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부장놀이

포도부장놀이

포도부장놀이는 포도부장이 샌님에게서 젊은 소실인 소무를 빼앗는 내용으로, 양주별산대놀이 제12과장, 송파산대놀이 제11과장, 퇴계원산대놀이 제11과장에서 연행된다. 봉산탈춤에도 제6과장 양반춤 다음에 샌님·포도부장 과장이 있었다. 월남한 후 오랫동안 샌님·포도부장 과장을 연행하지 않았으나, 최근에 이를 복원했다.

양주별산대놀이 제12과장 포도부장놀이에서 샌님이 젊은 소실인 소무를 데리고 등장한다. 갑자기 젊고 힘 있는 포도부장이 등장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샌님은 재물로 소무를 유혹하며 잡아두려 한다. 하지만 포도부장이 다시 접근하고 마침내 샌님은 소무에게 발길질을 당하기까지 한다. 샌님은 어쩔 수 없이 서럽게 울면서 소무를 포기하고 하직 인사를 한다. 소무는 포도부장과 어울려 춤을 추다가 퇴장한다.

샌님, 포도부장, 소무

샌님, 포도부장, 소무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제11과장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에서 도포 차림에 정자관을 쓴 샌님이 작은마누라의 어깨를 안고,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나와서 마당을 한 바퀴 돈다. 이때 미얄할미가 지팡이를 짚고 두리번거리면서 등장한다. 이를 본 샌님이 작은마누라를 뒤에 숨긴다. 샌님과 미얄할미는 서로 찾아다녔다면서 재담을 한다. 샌님이 작은마누라를 소개하자, 미얄할미는 욕을 하며 달려들어 작은마누라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미얄할미가 나동그라진다. 샌님이 작은마누라의 편을 들며 말리자 미얄할미는 욕을 하며 나가버린다. 샌님과 작은마누라가 어울려 춤을 추는데, 포도부장이 횐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나와 반대편 쪽에 가서 선다. 포도부장이 다가가서 넘겨보다가 작은마누라의 양손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춘다. 샘이 난 샌님이 포도부장을 쫓아버린다. 샌님이 작은마누라를 달래고 다시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 포도부장이 다가와서 작은마누라의 양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샌님을 가로막고 돈다. 마침내 샌님이 포기하자, 포도부장과 작은마누라가 함께 춤을 추면서 퇴장한다.

퇴계원산대놀이 제11과장 포도부장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와 유사하다.

포도부장놀이는 1778년에 남대문 밖에서 공연된 본산대놀이를 묘사한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1789)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레한 늙은 유생 이 판에 끼어들다니 잘못이지. / 입술은 언청이 눈썹이 기다란데 고개를 길게 뽑아 새 먹이를 쪼듯 / 부채를 부치며 거드름을 피우는데 아우성치고 꾸짖는 건 무슨 연고인고? / 헌걸차다 웬 사나이 장사로 뽑힘직하구나. / 짧은 창옷에 호신수 호매하니 누가 감히 거역하랴! / 유생이고 노장이고 꾸짖어 물리치는데 마치 어린애 다루듯 / 젊고 어여쁜 계집을 홀로 차지하여 손목 잡고 끌어안고 / 칼춤은 어이 그리 기이한고! / 몸도 가뿐히 도망치는 토끼처럼(潦倒老儒生 闖入無乃誤 缺脣犭尨其眉 延頸如鳥嗉 揮扇擧止高 呌罵是何故 赳赳一武夫 可應壯士募 短衣好身手 豪邁誰敢忤 叱退儒與釋 視之如嬰孺 獨自嬰靑娥 抱持偏愛護 舞劍一何奇 身輕似脫兎)"이라는 구절이 이 과장에 해당한다. 포도부장은 원래 도성을 지키는 종5품에 해당하는 직급 높은 무관이다. 당시 포도부장은 여러 형태로 연행문화에 깊숙이 개입했는데, 서울·경기 지역 산대놀이에 포도부장이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치안을 담당하던 의금부와 포도청, 임금의 친위부대인 금군청(후에 용호영)과 5군영의 총융청 등 군대들은 연희자 집단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나례를 설행할 때 놀았던 산대놀이를 위해서 임시관청인 나례도감이 설치되었는데, 좌변나례도감을 의금부가, 우변나례도감을 군기시(軍器寺)가 맡았다. 또한 의금부는 평상시 서울에 거주하는 경중우인(京中優人)을 관리했으며, 이 업무는 후에 포도청으로 이관되었다. 더불어 시정에서 연희 활동을 위해서는 치안을 담당하던 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또한 위 기관들의 말단 인력은 연희자로 충당되기도 했다. 외방재인 출신 중에는 무재(武才)를 떨쳐 임금의 친위부대인 금군(禁軍)에 속하여 시위(侍衛)의 업무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의금부의 핵심병력인 나장(羅將)은 원래 양민에서 보충되었으나, 대우가 나빠지고 업무가 힘들어지자 창우나 굴뢰(窟儡) 등 천민으로 보충하게 되었다. 이들은 3교대로 나뉘어 한 달씩 복무했으므로, 복무기간 외에는 공연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총융청, 어영청, 용호영 등 군영에 소속된 음악인들 역시 반군반민(半軍半民)의 신분으로 각종 풍류마당에 초청되어 공연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서울·경기 산대놀이의 포도부장과장은 이러한 당대 연행문화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문헌

  • 사진실, 『공연문화의 전통 : 樂·戱·劇』, 태학사, 2002.
  •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도서출판 피아, 2006.
  •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 정형호, 『양주별산대놀이』, 화산문화, 2000.
  • 퇴계원산대놀이보존회, 『퇴계원산대놀이』, 월인, 1999.

참조어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