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놀이
정의 및 이칭
산대놀이는 서울 및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다. 원래 애오개(아현동)·녹번·구파발·사직골 등에 산대(山臺)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대신에 애오개 또는 녹번리의 산대놀이를 배워왔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구파발본산대 또는 노량진본산대 등에서 배워왔다는 송파산대놀이가 현재 전승되고 있다. 최근에는 퇴계원산대놀이도 복원되었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유래 및 역사
산대놀이는 한자말 산대희(山臺戱)에서 유래했는데, 산대희는 나례·중국 사신 환영행사 등에서 설치했던 '산대(山臺)'라는 무대구조물 앞에서 놀았던 연희들을 말한다. 산대희를 놀았던 연희자들 중에서 가면극을 만들어내어 산대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歌舞百戱)·잡희(雜戱)·산대잡극(山臺雜劇)·산대희라고 불리던 연희들은 바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던 산악(散樂)·백희(百戱)를 가리킨다. 산악·백희 또는 산악잡희(散樂雜戱)라고 불리는 연희들은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는데, 그 종목은 곡예와 묘기,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골계희인 우희(優戱), 환술(幻術), 가무희, 악기연주 등이었다.
중국에서는 산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이 연희들을 발전시켜 '나희(儺戱)'라는 가면극을 성립시켰고, 일본에서는 사루가쿠(猿樂) 즉 산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노(能)'라는 가면극을 성립시킨 것처럼, 한국에서도 중국 사신 영접시에 나례도감(儺禮都監)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泮人)들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와 기존의 가면희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 '본산대놀이'이다. 그리고 원래 중국과 한국의 나례에서 산악·백희가 연행되었고, 그 연희자들이 후대에 가면극을 성립시켰다는 점도 일치한다고 한다. (☞ 자세한 내용은 산대희기원설 항목 참조)
중국 사신을 위한 연희 장면 『봉사도』. 제7폭
최근에 발견된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1725)는 중국 사신 영접행사의 연희 장면을 전해 주는 자료로서, 산대와 산대희가 그려져 있다. 『봉사도』 제7폭은 모화관(慕華館) 마당에서 사신을 위해 공연한 연희들을 묘사하고 있다. 모화관은 현재의 독립문 근처에 있었다. 객사 바로 앞에서는 한 연희자가 대접돌리기를 하고 있으며, 마당 가운데서는 두 명의 연희자가 땅재주인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이들 양 옆에서는 각각 두 명의 연희자가 탈춤을 추고 있다. 마당의 오른쪽에서는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 연희들이 바로 산대희인 것이다. 특히 산대 앞에서 가면을 쓴 네 사람이 탈춤을 추고 있는데, 서울 근교의 가면극을 '산대놀이'라고 부른 이유를 알려준다. (☞ 자세한 내용은 봉사도 항목 참조)
본산대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근교의 가면극은 애오개(아현), 사직골, 노량진, 녹번(구파발) 등에 있었다. 이러한 서울 본산대놀이의 내용은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에서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는 강이천이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인형극과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지은 것으로, 애오개(아현)의 본산대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상좌과장, 팔선녀과장, 노장과장, 양반과장(샌님·포도부장과장), 영감·할미과장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내용과 등장인물들이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대부분 일치한다. (☞ 자세한 내용은 남성관희자 항목 참조)
조선 후기에 서울의 시정에서는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泮人)들에 의해 본산대놀이가 공연되고 있었다. 특히 애오개와 사직골의 본산대패는 지방 순회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이것이 각 지방의 가면극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남사당패, 대광대패 등의 유랑예인집단이 각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하면서, 흥행을 위해 본산대패의 가면극을 그들의 공연 종목 가운데 하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상업이 발달했던 곳에서 공연된 것들이 많다. 본산대놀이 중 가장 유명한 애오개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애오개는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시장과 인접하고 있으면서, 현방(懸房, 조선 후기 서울 근교의 독점적 푸줏간)이 있던 곳이다. 노량진에도 본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노량진은 경강(京江) 지역의 나루였다. 별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양주, 송파는 18세기경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가진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에 대항하는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를 장악하면서 상설 시장을 벌였던 곳이다. 양주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난장을 텄을 때 낮에는 줄타기를, 밤에는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했다.
애오개와 같은 상업 지역은 사람이 많이 몰렸던 곳이기 때문에, 흥행을 위한 공연장소로 적합했다. 상인들은 영업을 위해 연희패를 이런 곳에 불러다 공연시켰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는 정조가 1792년 한양 전체를 그리게 하고, 이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소재로 규장각 문신들에게 장편시를 지으라는 하명에 의해 박제가가 지은 작품이다.
거리를 한가로이 지나가노라니(忽若閒行過康莊)
홀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들리는 듯.(如聞嘖嘖相汝爾)
사고팔기 끝나 연희 펼치기를 청하니(賣買旣訖請設戱)
배우들의 복색이 놀랍고도 괴이하네.(伶優之服駭且詭)
우리나라 솟대타기 천하에 으뜸이라(東國撞竿天下無)
줄을 걷기도 하고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것이 거미와 같네.(步繩倒空縋如蟢)
또다시 인형을 가지고 등장하는 사람이 있으니(別有傀儡登場手)
칙사가 동쪽으로 왔다 하며 손뼉을 한 번 치네.(勅使東來掌一抵)
조그만 원숭이 참으로 아녀자를 놀래켜(小猴眞堪嚇婦孺)
제 뜻을 채워 주면 예쁘게 절하고 무릎 꿇네.(受人意旨工拜跪)
"사고팔기 끝나 연희 펼치기를 청하니(賣買旣訖請設戱)"에서 연희패가 상인들의 상업 활동과 연계하여 흥행을 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사가 끝난 다음 그 곳에서 배우들이 놀랍고도 괴이한 복색을 하고, 솟대타기·줄타기·인형극·원숭이 재주 부리기 등의 연희를 펼치고 있다. 이 시는 그림을 보고 지은 것이지만, 마치 지금 서울 시정에 나가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박제가가 그림만 보고도 이와 같이 앞뒤 문맥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이런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업도시 중 지방 관아가 자리잡은 곳에서는 상인이 이속(吏屬)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며, 가면극의 후원자 노릇도 함께 했다. 이속들은 그들의 행사인 관아나례를 거행할 때 가면극을 초청하기도 했다. 시장을 배경으로 전승되던 가면극의 후원은 상인들이 맡았다. 가면극을 공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상인들은 가면극을 후원했다.
이러한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 황해도의 해서탈춤(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남의 야류(수영야류·동래야류)와 오광대(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진주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성립되었다. 황해도의 경우, 김일출이 1955년 8월 재인촌인 봉산군 천덕리 가창마을에서 통인(通人) 출신이었던 미얄 역의 한성근 등 해주탈춤 관계자들을 현지 조사했는데, 그들은 "해주탈춤은 경기의 산대놀이와 부단한 교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산대놀이의 영향이 일정하게 작용했다"라며 두 지역 가면극 사이의 영향 관계를 명확하게 증언했다.
내용 및 특성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인 해서탈춤(황해도), 별산대놀이(서울·경기), 야류와 오광대(경남) 등은 각 과장의 구성과 연희 내용, 등장인물, 대사의 형식, 극적 형식, 가면의 유형 등을 살펴볼 때, 동일 계통임이 드러난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벽사(辟邪)의 의식무, 양반과장, 파계승과장, 영감·할미과장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벽사의 의식무는 흔히 가면극의 첫 과장에 설정되어 있다. 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봉산탈춤 등에는 상좌춤, 강령탈춤·은율탈춤 등에는 사자춤, 진주오광대·가산오광대 등에는 오방신장무가 첫 과장으로 연행하고 있다. 이 춤들은 놀이판을 정화하고 가면극을 시작하는 벽사적인 의식무이다.
연잎 양주별산대놀이
할미가 죽은 후 굿을 하는 장면 송파산대놀이
별산대놀이와 해서탈춤에서는 파계승과장인 노장과장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등장인물도 많다. 노장과장은 먹중들과 노장이 티격태격하는 노장춤, 노장과 신장수가 실랑이를 벌이는 신장수춤, 노장과 취발이가 대결하는 취발이춤 등 여러 삽화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양주·송파 등 별산대놀이에는 이밖에도 옴중과장, 연잎·눈끔적이과장, 염불놀이과장, 침놀이과장, 애사당법고놀이과장 등 중이 등장하는 삽화가 계속 이어진다. 야류와 오광대에서는 노장과장이 축소되어 있다.
1920년대 수집된 양주별산대놀이와 퇴계원산대놀이의 취발이 가면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봉산탈춤·강령탈춤의 취발이 가면들, 그리고 은율탈춤의 최괄이 가면은 모두 공통된 모습을 갖고 있다. 즉 얼굴 바탕은 붉은 색이고, 이마에 여러 개의 주름이 강하게 잡혀 있으며, 가면의 이마 윗부분에서부터 한 줄기의 긴 머리카락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늘어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할미과장은 영감과 할미가 젊은 첩 때문에 싸우는 내용으로, 매우 유기적인 짜임을 갖고 있다. 영감이 양반으로 설정되어 있는 오광대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영감과 할미는 서민층으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할미는 대부분 무당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손에 방울을 들고 다니는가 하면, 무속신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다. 영감과 할미는 고생하며 다니다가 만나지만, 영감이 할미를 박대하자 서로 싸운다. 이때 영감의 첩이 등장하면서 싸움이 격화된다. 결국 영감과 할미의 싸움은 할미와 첩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결국 영감이 할미를 때려 죽이면, 무당이 나와 할미의 원통한 한을 풀어 주기 위해 진오귀굿을 거행한다. 야류와 오광대에서는 무당의 굿 대신에 상두꾼들의 상여소리가 있다. 할미과장은 할미의 가련한 신세를 통하여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부당한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한국 가면극의 악사는 원래 예전부터 지역에 따라 무부(巫夫), 재인촌의 재인, 악사청의 악사, 농민, 연희자를 겸하고 있는 악사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서울의 본산대놀이는 총융청의 공인,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 관아의 악사, 송파산대놀이는 무부를 초청하여 삼현육각의 음악 반주를 맡겼다. 동래야류와 수영야류에서는 농악대의 풍물재비들이 악사를 담당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고성오광대의 반주 악기는 꽹과리, 징, 북, 장고 등이어서 농악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악사는 농민이었다. 통영오광대의 반주 악기는 꽹과리, 징, 북, 장고 등이어서 농악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나, 악사는 원래 통제영의 취고수청에 속해 있던 악공들로서, 무계 출신들이었다.
애사당놀이 퇴계원산대놀이
해서탈춤에서는 재인촌의 재인을 초청하여 삼현육각의 음악 반주를 맡겼다. 그래서 산대놀이와 해서탈춤의 악사는 전문적 연주자로서 연희자와 분리되어 있고, 앉아서 반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이 연주하는 삼현육각은 피리·대금·해금 같은 선율악기가 있어서 농악기로만 연주하는 것보다 음악성이 풍부하다.
이러한 전문적 악사들이 앉아서 연주하는 음악 반주는 가면극의 춤사위, 노래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현전하는 가면극 가운데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와 봉산탈춤, 강령탈춤의 춤사위가 뛰어나고 다양하게 세분되어 있으며, 삽입가요가 많으면서 그 가락이 좋은 것이다.
산대놀이의 춤사위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섬세한 중부 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데, 춤사위가 매우 분화되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산대놀이의 가면은 황해도 해서탈춤의 가면이나 경상남도 야류·오광대의 가면과 차이를 보인다. 산대놀이 가면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고, 비교적 아기자기하고, 손질이 많이 가해져서 기교가 뛰어나고 다양하며, 가면의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야류와 오광대의 가면은 선이 굵고 투박하며, 생김새가 단순하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말뚝이가면은 모두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산대놀이 가면은 해서탈춤과 마찬가지로 중 가면이 많이 등장하고, 야류·오광대에는 중 가면이 현격히 적다.
의의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가면극은 매우 유사한 발전 과정을 보인다. 동아시아에는 (1) 마을 주민들이 전승하던 가면극과 (2) 전문적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가면극이 있었다. (1)은 각 지역의 향촌제사활동(鄕村祭祀活動)에서 연행되던 것으로서, 각각 자생적, 향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2)는 산악(散樂) 또는 백희(百戱)라고 불리던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들이 발전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함께 각국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 산대놀이는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가면극이다. 그러므로 산대놀이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면, 각국 가면극의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함께 각국 가면극의 독자성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나례에 동원되던 전문 연희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례가 있을 때 지방의 재인청에서 동원되던 재인들과 구별된다. 조선 전기의 여러 기록에 경중우인(京中優人), 경중남녀재인(京中男女才人) 등의 용어가 보이고, 우인 또는 재인이 서울의 사대문 안에 살았다는 내용도 발견된다. 이때 경중우인의 일부로 주목되는 존재가 성균관에 속한 노비였던 반인이다. 반인들은 조선 후기에 서울 근교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인 산대놀이를 성립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반인 항목 참조) 반인들은 기존의 유구한 연희 전통을 계승하면서 조선 후기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산대놀이를 성립시켰고, 이를 황해도, 경상도 등 각 지역으로 전파했다. 그러므로 산대놀이에 대한 연구는 가면극, 판소리, 인형극 등 전통연희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창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참고문헌
-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관련이미지
취발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