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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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6부 중 하나로 금량부, 사량부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부

일반정보

6촌 중의 하나인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 6부로 개편되면서 본피부로 전환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 가서 통선부로 개칭된다. 신라사회에서 본피부는 급량부와 사량부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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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서는 6촌을 설명하면서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고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辰韓之地 古有六村 …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 是崔侯古宅也 殆明矣)”라고 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始祖 赫居世居西干)조에서는,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 是爲辰韓六部)”라고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년(32)조에는,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 간진부(干珍部)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으로 하였다.(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干珍部爲本彼部 姓鄭)”라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고려사』 권57 지리2에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경주의 6부명을 고쳤는데 … 본피부를 통선부로 하였다.(二十三年 … 改其州六部名 … 本彼爲通仙部)”라는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에서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빈지촌(賓之村), 빈자촌(賓子村), 빙지촌(氷之村)이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고, 고려시대에 통선부(通仙部)로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삼국사기』에서는 취산 진지촌 혹은 간진촌(干珍村)이 후에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고, 유리 이사금 9년(32)에 간진부(干珍部)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를 통해서 『삼국유사』에 언급된 지금의 통선부(通仙部)라는 부분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개칭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사들에서 확인되는 6촌의 사실성을 인정하면서, 이후 6부와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연구들은 대체로 본피부의 위치를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위치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자료의 부족으로 본피부와 관련된 내용을 통해서 위치를 비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교적 내용이 풍부한 취산 진지촌에 주목한 것이다.

우선 『삼국유사』 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 황룡사(皇龍寺) 남쪽의 미탄사(味呑寺) 남쪽 옛 터에 최치원의 집이 있었다고 언급한 내용에 따라서 경주시 인왕동 남쪽에 비정한 견해가 있었다. 처음에는 월성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위에 있었지만 왕경이 형성되면서 축소되었으며, 현재 탈해왕릉이 위치한 소금강산 지역을 본피부의 중심으로 추정하였다.(이병도, 1976) 이러한 견해를 고고학적인 성과를 통하여 보충한 견해가 있다. 경주 인왕동 고분군과 석탈해왕릉에 주목하여 낭산지역을 진지촌의 거주지로 파악하고, 인왕동 고분군은 석탈해 집단과 관련된 고분군이며, 석탈해왕릉이 위치한 소금강산 지역은 진지촌의 북쪽 끝부분으로 이해하였다.(김원룡, 1987)

그리고 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6촌의 범위를 경주분지 외곽까지 확대해서 파악하는 견해도 나왔다. 여기서는 지석묘군의 분포범위에 주목하였는데, 취산 진지촌은 경주 낭산지역에서부터 외동면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쳐서 설정하였다.(이종욱, 1982)

이와 같이 고고학적인 자료를 이용한 접근의 방법론을 받아들이면서, 이후 축적된 성과를 바탕으로 본피부의 위치를 1-3세기대의 목관묘가 조사된 경주시 조양동, 구정동, 입실리 일대로 파악한 연구도 있다.(권오영, 1997) 또한 조양동, 구정동 일대의 지형이 약 4㎞의 타원형지대이고, 서쪽과 남쪽에는 남천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지표조사 결과 다량의 무문토기들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취산 진지촌의 범위로 설정한 견해도 있다.(박홍국 외, 2003)

이러한 견해와 다르게 6촌을 이부체제의 입장에서 설명한 연구의 경우에는 취산(觜山)과 진지촌(珍支村)을 경주 밖에 있던 촌으로 파악하였으며, 취산과 진지를 서로 구별되는 촌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비정은 보류하면서, 본피부의 이름과 『삼국사기』 권 34 잡지3 지리1 신라 강주 성산군(星山郡)조에서 성산군의 영현인 본피현(本彼縣)과 연결된다고 보아서 본피부를 경북 성주군 성주읍에 비정하였다.(김철준, 1975)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여 취산(觜山)을 경북 포항시 영해면 축산포(丑山浦)와 음이 유사하다고 비정하고, 진지촌(珍支村)이 간진촌(干珍村)으로도 불린다는 것과 울진(蔚珍)이 우진(于珍)으로 불린다는 것을 연결하여 울진 지역에 비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6부로 전환된 이후의 본피부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한 자료는 부족한 편이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진한(辰韓)조에서 언급되는 금입택(金入宅) 중에서 본피택(本彼宅)이 있으며, 본피부(本彼部)내에 지상택(池上宅)과 항질택(巷叱宅)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권3 탑상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鍾)조에서 분황사약사동상(芬皇藥師銅像)을 만든 장인(匠人)이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삼국사기』에서는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上)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에서는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 … 본피부(本彼部)에는 감랑(監郞)이 1명이었고, 감대사(監大舍)가 1명이었고, 사지(舍知)가 1명이었고, 감당(監幢)이 5명이었고, 사(史)가 1명이었다.(六部少監典 … 本彼部 監郞一人 監大舍一人 舍知一人 監幢五人 史一人)”는 기사가 확인된다.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은 왕경내 6부를 맡은 관부로서, 6부 각각에 개별적으로 설치된 조직체계를 총칭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이문기, 1997) 따라서 본피부도 다른 부와 마찬가지로 조직적으로 관리되었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몇 사례를 제외하면 본피부와 관련된 자료는 사료를 통해서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 신라 중고기 금석문 자료에서는 본피부(本彼部)를 칭하는 용례가 보인다.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 503년)」에서는 “본피부 두복지 간지(本彼頭腹智干支)”가 확인된다.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524년)」에서도 신료의 이름들이 나열되면서 “본피부 □부지 간지(本彼□夫智干支)”가 보인다.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 551년)」에서는 명활산성 공사의 총 책임자격인 상인나두(上人邏頭)인 본피부 이피이리 길지(夲彼部 伊皮尒利 吉之)가 보이며,「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561년)」에는 “본피부 말□지 급척간(本彼末□智及尺干)”,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 568년)」에는 내말통전인 본피부 가양지 소사(本彼部 加良知 小舍)와 직책미상의 본피부 막사지 길지(本彼部 莫沙知 吉之) 2인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금석문을 통해서 6명의 본피부 출신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들 비와 여타 비에는 탁부(啄部, 梁部)와 사탁부(沙啄部, 沙梁部) 출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에 비해서 등장하는 비중이 낮은 편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힌 부만 참석하여 금석문으로 남은 결과라고 설명도 하는 경우도 있지만,(서의식, 1994) 부(部) 간에 정치적인 영향력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전덕재, 1996)

또한 본피부와 관련된 내용으로 본피궁(本彼宮)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2년(662)에는, “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와 토지(田莊) 그리고 노비를 반씩 나누어, 김유신(庾信)과 김인문(仁問)에게 주었다.(論功 中分本彼宮財貨田莊奴僕 以賜庾信仁問)”라는 기사를 통해서 본피궁(本彼宮)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職官) 중(中) 본피궁(本彼宮)조에 “본피궁(本彼宮)은 신문왕 원년(681)에 설치하였다. 우(虞)는 1명이었다. 사모(私母)는 1명이었다. 공옹(工翁)은 2명이었다. 전옹(典翁)은 1명이었다. 사(史)는 2명이었다.(本彼宮 神文王元年置 虞一人 私母一人 工翁二人 典翁一人 史二人)”라는 내용이 있다.

본피궁(本彼宮)을 석씨(昔氏)의 본궁(本宮)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었다.(이병도, 1956)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본피부에 위치한 이궁(離宮)으로 생각된다.(三池賢一, 1971) 신문왕 원년(681)에 설치되었다고 하지만, 앞서 문무왕 2년(662)에 이미 거론되는 점으로 보아서 신문왕대에 개편된 것으로 이해된다. 본피궁은 단순히 궁궐의 이름이 아니라 이 궁(宮)과 관련되는 제반 사무를 관장한 관청이다. 그런데 권39 잡지8 직관(職官) 중(中)을 비교하면 본피궁 관원의 격과 수가 양궁(梁宮)이나 사량궁(沙梁宮)에 비해서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부 간에 격의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한편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 결과 “본피궁(夲彼宮)”명(銘) 칠기합(漆器盒)편이 출토되어 본피궁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면서 주목을 받았다.(국립경주박물관, 2002) 이와 함께 안성의 비봉산성(飛鳳山城)에서 수습된 통일신라시대 “본피(本彼)”명(銘) 기와도 주목되는 자료이다. 현재 경주 왕경유적에서도 “습비(習比)”, “습부(習部)”, “한지(漢只)”명문이 있는 기와편들이 확인되었을 뿐인데, 왕경에서 거리가 떨어진 지방에서 부명(部名)이 새겨진 유물이 출토된 것은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사량부(沙梁部)”명(銘) 기와편을 제외하면 매우 드문 사례이다. 따라서 “본피”명문의 기와편에 대하여, 소경(小京)에 육부의 행정구획이 있었다는 견해를 수용하면(양기석, 1993), 인근의 중원소경(中原小京, 충주)에 설치된 본피부와 관련된 세력이 비봉산성의 수축 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서영일, 1999)

참고문헌

이병도, 1956, 『(原文幷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三池賢一, 1971, 「新羅內廷官制考 (上)」『朝鮮學報』61.
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종욱,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일조각.
김원룡, 1987, 『韓國考古學硏究』, 일지사.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양기석, 1993, 「新羅 五小京의 設置와 西原京」『호서문화연구』11.
권오영, 1997, 「斯盧六村의 위치문제와 首長의 성격」『新羅文化』14.
이문기, 1997, 『新羅兵制史硏究』, 일조각.
서영일, 1999, 「安城 飛鳳山城 수습 「本彼」銘 기와 考察」『文化史學』11․12․13合.
국립경주박물관, 2002, 『文字로 본 新羅 -新羅人의 紀錄과 筆跡-』.
박홍국․정상주․김지훈, 2003, 「斯盧 6村의 위치에 대한 詩論」『新羅文化』2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旀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