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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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비유설화

• 주제 : 비유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불본행집경

불타는 이와 같이 석가족의 뛰어만 황태자로 만민의 축복 속에 천인(天人)의 경하를 받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비록 생후 7일 만에 생모(生母)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여의고 마음의 고독은 떠나지 못하였으나, 이모 마하파자파티부인의 애육(愛育)으로 나이 19세에는 모든 문예를 통달하고 절세미인 야수다라와 결혼하였다.
봄꽃과 같은 자태, 가을 달과 같은 단장으로 3천 채녀를 무색케한 야수다라는 마음이 어질고 착하여 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부왕은 이들 두 부부를 위하여 시원한 바람, 밖은 빛이 통하는 전원 위에 아름다운 궁전을 짓고 현세의 부귀를 마음껏 맛보게 하였다. 아름다운 궁전, 위엄 충천한 성곽은 마치 높은 탑이 하늘 위에 솟은 것 같고 가을 구름이 창공을 나는 것 같았다. 반월석교로 때 아닌 무지개를 짓고 봄 안개처럼 나부끼는 꽃향기는 계절의 변화를 기다리지 않고도 마음껏 호흡할 수 있었다.

수십 리 길에 달하는 넓은 궁정위에는 차고 더운 물이 4시를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왔고 기묘한 새, 영묘한 새들이 수천 채녀와 함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런 속에서 태자는 인생의 수심을 가득히 잊어버리고 현세의 복락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는 입과 몸, 놀이와 빛으로 온갖 미의 향락을 맛보면서도 마음만은 또렷 또렷이 편안치 못한 바가 있었다.
「과연 인생은 이런 것인가? 달은 찼다가 기울고 4시는 때를 따라 변천한다. 청춘의 호락, 이것도 생각하면 풀잎의 이슬이요, 저녁 하늘의 연기와 같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거냐. 이승에는 한없는 인간이 있고, 한없는 계급이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가는 곳이 어디메냐?」
깊은 밤, 은은한 달빛이 꽃 같은 궁중에 소리 없이 흘러내리면 태자는 말없이 홀로 후원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하였다.
「5官은 필경 유혹이다. 그것은 끝없고도 강한 자극을 싫어하지 않고, 마음은 일시의 호방에 취해도 필경은 끝까지 가지 않고 한층 더 좋은 것을 구해 권태를 느끼게 된다. 오직 환락자를 위협하는 것은 인생무상의 섬광이다.
아마 참으로 환락을 경험하고 또 거기에 깊은 집착을 느낀 자 아니면 이 무상의 일념에 위협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유한 자에게 반듯이 빼앗기는 쓰라림이 있는 것같이, 향락이 무상감을 낳은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았을 땐 왕자 자신도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부왕은 이것을 모르고 더욱 더 미녀들을 모아 향락의 자료를 더해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일은 이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는 전기불을 꺼지게 하려고 먹구름을 모으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이 모이면 모일수록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빛은 더욱 빛나고 영롱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태자는 거의 쇠가 자석에 끌려드는 것 같이 진실한 것에 대한 눈이 떠지고 만 것이다.
이 빛이 한번 인간의 가슴에 번쩍이자 인간의 모든 허위의 옷은 벗겨져 한천(寒天)에 떠 있는 나목같이 전율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자는 사람을 부르고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 말하였다.
여기에 4문유관이 시작 된다
『그 말이 곧 부궁에 알려지자. 부왕은 군신에게 명하여 칠보영락으로 아름다운 수레를 장식했고 성문을 정돈하고 또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여 모든 부정이 나타나지 못하게 한 뒤 태자를 거동케 하였다.
태자의 출유(出遊)는 동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행하는 자는 모두 소년 홍안의 남녀 그 기라(綺羅)는 밝은 하늘의 별빛처럼 빛났고 그 찬란함은 봄날의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태자의 거마가 이르는 곳마다 향기로운 꽃잎이 길거리를 덮고 시민들이 거리 거리에 나타나 환호성을 울렸다.
이렇듯 아름다운 행진이 무르익어 갈 무렵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는 희고 눈은 어둡고, 등은 굽고, 몸은 떤다.
겨우 한가지의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주적주적 걷고 있다.
「저는 누구냐?」
「늙은 사람입니다.」
「늙는 것은 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인가?」
「아,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 사람도 옛날에는 홍안의 청춘이었습니다.」
태자는 이 말을 들고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숙이고 깊은 사념에 잠기었다.
그러고 어자에게 일렀다.
「생각 생각에 노쇠의 적이 따라온다. 어찌 시가원림, 그 무엇이 즐거우랴. 이대로 돌아가자.」
부왕은 태자를 위하여 베풀어진 외유회가 도리어 태자를 슬프게 해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명령하여 남문을 출유케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자를 만났다.
몸은 시들고 배는 커서 숨을 허덕허덕하면서도 사람의 동정만을 구하는 정경, 실로 침통한 바가 있었다. 「저는 누구냐?」
「병자올시다. 四대(지수화풍.地水火風)가 허물어져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병이 난 것입니다.」
「다만 저 만 그런 가? 다른 사람도 그러 한가?」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찌 만년 천자가 있겠습니까?」
「아,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구나. 병환이 오는 그 기간을 미리 알지 못하는구나. 오늘의 아름다움이 내일에 아픈 자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증할 것인가? 안연히 세상 영화를 추구하고 꽃 속의 유희로 헛세월을 보내다니 - 어찌 이다지도 마음씨가 부족할까?」

태자는 거동을 몰아 다시 본궁으로 돌아왔다. 부왕은 이 말을 듣고 종자와 노상감독을 불러 호되게 나무라고 다시 진보를 거두고 미희를 모아 백방으로 태자의 마음을 달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홍안을 보면 백발을 생각하고 미태(媚態)를 보면 곧 병자를 연상하여 소리와 색이 귀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아니했다. 동남 두 문에 실패한 대왕은 다시 서문을 정비하고 출유하도록 명했다. 물론 거리는 엄정(嚴淨)히 꾸며지고 종자들은 단호히 시위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뜻밖에 멀러서 상여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번화는 화려한데 뒤따르는 사람들이 다 울색을 하고 길이 바쁘게 걸어가니 이 무슨 가마인가?」
「예. 저것은 가마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싣고 가는 상여입니다.」
종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당황한 듯, 대답했다.
「죽은 사람? 아, 진계(塵界)의 사람들이여, 왜 이다지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가? 사람이 어디에 죽음이 없을 것인가?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생을 가지고도 왜 이다지도 죽음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단 말인가. 아, 위태롭다. 인생의 무상이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구나. 어서 돌아가자. 가련한 종자들아.」

그러나 종자들은 부왕의 비책이 무서워 태자의 명령을 거스리고 가마를 몰아 목적지인 원림의 별장에 이르렀다. 대신 우다이가 말했다.
「사람은 득의의 성시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때에 향락하지 못하면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재색을 함께 갖춘 태자가 성색의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한다면 인생 일대에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리와 색의 아름다움은 대개 자연에서 우러나온다고 하거늘 태자는 어찌하여 그 근심스러운 생을 버리고 이 여러 사람과 같이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구구한 형체의 욕, 그것이 어제 대인의 성도에 장애가 되겠습니까?」

태자는 도리어 빙그레 웃으며 우다이에게 충고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가상하다. 그러나 내 정성껏 그대에게 고하노라. 세상 일체의 쾌락은 필경은 무상한 모양뿐이다. 만일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이 홍안 청춘으로부터 영원히 이탈되어 있다면 나도 여러분과 같이 즐겨 놀리라- 아, 세계는 필경 괴로움의 무덤일 뿐. 하나도 탐착할 것이 없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나는 이것을 생각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무슨 틈이 있어 5욕에 집착해서 이 무상의 쾌락을 즐겨하겠는가?」

말과 말은 통절을 다해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이에 우다이의 교언(巧言)도 대답할 바를 모르고 물러갔다. 이튿날 태자는 다시 부왕의 주선으로 북문에 출유했다.
그런데 길가에서 흙 갈색 옷을 입고, 머리를 깎고 석장을 손에 든 위의당당한 수행자를 보았다.
「저는 누구냐 ?」
「출가사문입니다.」
태자는 차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출가의 행은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벗어나 영원한 해탈의 자유를 얻으며, 세간의 염애(染愛)를 버리고 정법에 의해 도를 닦고 자비로써 일체의 생명을 구제합니다.」
태자는 사문의 말을 듣고 공경히 예배한 다음,
「인간의 어떤 것이 이 사문의 행보다 뛰어난 것이 있으랴!」
하고, 그날은 기분 좋게 원림에 들어가 유쾌히 놀았다. <佛本行集經 卷十四>

이것이 저 유명한 석가세존의 4문유관이다. 석가가 꼭 이와 같이 네 문을 순서적으로 출유(出遊)하여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들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참으로 인간본연의 운명에 잘 비유된 것이고 그 운명의 표반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고자 하는 한 구도자의 심적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불타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회피할 수 없는 운명과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내적 성실과 진실성의 문제와 마주 섬으로써 그와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의 길을 트고, 예수가 인간의 죄악성의 문제와 철저히 마주 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절충하듯이 불타는 생과 사의 문제에 철저히 도전하여 일체의 대립과 모순 갈등을 용해하는 열반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가 보여준 4문유관은 인간고의 극치임과 동시에 또 다른 해탈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성도 후 인간 고통의 문제를 이렇게 관조하였다.
「슬픔과 고통에 가득 찬 노사는 무엇을 인연으로 하여 생기는가? 그것은 생이다. 생은 유가 있으므로 생기고 유는 취(取)를 인연으로 하여 생긴다. 취는 애를 반연하고 애는 수를 반연하며 수는 촉(觸), 촉은 6입 (六入), 6입은 명색 (名色), 명색은 식(識), 식은 행(行)을 반연하여 각각 생기고 또 행은 무명(無明)을 반연하여 생긴다.
그러므로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행이 있으면 식이 있어 명색, 6입, 촉, 수, 애, 취유, 생, 노사, 우비고뇌가 있나니, 슬픔과 고통의 노사를 멸하려면 생(生)을 멸해야하고, 생을 멸하려면 유, 취, 애, 수, 촉을 반대로 육입, 명색, 식, 행, 무명을 멸하여 슬픔과 고통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가세존은 그 무서운 근본 무명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길을 「바른 견해」에 두고 있다. 「바른 견해(正見)」는 바른 생각(正恩)을 낳고, 바른 말(正語), 바른 행(正業)을 낳아 바른 생명을 유지해 가고(正命), 바른 의지(正念)를 자아내어 바른 마음을 잡기(正定)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만 간주하여 어느 누구 하나 의심 하려 하지 않는 아니, 설사 의심을 한다 해도 일종의 사변으로 체념 해버리는- 그러한 문제(生死)에 직면하여 불타는 이와 같이 자기 존재의 내면을 자각하고 일체 존재의 고근(苦根)을 뿌리채 뽑아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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