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무
[ 鶴舞 ]
- 요약
성종(1469~1494) 때 창제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 일명 학춤.
『고려사』「악지」에 학무는 없고 연화대(蓮花臺)만 있다. 반대로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에는 학무만 있고 연화대는 없다. 그러나 『고려사』의 연화대는 무녀(舞女)가 연꽃 속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고, 또 한편 학무는 학이 연통(蓮筒)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童女)가 나오므로, 학무와 연화대는 응당 붙어다녀야 할 것이다.
학무-국립국악원 무용단(이흥구 제공)
현행 학무와 연화대무(『학연화대합설무』)
학무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조선초기 세조(1455~1468) 때 학무가 있었다고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전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의 도설이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학무·연화대무·처용무(處容舞)를 합해서 연속적인 정재로 만든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세 정재가 따로따로 공연됐음이 『진찬의궤』(進饌儀軌)나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전한다.
조선초기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경우 학무와 연화대무의 공연 이후에 처용무가 공연됐다. 이런 춤은 궁중의 나례의식(儺禮儀式)을 마치고 난 후에 추도록 되어 있었다. 학춤과 관련해 연통(蓮筒)이 달린 지당판(池塘板)을 무대에 놓는다. 학무의 마지막 장면에서 학이 연통을 쪼으면, 그 연통 속에서 두 동녀(童女)가 나와 춤을 추고, 이때 학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가 퇴장한다.
이같이 학무는 독립적으로 연주되기도 했고, 처용무 또는 연화대무와 합설로 연행되기도 했다. 조선초기 학무에 등장하는 청학과 백학(白鶴)은 조선후기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1893)에 의하면 청학(靑鶴)과 황학(黃鶴)으로 바뀌었다. 본래 학춤의 반주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 즉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이었다. 조선후기에도 같은 음악이 학춤에 쓰였다.
『평양속지』(平壤續誌)에 의하면, 1730년(영조 6) 평양교방(平壤敎坊) 소속 영기(營妓)와 부기(府妓)가 이 학무를 공연하였다. 1872년(고종 2) 정현석(鄭顯奭)의 『교방가요』에 의하면, 백학이 학무에 등장한다고 기록됐다. 1901년(광무 5)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탄신50주년기념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진연(進宴) 때 공연된 정재(呈才)의 한 종목이 학무이다.
조선시대의 학춤과 현행 학춤의 차이점
구분 | 악학궤범 (1493) 및 『정재무도홀기』 |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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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음악 | 보허자령(관악보허자) |
염불과 굿거리 |
학의 종류 | 청학·백학(『악학궤범』) |
백학 한 쌍 |
학 제작 | 눈만 나오게 되어 있음 |
얼굴 전체가 드러나 보이게 제작됨 |
지당판과 연통 | 있음 |
없음 |
일제강점기 한성준(韓成俊)이 학춤을 새롭게 재현했다. 현행 학춤은 1969년 작성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에 바탕을 두고 재현된 춤이다. 옛 것에 비해 위와 같이 서로 다르다고 지적된 바 있다.
학춤은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40로 지정됐다. 예능보유자는 한영숙(韓英淑)이며, 전수자는 김용화와 김경희이다. 1972년 4월 무형문화재 전수생 발표회가 열렸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318~19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270, 354, 525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383~84쪽
참조어
학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