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문화

야요이문화

[ 彌生文化 ]

야요이시대(彌生時代)는 1848년 도쿄군(東京都) 야요이죠(彌生町 : 現 동경대학 후문)에서 발견된 토기를 ‘야요이식토기’라고 명명한 것에 유래한다. 이 시대에는 일본열도에서 농경이 정착·확대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되고 계층 혹은 계급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일본열도 각 지역이 정치적으로 통합된다. 또 청동기(靑銅器)와 철기(鐵器)라는 새로운 금속제 도구가 제작·사용되고, 대대적이고도 항시적으로 한반도 및 중국대륙과의 교섭이 행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야요이시대’는 단순히 ‘야요이식토기’가 사용된 시대가 아니라 벼를 위주로 한 곡물생산에 의해서 초기 농경사회가 형성·발전된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야요이문화에 대한 인식은 연구가 진행될수록 더욱 복잡해져간다고 말할 수 있는데, 야요이문화의 정치적 성장의 고도성을 강조하거나 야요이시대의 개시연대가 AMS법에 의한 교정연대로 기원전 800년 경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경향이다. 서일본 각지의 거점적인 환호(環濠)취락에 인구가 많고, 수장(首長)의 거처와 대규모 제의시설(祭儀施設)이 정비되는 사실을 토대로 야요이문화의 정치적 성장의 고도성이 주장된다. 이러한 주장은 또한 농업 이외에 생업과 청동기·철기 생산 등 야금(冶金)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며, 수장이 관리하는 사회적인 분업이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야요이시대 취락이 이미 도시적인 기능을 가졌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야요이시대의 시작은 채집경제사회에서 생산경제사회로 변화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로 인해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조직이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야요이시대는 농업기술을 포함한 한반도 민무늬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의 수용 정도, 생태환경과 토지 조건의 차이 등으로 인해 죠몬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경제적·정치적인 지역차가 현저하게 나타난 시대이기도 하다.

야요이문화를 결정짓는 논농사〔水田稻作〕는 죠몬시대 식물재배의 경제체계 범위 내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었다. 농업형태는 논농사와 밭농사가 혼합된 나바다케(菜畑) 방식과 논농사에 중점을 둔 이다즈케(板付) 방식이 존재하는데, 특히 후자는 죠몬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농형태로서, 그 변화는 획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생활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만큼 생산성이 이념적으로 보장되었던 까닭이다. 도작농경은 생산성이 높고 수확의 안정성이 유망하며 저장하기 쉽다는 점에서 선택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죠몬시대 후기와 만기에 악화된 기후조건과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거주지역에서의 효율적인 자원확보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것은 기온저하라는 기후변화가 생산성을 저하시켰고, 조엽수림 확대에 따른 자연환경의 변화는 죠몬문화의 생산기반이었던 낙엽광엽수림의 축소라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자원확보의 다양한 시도는 토기에 나타난 고도의 기술, 유구에 보이는 대규모 축조물, 무덤구조의 복잡성, 생업에서의 협조조직, 분업의 성립, 원격지간의 교역 등으로 채집경제에 기반을 둔 사회로서는 극히 드문 고도의 사회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야요이시대에 들어서면서 당시 서일본 전체가 조엽수림대였으며 지형적으로도 충적지에까지 관개수전개발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환경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농경을 위주로 하는 생산경제로의 탈바꿈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하였고, 금속기·논농사 기술과 또 이에 따른 문화와 전통의 전래가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죠몬만기 후엽(야요이 조기)에 한반도로부터 민무늬토기문화의 수용이 절정에 이르렀는 바, 고인돌〔支石墓〕과 껴묻거리〔副葬品〕, 항아리〔壺〕, 간석기〔磨製石器〕, 주거(住居), 의례(儀禮)까지도 도입되어 문화적으로도 가치관의 대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죠몬만기 중엽의 구로가와식토기기(黑川式土器期)에 복합농경이 시작된 것은 한반도 민무늬토기문화(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를 담당한 도래인(渡來人)들이 있어 가능하였다.

저습지를 개간하고 수전을 경영하기 위해서 기능 분화된 목제농구가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며, 방대한 구역을 나무판으로 막아 만든 논두렁으로 구획된 수전, 그리고 풍요가 보장·기대되는 곡물저장용의 고상창고는 생산경제의 확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목제농구의 제작은 기능 분화된 한반도계 각종 간석기와 철기로써 제작되며, 간략화한 문양과 기능적인 형태의 토기는 농경생활에 적합한 산물이었다.

한반도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는 농경문화요소를 주축으로 야요이문화가 성립하였는데, 계기가 된 기술혁신과 사회변화는 논농사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운 집단관계를 성립케 하였고, 농작물(쌀)의 비축에 의해서 얻어진 부(富)는 사회의 계층화와 분쟁을 초래하여 계급사회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짧은 기간에 달성된 것이 아니라 죠몬만기 중엽의 구로가와식토기기부터 오랜 시간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죠몬후기 후반기 이후 서서히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의 도입이 가속화되어 온 죠몬사회는 도작농경(稻作農耕)을 기반으로 하는 농경사회인 야요이문화로 변화하였다.

일본열도에서 최초로 논농사가 정착한 것은 사가(佐賀) 가라츠평야(唐津平野)에서 후쿠오카평야(福岡平野)에 이르는 겐카이나다(玄界灘)연안지역이었다. 여기에 정착한 농경기술은 당초부터 완성된 하나의 기술체계를 갖춘 것이며, 한반도에서 건너 온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1978년 이후의 이다즈케(板付), 마가리다(曲リ田), 나바다케(菜田) 유적 등의 조사로 북부 큐슈에서의 논농사의 시작은 야요이시기에 앞서는 죠몬만기의 새김덧띠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의 시대까지 올려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야요이문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시되고 있다. 야요이문화의 내용은 쌀, 가락바퀴〔紡錘車〕, 직물, 정형화된 토기, 한반도계 간석기를 포함한 농공구류, 금속기, 고인돌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요소가 축적되면서 서로 긴밀하게 조합되어 완전한 형태로 갖추어진 때를 야요이문화의 성립으로 보고 있다. 토기로는 이다즈케Ⅰ식토기를 기준으로 하여 야요이시대가 시작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야요이시대의 연대는 일반적으로 북부 큐슈 토기형식의 변천을 세밀히 검토하여 토기형식의 서열을 결정한 후에 인접지역간의 대응관계를 조사하여 전·중·후기의 3시기로 정리하고 있다. 긴키(近畿)에서는 야요이시대를 총괄하여 Ⅰ-V양식으로 편년하고, 그것을 주축으로 하여 전국적인 토기편년을 시도하고 있다.

큐슈에서는 야요이시대 각 시기의 독널〔甕棺〕의 역연대를 알 수 있는 대륙계청동기(大陸系靑銅器)로 중국제와 한반도제가 출토한다. 사가 우키쿤덴(宇木汲田) 12호 독널무덤〔甕棺墓〕과 가지구리하마(梶栗浜) 유적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여러꼭지잔무늬거울〔多瞿細文鏡〕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220∼150년경으로 비정하고 있다.

야요이시대 중기는 동아시아 국제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며, 중국사서에는 당시 일본열도에 사는 사람을 ‘왜(倭)’, 또는 ‘왜인(倭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청동거울이나 동전, 인장 등의 중국제 청동기 출토사례가 증가되어 역연대 설정이 더욱 확실해진다. 특히 북부 큐슈의 독널을 중심으로 대량의 전한경(前漢鏡)을 껴묻기〔副葬〕한 미구모(三雲) 미나미쇼지(南小路) 유적, 스구오카모토(須玖岡本) 유적, 다테이와홋타(立岩堀田) 10호 독널 등은 야요이시대 중기 후반(기원전 1세기)의 다테이와식에 속한다. 이들 독널에는 전한 후기의 내행화문청백경(內行花文淸白鏡)·연호문청백경(連弧文淸白鏡) 등의 명대경(銘帶鏡) Ⅲ식이 껴묻기되었으며, 독널 이외에도 같은 시기의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었다.

야요이시대 후기 전반의 사쿠라노바바(櫻馬場) 유적 독널에서는 파형동기(巴形銅器)·청동팔찌·철도(鐵刀)와 신(新)∼후한(後漢) 전기의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방격규구운문경(方格規矩雲文鏡)이 출토되었다. 역연대가 기원후 1세기대를 중심으로 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야요이시대 후기 후반에는 후한 중∼만기의 장의자손내행화문경(長宜子孫內行花文鏡)이 출토되었다. 야요이시대 종말은 위지 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 나타나는 ‘동경백매(銅鏡百枚)’라는 기사를 초기고분에서 출토하는 삼각연신수경(三角緣神獸鏡)으로 인정한다면, 이 역연대는 기원 3세기 후반에 비정될 것이다.

이상 독널무덤에 껴묻기 된 중국 거울과 사서에 나타나는 기록을 조합하여 고고학적인 상황을 근거로 하여 연대를 추정한다면 야요이시대 조기는 기원전 5∼4세기, 전기는 기원전 3∼2세기 초, 중기는 기원전 2세기 초∼1세기 혹은 기원후 1세기 초, 후기는 기원후 1∼3세기 중엽 경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한편 최근에 나이테연대법의 개발로써 건물 기둥의 나이테를 통한 절대연대치가 측정 가능하게 됨에 따라 이후 더욱 세밀한 역연대 결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한덕)

유스식토기(黑川式土器)~이다즈케Ⅱa식토기(板付Ⅱa式土器) 변천도

유스식토기(黑川式土器)~이다즈케Ⅱa식토기(板付Ⅱa式土器) 변천도

참고문헌

  • 繩文農耕(森貞次郞, 彌生時代の東アジアと日本, 1985년)
  • 彌生時代における靑銅器の舶載(下條信行, 彌生時代の東アジアと日本, 1985년)
  • 倣製靑銅武器·銅鐸(武末純一, 徒生時代の東アジアと日本, 1985년)
  • 繩文土器と徒生土器-1.西日本(田中良之, 徒生文化の硏究 3, 1986년)
  • 新版 日本考古學を學ぶ(1)·(2)·(3)(大塚初重 外編, 有斐閣選書, 1988년)
  • 日本의 考古學(鄭漢德, 學硏文化史,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