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
[ 朴海一 ]
박해일(朴海一, 1923-2007)은 서울 이태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재담꾼으로 유명했던 조하소와 고준성에게서 재담과 타령을 배웠다. 두 스승에게서 재담을 배운 박해일은 해방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재담 공연을 했다. 그는 고준성에게서 여러 재담을 배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장님타령〉을 좋아했고 잘했다. 그래서 스승인 고준성이 지방 공연을 갈 때는 박해일의 〈장님타령〉을 연행 종목에 포함시켜주었다고 한다. 박해일의 〈장님타령〉은 백영춘을 통해 현재 이어지고 있다.
박해일은 〈발탈〉 연희자로서 유명하다. 재담꾼으로서의 박해일이 〈발탈〉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72년 심우성, 이동안과 함께 〈발탈〉 복원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그렇다고 박해일이 1972년 이전에는 〈발탈〉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박해일의 스승이었던 고준성은 일제강점기에 박춘재와 함께 단체를 조직하여 공연을 다녔기 때문에, 곁에서 박춘재 〈발탈〉의 면모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스승에게서 박해일은 재담을 배웠다. 동시에 박해일이 배운 전통 재담과 〈발탈〉 재담 사이의 거리가 그리 먼 것이 아니라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박해일이 〈발탈〉 복원에 참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된다.
이후 박해일은 이동안과 함께 〈발탈〉 연행을 지속하여, 1977년 3월 문예진흥원 강당, 1978년 4월 공간사랑, 1982년 6월 공간사랑 등에서 공연을 하며, 1983년 〈발탈〉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 이동안의 탈(유람객) 조종 예능과 더불어 박해일의 어릿광대 재담 예능이 결합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86년까지 박해일은 이동안과 함께 공연을 하며 〈발탈〉 전승에 참여한다. 하지만 〈발탈〉 전승과 원형에 대한 이견 등으로 1986년 2월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박해일은 이동안과 결별했다.
박해일 재담 공연을 하고 있다.
박해일이 이동안과 결별했다고 해서 〈발탈〉과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박춘재식 〈발탈〉 재담 찾기 노력을 계속하여 1987년 9월 〈발탈〉 대본을 재정리했다. 〈박해일본〉이라 불리는 이 대본은 민속 예술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많은 공연 경험이 있던 김천홍과 해방 직전 박춘재가 만리재 흑룡극장에서 발탈 연행을 할 때, 여자 역을 맡았던 이경자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것이다.
박해일이 다시 만들어낸 〈발탈〉 대본은 여러 모로 이전 대본과 다른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여자의 등장 대목이 첨가된다는 점이다. '탈'과 '어릿광대'라는 두 등장인물이 나오던 이전 대본과는 달리, 〈박해일본〉에서는 '여자'가 등장하여 새로운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박해일이 다시 만들어낸 3인이 등장하는 〈발탈〉은 이전에 박춘재가 연행하던 〈발탈〉에 가까운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적어도 박해일은 〈발탈〉 전승에 있어 박춘재식 〈발탈〉의 형태에 가깝게 대본을 재구해 낸 인물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박해일이 〈발탈〉 전승과 보존의 중심에 다시 서게 된 것은 1996년부터이다. 〈발탈〉 예능보유자였던 이동안이 1995년 사망한 이후, 〈발탈〉 예능보유자 재지정 및 전승에 필요한 대책 강구를 위해 재조사가 1995년 8월에서 10월까지 이루어진다. 이때 1983년 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을 지정할 때 재담꾼 박해일을 예능보유자로 함께 지정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으며, 〈발탈〉 전승의 차질이 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진다. 박해일의 〈발탈〉 재담 예능이 마침내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박해일은 1996년 5월 1일 〈발탈〉 예능보유자로 인정받는다.
참고문헌
- 정병호·최헌, 「태평무와 발탈」,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49호‚ 문화재관리국, 1982.
- 허용호, 『발탈』‚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