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

처용무

[ 處容舞 ]

요약 처용이 추는 춤.

처용무는 궁중의 구나의(驅儺儀)에서 공연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이다. 현행 공연 때 다섯 명의 무용수가 처용 탈을 쓰고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5색 의상을 입고 춤을 춘다. 반주음악으로 "수제천"(壽齊天)·"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세환입"(細還入)이 쓰인다. 이 춤의 창사는 가곡(歌曲)의 편락(編樂)이나 언락(言樂)의 곡조에 맞추어 불린다.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소재 처용무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소재 처용무

이 춤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의 처용랑(處容郞)에 나오는 신라 헌강왕(875~885) 때의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비롯한다. 고려 충혜왕(1339~1344) 때 신우(辛禑)가 처용희(處容戲)를 즐겼다고 하고, 1443년(세종 25) 처용무의 무용수로 여기(女妓) 대신에 남부(男夫)를 쓰도록 했고, 처음에는 한 사람이 흑포사모(黑布紗帽)하고 처용무를 추었다. 뒤에 오방처용(五方處容)으로 변했다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 전한다.

성종(1469~1494) 때 처용무는 전도(前度)와 후도(後度)로 두 번 공연됐다. 후도에서는 학무(鶴舞)와 연화대(蓮花臺)가 합설(合設)됐고, 이어서 "미타찬"(彌陀讚)·본사찬(本師讚)·"관음찬"(觀音讚) 등의 불교가요를 곁들였다. 다섯 무용수는 각각 사모(紗帽)를 쓰고 청(靑)·홍(紅)·황(黃)·흑(黑)·백(白)색의 단의(丹衣)를 입고, 홍록흉배(紅綠胸背)·초록천의(草綠天衣)·홍초길경(紅綃吉慶)·남말군(藍袜裙)·홍방슬(紅方膝)·황초상(黃綃裳)에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매고, 백피혜(白皮鞋)를 신는다.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에 의하면, 1630년(인조 8)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진풍정(進豊呈) 때 처용무는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금척(金尺)·봉래의(鳳來儀)·연화대(蓮花臺)·포구락(抛毬樂)·향발(響鈸)과 함께 공연됐다.

진연의궤』(進宴儀軌 1719)를 보면, 1719년(숙종 45)에 공연된 정재(呈才)의 한 종목. 숙종의 보령(寶齡) 육순을 축하하기 위한 대전진연(大殿進宴)의 칠작행례(七爵行禮)에서 처용무는 진대선(進大膳) 때 공연됐다.

1744년(영조 20)에 공연된 정재의 한 종목. 영조 갑자년(1744) 『진연의궤』에 의하면, 중궁전(中宮殿)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내연 및 영조를 위한 구작행례(九爵行禮)에서 처용무는 진대선(進大膳) 때 공연됐다.

『평양속지』(平壤續誌)에 의하면, 1730년(영조 6) 평양교방(平壤敎坊) 소속 영기(營妓)와 부기(府妓)가 이 정재를 공연하였다. 이 정재(呈才)는 19세기 평양에서 연행됐다고 이만용(李萬用)의 「이선악부」(離船樂府) 및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에 나온다.

1730년 사연에서의 처용무(서울대 규장각도서관 제공)

1730년 사연에서의 처용무(서울대 규장각도서관 제공)

현행 처용무(이흥구 제공)

현행 처용무(이흥구 제공)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5.2105~107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