭 박해일의 〈장님타령〉을 연행 종목에 포함시켜주었다고 한다.
재담꾼으로서의 박해일이 〈발탈〉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72년 심우성·이동안과 함께 〈발탈〉 복원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후 박해일은 이동안과 함께 〈발탈〉 연행을 지속하여, 1977년 3월 문예진흥원 강당, 1978년 4월 공간사랑, 1982년 6월 공간사랑 등에서 공연을 하며 1983년 〈발탈〉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 이동안의 탈(유람객) 조종 기능과 더불어 박해일의 재담 기능이 결합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된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된 이후 1986년까지 박해일은 이동안과 함께 공연을 하며, 〈발탈〉 전승에 참여한다. 하지만 〈발탈〉 전승과 원형에 대한 이견 등으로 1986년 2월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박해일은 이동안과 결별한다.
박해일 발탈 공연에서 재담을 하고 있다.
박해일이 이동안과 결별했다고 해서 〈발탈〉과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박춘재식 〈발탈〉 재담 찾기 노력을 계속하여 1987년 9월 〈발탈〉 대본을 재정리한다. '박해일 정리본'이라 불리는 이 대본은 민속 예술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많은 공연 경험이 있던 김천홍과 해방 직전 박춘재가 만리재 흑룡극장에서 〈발탈〉 연행을 할 때, 여자 역을 맡았던 이경자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것이다.
박해일이 다시 만들어낸 〈발탈〉 대본은 여러 모로 이전 대본과 다른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여자의 등장 대목이 첨가된다는 점이다. '탈'과 '어릿광대'라는 두 등장인물이 나오던 이전 대본과는 달리, 박해일본에서는 '여자'가 등장하여 새로운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박해일이 다시 만들어낸 세 명이 등장하는 〈발탈〉은 이전에 박춘재가 연행하던 〈발탈〉에 가까운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적어도 박해일은 〈발탈〉 전승에 있어 박춘재식 〈발탈〉의 형태에 가깝게 대본을 재구해 낸 인물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박해일이 〈발탈〉 전승과 보존의 중심에 다시 서게 된 것은 1996년부터이다. 〈발탈〉 예능보유자였던 이동안이 1995년 사망한 이후, 〈발탈〉 예능보유자 재지정 및 전승에 필요한 대책 강구를 위해 재조사가 1995년 8월에서 10월까지 진행되었다. 이때 1983년 무형문화재 〈발탈〉을 지정할 때 재담꾼 박해일을 예능보유자로 함께 인정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으며, 〈발탈〉 전승의 차질이 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박해일의 〈발탈〉 재담 기능이 마침내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박해일은 1996년 5월 1일 〈발탈〉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4) 박정임(朴貞任, 1939- )이 〈발탈〉 전승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동안을 만나면서이다. 열일곱 살 즈음에 우연히 보게 된 국극 공연은 그녀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고, 국극 공연단의 일원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했다. 그런데 국극단에서 활동하려면 춤, 소리, 장단 등을 능숙하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김천흥·주만향·김금환 등에게서 승무와 북춤, 가야금과 남도창 등을 배우던 중에 만난 이가 이동안이었다.
그녀는 이동안의 제자가 된 이후 '이동안 전통무용 연구소' 조교로서 1962년부터 줄곧 이동안의 곁을 지키며 춤과 장단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탈〉을 배우게 된다. 그녀가 처음 〈발탈〉 연행에 참여한 것은, 이동안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1983년이다. 스승 이동안 곁에서 춤과 장단을 익혀왔던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동안이 연행하는 〈발탈〉의 장단을 맡았다.
그런데 발탈꾼 이동안과 재담꾼 박해일 체제에서 줄곧 장구 장단을 맡았던 박정임이 발탈꾼 역할을 맡게 되는 일이 생긴다. 이동안과 여러 문제로 이견을 보여 왔던 박해일이 〈발탈〉 연행에서 급작스레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공연을 취소할 수도 그렇다고 진행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박정임은 대역으로 발탈꾼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에 이동안은 박해일이 맡아왔던 어릿광대 역을 맡으라고 했지만,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재담을 하는 것이 쑥스러웠던 박정임은 포장막 안에서 탈을 조종하는 발탈꾼 역을 자청했던 것이다. 이때가 1986년인데, 그 이후부터 박정임은 본격적으로 〈발탈〉을 배우게 되었고, 2000년 12월 14일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박정임 발탈 공연을 하고 있다.
(5) 조영숙(趙英淑, 1934- )은 판소리 명창 조몽실의 딸이다. 1951년부터 임춘앵 여성국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했으며, 임춘앵의 대역까지 할 정도로 널리 인정을 받은 여성국극 역사의 산증인이다. 조영숙이 〈발탈〉 전승에 참여한 것은 1985년부터이다. 그녀는 1986년에서 1996까지 이어진 전승의 침체기에 박정임과 함께 〈발탈〉을 지켜냈다. 박해일이 전승 체계에서 빠져나가고, 이동안마저 나이가 들어 거동하기 힘들었던 시기에 박정임과 함께 〈발탈〉을 올곧게 지켰다. 여성국극 배우 생활을 하면서 다져진 역량은 〈발탈〉의 어릿광대 재담과 아낙네 역할을 거뜬히 수행하게 했다. 조영숙은 2000년 10월에 전수교육조교 인정되었고, 2012년에 〈발탈〉 재담으로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조영숙 발탈 공연을 하고 있다.
연희본
그동안 채록된 〈발탈〉 연희본은 다음과 같다.
(1) 〈심우성본〉(「발탈 演戱攷」, 『文化財』 12, 文化財管理局, 1979)
(2) 〈무형문화재조사본〉(「太平舞와 발탈」, 『無形文化財指定調査報告書』 제149호, 文化財管理局, 1982)
(3) 〈박해일본〉(「박해일 국악재담 : 발탈편」, 박해일 개인 문건, 1987)
(4) 〈허용호본〉(『발탈』,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1) 〈심우성본〉은 1972년 9월 10일 심우성이 이동안의 구술을 바탕으로 채록한 것이다. 그 삽화를 정리해 보면, 등장-굿거리 춤-만고강산 소리-허튼타령 춤-개성난봉가 소리-먹는 것 시비-조기장사 조기세기-고사-진도아리랑 소리-덧배기 춤-파연곡(신난봉가) 순서로 진행된다.
〈심우성본〉은 전체적으로 소략하다. 삽화 수도 적을 뿐만 아니라, 삽화 자체의 내용도 소략하다. 1972년에 채록된 〈심우성본〉은 〈발탈〉 최초의 채록 대본이다. 심우성에 의하면 이 대본은 이동안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본전 재담'만 채록한 것이라 한다. 연행 현장의 상황에 따라 신축성 있게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제 양상을 채록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핵심적인 것만을 채록했다는 의미이다. 이후 연희본들과 비교해 볼 때, 〈심우성본〉은 여러 삽화들의 핵심만 드러날 뿐, 핵심에 이르기까지의 전개나 핵심 이후의 처리 양상이 세밀하게 채록되어 있지는 않다. 각 삽화의 '본전'만 채록되어 있고, 삽화와 삽화 사이의 전환이 급격하다.
〈심우성본〉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탈(유람객) 중심의 대본이라는 점이다. 어릿광대(주인)는 탈(유람객)을 소개하는 사회자 역할에 머문다. 연행의 중심에는 언제나 탈(유람객)이 자리하고 있고, 어릿광대(주인)는 탈(유람객) 주변에서 그를 주목받게 하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고 있다. 어릿광대(주인)는 여러 삽화 중에서 한 번도 중심적인 인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이나 〈허용호본〉에서 어릿광대(주인)이 담당하는 조기 세는 부분 역시, 〈심우성본〉에서는 탈(유람객)이 담당하고 있다. 발탈꾼 예능을 갖고 있었던 이동안의 구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
조기 세는 대목과 관련해서 〈심우성본〉이 갖는 특징이 또 하나 드러난다. 〈심우성본〉의 경우 조기 장사 대목과 조기 세는 대목이 미분화되어 있고 그 전개 양상이 소략하여, 여자(아낙네)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심우성본〉에서는 줄곧 어릿광대(주인)와 탈(유람객)만 등장한다. 이는 어릿광대(주인), 탈(유람객)과 더불어 여자(아낙네) 등 세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다른 본들과 변별되는 〈심우성본〉만의 특성이 된다.
등장인물과 관련한 〈심우성본〉의 또 하나의 특징은 두 등장인물이 '발탈'과 '어릿광대'로 채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 다른 채록본들에서 '탈'과 '유람객', '주인' 등으로 불리는 것과는 변별되는 것이다. 〈심우성본〉만의 독특함은 〈만고강산〉 소리 대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리 장단은 악사들이 치는 데 비해 심우성본의 〈만고강산〉 소리 대목은 어릿광대가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고 있다. 〈심우성본〉의 특성은 고사 대목 이후에 벌어지는 마무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고사 소리 이후에 탈(유람객)이 흥겹게 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어릿광대(주인) 역시 곁에서 추임새를 넣고 함께 춤을 춘다. 이러한 방식은 흥겹게 뒷풀이 형식으로 〈발탈〉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무대 위의 흥겨움을 관객에게까지 전달하려는 열린 마무리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발탈꾼이 탈을 벗고 나와 객석에 인사한 후, 〈파연곡〉 또는 〈신난봉가〉를 부르는 방식 역시 독특하다.
(2) 〈무형문화재조사본〉은 1982년 정병호가 〈발탈〉의 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동안의 구술을 중심으로 채록이 이루어졌는데, 〈심우성본〉에 비해 삽화 수도 많고, 각 삽화의 전개 양상 역시 비교적 세밀하게 조사되었다. 그 삽화는, '등장-용모 시비-허튼타령 춤 시비-팔도 유람 시비-만고강산 소리-쑥대머리 소리-자진모리 춤-잡가-먹는 것 시비-조기 세는 흉내-조기 장사-약 시비-고사 소리-파연곡-퇴장'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러한 삽화 진행은 〈심우성본〉과 비교해 볼 때, '용모 시비', '허튼타령춤 시비', '팔도유람 시비', '잡가 시비', '조기 세는 흉내', '조기 장사 시비', '약 시비', '퇴장' 등의 대목이 첨가되거나 확장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대목들은 이후, 〈박해일본〉이나 〈허용호본〉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들이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의 특징적인 면은 잡가 시비 대목에서 부르는 풍부한 소리들이다. 탈(유람객)이 부르는 잡가 항목으로는, '개성난봉가', '함경도잡가',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경기잡가', '양산도', '전라도 육자백이', '충청도 잡가', '경기 흥타령' 등이 나열된다. 아마 잡가 시비 대목에서 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 종목들을 조사하여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잡가 시비 대목에서 보이는 어릿광대(주인)의 병신춤 역시 다른 연희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형문화재조사본〉만의 특징이다.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는 조기 세는 흉내 대목과 조기 장사 대목이 독립되어 나타난다. 이는 〈심우성본〉에 조기 장사 대목만 나오는 것과 비교가 된다. 더불어 조기 세는 흉내 대목에서는 어릿광대(주인)가 적극적으로 조기 세는 흉내를 낸다. 〈심우성본〉에서 주변적 인물로만 머물렀던 어릿광대(주인)가 중심적 인물로 나서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기 세는 흉내 대목과 조기 장사 대목의 분화와 어릿광대의 조기 세는 흉내는 이후 〈박해일본〉이나 〈허용호본〉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의 또 다른 특징은 '여자'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여자'는 〈심우성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물이다. '여자'라는 인물은 조기 장사 대목이 〈심우성본〉에 비해 확장되면서 나타난 것인데, 미약하나마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여자'는 '조기를 사러 온 모르는 여자'로 설정되어 조기 장사 대목에 등장하고 있다. 이후 '여자'는 〈박해일본〉과 〈허용호본〉에서도 등장하는데, 〈무형문화재조사본〉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우성본〉과 비교해 볼 때, 등장인물과 관련한 〈무형문화재조사본〉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이름이 다소 달라졌다는 점이다. 〈심우성본〉에서는 '발탈'이라고 표기된 탈(유람객)이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는 '탈'이라 표기되어 나타난다. 어릿광대(주인)는 동일하게 '어릿광대'라 표기되고 있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퇴장 대목에 있다. 이 부분은 다른 연희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관중을 위한 고사 소리를 하고 파연곡을 하고 난 뒤, '발탈'이 목이 없는 상체만 남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배우는 할 수 없는 인형 배우만의 독특한 연행술을 보여주며 끝내는 방식은 다른 연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3) 〈박해일본〉은 1987년 9월에 박해일이 이전에 〈발탈〉을 많이 보았던 김천흥과, 여자(아낙네) 역할을 맡았던 이경자의 조언을 받아 정리한 것이다. 〈발탈〉 재담 부분 예능보유자였던 박해일이 정리한 것처럼, 재담 부분이 잘 정리되어 있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 연희본이다.
〈박해일본〉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은 등장하는 두 주요 인물의 정체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심우성본〉이나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 그 성격이 문면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던 두 주요 인물이 '팔도강산 유람차 다니는 사람'과 '마포 강변 어물도가 주인'으로 분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낸다.
주요 인물의 정체 규정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박해일 정리본의 또 다른 특징은 어릿광대(주인)가 '주인'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우성본〉이나 〈무형문화재본〉에서 '어릿광대'로 표기되던 것이 〈박해일본〉에서는 '주인'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핀 주요 인물의 명확한 정체 규정과 관련된 것이다.
〈박해일본〉에서 나타나는 세 번째 특징은 시조창 대목의 첨가이다. 〈심우성본〉이나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조창 대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조창 대목은 〈허용호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시조창 대목의 첨가와 더불어 〈박해일본〉은 팔도 유람 관련 대목이 확장되고 체계화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팔도유람 관련 대목을 2인 재담의 묘미를 잘 살리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심우성본〉이나 〈무형문화재조사본〉에서는 소외되었거나 미약했던 어릿광대(주인)의 재담꾼으로서의 기능을 본격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팔도 유람 관련 대목에서는 재담의 묘미가 잘 드러남과 동시에 팔도 유람을 하면서 그 지역의 사투리나 고유 소리를 하는 방식이 이용된다. 개성에서 〈박연폭포〉, 황해도에서 〈몽금포타령〉과 〈산염불〉, 평양에서 사투리와 〈추풍감별곡〉 및 〈봉죽타령〉, 강원도에서 소를 모는 방식과 〈한오백년〉 등으로 팔도 유람 대목이 이어지면서 이 대목이 확장되고 체계화되고 있다.
〈박해일본〉의 다섯 번째 특징으로 '여자'의 등장과 등장인물로서의 위상 확보를 꼽을 수 있다. '여자'는 앞서 살펴본 〈무형문화재본〉에서도 등장했었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본〉의 경우, 잠시 얼굴만 비치는 정도에 머문다. 하지만 〈박해일본〉에서는 탈(유람객)과 어릿광대(주인)에 이은 제3의 등장인물로 자리 잡는다. '여자'는 남편을 잃고 생선 장사를 하게 된 아낙네로 설정된다.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 역시 〈무형문화재조사본〉처럼 모르는 사람이 아닌, 탈(유람객)과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인물로 설정된다.
'여자'가 본격적인 등장인물로 자기 위상을 잡았다는 것은, 곧 여자가 등장하는 조기 장사 대목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여자'에게 탈(유람객)이 마구 조기를 퍼주는 정도의 진행에 그친 〈무형문화재조사본〉에 비해, 〈박해일본〉에서는 '여자가 생선장사를 하게 된 사연→여자에게 조기를 마구 퍼주는 탈(유람객)→이에 대해 어릿광대(주인)이 화를 내고 탈(유람객)의 따귀를 때림→여자가 탈(유람객)에게 위로' 등의 순서로 확장되어 진행된다.
이렇게 확장된 조기 장사 대목은 연행되는 순서의 측면에서 또 〈박해일본〉의 특징을 만들어낸다. 다른 연희본들과 달리 〈박해일본〉은 고사 덕담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조기 장사 대목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 파연곡을 하고 연행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무리 부분에 조기 장사 대목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박해일본〉은 다른 연희본들과는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 탈(유람객)이 조기를 마구 퍼준 것은 여자(아낙네)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고, 이러한 탈(유람객)의 모습을 제대로 평가하고 어릿광대(주인)이 탈(유람객)에게 함께 살자며 다시 인정을 베풀며 화해하는 것으로 〈박해일본〉은 맺어진다. 〈박해일본〉은 이른바 '3인 인정극(人情劇)'으로서의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지향은 다른 연희본들에서 보이는 탈(유람객)과 어릿광대(주인)의 지속적인 티격태격 식의 다툼의 연속과는 분명히 그 방향을 달리 하고 있다.
(4) 〈허용호본〉은 2003년 9월 24일 서울 남산 한옥 마을에서 벌어진 연행을 허용호가 채록한 것이다. 〈발탈〉의 현재적 전승 모습을 잘 파악할 수 있게, 연행자들의 오류는 물론이고 연행되는 현장의 가변성에 따른 변모 양상까지 세밀하게 정리되었다. 대체적으로 〈허용호본〉은 〈무형문화재조사본〉과 〈박해일본〉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무형문화재조사본〉이나 〈박해일본〉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대목이 첨가되기도 하고 일부 부분이 빠지기도 했다.
〈무형문화재조사본〉과 비교해 볼 때, 〈허용호본〉은 조기 세는 흉내 대목과 조기 장사 대목의 독립, 여자(아낙네)의 등장 등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만 조기 세는 흉내 대목과 조기 장사 대목 각각의 독립성이 더 강화되었다는 점이 〈허용호본〉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의 경우 조기 세는 흉내 대목과 조기 장사 시비 대목이 독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연이어 자리하고 있어서 그 내적 연관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허용호본〉은 조기 세는 흉내 대목 다음에 잡가, 빠른 장단 춤이 이어지고 난 후에 조기 장사 대목이 자리하고 있어, 둘 사이의 내적 연관성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해도 괜찮을 듯하다.
〈박해일본〉과 〈허용호본〉은 시조창 대목의 존재, 두 주요 인물 정체의 확실성, 조기 장사 대목의 확장, 여자(아낙네)의 등장인물로서의 위상 확보 등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팔도유람 관련 대목의 확장과 체계화라는 〈박해일본〉의 특징을 〈허용호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팔도유람 관련 대목은 오히려 〈무형문화재조사본〉과 친연성을 갖는다. 〈무형문화재조사본〉과 〈허용호본〉의 친연성은 조기 장사 대목의 위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박해일본〉의 경우, 마무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데 비해, 〈무형문화재조사본〉은 〈허용호본〉과 마찬가지로 탈과 어릿광대가 시비를 벌이는 대목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허용호본〉이 〈박해일본〉과 같이 '3인 인정극'이라는 지향점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허용호본〉이 갖는 독자적인 특징은 등장대목의 확장, 어릿광대의 국태민안 덕담 대목의 첨가와 탈(유람객)의 고사 소리 일부분의 탈락, 어릿광대(주인)의 적극적인 재담 연행 참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발탈〉 연희본들을 보면, 보통 등장 대목에서는 인사를 하는 정도로 끝이 난다. 〈박해일본〉에서는 정체 확인을 등장 대목에서 하고, 인사는 시조창 대목과 허튼타령 춤 대목 다음에 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역시 등장 대목이 그리 길지는 않다. 하지만 〈허용호본〉의 경우, 등장 대목이 정체 확인, 통성명, 말놓기, 인사 등으로 확장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특징은 탈(유람객) 고사 소리 일부분의 탈락과 국태민안 덕담의 첨가라고 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의 경우 고사 소리는 탈(유람객)에 의해 고사, 성주풀이, 세간벌기, 도액막기 등이 길게 이어진다. 〈박해일본〉의 경우 탈(유람객)이 국태민안과 액맥이를 연이어서 한다. 그런데 〈허용호본〉의 경우, 탈(유람객)이 고사 소리를 하고, 이어서 어릿광대(주인)가 국태민안 덕담을 한 다음, 탈(유람객)의 액맥이가 이어진다.
이러한 어릿광대(주인)의 국태민안 덕담의 첨가는 곧 〈허용호본〉이 어릿광대(주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 것임을 말한다. 〈심우성본〉의 경우, 어릿광대(주인)는 주변적인 인물에 머물렀다. 〈무형문화재조사본〉의 경우에는 조기 세는 흉내 대목에서 어릿광대(주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보이기는 하지만 미약하다. 〈박해일본〉에서는 어릿광대(주인)의 재담꾼으로서의 기능이 어느 정도 발휘된다. 그런데 〈허용호본〉에 와서는 조기 세는 흉내 대목과 국태민안 덕담 부분에서 어릿광대(주인)의 장기가 적극적으로 발휘되는 동시에, 재담꾼으로서의 기능 역시 발휘된다. 덧붙여 연행 곳곳에서 해설적인 발언으로 참여를 하고 있어 어릿광대(주인)의 〈발탈〉 연행 속 위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어릿광대(주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설자 역할은 〈허용호본〉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른 연희본에서 보이는 탈(유람객)의 소리에 맞춰 추임새를 하거나 춤을 추는 등의 참여 방식이 현저히 사라지고, 이렇게 재담 혹은 해설을 통한 적극적인 개입이 두드러지는 것이 현 연행본이다.
의의
〈발탈〉은 가면을 이용하면서도 가면극과 다르고, 인형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인형극과는 변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두 명의 등장인물이 티격태격 다투는 전통적인 재담의 전개 방식과 유사한 듯하면서도, 인간 배우와 인형 배우의 대결이라는 특이함을 갖고 있기도 하다. 발과 손을 이용하여 조종되는 특이한 구조의 인형 배우와, 스스로 움직이고 말하는 인간 배우가 공존하며 티격태격 다투는 독특한 양상의 전통연희가 바로 〈발탈〉이다. 이러한 〈발탈〉의 특징과 가치는 세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등장하는 배우와 그들이 연행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 측면'에서의 독특함과 가치, '전통연희사(傳統演戱史) 측면'에서의 의의, '연행 방식 측면'에서의 독특함 등이다.
'등장하는 배우와 그들이 연행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 차원에서의 독특함과 가치'는 인간 배우와 인형 배우의 공존이라는 측면을 주목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발탈〉에는 스스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 배우와 상반신만을 가진 기형적인 인형 배우가 함께 등장한다. 인형 배우는 발탈꾼이라는 인간연행자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인간 배우는 스스로 움직이고 말한다. 이들이 공존하며 티격태격 다투는 독특한 양상의 전통연희가 바로 〈발탈〉이다.
이 배우들이 연행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보면 더욱 흥미로운 상황이 나타난다. 스스로는 말할 수도 움직일 수 없는 기형적인 인형 배우가 연행 속에서 맡는 역할은 유람객이다. 팔도를 유람하는 신명 많고 축제적인 자유인으로 형상화된다. 반면에, 스스로 움직이며 말을 하는 인간 배우가 맡는 역할은 생선도가 주인이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상의 규칙에 얽매여 있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배우의 속성 차원에서 나타나는 '정상/기형', '생명 있음/생명 없음', '인간/인형' 등의 양항 대립과, 연행 속 역할 차원에서 나타나는 '정착/유랑', '정상/비정상', '일상/축제', '속박/자유', '정규/일탈' 등의 양항 대립이 서로 모순적으로 교차되고 있는 것이다. 배우의 속성과는 어긋난, 어쩌면 잘못된 역할 부여라 할 수 있는 묘한 역설의 전통연희가 〈발탈〉이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범상치 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두 배우가 등장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이 티격태격 다투는 연행 양상에서 전통연희사적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재담 전통은 14-15세기 궁정에서 연행된 우희(優戱), 18-19세기 서울 시정의 재담 연행, 20세기 초반 〈발탈〉을 비롯한 박춘재의 재담 연행 활동, 1930년대 만담과 이후 방송 코메디물 등으로 지속되어 왔다. 〈발탈〉은 〈도목정사놀이〉로 대표되는 14-15세기 궁중 우희에서 18-19세기 시정 재담 연행으로 이어지던 티격태격식 2인 재담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시에, 이러한 재담 전통을 1930년대 대화 만담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발을 이용한 인형 조종이라는 방식은 그 독특함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발탈꾼'이 반등신(半等身) 인형을 조종하는 방식은 유별나다. 포장막 뒤에 앉아 포장막 사이로 내민 발에는 탈이 씌워져 있고, 손에는 반등신 인형의 팔로 기능하는 대나무가 쥐어져 있다. 발탈꾼의 발과 양손이 움직임으로써, 반등신 인형의 얼굴과 양팔이 움직이게 된다. 그야말로 온 몸을 이용하는 조종 방식이다. 발탈꾼의 이러한 조종 방식, 특히 발을 이용한 조종 방식은 다른 전통연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조종 방식이다. 이 연희가 〈발탈〉이라 불리어지게 된 사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발탈〉을 비롯하여 '발작난', '족가면', '족무용' 등의 다양한 명칭들도 모두 발에다 탈을 씌우고 조종하는 독특한 연행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참고문헌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허용호, 『발탈』,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 허용호, 「한일 발인형연행의 양상 비교와 그 형성 과정」, 『비교민속학』 36, 비교민속학회, 2008.
참조어
완도발광대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