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락

포구락

[ 抛毬樂 ]

요약 현행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한 종목. 일명 포구락정재(抛毬樂呈才). 고려 때 공연된 당악정재의 한 종목.

고려사』 권71에 의하면, 1073년(문종 27) 11월에 열린 팔관회(八關會) 때 교방여제자(敎坊女弟子) 초영(楚英)은 여제자 13명과 함께 포구락을 공연하였다.

고려 의종(1146~1170)의 생일날인 하청절에 만춘정(萬春亭)에 나가 연흥전(延興殿)에서 잔치를 베풀 때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이 앞다투어 채붕(綵棚)하고 헌선도(獻仙桃)와 포구락 등의 놀이를 공연했다고 『고려사』 권18에 전한다.

교방여기(敎坊女妓)가 춤을 추면서 포구문(抛毬門)에 채구(彩毬)를 곧 공을 던져 넣는 놀이형태의 포구락은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의하면 이신언(李愼言)의 고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고려사』 권71(「악지」)에 전하는 포구락은 헌선도·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연화대(蓮花臺)와 함께 송나라 사악(詞樂) 중 대곡(大曲)에 든다. 조선초기 당악정재의 한 종목이었고,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 전승된 대표적인 당악정재의 한 종목이다.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소재 포구락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소재 포구락

무대 중앙에 놓인 포구문에 무용수가 편을 갈라 채구를 던져 포구문에 넣으면 봉화(奉花) 즉 꽃을 든 여기로부터 상으로 꽃송이를 받고, 못 넣으면 봉필(奉筆) 곧 붓을 든 여기로부터 벌로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일종의 유희무(遊戲舞)이다. 현행 반주음악은 "함녕지곡"(咸寧之曲)이다.

〈역사적 유래〉 1073년(문종 27) 11월 포구락은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와 함께 교방여제자 초영 등 13명의 여기(女妓)에 의해서 팔관회 때 처음으로 공연됐다. 이때 왕이 친히 신봉루(神鳳樓)에 나가서 그 춤 공연을 관람했다. 본래 중국 송나라의 민간에서 성행한 포구놀이를 후에 궁중에서 춤으로 만든 포구락이 고려조정에 소개됐다. 송나라에서는 153명의 여기가 춘 엄청난 규모의 포구락을 공연했다고 『송사』(宋史) 권142(「악지」)에 전한다.

조선초기 세종(1418~1450) 때 포구락을 포구락정재라고 했다. 이 정재(呈才)는 국왕이 사신 또는 종친을 위해서 베푸는 잔치 때 아박정재(牙拍呈才)·무고정재(舞鼓呈才)·오양선정재(五羊仙呈才) 등과 함께 공연됐다.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4에 의하면, 성종(1469~1494) 때 공연된 포구락은 16명의 정재여령(呈才女伶) 및 죽간자(竹竿子) 2명, 인인장(引人仗) 2명, 정절(旌節) 8명, 용선(龍扇) 2명, 봉선(鳳扇) 2명, 그리고 개(盖) 4명 총 22명의 의장여령(儀仗女伶)이 출연하였다.

1630년(인조 8)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진풍정(進豊呈) 때 포구락은 헌선도·수연장·금척(金尺)·봉래의(鳳來儀)·연화대(蓮花臺)·향발(響鈸)·처용무(處容舞)와 함께 공연됐다고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에 전한다.

평양교방(平壤敎坊)에서 공연된 정재의 한 종목. 『평양속지』(平壤續誌)에 의하면, 1730년(영조 6) 평양교방 소속 영기(營妓)와 부기(府妓)가 이 정재를 공연했다. 평양교방의 기생이 악공(樂工)의 삼현육각 반주에 맞추어 이 정재를 공연했음은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에 전한다.

19세기 후반 진주교방(晉州敎坊)에서 공연된 이 교방춤은 1867년(고종 4)부터 1870년(동왕 7) 사이 정현석(鄭顯奭)이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지냈을 때 진주교방에서 연행됐다고 그의 『교방가요』(敎坊歌謠 1872)에 전한다.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1745년)에 보이는 포구락과 무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1745년)에 보이는 포구락과 무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01년(광무 5)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탄신50주년기념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진연(進宴) 때 공연된 정재(呈才)의 한 종목이 포구락이다. 포구락의 구성 인원과 춤의 순서나 춤사위 및 반주음악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변천됐다. 국립국악원의 현행 포구락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전승된 것이다.

〈춤의 순서〉 포구락 관련의 문헌은 『고려사』 권71(「악지」)과 『악학궤범』 및 고종(1863~1907) 때 『정재무도홀기』, 이상 세 가지다. 『고려사』 권71(「악지」)에 전하는 포구락의 공연 순서는 대략 이러하다.

무대(舞隊)가 악관(樂官) 및 여기(女妓)를 이끌고 두 줄로 입장하고, 악관이 "절화령"(折花令)을 연주하면 죽간자 2명은 앞에 나가 섰다가 음악이 그치면 다음과 같은 구호치어(口號致語)를 한다. "우아한 음악이 미려(美麗)한 경치 속에 울려 나는데 ··· 운운."

악관이 "절화령"을 연주하면 여기 12명이 좌우 두 대(隊)로 나누어 죽간자 뒤에 갈라섰다가 음악이 그치면 "절화령"의 삼대사(三臺詞)를 다음과 같이 부른다. "푸른 장막 화려한 잔치 자리 서로 이끌고 있으니 정녕 즐거움이 많도다. ··· 운운."

노래가 끝나면 악관이 "절화령"을 연주하고 무대(舞隊)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춤을 추며 화병(花瓶) 앞으로 나와 꽃을 꺾는 시늉을 하면서 춤을 추고, 악관이 "수룡음"(水龍吟)을 연주하면 12명의 기녀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다 끝나면 "수룡음"의 동천경색사(洞天景色詞)를 부른다. "동천(洞天)의 경치 사철 봄이라. 연하게 붉고 엷게 흰 꽃들 가벼운 꽃받침에 피어나 있다. ··· 운운."

끝나면 악관이 "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을 연주하면, 왼쪽 무대 5명이 한 번은 팡을 보고 한 번은 뒤를 보이며 추고, 끝나면 전무대(全舞隊)가 "소포구락령"의 양행화규사(兩行花竅詞)를 부른다. "두 줄 꽃구명 풍류 점치며 금(金) 새겨 넣은 깁 띠에 포구(抛毬) 매달았다. ··· 운운."

끝나면 무대의 앞 사람이 구문(毬門) 앞으로 나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뜰에 가득 찬 소고(簫鼓)의 소리는 ··· 운운."

포구희(抛毬戲)를 하여 맞으면 전무대(全舞隊)가 큰 절을 한다. ···(중략)··· 끝나면 악관이 "소포구락"(小抛毬樂)을 연주하고 죽간자 2명이 앞으로 나와 음악이 그치면, 다음과 같은 구호치어(口號致語)를 한다. "온갖 묘치(妙致) 있는 춤. 이미 비연(飛燕)의 기묘함 나타냈고, 몇 가락 맑은 노래는 또 문학(文學)의 아름다움 기대됩니다. 계전(階前)에 재배(再拜)하옵고, 서로 이끌고 물러가려 하옵니다." 끝나면 물러나고, 좌우의 12명이 차례로 춤을 추며 물러난다.

〈복식〉 조선후기 궁중잔치 때 무동 또는 여기가 포구락을 추었다. 오직 무동복식(舞童服飾)만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동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홍라포(紅羅袍)·백질남선중단의(白質藍縇中單衣)·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에 녹한삼(綠汗衫)을 입고, 학정대(鶴頂帶)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는다. 무동은 복두(幞頭)를 쓰고, 남포(藍袍)·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홍색단령(紅色團領)에 화화방보(畵花方補)한다. 중단의(中單衣)·관대(管帶)·화자(靴子)는 초무(初舞)의 무동과 같다.

포구락-국립국악원 무용단(박은영 제공)

포구락-국립국악원 무용단(박은영 제공)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284~89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169~71, 279, 322~23, 354, 356, 525쪽
  • 『력사에 이름을 남긴 음악인들』,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01년, 2002년, 권1.89~90쪽
  • 『高麗音樂史研究』 宋芳松, 서울: 일지사, 1988년, 199, 236, 241~42, 279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375쪽
  •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년, 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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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락정재(抛毬樂呈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