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희기원설
산대희기원설과 산악·백희기원설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산대희와 산악·백희는 동일한 연희들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대희기원설이 한국적인 시각에서 가면극의 역사를 고찰하고 있다면, 산악·백희기원설은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 가면극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산악·백희로부터 전문적 연희자가 공연하는 가면극이 성립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보편적 현상임을 밝히고 있다.
이 기원설을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는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안확(安廓)이다. 그는 처용무·나례·산대희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즉 나의(儺儀)가 신라시대에 처용무가 되고 고려시대에 내려와 산대희가 되었는데, 산대희가 바로 조선시대 산대도감극의 전신이라는 견해이다.
김재철은 여러 문헌자료를 이용하여,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연극을 사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농사를 마치고 신을 즐겁게 하려는 무당의 의식에서 점점 복잡한 가무가 발달하여 비로소 가무극이 발생하게 된 듯하다고 하며, 신라의 검무(劍舞)·오기(五伎)·처용무(處容舞)·무애무(無舞)에서 연극의 면모를 살피고, 오기 즉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咏五首)〉에 묘사된 다섯 가지 연희 중 가면희를 고찰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종전의 다양한 가면극이 집대성되어 일종의 완전한 가면극인 산대극(山臺劇)이 형성되었고, 이 산대극이 조선시대에 산대도감극으로서 방방곡곡에 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안확과 김재철의 주장은 송석하와 조원경(趙元庚)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송석하는 나례가 가면극의 발생에 동기를 준 것은 인정하지만, 처용무와 나례가 다르고 나례와 산대극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안확의 논문에 대해 비판하면서, 처용무와 산대극은 벽사관념(辟邪觀念)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조형미술, 무용동작, 음곡가요에서 상이하기 때문에 처용무가 산대극이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나례나 산대잡극은 나례의식에서 행해진 백희 전반을 총괄해서 부르는 명칭이고, 처용무는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산대희와 산대잡극은 고려 말에는 여러 가지 잡기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현대의 산대극은 연극 형태를 갖춘 연극 명칭으로 여기에 잡기는 전연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례·산대희와 가면극인 산대극은 다른 것임을 지적했다.
조원경은 안확과 김재철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나례에서 행했던 백희, 희학지사(戱謔之事), 교방가요는 산대극과 같은 가면무극(假面舞劇)이 아니며, 어느 나례에서도 가면무극을 행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나례와 가면무극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례는 궁중나례(宮中儺禮)와 채붕나례(綵棚儺禮)로 나뉘는데, 궁중나례는 세말(歲末)에 궁중에서 행하는 것으로 방상시 축역(逐疫)과 학무(鶴舞), 처용무, 백희, 희학지사가 있었으나, 가면무용극은 없었다고 한다. 채붕나례는 중국사신을 영접할 때,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胎室)을 이안(移安)할 때, 신임 감사를 영접할 때 등에 행해졌고, 어느 경우나 백희는 있었으나 중국사신 영접시에는 희학지사가, 그리고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기 위해 왕이 행차할 때 교방가요가 추가되었을 뿐 역시 가면무용극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봉사도(奉使圖)』(1725)가 발견됨으로써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 산대희를 할 때 가면무용극도 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송석하와 조원경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양재연과 이두현은 산대희기원설을 다시 부분적으로 긍정했다. 이두현은 산대희기원설을 더욱 발전시켜, 가면극의 기원을 서낭제 탈놀이와 산대도감 계통극으로 나누어 논의했다. 그는 하회별신굿탈놀이·강릉관노가면극 등 서낭제에서 놀았던 서낭제 탈놀이는 서낭제에서 기원해 발전한 토착적 가면극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서울 근교의 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와 오광대는 산대도감 계통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고대의 제의에서 연극 일반의 기원을 찾아 이것을 가면극과 관련시키면서, 산대극의 모태로서 기악을 원형으로 설정하고, 나례희·산대희·가무잡희를 산대도감극의 선행 예능으로 보며, 규식지희와 소학지희의 결합이 가면극이라는 종합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산대도감극은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거기에 '몸짓이나 동작'과 '덕담·재담의 성격을 띤 대사'와 노래가 곁들이는 연출 형태인데, 그것의 가무적 측면은 규식지희의 전승이고, 연극적 측면은 광대소학지희의 희곡적 전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산대도감극의 춤과 연기는 나례의 규식지희에서, 대사는 나례의 광대소학지희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처용무와 나례를 산대도감극의 선행 예능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조 이후 공의(公儀)로서의 나희가 급격히 쇠퇴하고, 영·정조 이후 국가적인 행사로는 폐지되자, 그 연희자인 팽인(伻人, 편놈, 팽인(伻人)은 반인(泮人)의 착오)들이 민간에서 가면극인 산대놀이를 시작했고, 그러다가 그 연희자들의 지방 분산으로 각 지방의 가면극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전경욱은 한국 가면극의 계통을 크게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누어 그 기원을 논의했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하회별신굿놀이나 강릉관노가면극처럼 마을굿놀이나 고을굿놀이에서 유래한 가면극이고,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전문적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이 발전하여 성립된 가면극이라고 한다. 산악·백희 또는 산악잡희라고 불리는 연희들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는데, 그 종목은 곡예와 묘기,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골계희인 우희, 환술, 가무희, 악기연주 등이었다. 결국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잡희·산대잡극·산대희라고 불리던 연희들은 바로 이 산악·백희와 동일한 연희임을 지적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산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이 연희들을 발전시켜 '나희(儺戱)'라는 가면극을 성립시켰고, 일본에서는 사루가쿠(猿樂), 즉 산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노(能)'라는 가면극을 성립시킨 것처럼, 한국에서도 중국 사신 영접시에 나례도감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泮人)들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와 가면희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 '본산대놀이'라고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반인 항목 참조) 이러한 입장은 산대희기원설을 이어받아 확대 발전시켜 논의한 것으로서, 본산대놀이의 '산악·백희기원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결국 이상의 산대희기원설과 산악·백희기원설은 산대희에서 가면극인 산대놀이가 생겨났다고 보는 입장이다. 산대희는 신라시대 이래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산대는 무대 구조물로서, 산과 같이 높은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인 명칭이다. 신라 진흥왕 이래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를 거행할 때 산대 앞에서 가무백희를 연행했다. 1725년 완성된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1725)에는 소형의 산대 앞에서 줄타기, 접시돌리기, 땅재주, 그리고 가면을 쓴 사람 넷이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행사에서 행해진 산대희를 묘사한 것이므로, 산대희로부터 가면극인 산대놀이가 성립되었다는 견해는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 근교의 가면극에 대해 왜 애오개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 등 산대놀이라는 명칭을 붙였는가 하는 의문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산붕 앞에서 가면을 쓴 사람 넷이 춤을 추는 장면 아극돈. 『봉사도』. 1725. 제7폭
참고문헌
- 김재철, 『조선연극사』, 학예사, 1939.
- 송석하, 「처용무·나례·산대극의 관계를 논함」, 『진단학보』 2권 2, 진단학회, 1935.
- 안확, 「山臺舞劇と處容舞と儺」, 『朝鮮』 201, 朝鮮總督府, 1932.
- 양재연, 「산대도감희에 취하여」, 『중대30주년논문집』, 중앙대, 1955.
- 이두현, 『한국 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 조원경, 「나례와 가면무극」, 『학림』 4, 연세대 사학과, 1955.
참조어
별산대놀이, 본산대놀이, 산대도감극기원설, 산악백희기원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