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뵈기

덧뵈기

정의 및 이칭

덧뵈기는 조선 후기의 다양한 유랑예인집단 중 남성으로 구성된 연희 집단인 남사당패가 각 지방을 유랑하며 공연하던 가면극이다. 원래 남사당놀이 가운데 꼭두각시놀음만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나, 1988년 풍물, 덧뵈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의 다섯 종목이 추가되었다.

남사당패는 경기도 안성과 진위, 충청남도 당진과 회덕, 전라남도 강진과 구례, 경상남도 진양과 남해, 황해도 송화와 은율 등 전국 각지에 있는 사당골 및 불당골이란 명칭의 여러 마을을 근거지로 삼고, 덧뵈기를 비롯한 연희 종목들을 전수했다. 덧뵈기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지니고 있어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영향으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덧뵈기는 남사당패에서 가면극을 은어로 일컫는 용어이다. 덧뵈기를 풀어보면 '덧쓰고 보인다', '덧 보이게 한다', '덧(곱)본다'는 뜻으로, 가면을 착용하고 벌이는 가면극을 의미한다. 현재 남사당패는 강남구 삼성동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 보존회 사무실을 두고 덧뵈기를 비롯한 여러 연희를 전승하고 있다.

유래와 역사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유랑예인집단들이 있었는데,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사당패·대광대패·솟대쟁이패·초라니패·풍각쟁이패·광대패·걸립패·중매구·굿중패 등이 있었다. 사당패란 여(女)사당으로 춤과 노래를 앞세우고 매음(賣淫)하는 집단으로, 우두머리격인 '모갑(某甲)'이란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居士)'라는 남자들이 제각기 사당과 짝을 맞춘다. 표면적으로는 모갑이가 이끄는 집단처럼 보이지만, 모갑이와 거사들은 모두 사당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걸립패(비나리패)는 우두머리격인 화주를 중심으로 비나리(告祀꾼), 보살, 잽이(풍물잽이), 산이(기예의 연희자), 탁발(托鉢) 등 15명 내외로 구성되며, 반드시 사찰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사찰의 신표를 제시하고 집걷이할 것을 청하여 곡식과 금품을 받아 수입으로 삼는다.

이에 반해 남사당패는 꼭두쇠와 40-50명의 연희자들로 구성되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남자들의 연희집단이다. 간혹 어름산이(줄꾼)나 한두 명의 여자가 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는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서의 일이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 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암동모는 초입자인 삐리들이 감당했고, 삐리는 연희자인 가열이 되기까지 머리를 땋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여장(女裝)을 했다. 여성 예인 집단인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여장한 남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남사당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갑이)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가지 놀이를 공연하고 다녔다. 남사당패는 수입을 위해 경제력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그곳은 주로 장터·파시·마을 행사 등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과 다소의 노자만 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 진위, 충청남도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북쪽으로는 송화·은율 등지이다. 그 곳에서는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해서 초입자인 삐리들의 기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사당패의 여러 연희 중 덧뵈기에 대해서, 1959년 무렵 생존하고 있던 여러 남사당패 연희자들은 자신들의 덧뵈기가 1900년대 초에 원각사(圓覺社)에서도 공연한 바 있는 당시의 이름난 탈꾼 이운선(李雲仙)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운선은 진위패(振威牌) 남사당의 곰뱅이쇠였는데, 그에게서 가면극을 배운 이경화(振威牌, 덧뵈기쇠)가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를 거점으로, 당시 조정까지 출입하던 사당 바우덕이(金岩德)의 힘을 입어 안성 개다리패들에게 덧뵈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사당놀이는 20세기 들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지다가, 광복 이후 남사당의 뜬쇠들인 송순갑, 양도일, 송복산, 남형우가 남사당 재건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최은창, 이돌천, 조송자 등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러던 중 1964년 남사당패 여섯 종목 중 덜미(꼭두각시놀음)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고인이 된 남형우, 양도일, 송복산이 그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후 1970년대 이래 여섯 마당을 집대성하여 발표회를 하게 되었고, 1988년에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이 모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포함되었다.

내용 및 특성

덧뵈기는 지역 전승의 가면극에 비해 의식성이나 행사성이 약하다. 대신에 그때그때 관중의 취향과 흥미에 영합하는 현장성이 지역 전승 가면극보다 우수하다는 평을 받는다. 덧뵈기는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우세한 풍자극으로 첫째마당 마당씻이, 둘째마당 옴탈잡이, 셋째마당 샌님잡이, 넷째마당 먹중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씻이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의 역할을 하고, 옴탈잡이는 양주별산대놀이 옴중·먹중놀이와 비슷하다. 샌님잡이는 다른 가면극의 양반과장에 해당하는데, 양반을 조롱하는 천민의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먹중잡이는 다른 가면극의 파계승과장인 노장과장에 해당하는데, 술집 여자에게 미혹되어 파계하는 승려를 풍자한다. 덧뵈기의 과장 명칭은 최초 채록자가 연희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마당씻이를 하고, 옴탈잡고, 샌님잡고, 먹중잡고라는 말을 그대로 응용하여 과장의 명칭을 정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덧뵈기에는 다른 가면극에 반드시 나오는 벽사적인 의식무가 마당씻이의 고사문(告祀文)인 '비나리'로 대체되어 있고, 반주악인 풍물 가락과 힘찬 춤사위, 기민한 극 진행이 돋보인다. 지역 전승 가면극과 덧뵈기가 다른 점은 풍물과 함께 비나리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걸립패로서 남사당패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남사당의 여러 놀이 중 덧뵈기 외에도 풍물놀이에 마당씻이가 있으며 고사(비나리)와 걸립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즉 남사당패들은 사람들의 제사의식이나 종교적인 기원을 대행해 주고 생계비를 얻어내었던 것이다.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는 각각 양주별산대놀이의 옴중·먹중놀이, 샌님놀이, 노장놀이와 유사한 내용이다. 등장인물과 내용에서 양주별산대놀이와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덧뵈기는 서울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샌님잡이 장면

샌님잡이 장면 남사당 덧뵈기

먹중춤

먹중춤 남사당 덧뵈기

남사당패의 덧뵈기는 다른 지역의 가면극과 비교해서 전체적으로 즉흥성과 오락성이 강하고 행동이 거칠고 공격성이 짙다. 그 짜임새에서도 인물의 성격을 치밀하게 추구하기보다는 놀이판의 분위기에 따른 가변성이 두드러진 판놀이 내지는 촌극적 성향이 강하다.

닭이똥사위는 몸을 감고 풀면서 펼치는 것으로 그 율동이 양팔에서 크게 나타나도록 하는 춤사위인데, 남사당 덧뵈기의 합동춤에서 여러 배역이 추는 춤이다. 양다리는 제자리에 서 있으면서 오른팔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양쪽으로 함께 어른다. 올렸던 오른팔을 어르면서 앞으로 내리고, 내린 양팔을 가슴 앞으로 모으는 동작이다. 양손을 휘휘 맴을 돌리듯 또는 닭이 똥을 싸는 것처럼 원을 그리는 성희(性戱)를 상징하는 춤사위이다.

덧뵈기의 등장과 퇴장 방식은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 없고 놀이판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흥에 겨운 구경꾼들에게 연희자들이 끌려가 함께 어우러져 한바탕 춤을 추고 들어간다. 덧뵈기에는 샌님탈, 노친네탈, 취발이탈, 말뚝이탈, 먹중탈, 옴중탈, 피조리탈, 꺽쇠탈, 장쇠탈과 같은 가면이 사용되는데, 모두 등장인물의 성격을 잘 구현해 준다.

다른 지역의 사례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산대놀이와 황해도의 해서탈춤, 경남의 야류와 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났다. 현존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에는 나례와 기존 전문적 놀이꾼에 의해 전승되던 연희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본산대놀이, 별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 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는 연희 내용, 과장의 구성, 대사의 형식, 극적 형식, 가면 등을 살펴볼 때, 분명히 하나의 계통에서 전파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덧뵈기와 유사성을 보이는 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양주별산대놀이이다.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의 여러 놀이 중 하나인 덧뵈기는 산대놀이나 해서탈춤에 비해 간단하기는 하지만 유사한 점이 많다. 양주별산대놀이, 봉산탈춤, 덧뵈기(남사당패)의 노장과장에서 여성 인물인 소매가 두 명 등장하는 것과 같이 덧뵈기에서도 피조리가 두 명 등장한다. 그리고 덧뵈기의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는 각각 양주별산대놀이의 옴중·먹중놀이, 샌님놀이, 노장놀이와 유사한 내용이다. 이와 같이 덧뵈기는 서울 근교의 산대놀이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사당패의 여러 공연 종목 중 하나로 가면극을 놀았기 때문에 덧뵈기의 내용이 간단해졌을 것이다.

한국의 가면극에 등장하는 가면들은 여러 가면극에서 공통된 모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면극의 가면은 재료가 종이, 바가지, 나무 등 다양하다. 해서탈춤은 종이가면, 산대놀이는 바가지가면, 야류와 오광대는 대부분 바가지가면, 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 일부는 종이가면, 북청사자놀음은 종이가면, 하회가면은 나무가면, 강릉관노가면극은 나무가면, 덧뵈기는 바가지가면 등을 사용한다. 이렇듯 재질은 다양하지만 취발이 가면을 비롯한 가면의 유형을 살펴보면 등장인물에 따라 가면에 일정한 유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봉산탈춤, 강령탈춤,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남사당패의 덧뵈기에서 사용하는 취발이 가면은 얼굴 바탕은 붉은색이고, 이마에 여러 개의 주름이 강하게 잡혀 있으며, 가면의 이마 윗부분에서부터 한 줄기의 긴 머리카락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늘어져 있다. 이는 덧뵈기가 다른 지역 전승 가면극과 함께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역대 명 연희자

1959년 무렵 생존하고 있던 여러 놀이꾼에 의하면, 그들은 1900년대 초 원각사(圓覺社)에서도 공연한 바 있는 당시의 이름난 탈꾼 이운선(李雲仙)의 후예라고 한다. 이운선은 원각사에서 공연하던 이름난 탈꾼으로, 진위패(振威牌) 남사당의 곰뱅이쇠였다. 그에게서 가면극을 배운 이경화(덧뵈기쇠)가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를 거점으로 당시 조정까지 출입하던 사당 바우덕이(본명 김암덕(金岩德))의 힘을 입어 안성 개다리패의 가열들에게 덧뵈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이경화에게 배운 사람으로는 정성보·이일룡(이상 경기도 이천 출생), 이재근·이복만(이상 경기도 안성 출생), 이성근(함경도 안변 출생) 최경선(경기도 진위 출생) 등으로 후에 남사당패 중에서도 뛰어난 탈꾼이었다. 그보다 후대인 김복만은 안성 복만이패 꼭두쇠였는데, 그에게 배운 사람으로는 전근배(충남 괴산 출생), 정일파(충남 당진 출생), 양도일(충남 대덕 출생), 남형우(충북 괴산 출생), 최성구(경기도), 송순갑(충남 은산 출생) 등이 1930년대 중엽까지 순회공연한 바 있다고 한다.

이후로는 남형우의 덧뵈기를 승계한 최성구, 지수문, 송창선, 송철수, 박계순, 김재원, 남기환, 박용태 등이 있다. 1964년 남사당놀이 중 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될 당시 보유자로 인정된 사람으로는 송창선(1911-1986/호적), 남운용(1907-1978/대잡이)이 있다. 이후 1968년에 양도일(1907-1979/받는 소리, 장고)이, 1980년에 김재원(1934-1992/덧뵈기, 버나)과 박계순(1934-2006/산받이)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1988년 꼭두각시놀음에서 남사당놀이로 확대 지정되면서 1993년에 남기환(꼭두각시놀음)이, 2002년에 박용태(꼭두각시놀음, 덧뵈기, 풍물)가 추가로 인정되었다. 남기환은 현재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박용태가 전수교육에 힘쓰고 있다.

연희본

남사당패는 원래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流浪藝人集團)이다. 1964년 꼭두각시놀음만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남사당놀이 전 종목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남사당패의 덧뵈기는 '덧(곱)본다'는 뜻으로 가면을 나타낸다. 덧뵈기는 지역 전승의 가면극에 비해 의식성이나 행사성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취향과 흥취에 영합했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우세한 풍자극이다. 덧뵈기에는 다른 가면극에서 반드시 나오는 벽사적인 의식무가 마당씻이의 고사문(告祀文)인 '비나리'로 대치되어 있다.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는 각각 양주별산대놀이옴중·먹중놀이, 샌님놀이, 노장춤과 같은 내용이다. 덧뵈기의 연희본은 여러 지방 가면극의 영향을 고루 받았지만, 등장인물과 내용에서 양주별산대놀이와 유사한 점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서울·경기 지역의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채록된 남사당 덧뵈기의 연희본은 다음과 같다.

(1) 〈무형문화재본〉(『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40호, 문화재관리국, 1968)
(2) 〈심우성본〉(『남사당패연구』, 동화출판공사, 1974)
(3) 〈박용태본〉(『박첨지가 전하는 남사당놀이』, 엠-애드, 2008)

(1) 〈무형문화재본〉은 심우성이 1968년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40호에 남사당의 여러 놀이 가운데 하나로 채록된 것이다. 제1과장 마당씻이, 제2과장 옴탈잡이, 제3과장 샌님잡이, 제4과장 먹중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덧뵈기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근거가 되었고 덧뵈기 연구의 기초적 자료에 해당한다. 이 대본은 2000년에 간행된 『남사당놀이』에 그대로 전재되어 있다.

(2) 〈심우성본〉은 심우성이 1967년 9월 3일 남형우양도일의 구술과 1968년 1월 14일 최성구의 구술, 그리고 1969년 1월 20-23일 정일파의 회고적 증언, 1968년 2월 15일 YMCA공연, 1968년 7월 26일 경복궁 후정 공연, 1969년 3월 24일 〈까페 떼아뜨르〉 공연 등 민속극회 남사당의 덧뵈기 발표회 실황녹음을 정리한 것이다. 이 대본은 1974년 간행된 『남사당패 연구』에도 수록되어 있다.

(3) 〈박용태본〉은 남사당놀이 예능보유자인 박용태의 덧뵈기 연희본이다.

의의

덧뵈기는 지역을 전승 기반으로 삼고 특정 행사에서 연행되던 가면극과 달리 전국을 무대로 삼아 공연을 펼쳤다. 덧뵈기는 특정한 지방색을 띠지 않고 여러 지방의 연희를 두루 섭렵하여 가장 재미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이것은 남사당이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연희를 보여주는 유랑예인집단이므로 특정한 지방색을 띠지 않아야 거부감 없이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고, 이를 통해 생활이 가능해지는 남사당 연희의 유통적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덧뵈기는 폭넓게 민중에 뿌리를 내렸던 사회극의 성격을 띠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덧뵈기는 당시 국가 공식 행사에 동원되었던 산대놀이 계통 연희와는 달리, 서민층과 더욱 밀접한 호흡을 함께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덧뵈기에 잠재한 사상이 민중의 의지와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타의 모든 민속예술에 깊이 영향을 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덧뵈기는 조선 후기에 기존의 가면놀이를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에 맞는 내용으로 환골탈태하여 재창조한 보편적인 연희양식이다.

또한 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만큼 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초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도 남사당 덧뵈기의 중요성을 배가시키는 요인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 박용태·양근수, 『박첨지가 전하는 남사당놀이』, 엠-애드, 2008.
  • 서연호, 『한국 전승 연희의 현장 연구』, 집문당, 1997.
  • 심우성,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6집 40호, 문화재관리국, 1968.
  • 심우성, 『남사당패 연구』, 동문선, 1989.
  • 심우성, 『남사당놀이』, 화산문화, 2000.
  • 윤광봉, 『유랑예인과 꼭두각시놀음』, 밀알, 1994.
  •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참조어

송복산, 송철수, 이경화, 이복만, 이운선, 이일용, 전근배, 정성보, 정일파, 지수문, 최경선, 최성구, 최은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