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통스님이 용의 항복을 받다

혜통스님이 용의 항복을 받다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참고문헌 : 삼국유사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속인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南山)의 서쪽 기슭 은천동(銀天洞)의 동구(洞ㅁ) - 지금의 남산사(南澗寺) 동리(東里)이다-에 있었다. 하루는 집 동쪽 시내위에서 놀다가 한 마리의 수달을 잡아 죽여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그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았더니 뼈가 예전에 살던 구멍으로 되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앉아 있었다.
낭(혜통)은 그것을 바라보고 한참동안 놀라워하고 이상히 여겼다.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문득 속가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고 고쳤다.
당나라로 가서 무외삼장(無畏三藏)을 찾아 보고 배우기를 청했더니 삼장(三藏)은 말했다.
「신라 사람이 어찌 법기(法器)가 되겠소.」
그는 마침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고 3년이나 섬기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혜통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머리에 불담긴 동이를 이고 있었더니 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졌는데 우뢰 같은 소리가 났다 삼장이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고는 불담긴 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며 신주(神呪)를 외우니 상처가 아물어 그전처럼 되었다.
그러나 흉터가 생겨 왕(王)자 무늬와 같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왕 스님이라 불렀으며, 재기(才器)를 깊이 인정 했으므로 인결(印訣=心法)을 삼장은 그에게 전해 주었다.
이 때 당나라 황실에서 공주가 병이 나서 고종(高宗)은 삼장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했더니 삼장은 혜통을 자기 대신으로 천거했다.
혜통은 명령을 받고 따로 거처하며 흰콩 한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그것이 변해서 횐 갑옷 입은 신병 (神病)이 나타나고 병이 드디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았음을 원망하여 본국(=신라), 문잉림(文沆林)으로 가서 인명을 너무 심하게 해쳤다. 그 때 정공(鄭恭)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혜통을 보고 말했다.
「스님이 쫓은 독룡이 본국에 와서 그 해가 심하니 속히 가서 그것을 없애 주십시오.」
혜통은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 (麟德) 2년 을측(665)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용을 쫓아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에 버드나무로 태어나 정공의 문 밖에 나 있었다. 정공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고 매우 사랑했다.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효소왕이 왕위에 오르자, 산을 만들고 장례길을 닦는데. 정씨집의 버드나무가 길에 가로막고 서 있었으므로 유사(有司)가 그것을 베려 했다. 정공은 노했다.
「차라리 내 머리를 베었으면 베었지, 이 나무는 베지 말라.」
이에 정공의 목을 베고 나무를 자르자 용이 스님에게 붙었다. 병졸들이 스님을 보고 쫓아오자 스님은 신통으로 병목에 금을 긋고 그들의 목을 바라보라 하였다.
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있었으므로 서로 쳐다보고 놀랐다. 혜통은 또 외쳤다.
「만약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 목도 잘라질 것인데 어찌려느냐?」
그 병사들은 달아나 붉은 획이 그어진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은 말했다.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겠느냐 ?」
이에 내버려 두었다. 왕녀에게 문득 병이 나서, 왕이 혜통을 불러 치료케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했다. 혜통은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 애매하게 나라의 형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뉘우쳐서 이에 정공의 처자에게 죄를 면해주고, 혜통은 국사로 삼았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期張山)에 가서 웅신(態神)이 되어 해독을 끼침이 더욱 심하니 백성들이 많이 괴로워했다.
혜통은 그 산중으로 가서 용을 달래서 불살계(不殺戒)를 가르쳤다. 웅신의 해가 그제야 그쳤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므로,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우니 즉시 나았다. 혜통은 이에 말했다.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몸이 되어 양민 신충(信忠)을 그릇 판결하여 종으로 삼았으므로 신충에게는 원망이 있어 윤회(輪廻) 환생(還生)할 때마다 보복하게 됩니다. 지금 이 등창도 또한 신충의 탓입니다. 마땅히 신충을 위해 절을 세워 명복을 빌어 원한을 풀게 해야 될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절을 세워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 했다. 절이 낙성되자 하늘에서 외쳤다.
「왕이 절을 세워주셨으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망은 이미 풀렸습니다.」-어떤 책에서는 이 사실이 진표의 전기 속에 실려 있는데 잘못이다. -또 그 외친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설치했다. 그 당과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먼저 밀본법사의 후예 고승 명랑(明朗)이 있었다.
용궁에 들어가서 신인(神印) -지금의 천왕사-을 처음으로 세우고 여러번 이웃 나라가 쳐들어온 것을 기도로써 물리쳤다.
이에 화상은 걸림 없는 밝은 지혜로써 절을 세워 원망을 풀게 해주니 밀교(密敎)의 교풍이 그제사 크게 떨쳐졌다.
천마산(天磨山)의 총지엄(總持嚴)과 모악(母岳)의 주석원(呪錫院) 등이 모두 거기에서 갈려나온 것이다. 어떤 이는 혜통의 세속 이름을 존승각간(尊勝角干)이라고 한다. 하나 각간(角干)은 곧 신라의 재상급이며 혜통이 관직을 지냈다는 사적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이는 시랑을 쏘아 잡았다 하나 모두 자세히 알 수없다.
산속의 복숭아와 냇가의 살구는 울타리에 비꼈는데, 일경(一境)에 봄이 깊어 두 언덕엔 꽃이 피었다.
낭군(惠通)이 수달을 잡음으로 해서, 마귀와 외도를 모두 서울에서 내쫓아 버렸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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