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동

무동

[ 舞童 ]

요약 ① 조선시대 궁중잔치 때 춤추던 어린 아이.
② 농악대(農樂隊)의 잡색(雜色) 중 일원. 일명 새미·피조리·꽃나무.

① 조선시대 궁중잔치 때 춤추던 어린 아이. 조선시대 무동은 (外宴)과 (內宴) 때 (呈才) 공연을 담당하였다. 조선초기 궁중잔치 때 출연하던 무동이 한때 혁파됐다가 1450년( 32) 복립(復立)됐다. (1469~1494) 때 (會禮宴)이나 내연 때 정재 공연에 출연한 무동은 (銅蓮花冠) 또는 (芙蓉冠)을 쓰고, (中單)에 오색(五色) 두루마기를 입고, (烏皮靴)를 신었다.

(鶴蓮花臺處容舞合設)의 무동 10명은 모두 이 달린 동연화관(銅蓮花冠)을 쓰고, 각 색깔의 단의(段衣)를 입고 (黑緣白紬中單)과 (黑緣紅段裳)을 입는다. (豆錫綠鞓帶)를 띠고, (花兒黑短靴)를 신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거치면서 무동의 전통이 조선후기에 잘 전승됐음은 여러 (儀軌)에 나온다. 조선후기 궁중의 (進饌)과 진작(進爵) 때 무동이 (佳人剪牧丹)·경풍도(慶豊圖)·(寶相舞) 같은 및 (長生寶宴之舞)·(帝壽昌)·(催花舞) 등의 (唐樂呈才) 공연에 출연했음은 1828년(순조 28) 『』(進爵儀軌)와 1829년 『』(進饌儀軌)에 나온다.

망선무(望仙舞) 공연에 출연한 무동복식(舞童服飾)은 봉작선(奉雀扇)한 무동은 주취금관(珠翠金冠)을 쓰고, 화금포(花錦枹)·남질흑선중단의(藍質黑縇中單衣)·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 위에 백우호령(白羽護領)과 백우엄요(白羽掩腰)에 보대(寶帶)를 띠고, 무우리(無憂履)를 신는다. 그리고 집당(執幢)한 무동은 주취금관을 쓰고, 자라포(紫羅枹)·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에 남사대(藍絲帶)를 띤다. 백우호령·백우엄요에 학정대(鶴頂帶)를 띠고, 비두리(飛頭履)를 신는다고 하였다.

1884년(헌종 10) 한양거사(漢陽居士)의 ""(漢陽歌)에 나오는 무동 관련 구절은 이러하다.

" 협률랑(協律郞)은/(習樂)하기 일삼오니/(梨園弟子) 천여 명은/무동· 되었어라/ ··· 에/무동은 춤을 추고/벽제(辟除)소리 웅장하다/ ··· 운운."

② (農樂隊)의 (雜色) 중 일원. 일명 ·피조리·꽃나무. 농악대 외 (乞粒牌)나 남사당패(男社黨牌)의 구성원 중 일원이기도 한 무동을 경기도 지방에서는 피조리라고 부르고, 충청도 지방에서는 꽃나무라고 부른다. 지방에 따라서 농악대에 나오는 무동의 수나 옷차림이 약간 차이가 있으나, 강원도 의 경우 무동은 붉은 치마네 노란 저고리 위에 청쾌자를 입고 붉은 댕기로 땋아놓은 머리에 을 쓴다. 경기도 농악대에는 3명 또는 5명의 무동이 포함됐고, 강원도 농악의 경우 8명의 무동이 잡색으로 활약한다.

농악대의 행진 또는 놀이 때 무동은 어른 어깨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면서 재주를 부리는데, 이것을 무동춤 또는 라고 한다. 강원도 농악의 판굿 놀이 맨 끝에서 소고잽이 어깨 위에서 연행하는 무동놀이를 라고 한다. 무동의 수에 따라서 단동고리·삼동고리·오동고리로 나뉜다. (忠北農樂)에서 무동놀이 때 치는 장단을 이라고 한다. (京畿農樂)의 경우 무동놀이 때 흰 에 고깔을 쓰고 재주를 부리는 무동이 있다. 그 무동을 새미라고 부른다. 이렇듯 농악대의 판굿 때 관중을 즐겁고 흥나게 해주는 무동이 요즈음에는 소년 대신에 가끔 소녀를 쓰기도 한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2.794~96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212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11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