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사자놀음

북청사자놀음

정의 및 이칭

북청사자놀음은 원래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의 전 지역에서 세시풍속의 하나로 행해지던 민속극으로서,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북한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북청 지방에서 사자놀이가 전승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연희가 복원되었다. 현재 강남구 삼성동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 보존회사무실을 두고 있다. 북청 현지에서는 이 연희를 '사자놀이'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북청사자놀음'이라고 부른다.

유래 및 역사

한국에는 사자가 없지만, 사자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나타난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자라는 동물에 대한 인식도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사자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중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의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조에서 발견된다. 지증왕 13년(512) 6월에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현재의 울릉도를 정벌하는 내용에 '사자'라는 명칭이 보인다. 이는 나무로 만든 사자로서 사자가면은 아니지만, 사자 모습으로 가장하여 상대편을 위협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가야에서 귀순한 신라의 우륵이 제작한 십이곡의 여덟 번째 곡에 사자기(獅子伎)가 있는 점으로 보아, 사자춤도 이때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자춤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 중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절구시(絶句詩)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 발견된다. 이 한시에서는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다섯 가지 놀이를 읊고 있는데, 이 중 산예가 바로 사자춤이다.

고려시대의 사자춤은 고려 말 이색(李穡)의 〈구나행(驅儺行)〉이라는 한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나례에서 공연된 오방귀무, 사자춤, 서역의 호인희, 처용무, 불토해내기, 줄타기, 칼삼키기, 인형극,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등의 놀이를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자춤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성종(成宗) 19년(1488) 3월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明)나라의 동월(董越)이 자신을 영접하는 산대희(山臺戱)를 보고 지은 〈조선부(朝鮮賦)〉에 사자춤이 나온다. 그리고 유득공(柳得恭, 1749-?)의 『경도잡지(京都雜志)』 권1 「성기(聲伎)」 조에 의하면, 나례도감에 속하는 산희에 사자가 나온다. 송만재(宋晩載)가 1843년에 지은 〈관우희(觀優戱)〉에도 사자춤이 보인다. 김홍도(金弘道, 1745-?)가 그린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낙성연도(落成宴圖)〉에도 사자춤이 그려져 있다. 『국연정재창사초록(國讌呈才唱詞抄錄)』에 의하면, 고종(高宗) 24년(1887)에 궁중에서 성천잡극(成川雜劇)이라고 하는 사자춤을 처음 연행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이상과 같이, 사자춤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전승되어 왔지만, 구체적으로 북청 지방의 사자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미상이다. 그러나 함경도에서만도 함남의 북청, 함주, 정평, 영흥, 홍원, 함북의 경성, 명천, 무산, 종성, 경원 등지에서 놀 만큼 사자춤의 전승기반이 매우 탄탄했던 점으로 보아 유구한 역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및 특성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 산하 11개 면과 3개 읍에 속하는 각 마을에서 마을 주민인 농민들에 의해 음력 정월 15일 밤 세시풍속의 하나로 행해졌다. 북청읍의 사자놀이는 댓벌(竹坪里)사자(여기에는 이촌(李村)사자, 중촌(中村)사자, 넘은개사자가 속함), 동문(東門)밖사자, 후평사자, 북리(北里)사자, 당포(棠浦)사자 등이 유명했으며, 그 밖에 마을마다 제각기 사자를 꾸며 놀았다.

음력 정월 대보름 저녁 달이 뜨기 시작할 무렵이면, 마을마다 청년들은 횃불을 들고 성지를 돈 후 횃불싸움을 벌인다. 마을 단위로 대결하여 상대편을 후리면 삽시간에 요란하고 격렬한 싸움터가 된다. 횃불이 꺼질 때쯤이면 횃불싸움이 끝나고, 청년들은 각기 자기 마을의 회관인 도청(都廳)으로 돌아간다. 이어 도청 앞마당에서 퉁소가락이 울리면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 들고 사자놀이가 시작되는데,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사자춤을 즐긴다. 북청군의 수십 개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밤에 일시에 사자놀이가 행해지므로, 특별히 전문적이거나 직업적인 연희자가 놀았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이꾼이라 할 수 있다.

각 마을의 사자놀이패는 정월 4일부터 14일까지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사자놀이를 놀았다. 먼저 마당으로 들어가서 어지러이 춤을 추고, 안방이나 부엌 등에 들어가 무엇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하고는, 마당으로 나와 활달하게 춤을 춘다. 이때 주인의 청에 따라 부엌의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조상신에게 절을 한다. 아이를 사자에 태워주면 수명이 길어진다거나, 사자 털을 몰래 베어두면 장수한다는 속신(俗信)이 있었다.

부엌에서 바가지를 물고 나오는 사자

부엌에서 바가지를 물고 나오는 사자 북청사자놀음

한편 현재는 북청사자놀음에 사자가 두 마리 등장하지만, 원래 북청 지방에서는 사자가 한 마리만 등장했다. 드문 경우이지만 새끼사자를 꾸며 노는 마을에서는 어미사자와 함께 새끼사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사자놀이의 내용도 현재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선 사자놀이에 등장하는 배역을 보면, 현재는 사자탈춤 외에 애원성춤, 사당·거사, 무동, 꼽추, 칼춤꾼, 승무꾼, 대사, 의원, 양반, 꼭쇠 등이 나온다. 그러나 북청 현지에서는 마을에 따라 등장인물의 차이가 있었다.

1930년대 북청사자놀이의 연희자들

1930년대 북청사자놀이의 연희자들

북한에서 1955년 겨울부터 1956년 여름 사이에 북청 지방을 현지 조사한 김일출의 보고에 의하면, 죽평리 사자놀이에는 피리 넷, 퉁소 넷, 꽹과리 하나, 징 하나, 새납 하나, 소고 하나, 큰북 하나의 악기와 함께, 놀이꾼은 사자 외에 꼭쇠, 양반, 대사, 점바치, 의원, 굴중(상모) 돌리는 사람, 소고를 든 거사 두 명, 무동이 나온다. 이 중 주목되는 인물은 점바치 즉 점쟁이인데, 점쟁이는 사자가 먹이를 먹고 병들어 쓰러진 후에 병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점을 친다.

북청사자놀음의 반주음악은 퉁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자놀이의 모든 춤은 저절로 어깨가 들썩들썩할 정도로 흥겨운 퉁소 가락에 맞추어 춘다.

북청 지방에서는 수십 개의 마을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사자를 만들어 놀았기 때문에, 사자가면의 모습이 마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북청의 사자가면은 1930년대에 송석하가 수집한 사자가면(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6년 2월 7일 송석하가 북청 현지에서 찍은 북청읍의 사자와 토성리의 사자, 현재 북청사자놀음에서 사용하는 사자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모두 다른 모습이다. 북청 지방을 현지조사 한 김일출은 북청사자가면의 유형을 (1) 호랑이 또는 고양이 모습의 사자, (2) 귀면(鬼面) 모양의 사자, (3) 용 비늘을 그린 사자로 나누었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이 중심이고, 애원성춤, 사당·거사춤, 무동춤, 넉두리춤, 꼽추춤, 칼춤은 사자춤을 추기 전에 여흥으로 추는 것이다. (☞ 이상 각 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 해당 춤 항목 참조)

모래기치기는 북청사자놀이의 사자가 머리를 좌·우·하·상 또는 하·상·좌·우로 힘차게 흔드는 춤으로서, 서서모래기치기와 앉아서모래기치기가 있다. 모재비는 사자춤 춤사위로 선모재비, 앉은모재비, 앉은잰걸음모재비가 있다. 선모재비는 앞채사람이 사자 머리를 들거나 낮춘 상태로 허리를 구부리고, 사자 머리를 상하 또는 좌우로 음악에 맞춰 가볍게 흔들며 옆으로 겅중겅중 뛰거나 살짝살짝 걷는 춤사위를 말한다. 뒤채사람은 왼팔을 쭉 뻗어 앞채의 등이나 허리에 왼손을 얹고, 팔 위나 아래로 머리가 올라가거나 내려오지 않도록 조심한다. 오른손은 꼬리를 잡고 음악에 맞춰 흔들면서, 앞채와 같이 옆으로 겅중겅중 뛰거나 살짝살짝 걷는다.

북청사자놀음 대사는 다른 가면극보다 훨씬 더 즉흥성을 띠고 있다. 북청사자놀음의 대사는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를 통하여 갈등을 표출하거나, 등장인물이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는 내용이 아니다. 대부분 놀이의 진행을 위한 대화이거나 춤을 해설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고정된 대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놀이의 진행과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대사를 구사한다.

북청사자놀음의 음악은 퉁소 2-5, 북 1, 장고 1, 징 1로 구성된다. 다른 가면극에서는 장고와 꽹과리가 주장단을 이루지만, 북청사자놀음은 북이 주장단을 이룬다. 퉁소는 소리가 작으므로 2-5명이 불어야 제대로 연행할 수 있으며, 퉁소의 음색에는 북과 징의 은은한 음색이 어울린다. 또한 장구는 퉁소 소리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꽹과리는 퉁소 소리가 묻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즉 음악적 효과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악기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사례

현존하는 가면극 가운데 사자춤은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수영야류, 통영오광대,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에서 발견된다.

김일출은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에 자신이 직접 함경도와 황해도를 현지 조사한 결과와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제47집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거해 사자놀이 분포도를 작성했다. 함경도의 경원·종성·회령·무산·경성·어대진·명천·풍산·북청·신창·퇴조·함흥·장진·함주·정평·영흥·고원, 평안도의 벽동·용천·순천, 강원도의 고성·양양·횡성·원주, 경기도의 광주·용인, 충청도의 아산, 경북의 울진, 경남의 통영 등에 사자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함경도의 홍원, 황해도의 황주·봉산·은율·송화·재령·기린·강령, 경남의 함안·동래·마산 등에서는 가면극에 사자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꼽추춤

꼽추춤 북청사자놀음

사자춤

사자춤 북청사자놀음

최남선(崔南善)이 1947년에 저술한 『조선상식문답속편(朝鮮常識問答續編)』에 의하면, 당시로부터 얼마 전까지 경주(慶州)의 월남(月南)과 보문(普門)에 주지춤 즉 사자춤이 있었는데, 마을마다 그것을 부양하기 위한 '주지논'이 있어서 그 소요비용을 공급했다고 한다. 연말세초(年末歲初) 밤중 무렵에 두 마을에서 출발해 중로(中路)에서 만나 밤새도록 싸워 승부를 내며, 세후(歲後)에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축사연상(逐邪延祥)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함경도에서는 함경남도의 북청·함주·정평·영흥·홍원, 함경북도의 경성·명천·무산·종성·경원 등지에서 사자놀이를 놀았다고 한다. 이 중 북청의 사자놀이가 가장 유명하며 함경도의 사자놀이를 대표한다. 한편 함경북도 북부 산간지역의 재가승(在家僧) 마을에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주지놀이'라는 사자춤이 있었는데, 1982년 월남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복원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역대 명 연희자

1960년 8월에 '북청사자놀이보존회'를 발족하여, 윤영춘(사자 앞채), 마후섭(馬厚燮, 사자 뒷채), 마희수(퉁소), 김수석(사자 앞채), 오동술(吳東述, 사자 뒷채), 동태선(북), 이인섭(李仁燮, 퉁소), 변영호(퉁소), 이근화선(사당춤), 전중식(칼춤), 동시협(북·꺽쇠), 동성영(사자)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중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예능보유자로 김수석(金壽石, 1907-1997/ 사자앞채), 동태선(董泰善, ?-1977/ 퉁소·북), 마희수(馬犧洙, ?-1978/ 퉁소), 윤영춘(尹迎春, ?-1981/ 사자앞머리)이 인정되었으며, 이후 1970년 동성영(董誠映, 1909-2008/ 사자앞채), 여재성(呂在成, 1919-2007/ 사자뒷채), 변영호(邊永鎬, 1908-1996/ 사자제작·악사), 이근화선(李根花善, 1925- / 사당춤), 1972년 전중식(全仲植, 1914-1984/ 퉁소), 동시협(董時協, ?-1977/ 북·꺽쇠), 1973년 전광석(田光石, 1917-2002/ 칼춤), 김삼현(金三鉉, ?-1974/ 칼춤)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외에 보유자 후보로 신선식(申宣湜, 1917-1995/ 퉁소), 전수교육조교로 이철균(李哲均, 1924-2003/ 악사), 전철하(全澈河, 1917-1996/ 사자앞채), 동선본(董善本, 1960- / 퉁소), 동선백(童善白, 1957- / 사자앞채), 동영범(童泳範, 1960- / 사자앞채·사자뒷채), 박균일(朴均一, 1963- / 사자앞채·꼭쇠), 강선윤(康先潤, 1963- / 꼽추춤) 등이 인정되었다.

연희본

그동안 채록된 북청사자놀음의 주요 연희본은 다음과 같다.

(1) 〈이두현본〉(『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2) 〈조규희본〉(『북청사자놀음대본』, 함남북청민속예술보존회, 1979)
(3) 〈전경욱본〉(『북청사자놀이연구』, 태학사, 1997)

(1) 〈이두현본〉은 1966년에 윤영춘·마희수의 구술을 채록한 것이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제1과장 애원성, 제2과장 마당돌이(① 마당돌이, ② 사당춤, ③ 무동춤, ④ 꼽새춤), 제3과장 사자춤(① 사자춤, ② 군무)으로 되어 있다.

(2) 〈조규희본〉은 1979년에 예능보유자들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했다고 하나, 개인적인 윤색이 많아 문제점을 지닌 대본이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제1 애원성 마당(① 해학, ② 애원성, ③ 사당춤, ④ 칼춤, ⑤ 무동춤, ⑥ 꼽추춤), 제2 사자놀이 마당(⑦ 사자춤과 승무, ⑧ 풍자, ⑨ 군무(넉두리춤))로 되어 있다. 그 중 ① 해학과 ⑧ 풍자가 주로 윤색되었는데, 꼭쇠가 양반을 풍자하는 내용이 그 예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원래 양반을 풍자하는 내용이 적었는데 개인적인 윤색이 가해진 것이다. 또한 사자가 토끼를 먹고 쓰러진 다음에 대사가 염불하기 전 양반이 축문을 고하는 장면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근거가 없는 내용으로 어색한 장면의 삽입이다.

(3) 〈전경욱본〉은 전경욱이 1984년 당시 예능보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대본이다. 이 대본의 과장 구성은 Ⅰ. 마당놀이마당(1. 마당돌이과장, 2. 애원성춤과장, 3. 사당·거사춤과장, 4. 무동춤과장, 5. 넉두리춤과장, 6. 꼽추춤과장, 7. 칼춤과장), Ⅱ. 사자놀이마당(1. 사자춤 초장, 2. 사자춤 중장, 3. 사자춤 말장, 4. 마을돌이뒤풀이 과장)으로 되어 있다. 북청사자놀이는 사자춤이 중심이고 애원성춤, 사당춤, 거사춤, 무동춤, 넉두리춤, 꼽추춤, 칼춤은 사자춤을 추기 전에 여흥으로 추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본은 사자춤과 그 이전의 여흥을 위한 춤을 구분하여, 사자놀이를 마당놀이 마당과 사자춤 마당으로 크게 나누었다.

의의

북청사자놀음은 연극적인 요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나례의 매귀(埋鬼, 귀신쫓기)행사와 동일한 모습도 보인다. 사자놀이패는 정월 4일부터 14일까지 마을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나례의 '매귀' 즉 지신(地神)밟기와 유사한 의식을 거행했다. 북청사자놀음은 정월 보름을 기해 거행되는 대부분의 민속놀이와 마찬가지로 벽사진경(辟邪進慶, 악귀를 쫓아버리고 경사를 맞이하는 것)을 목적으로 거행되었다. 백수의 왕인 사자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벽사적인 기능을 하지만, 특히 사자가 방울소리를 울리면서 가가호호를 방문해 집안 구석구석의 잡귀를 쫓는 모습은 바로 나례의 매귀라고 하는 행사와 일치한다.

한국의 궁중나례에서는 궁궐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잡귀를 쫓는 구나의식(驅儺儀式)을 거행했고, 관아나례와 민간나례에서는 이 행사를 매귀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초에 풍물패가 가가호호를 방문해 마루(成造神), 안방(祖上神), 부엌(竈王神), 마당, 변소(厠神), 대문(門神), 우물(井神)의 신에게 기원하고 집안 구석구석의 잡귀를 쫓아내는 것을 매구, 매귀, 지신밟기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나례의 유풍이다. 그런데 북청 지방의 사자놀이도 이러한 매귀행사를 거행한 사실은 바로 이 사자춤이 나례의 영향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북청사자놀음의 주목적은 벽사진경에 있다. 백수의 왕으로 벽사의 뜻을 가진 사자가 가면으로 전래하는 과정에서, 악귀를 내쫓고 마을이 태평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면서 정월 대보름날 사자놀이를 성대하게 거행했던 듯하다. 사자놀이가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사자에 태우면 무병장수한다거나, 사자털을 베어다 두면 장수한다는 생각도 사자놀이의 종교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사자놀이를 통해 마을의 단결과 협동을 도모하는 사회적 통합의 기능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각 마을 자체로 사자놀이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각 가정마다 방문해 사자를 놀아 주고, 유지의 집을 순회하며 생긴 곡식으로 마을의 공공사업(장학회, 빈민구제, 경로회 비용, 사자놀이 비용 등)에 사용함으로써 모든 마을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1년에 한 번 큰 명절을 맞이해 밤새도록 춤과 노래를 즐기며 흥과 신명을 푸는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긴장을 풀어 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활력을 되찾아 새해를 시작하는 오락적 기능도 있었다.

참고문헌

  •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연구』, 평양 : 과학원출판사, 1957.
  • 송석하, 「신라의 산예와 북청사자」, 『동아일보』, 1936.3.26-31.
  • 심우성, 「民俗劇의 舞臺空間(놀이판) : 獅子놀이」, 『공간』 86, 공간사, 1974.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 전경욱, 『북청사자놀음』, 화산문화, 2001.

참조어

강선윤, 김삼현, 김수석, 동선백, 동선본, 동성영, 동시협, 동영범, 동태선, 마후섭, 마희수, 박균일, 변영호, 신선식, 여재성, 오동술, 윤영춘, 이근화선, 이인섭, 이철균, 전광석, 전중식, 전철하, 주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