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진화

인간의 진화

다른 표기 언어 human evolution

요약 오랜 기간에 걸친 인간의 변화.

인간의 진화
인간의 진화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생물로,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0종에 이르는 영장목의 한 종(種)이다.

영장류 가운데 사람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성성이과 동물들(African great apes)과 외관이 가장 비슷하기 때문에 연관관계도 가장 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양한 수단을 통해 현존하는 아프리카의 민꼬리원숭이(African apes)와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적 형질을 연구한 결과 이들간에는 매우 유사한 점이 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발견은 민꼬리원숭이와 사람과의 공통된 기원, 즉 이들이 500만~60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사람과의 기원은 적어도 400만 년에서 최대 5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가장 오래된 화석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지 않아 인간의 진화과정상의 중요한 측면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진화과정의 세세한 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추측이 무성하다. 현재의 아프리카 민꼬리원숭이와 인간의 조상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개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의 민꼬리원숭이'라는 뜻)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믿어지는 화석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여러 화석에 붙여진 이름이다.

192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타웅에 있는 동굴에서 어린이의 두개골이 발견된 이래 아프리카 동부와 남부 각지에서 이와 유사한 인류의 화석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타웅 두개골, 화석의 기록).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마이오세말(약 530만 년 전)과 홍적세초(약 16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화석을 가리킨다.

약 8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화석도 발견되었지만 이것들은 민꼬리원숭이의 화석으로 생각된다. 일부 학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인간이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단일한 과정 내의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다양한 화석간의 적응상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진화과정에는 2~3개의 서로 다른 계통이 병행하여 발생했으며, 그중 하나의 계통만이 나중에 사람속(―屬 Homo)의 종들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에 있는 스테르크폰테인크롬드라이의 동굴에서 1936, 1938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와르트크란스와 마카판스가트 등 다른 2개의 동굴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1979년 발굴작업이 재개되어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만 총 1,000여 개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된 화석들은 일반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로 분류된다.

일부 학자들은 스와르트크란스의 동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크라시덴스로 분류하지만 이는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반면 많은 학자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라는 명칭 대신 1938년 처음 만들어진 파란트로푸스('인간에 가까운'이라는 뜻)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유적지인 마카판스가트에서 발견된 화석은 약 250만~32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스테르크폰테인의 화석은 약 250만~300만 년 전의 것으로 보인다. 크롬드라이에서 발견된 화석은 이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반적으로는 더 최근의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동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의 화석이 발견된 것은 1959년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였다.

올두바이 호미니드(OH) 5로 명명된 이 화석은 보존상태가 좋은 두개골로, 스와르트크란스와 크롬드라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와 닮은 점이 많았다. 1964년에 탄자니아의 나트론 호 부근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거대한 턱뼈 화석이 발견되면서 동아프리카에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그뒤 에티오피아의 오모 강 유역과 케냐의 투르카나 호(루돌프 호) 북동쪽과 북서쪽 기슭의 유적지에서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관한 연구가 진일보되었다(쿠비포라 유해). 이 두 유적지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화석이 모두 발견되었다.

이후 발견된 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화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로 분류된다. 서(西)투르카나에서 발견된 거의 완전한 형태의 두개골 화석(KNM-WT 17000으로 명명되었으며, 일반적으로는 '검은 두개골'이라고 함)도 실험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로 분류되었다.

1930년대에 탄자니아(당시에는 가루시)의 라에톨릴 유적지에서 2점의 위턱뼈가 발견되었다.

1970년대에 이 유적지를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발자국과 함께 인간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1972~77년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대규모 유적지 하다르에서 진행된 현지작업에서도 수백여 점의 인간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특히 2가지 발견이 아주 놀라웠는데, 하나는 AL 288-1로 명명되었으나 흔히 '루시'라고 불리는 표본으로 절반 정도의 뼈가 보존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최초의 가족'이라고도 불리는 최소한 13개체의 뼈로 구성된 화석이다. 라에톨리와 하다르의 화석들을 정밀조사한 결과 이 화석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는 완전히 새로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은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보다 그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라에톨릴과 하다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은 250만~450만 년 전의 인류이다. 여기서 2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첫째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가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시기가 더욱 진보된 사람과 생물인 호모 하빌리스의 출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

동아프리카의 주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유적지에서 수많은 화석이 발견된 사실은 남아프리카의 동굴 유적지에서 화석이 비교적 덜 발견되는 점과 대조를 이룬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남아프리카의 마카판스가트에서 인류의 화석과 함께 발견된 동물의 를 세심하게 조사·연구하면서 설명이 가능해졌다.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이 동굴들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몸집이 큰 육식동물에게 잡아먹힌 뒤에 그 뼈가 동굴 속에 쌓이게 된 것이다(포식). 또 이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당시 인류가 골각기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뚜렷한 증거는 없다(도구, 뼈와 이빨과 뿔의 연모공작).

스와르트크란스와 스테르크폰테인에서는 돌로 된 인공물이 발견되었다.

스와르트크란스에서 발견된 인공물은 주로 조야한 석핵(石核), 박편, 규암과 석영으로 만든 스크레이퍼, 골각기 등이었다. 스테르크폰테인에서 발견된 인공물 중에는 기술적으로 더 발전된 작은 크기의 스크레이퍼와 원시적인 손도끼 등이 있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작은 석영박편 등 상당한 규모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오모 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올두바이 협곡과 투르카나 호 북동쪽의 유적지에서 초기 인류의 기술수준과 행동양식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이미 약 175만 년 전에 인류는 손에 의한 조작기술을 충분히 발전시켰으며, 다양한 석기를 변형시킬 수 있는 인식능력을 개발했다. 이중 가장 유명한 올두바이 공작(工作)의 뒤를 이어 그 변형이나 더욱 발전된 형태의 기술이 올두바이 협곡이나 다른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행동에 관한 추론과 진화적 관계

마이오세의 화석인류가 발견된 곳의 고(古)환경은 대부분 개방된 숲 지역으로 초기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유적지와 비슷한 서식지였다.

라에톨릴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을 통해 이들 화석인이 두 발로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하다르에서 발견된 골반의 화석을 통해 약 300만 년 전에 인류가 직립자세를 취했음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그러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사지 뼈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골격은 기어오르기나 이족직립보행에 똑같이 적응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 서식하던 초기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이러한 2가지 자세를 동시에 취했으며, 상당한 시간을 나무 위에서 생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의 이빨 화석에서는 특별히 음식물의 변화에 의한 적응의 증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들이 주로 과일류·장과(漿果)·괴경(塊莖) 등 식물을 먹고 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의 출현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가설은 이들이 약 500만 년 전 지구의 기후가 더 건조하게 변할 무렵에 출현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바나 지대가 더 넓게 확대되면서 일어난 제2의 기후변동은 호모 하빌리스라는 더 진화된 형태의 사람과 생물들 및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출현과 그 시기가 일치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큰어금니는 과일 껍질 같은 단단한 것도 깰 수 있을 만큼 적응해 있었다. 그리고 건조한 기후로 인해 이들은 산재해 있는 사바나의 특정 지역에서만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이빨이 덜 특수화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적응한 것이 분명한데, 이들은 문화적 발전을 촉진했고, 호모 하빌리스나 호모 에렉투스의 출현에 연결고리가 되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계통수가 제시되었다. 이제까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의 조상으로 인정되었지만, 사람속과의 관계에 대한 직접성 여부(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를 경유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는 한때 조상이 되는 사람과 생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이러한 가설에 동의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연구 결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는 사람속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 모두와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서로 다른 특질의 혼융을 놓고 일부 학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사람속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공통조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사람속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 중 어느 한쪽의 특질이 더 우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KNM-WT 17000으로 명명된 두개골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논쟁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하빌리스
개요

호모 하빌리스라는 사람속의 멸종된 인류는 적어도 200만 년 전에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에 살았다. 1959, 1960년에 최초의 호모 하빌리스 화석(OH 7로 명명됨)이 탄자니아 북부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몇 개의 이빨과 1개의 아래턱뼈, 두개골 조각과 일부 손뼈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 많은 표본이 발견됨에 따라 그 화석들이 대표하는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4년 이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가 발표되었다.

호모 하빌리스라고 명명된 이유는 이 화석인들의 용적이 더욱 늘어났고, 작은어금니와 큰어금니가 상대적으로 작으며,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따라서 호모 하빌리스는 호모 에렉투스와 그뒤에 나타난 인류의 특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석상의 증거

최초로 발견된 화석(한 청년의 것으로 추정됨) 이외에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다른 화석들도 호모 하빌리스로 분류되었다. 1963년 최초의 발굴지로부터 약간 올라간 곳에서 위턱과 아래턱뼈, 이빨(OH 13)과 함께 두개골이 나왔다. 1개월 뒤에 3번째 두개골(OH 16)이 발견되었으나, 협곡이 물에 잠기면서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는 올두바이 협곡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화석이 발견되었다. 큰 흥미를 자아내는 OH 24 두개골은 올두바이에서 발견된 다른 호모 하빌리스 화석들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화석은 뇌의 크기와 이빨의 특성을 제외하고 얼굴의 생김새는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과 닮았다.

투르카나 호 동쪽 기슭 근처에 있는 쿠비포라에서 KNM-ER 1470으로 명명된 두개골을 비롯하여 중요한 유골들이 발굴되었다. 이 두개골은 사람속의 두개골과 비슷했으나 얼굴의 골격이 상대적으로 크고 아래쪽이 평평했다. 이 점에서 쿠비포라의 화석 표본 역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비슷하다. 쿠비포라 지역의 다른 중요한 발굴물로는 KNM-ER 1813과 ER 1805가 있다. 주로 두개골로 이루어진 KNM-ER 1813 화석은 ER 1470보다 작으며 OH 13과 비슷하다. ER 1805 화석은 특이한 점이 몇 군데 있다. 이 두개골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보다 크지만 골즐은 둥근 천장 모양이다. 이 화살촉 모양의 골즐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두개골 뒤쪽으로 가로질러 있다(→ 시상릉). 이러한 융기된 부분은 음식 씹는 기능을 하는 근육과 목 근육이 똑같이 발달했음을 나타낸다. 비슷한 특징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에서 나타나지만 사람속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ER 1805의 다른 특징들은 사람속과 비슷하다.

OH 7 화석과 비슷한 아래턱뼈들이 쿠비포라에서 발견되었고, 호모 하빌리스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화석이 훨씬 북쪽에 있는 에티오피아 오모 강 유역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심하게 부서진 두개골을 포함하여 다른 화석 몇 점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와르트크란스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의 호모 하빌리스 화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 화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스테르크폰테인에서도 사람속의 초기 종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1986년 올두바이 협곡에서 이빨이 달린 턱뼈, 두개골 일부, 오른팔뼈 일부와 두 다리뼈 등 가치있는 화석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1개체의 골격으로만 구성된 이 화석은 OH 62로 명명되었다. 이 두개골은 크게 부서져 있었지만 얼굴의 형상은 초기 사람속과의 유사성을 뚜렷이 나타냈다. OH 62가 매우 작은 사람과 생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사지뼈 덕분에 이 화석의 발견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팔이 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더 진화한 사람과 생물(hominid)과는 전체적인 몸의 균형이 크게 다르다.

화석인류 조사한 화석 표본의 수 평균뇌용적 (CC)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6 440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 4 519
호모 하빌리스 4 640
자바 원인 7 883
베이징 원인 5 1,043
호모 사피엔스 7 1,450
화석인류의 평균뇌용적
화석의 연대

OH 24를 포함하여 가장 오래된 화석이 약 185만 년 된 바위 바로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OH 7이나 OH 62 같은 다른 화석은 그보다 오래되지 않았으며, 가장 오래된 초기 사람속의 화석 OH 13으로서 약 15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쿠비포라 지역에서 발견된 ER 1470과 다른 호모 하빌리스 표본들은 약 200만 년 전의 것이다. 지표에서 발견된 다른 화석은 이보다 약간 최근의 것이며,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화석 중에 OH 13보다 오래된 것은 없다. 따라서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추측해볼 때, 호모 하빌리스는 사람속의 다른 종이 출현할 때까지 약 50만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행동상의 추론

호모 하빌리스가 남긴 석기 및 조야한 형태의 역기와 날카로운 조각을 통해 초기 인류의 행동양식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올두바이 협곡에서는 동물의 화석과 함께 많은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호모 하빌리스가 동물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부 동물뼈에 있는 표시는 석기로 새겨진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호모 하빌리스가 동물을 사냥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올두바이 협곡의 동물 화석을 분석한 결과 뼈의 표시는 석기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설치류나 육식 동물의 이빨에 의한 것도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이 동물들 중 일부는 사람이 아닌 육식동물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호모 하빌리스는 영양과 같은 몸집이 작은 동물을 사냥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썩은 고기를 먹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올두바이 협곡이 호모 하빌리스의 본거지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동물의 뼈가 쌓여 있는 곳에서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 지역이 죽은 동물을 빨리 처리하기에 편리한 곳으로 석기와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두는 곳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호모 하빌리스가 어디에서 살았는지, 또 후대의 수렵채집 민족들의 사회조직의 원형이 된 그들의 사회조직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속의 초기 종이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도 중요한 문제이다. 일부 해부학자들은 호모 하빌리스의 두개골을 조사한 뒤 올두바이 협곡의 호모 하빌리스가 언어를 사용했다고 믿었으나,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위의 견해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제작한 도구를 근거로 이들이 처음으로 상징과 언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서 한 가지 문제는 기술적·언어적 행위 사이에 분명한 연결고리가 없다는 점이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던 인류에 의해서 훨씬 더 정교한 도구가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현생인류를 특징짓는 언어의 기술이 언제 개발되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진화상의 의미

호모 하빌리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는 해부학적 특징을 달리 하는 인류로서, 인간의 진화를 특징짓는 경향이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중요한 진화상 특질은 뇌용적의 증가이다. 올두바이 협곡과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일부 화석의 뇌용적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것보다 더 크다. 또한 호모 하빌리스에서부터 이빨이 작아지고, 얼굴 모양에서 특히 코 부분이 변화하는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모 하빌리스가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플라이오세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더 발달한 홍적세의 사람속과의 중간에 자리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이것도 여러 측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호모 하빌리스에 대해서는 아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각 화석간의 해부학적 차이는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ER 1470 같은 일부 새로운 화석을 통해 초기 사람속의 두개골이 비교적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 확실해졌다. 다른 화석들은 호모 하빌리스로 분류하는 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OH 24와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ER 1805와 ER 1813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두개골들은 크기 면에서 훨씬 더 작을 뿐만 아니라 형태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OH 24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얼굴 모습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서로 연관이 있으나, ER 1805는 두개골의 융기한 모양이 다른 사람속의 것과 같지 않다. 이 화석들은 성적 이형을 보이는 하나의 집단이기보다는 2개의 분류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화석 표본들을 2개의 집단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2개 집단이 모두 사람과 생물의 계통발생과 맞아 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뇌용적이 작은 표본들(OH 24를 포함함)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로 분류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뇌용적이 큰 화석들(OH 7과 ER 1470을 포함함)만이 사람속의 초기 진화를 대변하게 된다. 다른 학자들은 초기의 인간 집단은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매우 다양했으며, 뇌용적에 관계없이 두 집단이 모두 사람속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두 종은 150만~200만 년 전에 공존했지만, 이중 한 종만이 호모 에렉투스의 직계조상이 된다. 즉 뇌용적이 큰 집단은 계속 진화한 반면에 뇌용적이 작은 집단은 소멸하게 된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개요

일반적으로 최초의 인류로 간주되는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가 주요발상지이며, 호모 하빌리스에서 진화했음이 거의 분명하다.

호모 에렉투스는 수십 만 년 동안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에서만 살았으나, 점차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들이 발견되는 유적지들을 조사하면 이러한 역사를 추론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동물의 뼈와 석기들이 발견되는 장소를 통해 이들이 지구상에 살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호모 에렉투스는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기 이전인 중기 플라이스토세(약 30만 년 전)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석상의 증거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

1890년에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있음)에서 발견된 화석이 처음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되었다.

1891년에는 솔로 강 유역의 트리닐에서 보존이 잘 된 두개골이 발굴되었다. 튀어나온 눈썹뼈와 쑥 들어간 이마, 둥근 후두부 등으로 미루어 처음에 이 화석은 해부학적으로 인간의 두개골과 민꼬리원숭이의 두개골의 중간 형태라고 생각되었다. 몇 년 후에 이 화석이 발견된 곳 근처에서 현대인의 것 같은 아주 완전한 형태의 넓적다리뼈가 발견되었다. 이 뼈는 마치 현생인류의 넓적다리뼈처럼 길고 곧았기 때문에 그 주인은 분명히 직립자세로 보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이 발견물에는 독일의 한 동물학자가 만들어낸 피테칸트로푸스라는 이름을 이용해 '똑바로 선 민꼬리원숭이-인간'이라는 의미의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트리닐의 유적지에서는 약간의 팔다리뼈가 더 나왔을 뿐이며, 몇 십 년이 지난 뒤에야 호모 에렉투스의 존재의 증거가 될 만한 충분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이 화석들을 모두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하며, 피테칸트로푸스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주로 아시아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자바의 몇몇 지역에서 비슷한 유형의 화석들이 나왔고, 그뒤에는 중국의 베이징[北京] 근처 저우커우뎬[周口店]에 있는 동굴들을 중심으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베이징 원인(原人)으로 명명된 이 화석들은 중일전쟁 기간인 1941년에 모두 분실되었으나, 같은 지역에서 계속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아시아 대륙에서만 발견되자 학자들 사이에서 호모 에렉투스는 초기 인류의 아시아적인 형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뒤 아프리카에서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고 유럽도 이들의 활동무대였을 것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자 이러한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1954~55년에 알제리의 마스카라 동쪽에서 베이징 원인과 가장 유사한 화석이 발견되었다(테르니피네 화석).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발견된 다른 화석들은 신체구조상으로는 다소 진화되어 있었으나,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분명했다.

1971년에는 모로코의 살레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이 화석은 얼굴과 이마의 뼈가 손상되기는 했지만 매우 중요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두개골(OH 9로 명명됨)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아프리카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음이 확실해졌다. 이외에도 두개골·턱뼈·팔다리뼈가 더 발견되었다. 올두바이 협곡에서 나온 화석들은 주로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동아프리카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지식의 공백은 투르카나 호 동쪽 기슭에 있는 쿠비포라의 유적을 통해 어느 정도 보완될 수 있었다.

이곳의 일괄 유물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과 호모 하빌리스로 추정되는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호모 에렉투스 화석 가운데 꽤 보존상태가 좋은 KNM-ER 3733 두개골이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에 속한다. 쿠비포라의 또다른 중요한 발굴화석은 비록 질병에 감염된 것이기는 하지만 거의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ER 1808 해골이다. 이외에도 투르카나 호 북서쪽 기슭에서 발견된 거의 완전한 형태의 해골이 또 하나 있는데(KNM-WT 15000으로 명명됨), 이것은 청년기 남자의 뼈 였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유럽에서 발굴된 초기 인류의 화석에 대해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1907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부근에 있는 마우어의 모래 채취장에서 하악골이 발견되었다. 이 화석에는 수년 간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여졌지만 턱뼈와 연결된 두개골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화석과의 정확한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는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하이델베르크인 또는 마우어인)되며, 베이징 원인의 연대와 비슷하나 그 구조적인 특성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의 턱뼈 화석보다 더 현대적이다.

196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서쪽에 있는 베르테슈죌뢰슈의 한 채석장에서 어린이와 어른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베르테슈죌뢰슈 유적). 어린이의 화석에는 젖니가 있었는데, 2명의 화석 모두 베이징 원인과의 관련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중 어른의 화석은 주로 큰 두개골의 후두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 2개의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을 보여주는 반면 호모 사피엔스의 초기 특징도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화석이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다른 화석들에 대해서도 이것이 호모 에렉투스의 후기형태인지, 아니면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이행형태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지 못했다. 베이징 원인과 동시대의 화석인 마우어의 턱뼈와, 베르테슈죌뢰슈의 치아와 후두부, 이보다 뒤에 프랑스 남부의 아라고 동굴에서 발견된 일부 유골 등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와 그 구조가 비슷하다. 유럽에서 발견된 더 최근(즉 중기 플라이스토세 말)의 몇몇 화석도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빌칭슬레벤에서 발견된 두개골과 큰어금니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와 닮은 점이 있지만, 두개골 화석은 1960년 그리스 페트랄로나 근처에서 발견된 거의 완벽한 사람과 생물의 화석과 유사하다. 정밀조사를 통해 페트랄로나의 화석은 호모 사피엔스와 몇몇 특질을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중기 플라이스토세 말 유럽에 살던 집단의 분류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처럼 유럽에 호모 에렉투스가 확실히 존재했다고 확신할 만한 증거가 아직 없다고 하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

화석의 연대

물리학과 같은 분야가 발달하면서 화석 연대 측정이 더욱 정확해졌다.

이 덕분에 호모 에렉투스가 대략 160만~250만 년 전인 플라이스토세의 긴 간빙기 동안 번성했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었다.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화석은 약 160만 년 전의 것이다.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화석의 일부도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OH 9는 대략 120만 년 전의 것이다.

이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는 나머지 화석들은 유감스럽게도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몇 가지 방법으로 연대를 비교측정한 결과 자바의 상기란 및 모조케르토의 표본(특히 푸탕간 하상의 퇴적층에서 나온 것)과 중국의 란톈 원인[藍田猿人] 중 하나는 호모 에렉투스의 초기 형태임이 밝혀졌다. 반면에 알제리의 테르니피네, 중국의 저우커우뎬, 자바의 트리닐에서 발견된 화석 등은 가장 최근의 호모 에렉투스에 속한다. 160만 년 이전의 화석은 대부분 호모 하빌리스로 분류된다. 반면에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 가운데 일부를 보여주는 후기의 화석들은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로 이행해가는 과정의 화석 또는 호모 사피엔스로 간주된다.

따라서 어떤 인구집단이 호모 에렉투스에 속하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즉 호모 에렉투스와 다른 화석인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이 이행기 동안에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은 진화과정 속에서 어느덧 서서히 호모 에렉투스로 발전해왔으며, 호모 에렉투스 역시 현생인류가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간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의 신체구조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평균용적 1,000㎤ 이하)은 다른 인류의 두개골과 크게 다르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예를 들어, 현생 호모 사피엔스의 뇌용적은 1,450㎤이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의 뇌용적의 상부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기대되는 뇌용적의 하부와 중첩된다. 또한 작은 뇌용적 이외에도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에는 몇 가지 특징이 더 있다. 소수의 화석 표본에만 보존되어 있는 얼굴의 뼈는 무거우며, 아랫부분이 튀어나와 있다. 코벽을 이루는 뼈는 매우 얇고 이전의 사람속 종들이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것보다 더 뒤집어져 있으며, 코의 옆모습이 현대인의 코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개골은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위의 둥근 부분은 두꺼운 편이다. 안와(眼窩) 위로는 눈썹궁이 많이 튀어나와 있다(안와상융선). 이마는 납작하며, 눈썹궁 바로 뒤의 두개골의 앞부분은 옆으로 수축되어 있다. 이마뼈에서부터 중선(中線)을 따라 용골돌기가 뻗어 있으며, 유양돌기 부분은 매우 융기되어 있다.

넓은 두개골은 둥근 모양을 이루며, 후두부의 표면을 상하로 나누는 두꺼운 안와가 있다. 후두부 바로 뒤의 목 근육 부분은 호모 하빌리스나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크다. 이외에도 호모 에렉투스는 특히 턱 부분과 같은 얼굴 아랫부분이 특징적이다. 턱 자체는 매우 강인하지만 뺨의 발달은 미약하다. 치아는 대체로 호모 사피엔스의 것보다 큰 편이다. 호모 에렉투스 화석으로는 대퇴골 화석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대퇴골의 구조가 현대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직립자세를 취했던 것이 분명하다. 뼈의 구성은 매우 단단하며 이것은 다른 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실은 호모 에렉투스의 생활이 신체적인 강인함을 요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지뼈를 통해서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특히 대퇴골의 크기를 통해 이들의 신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리오코토메에서 발견된 KNM-WT 15000 화석을 정밀조사한 결과 이 뼈의 주인은 아직 완전히 성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 성인남자의 키에 근접하는 약 160㎝의 신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행동상의 추론

중국 저우커우뎬의 동굴에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사실이 호모 에렉투스가 영구적으로 동굴에서 생활했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인간행동, 문화적 진화). 그러나 이외에도 화석과 연관된 돌과 뼈(호모 에렉투스가 모아둔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그슬린 동물의 뼈, 씨앗들, 원시적인 화로와 숯 등)를 통해서 호모 에렉투스가 상당 기간 동안 이 지역의 동굴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테르니피네·올두바이 협곡과 함께 란톈·트리닐·상기란·모조케르토에서는 개방된 지역이나 개울의 자갈밭과 진흙, 강의 사암층, 역암층과 화산암, 호수의 바닥 등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호모 에렉투스가 하천의 기슭에 있는 개방된 야영지나 호수 주변에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베르테슈죌뢰슈에서 발견된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가 도나우 강 지류의 샘 근처 광물질이 포함된 진흙 땅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방된 지역에서는 수많은 석기와 가공을 거친 듯한 돌조각, 부분적으로 불에 탄 동물의 뼛조각(아마도 이 동물들은 식량으로 사냥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원시적인 화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저우커우뎬과 베르테슈죌뢰슈에서 발견된 화석은 중기 플라이스토세에 이미 인간이 을 능숙하게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저우커우뎬의 동굴(호모 에렉투스의 뼈가 들어 있던 곳) 옆에서는 이 동굴 자체보다 약간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석기제작장소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이 지역에서는 인류가 동굴 속에서 살기 시작하기 전부터 불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하는 데 성공하려면 불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이 그 선행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 동굴 거주만은 아닌 것 같다.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게 되자 인간은 더 추운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요소가 습기차고 때로는 아직도 빙하로 덮여 있는 선사시대의 유럽으로 인류가 이동하는 것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또 인류가 음식물을 불에 익혀 먹게 되면서 이빨이 하는 수고가 줄게 되었다. 즉 이는 불에 익힌 음식을 먹을 때는 날것을 먹을 때보다 음식을 자르고, 찢고, 잘게 부수는 데 힘이 덜 들게 되므로 큰 이빨의 이점이 적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크고 튼튼한 이빨을 가진 사람이 생존하는 데 유리한 진화상의 선택적 압력이 줄어들게 되면서 이빨이 작아지게 되었는데,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에렉투스 간의 차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이빨의 크기이다.

호모 에렉투스 문화의 다른 특징은 이들의 뼈와 함께 발견된 도구이다. 쪼개진 자갈로 만들어진 역기(礫器)가 저우커우뎬과 베르테슈죌뢰슈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찍개공작). 두 지역 모두 이른바 역기문화가 발달했던 곳이다.

아프리카 북서부의 테르니피네에서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석기와 연관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도구들은 초기 아슐리안 공작(工作)을 대표하는 양면 주먹도끼와 스크레이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유럽과 아프리카 각지에서 발견되는 위대한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복합체의 일부이다. 이러한 사실은 호모 에렉투스가 사냥을 했음을 말해준다. 호모 에렉투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호모 하빌리스보다 신체적(또한 지적) 능력과 도구 면에서 훨씬 더 우수했기 때문에 사냥을 비롯하여 식량을 획득하는 기술이 더 뛰어났을 것이다.

이들은 몸집이 큰 동물의 고기 이외에도 뱀, 새와 그 알, 메뚜기, 전갈, 지네, 거북이, 쥐를 비롯한 설치류, 고슴도치, 물고기, 갑각류 등을 식량으로 삼았다.

어린이들도 성인들과 함께 사냥에 참여했다. 두꺼운 잎과 과일·견과류·뿌리 등의 식물도 호모 에렉투스의 식량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가 잡식성(현재의 호모 사피엔스와 마찬가지임)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약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는 진화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큰 유연성과 적응성·생존력을 가졌을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의 문화에 어떤 의례적인 요소가 있었는지의 여부도 관심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가 시체를 매장했다는 증거는 없다. 사실 완전한 형태의 매장·무덤·매장물·오커(호모 에렉투스 이후의 인류가 뼈를 색칠하는 데 사용했던 물질) 등이 발견된 적은 없다.

진화론적 의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일부 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호모 사피엔스의 직계조상일 것이라는 견해에 반대한다.

L. S. B. 리키는 특히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은 더 발전된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그 연대가 중복되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 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리키의 주장은 주로 단층분석과 연대학에 기초를 둔 것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화석에서 발견되는 해부학적인 특징에 대한 분석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결과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기 호모 에렉투스와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중첩에 대한 단층론적인 논의는 더이상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며, 형태학적인 차이에 근거하여 중기 및 후기 플라이스토세에 살던 사람속 개체군들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가설을 거부하기도 매우 어렵다. 그대신에 진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크기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신체크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합리적인 조상-후손의 순서를 정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도 이 배열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호모 에렉투스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초기 호모 사피엔스형으로 진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이것이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연구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차지하며, 구세계 전역에서 발견된 인류의 화석이 자세히 조사된 뒤에도 여전히 미해결로 남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인구집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뒤에 일어난 특정 지역의 빠른 진화라는 시나리오에 반대되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의 점진적인 변화라는 모델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존에 고생물학자들은 전통적으로 1가지 종은 같은 계통을 유지하면서 다음 종으로 점진적인 진화를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연속적인 진화과정에 있는 종은 연대학적 종으로 불린다. 객관적인 해부학적·기능적 기준에 의해 연대학적 종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경계를 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한 순간에 추측으로 '선을 긋는' 일이 남는다.

따라서 고생물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의 마지막 생존자와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 간에는 최종 분석 단계에서 어느 정도 임의로 그 경계를 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관계에 대한 점진주의적인 견해는 화석 기록에 대한 1가지 해석이 될 수 있을 뿐 다른 식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계통 점진진화).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종이란 한 계통 안에서 임의로 규정된 단편이 아니라 매우 영속적인 존재이다.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종은 오랜 기간 동안 진화적인 정체(즉 형태학적인 변화가 아주 적거나 거의 없는 것)를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 종이 진화하는 과정중에는 지질학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전세계적인 수준에서보다는 제한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신속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관계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지는 불확실하다. 즉 호모 사피엔스가 더 원시적인 형태의 호모 에렉투스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했는지, 또는 중기 홍적세말에 신속하고 짧은 진화가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계단식 진화).

호모 사피엔스

인류의 머리뼈
인류의 머리뼈
기원과 초기의 진화

현생인류와 동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플라이스토세였다.

대략 1만~160만 년 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지구에서는 빙하가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빙하작용). 이러한 빙하의 순환으로 해수면의 높이가 올라갔기 때문에, 강의 계곡이 드러나고 육교(陸橋)가 나타났다. 그결과 인간의 이주가 일어나고 상이한 인구집단간의 유전자 확산과 뒤섞임이 있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간빙기 사이에는 이러한 경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인구집단간의 고립이 생기게 되었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와 관련된 화석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선사시대에 살았던 이 인류는 평균 1,300㎤의 뇌용적, 거의 수직의 이마 모양, 목근육이 붙는 면적이 비교적 작은 둥근 후두부, 작은 크기의 턱과 이빨, 주걱 모양의 작은 송곳니, 튀어 나온 턱끝, 완전한 직립자세와 보행자세에 적응한 사지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유형에 일치하는 화석은 해부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렉투스에서 진화해나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가 민꼬리원숭이를 닮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하는 과정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몇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점진적인 뇌용적의 변화, 두개골이 더욱 둥글어지는 점, 위·아래 과 이빨을 포함한 음식물을 씹는 기능을 하는 부분의 퇴화 등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두개골의 모양에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머리 모양이 더욱 둥글어진 반면에 툭 튀어나와 있던 '입 부분'은 안으로 들어가서 얼굴이 전체적으로 곧게 변했다.

동시에 전체적인 두개골은 더 가벼워졌지만 구조적으로는 더 섬세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빨이 작아지면서 코와 턱끝이 얼굴에서 두드러져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턱끝은 호모 사피엔스의 턱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치골 결합 부위를 외부에서 지지해준다. 전체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이빨의 수는 많아졌지만 셋째 큰어금니를 비롯한 이빨의 크기는 모두 작아지고 이빨의 간격도 좁아졌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하게 측절치(側切齒 : 앞니의 양옆에 있는 이빨로 음식물을 자르는 데 사용됨)가 없어졌다. 그밖에 호모 사피엔스의 치열은 호모 에렉투스의 치열이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이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에서는 잘 드러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이빨에는 이빨의 표면에 주름을 만드는 2차 에나멜과 치수(齒髓)가 적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몸통과 사지의 형태는 이들이 완전한 직립 자세와 이족 보행에 적응했음을 보여준다(골격). 이러한 보행 능력은 적어도 400만 년에 걸친 인류의 진화과정을 압축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진화과정의 일부를 사람속의 초기 구성원들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통해서 볼 수 있다(스트라이드).

호모 사피엔스는 중기 플라이스토세 말부터 후기 플라이스토세(약 1만 5,000~20만 년 전)에 걸쳐 분포했던 것이 확실하다(화석의 기록). 발견되는 화석의 양은 이 시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 늘어난다.

화석연대측정법의 발달로 그전에는 측정이 불가능하던 화석의 연대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게 되었으며, 진화과정에 대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흔히 네안데르탈인과 원시인(현생인류가 속하는 Homo sapiens sapiens의 구성원들)으로 나누어졌던 많은 표본들이 남아 있다.

1921년에 노던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 카브웨)에 있는 브로컨힐에서 발견된 거의 완벽한 상태의 두개골과 여러 개의 후두골은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 화석 중 하나이다. 무거운 두개골은 네안데르탈인과 비슷했지만 뇌용적과 사지뼈는 현생인류의 것과 거의 같았다. 이 화석은 약 18만~26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고, 오랫동안 '로디지아인(人)'으로 불렸으나 일반적으로 호모 사피엔스 로데시엔시스로 분류된다.

카브웨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유형의 화석이 193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북쪽에 있는 호프필드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화석은 약 4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67년 에티오피아 남부에 있는 오모 강 유역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오모 Ⅰ·Ⅱ로 알려진 2곳의 유적지에서 2개의 두개골과 많은 사지뼈를 찾아냈다(오모화석군). 오모 Ⅱ에서 나온 두개골은 아주 완벽한 형태로서 아프리카의 초기 호모 사피엔스로 간주된다.

오모 Ⅰ의 두개골은 사지뼈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뒷모습을 보면 이 2개의 두개골에는 서로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오모 Ⅰ의 두개골은 전체적으로 훨씬 더 현대적이지만, 그 사지뼈는 억세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호모 사피엔스의 골격과 거의 유사하다. 오모 강 유역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화석의 가장 큰 특징은 약 13만 년 전의 같은 시기에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두 화석인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모 Ⅱ의 두개골은 사람속의 초기 형태에 비견될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오모 Ⅰ 화석은 특히 후두골과 사지뼈에서 현대의 호모 사피엔스의 형태를 예견하고 있다. 1976년에 탄자니아의 라에톨릴에서 화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는 약 12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석(LH 18)은 두개골 대부분과 얼굴뼈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명히 이 화석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을 갖고 있었으나 그 형태는 현대적이었다. 이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과는 크게 달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콰줄루라는 블랙 스테이트와 스와질란드 사이에 있는 보더 동굴 유적지에서도 인간의 화석과 인공물이 발견되었다(보더 동굴 원인). 이곳에서 발견된 3개의 화석은 각각 9만~11만 년 전의 것이다.

이 화석들은 두개골 파편(보더 동굴 1), 턱뼈(보더 동굴 2), 유아의 골격(보더 동굴 3) 등이었다. 이중 두개골은 그 특징이 현생인류의 해부학적인 특징과 유사했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었다.

이스라엘 나자렛 부근의 동굴 유적지인 제벨카프제에서도 여러 해 동안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석기 및 동물뼈와 함께 10여 개체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약 9만~11만 5,000년 전의 것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화석들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복원된 두개골은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호모 사피엔스와는 분명히 유사한 점을 보여주었다.

화석의 연대측정이 정확하다면 이 화석은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동의 초기 호모 사피엔스를 대표하는 것이다. 1960년 그리스의 한 동굴에서 많은 포유류의 뼈와 함께 인류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페트랄로나 두개골). 그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40만 년 전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화석은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화석에 속한다. 그러나 이 두개골과 다른 화석 간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개골은 호모 에렉투스보다 더 진화했으나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을 일부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사피엔스와도 다르다.

프랑스의 아라고 동굴에서도 석기와 함께 포유동물의 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이 유적지의 연대는 20만 년 전으로 추정되었지만 그뒤에 40만 년 전으로 정정되었다. 어떤 경우에나 이 정도의 연대라면 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변형된 얼굴뼈와 원개(圓蓋)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두개골은 어떤 면에서는 호모 에렉투스와, 어떤 면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과 유사했다. 이때문에 '프레네안데르탈인'(pre-Neanderthal)으로 규정되었으나, 이 화석은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만이 아니라 추운 기후에 적응한 원시적인 호모 사피엔스와 관련된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보다 더 유명한 호모 사피엔스 화석은 영국 노스켄트 주에 있는 스완즈컴에서 발견된 화석이다. 먼저 두개골 가운데 2부분을 찾아냈고, 20년 후에 이것들과 함께 후두골을 구성하는 다른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3개의 뼈는 모두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젊은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스완즈컴인은 꽤 현대적인 인류로 그 연대는 20만~4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다른 화석인류와 함께 '매개자 네안데르탈로이드'(Neanderthaloid Intermediate) 집단에 속한다.

이 화석 역시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모자이크적 진화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스완즈컴인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화석인류가 발견되었다(슈타인하임두개골). 이 화석은 프랑스의 아라고나 영국의 스완즈컴에서 발견된 화석보다 형태는 더 완벽했지만 약간 변형되어 있었고, 젊은 남자의 오른쪽 얼굴뼈와 두개골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개저(頭蓋底)는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작은어금니와 함께 큰어금니를 포함한 일부 이빨과 입천장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었다. 특히 이빨은 호모 사피엔스의 초기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큰어금니는 앞에서 뒤로 갈수록 작아지며 셋째 큰어금니는 나머지 2개의 큰어금니보다 훨씬 더 작다.

역시 이 두개골에도 진화과정상의 원시적인 특징과 앞선 특징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초기 호모 사피엔스에는 고려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다(인간행동, 문화적 진화). 석기나 돌구조물, 화석화된 동물의 뼈와 이빨 등이 많이 발견되는 대신에, 나무도구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들은 나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의 주거지는 인간과 이들의 사냥감이 되었던 동물들에게 모두 필요한 수원지 근처에 있었다(집). 또한 도구를 만드는 데 쓰이는 돌을 구하는 장소가 주거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원시인들은 주거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빙하기에는 동굴이나 다른 주거지를 찾아서 이동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간빙기가 온 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노천에서 임시로 쓸 수 있는 바람막이나 가죽 천막집만으로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초기 플라이스토세(약 100만 년 전)에 최초의 석기문화는 각각 주먹도끼와 박편도구를 중심으로 하는 2개의 문화로 나누어진 것 같다. 후기에 접어들면 이 2가지 문화유형 속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출현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도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도구들은 더 특별한 목적에 사용되었던 것 같다.

도구가 발견되는 유적지의 분포를 보면 일반적인 특징이 몇 가지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주먹도끼 같은 도구는 아프리카·서유럽·아라비아·인도 등에서만 발견되는데 반해, 주먹도끼 문화와 중복되어 나타나는 박편도구 문화는 서유럽만이 아니라 발칸 반도를 지나 서남아시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역기에서 주먹도끼가 발전되어 나온 것이 확실한데, 이 도구들은 나중에 아슐리안 공작과 같은 주요한 주먹도끼 문화로 발전했다.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베이징 원인의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대규모 역기문화에 대응하여 박편문화가 발생하기도 했다. 초기의 주요 박편도구문화는 유럽의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된 클락토니안 공작이다.

이 문화에서는 역기들이 부싯돌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후기의 발전된 클락토니안 문화는 타야시안 공작으로 불린다. 박편문화와 주먹도끼문화는 여기서 더 발전하여 무스테리안기(期)로 접어들며, 그뒤에는 차례로 르발루아·솔루트레안 문화 등으로 발전했다. 위의 후기 문화는 모두 후기 플라이스토세(약 10만 년 전)에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와 깊은 관계가 있다.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s/Neandertals)은 후기 플라이스토세에 유럽 대부분의 지역과 지중해 연안에 살던 원시인류를 말한다.

이들의 화석은 중동·북아프리카·아시아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이름은 이 화석이 1856년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네안더 계곡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데 따른다. 그러나 이것이 원시인류의 화석인지 질병으로 변형된 현대인의 뼈인지를 놓고 곧바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네안데르탈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초기의 네안데르탈인은 약 10만~15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화석은 그 연대가 이즈음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특징은 연대학적으로 네안데르탈인보다 앞섰던 호모 에렉투스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와 더 유사하다.

네안데르탈인은 약 7만 5,000~11만 5,000년 전인 리스-뷔름기에 유럽에서 살았던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분명한 턱뼈·이빨·두개골이 독일·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네안데르탈인의 외관이나 습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키가 작고 건장하며 힘이 세었다(골격). 이들의 두개골은 길고 옆으로 넓은 대신에 뒷부분이 납작했다. 또 무거운 이마뼈, 큰 이빨과 작은 광대뼈를 가지고 있었다. 가슴은 넓은 편이었지만, 사지는 상대적으로 짧고 무거웠다. 넓적다리뼈와 팔뚝뼈는 약간 휘었으며, 손과 발은 큰 편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두 발로 걸어 다녔지만 그 모양이 현대인과는 달랐다.

네안데르탈인은 노천에 주거지를 정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동굴에서 살았다.

동굴의 입구는 돌을 쌓아 작게 만들었다. 이들은 불을 사용했으며, 중간 크기의 동물(예를 들면 염소나 작은 사슴)을 사냥했고, 큰 짐승들이 사냥한 동물의 고기를 먹기도 했다. 또 다양한 석기와 나무로 된 창을 만들어 사용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시체를 매장했으며 병에 걸리거나 다친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살펴주었다. 때때로 인간의 유골과 함께 발견되는 동물의 뼈가 의례적으로 다루어진 점을 보면 이들에게는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가 있었던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의 분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 이들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라는 독립적인 종으로 분류되었는데, 나중에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亞種)인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후에 원래의 분류가 옳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은 일부 지역에서는 현생인류에 흡수되기도 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완전히 멸종하고 말았다.

크로마뇽인(Cro-Magnons)은 해부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는 후기 구석기(3만 5,000~1만 년 전)의 인류이다. 크로마뇽인의 화석은 1868년에 남프랑스의 도르도뉴에 있는 크로마뇽의 한 동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동굴을 조사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라르테였고, 5개 지층 중 제일 위의 지층에서 발견된 1만~3만 5,000년 전의 화석인에 크로마뇽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크로마뇽인은 건장하고 힘이 세며, 키는 166~171㎝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골격은 일반적으로 단단하고 무겁다. 이마는 곧고 바르며 이마뼈는 얇은 편이다. 두개골이 길고 좁은 대신에 얼굴은 짧고 넓적하다. 뇌용적은 약 1,600㎤으로서 현대인의 평균 용적보다 더 크다.

크로마뇽인은 판단의 기준이 될 만한 화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상의 신체적인 특징을 놓고 어떤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화석의 기록). 다만 이들은 다른 초기 인류보다 키가 컸을 것으로 여겨지며, 근육도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크로마뇽인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블레이드, 스크레이퍼, 엔드 스크레이퍼, 발화구(發火具)로 쓰인 도구, 정교한 골각기 등 다양한 도구들로 대표되는 오리나시안 문화와 연관된다.

이들은 또한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긁개도 만들었던 것 같다. 일부 크로마뇽인은 유배석도(有背石刀)를 만들었던 그라베티안(古페리고르디안) 공작과도 관련이 있다. 암벽에 기대어 지은 달개집이나 완전히 돌로 지은 원시적인 형태의 오두막도 발견되지만, 이들의 거주지는 대부분이 돌출부가 있는 동굴이나 얕은 동굴이었다. 암굴 주거지는 1년 내내 사용되었다. 크로마뇽인은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야 할 때나 환경의 변화로 인해 이동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곳에 정착해 살았다.

네안데르탈인과 마찬가지로 크로마뇽인도 시체를 매장했다.

최초로 예술을 시작한 인류는 바로 이들이었다. 크로마뇽인들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모습을 새기거나 조각상을 만들었다. 이들의 예술품에 나타나는 인간이 주로 가슴이 크고 엉덩이가 넓은, 임신한 듯이 보이는 여자인 것으로 보아 이 모델들은 모두 다산(多産)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는 크로마뇽인의 동굴에서 발견된 동물의 그림은 매우 아름답다(동굴화). 이 그림들은 크로마뇽인들에게 주술적·제의적인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높은 예술적 수준으로 볼 때 크로마뇽인은 원시적인 아마추어가 아니라 다양한 예술적 매개와 형식을 실험했던 것이 분명하다. 정교하게 장식된 도구와 무기를 보면 이들이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목적에 예술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크로마뇽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했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들은 나중에 유럽에서 살게 된 어떤 현생인류 집단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중석기 시대(BC 8000~5000년 전)와 신석기 시대(BC 5000~2000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특징을 일부 가지고 있는 원시인의 화석(흔히 크로마노이드로 불림)이 발견되었다.

아시아와 오스트랄라시아의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주로 발견되는 화석인류이지만, 동아시아와 오스트랄라시아에서도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 화석이 다수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이들은 호모 에렉투스에 속하는 지역집단의 후손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후에 그 지역에 살게 된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여긴다. 아시아의 초기 호모 사피엔스 화석은 중국에서만 발견되었다.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진뉴 산[金牛山]에서 발견된 꽤 완벽한 상태의 골격과, 산시 성[陝西省] 다리[大荔]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중기 홍적세말의 것이다.

두 화석 가운데 더 오래된 다리의 두개골은 30세가 안 되는 젊은 남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두개골과 유사한 특성들이 진뉴 산에서 발견된 여자의 두개골(몸체의 골격도 함께 발견됨)에서도 나타난다. 이 화석들은 약 10만~20만 년 전의 것이다. 광둥 성[廣東省]의 마바[馬埧] 유적지에서는 여자의 두개골 파편이, 다른 몇 곳의 유적지에서는 이빨 화석이 나왔다.

후기 플라이스토세 초의 호모 사피엔스 화석들은 이보다 더 파편화되어 있으며, 중기 플라이스토세 화석과 가장 큰 관련이 있는 화석은 저우커우뎬, 류장 강[柳江]과 라이빈[來賓 : 광시[廣西]), 쯔양[資陽 : 쓰촨[四川]) 등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자바 동부의 응간동에서 발견된 흔히 솔로인으로 불리는 초기 호모 사피엔스 화석은 자바 중부의 삼붕마찬 유적지에서 발견된 두개골과 같은 이행기 표본 등을 통해 훨씬 오래된 인도네시아의 호모 에렉투스 조상과 분명하게 연결된다.

오스트랄라시아에서 발견된 화석들의 상대적인 순서는 분명히 밝혀졌지만 각 화석의 정확한 연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트리닐의 솔로 강 유역에서 발견된 삼붕마찬 두개골은 중기 플라이스토세의 것이다. 나중에 응간동에서 중기 또는 후기 플라이스토세 초의 정강이뼈와 얼굴 부분이 없는 두개골이 발견되었고, 그 근처에서 다른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솔로인의 유골이 의도적으로 매장된 것도 아니고 다른 고고학적인 관련성도 없지만 이들의 행동에 관해서 얼마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두개골에 난 상처를 치료한 흔적이 있는데, 남자들의 두개골보다 여자들의 두개골에서 상처가 더 많이 발견되었다. 얼굴이 없는 두개골이 한데 모아져 있는 것을 놓고 이것들이 그릇으로 쓰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의 특정 부위가 제한된 수효로 발견되는 것이 죽은 자를 제의적으로 취급했기 때문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인도네시아의 자바인이 어디에선가 큰 바다를 건너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인구집단이 된 현생 호모 사피엔스와 관련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연관성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의 윌런드라 호(湖) 주변에서 발견된 3만 년 이상 된 두개골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이 남자의 화석은 두개골의 크기와 각 부위의 비율 면에서 응간동의 남자 화석과 유사하다.

아프리카의 호모 사피엔스

더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고 연대 측정법이 더욱 정교해짐에 따라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발견된 40만 년 이상 된 화석들의 연대를 확정짓는 일이 가능해졌다.

연대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초기 원시 호모 사피엔스, 후기 원시 호모 사피엔스, 현생(해부학상) 호모 사피엔스 등 모두 3가지로 분류된다. 첫번째 유형은 약 20만~40만 년 전의 인류로서 카브웨인과 호프필드의 화석으로 대표된다. 약 10만~20만 년 전의 인류인 2번째 유형은 오모 Ⅱ와 LH 18 두개골로 대표된다. 해부학상 현대적인 인류로 진화하는 과정은 오모 Ⅰ과 보더 동굴 표본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다.

북아프리카의 화석 기록은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하라 사막 이남의 화석과 이 지역의 화석 간의 연관성을 명확히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호모 사피엔스의 중심지와 현생인류의 기원지로는 아프리카가 꼽힌다.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나타나는 원시인류와 현생인류 간의 화석상의 불연속성 및 나중에 이 지역들에서 현생인류가 출현했던 사실은 아프리카가 현생인류의 유일한 발상지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과 유럽에서는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중에 이들 집단간에 뒤섞임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중동에서의 화석기록은 분명하지 않으나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현생인류가 이동해갔을 수도 있다. 현생인류가 지구 곳곳으로 퍼져갈 때 어떤 지역에 국한된 원시개체군과 퍼져나가는 현생개체군 사이에 일어났던 유전자 확산의 정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분자생물학적인 연구 결과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