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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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림살이의 본거지로 삼았던 유적.

집자리·주거지라고도 한다. 인류역사의 초기 단계인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자연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집터로 많이 이용했다. 동굴은 비바람과 추위를 막아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줄 뿐 아니라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막는 데도 좋았으므로 전망 좋고 습기가 알맞은 동굴이 집터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충청북도 일대와 평양특별시 부근의 석회암지대에 있는 자연동굴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살림살이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뿐 아니라 들판에 막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강가의 양지바른 곳이나 언덕에 기대어 나뭇가지를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풀이나 짐승가죽을 이어 집을 짓고 살았다. 집터 안팎에는 화덕을 만들어 음식조리와 난방에 필요한 열을 얻기도 했다.

금강가의 공주 석장리유적에서는 2만~3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집터 4기가 함께 발견돼 후기 구석기시대의 가족단위 생활상을 볼 수 있게 한다. 남한강가의 제천 창내유적과 화순 대전유적에서도 구석기시대 막집터가 나왔다. 구석기시대의 막집터는 지상에 바로 지은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한 곳에 살았다기보다는 일시주거용 집터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는강가와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던 경우가 많다. 구석기시대에 비해 날씨가 따뜻해진 것도 동굴생활로부터 벗어나게 된 원인의 하나이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사냥·채집 경제로부터 차차 농경과 집짐승기르기와 같은 생산경제로 들어가게 되므로 한 곳에 붙박이 살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집터의 구조를 보아도 훨씬 안정된 움집형태로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움집은 평면이 둥근꼴로 된 것이 많고 집터 안에는 화덕시설을 갖추고 있다. 서울 암사동을 비롯해 봉산 지탑리, 선봉 서포항, 양양 오산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청동기시대에도 움집전통은 계속되며 신석기시대에 비해 규모가 커지고 집안 공간에서 기능에 따른 공간분할이 이루어져 벽장이나 창고시설을 갖춘 곳도 있고 집과 집 사이를 통로로 연결하거나 집터 밖에 따로 저장시설을 갖추어 놓기도 했다. 청동기시대에는 한 곳에 수십 기의 집터가 모여 마을을 이룬 곳도 있고 마을 둘레에 방어시설을 갖춘 곳도 나타난다. 이는 농업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사회규모가 커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집터가 드러난 주요유적으로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 송림 석탄리, 무산 범의구석, 회령 오동, 울주 검단리 유적 등을 들 수 있고, 송국리와 검단리 유적에서는 방어시설용 목책을 설치한 것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