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촌

6촌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사로국에 있었던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의 6촌

일반정보

사로국에 있었던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의 6촌을 말한다. 6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급량부(及梁部), 사량부(沙梁部), 점량부(漸梁部), 본피부(本彼部), 한기부(漢歧部), 습비부(習比部)의 6부로 발전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고 시작하면서, 6촌에 대한 내용과 이후의 연혁에 대한 설명이 언급되어있다. 번잡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촌장-알평(謁平) / 하강지-표암봉(瓢嵓峰) / 이씨(李氏)
→ 급량부(及梁部) → 중흥부(中興部)
(2)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촌장-소벌도리(蘇伐都利) / 하강지-형산(兄山) / 정씨(鄭氏)
→ 사량부(沙梁部)=사탁부(沙涿部) → 남산부(南山部)
(3)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촌장-구례마(俱禮馬) / 하강지-이산(伊山), 계비산(皆比山) / 손씨(孫氏)
→ 점량부(漸梁部)=점탁부(漸涿部) → 장복부(長福部)
(4)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촌(賓之村)=빈자촌(賓子村)=빙지촌(氷之村) :
촌장-지백호(智伯虎) / 하강지-화산(花山) / 최씨(崔氏)
→ 본피부(本彼部) → 통선부(通仙部)
(5)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 :
촌장-기타(祗沱), 지타(只他) / 하강지-명활산(明活山) / 배씨(裵氏)
→ 한기부(漢歧部, 韓歧部) → 가덕부(加德部)
(6)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
촌장-호진(虎珍) / 하강지-금강산(金剛山) / 설씨(薛氏)
→ 습비부(習比部) → 임천부(臨川部)
*. 촌→부로의 개편 : 노례왕(弩禮王) 9년(32), 부의 개편 -고려 태조 23년(940).

이어서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라는 내용이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始祖 赫居世居西干)조에서는,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라고 되어 있다. 진지촌(珍支村)이 간진촌(干珍村)으로 불렸다는 기사와 촌이 언급된 순서를 제외하면 동일한 내용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년(32)조에는,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고, 고허부(高墟部)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 대수부(大樹部)를 점량부(漸梁部)[또는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孫), 간진부(干珍部)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 가리부(加利部)를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 명활부를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로 하였다. 또 관(官)을 설치하였는데, 17등급이 있었다.(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라는 기사가 확인된다.

여기서는 촌(村)이 이미 부(部)로 변경되었다가, 유리 이사금 9년(32)에 다시 부의 명칭이 변경된 것처럼 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사량부(沙梁部)와 본피부(本彼部)의 성이 각각 정씨(鄭氏와) 최씨(崔氏)인데, 여기에서는 뒤 바뀌어 있다. 이것은 『삼국유사』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서 본피부를 설명하면서, “최치원(崔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致遠乃本彼部人也)”라고 하였지만, 『삼국사기』권46 열전6 최치원(崔致遠)전에서는, “최치원은 왕경의 사량부(沙梁部)사람이다.(崔致遠 …王京沙梁部人也)”라는 구절에서처럼 인식의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부의 개편과 동시에 17관등제도 정비된 것으로 되어있다.

이상에서 사료를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언급된 6촌에 대한 부분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6촌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리 이사금 9년(32)에 6촌을 6부로 바꾸고 각각의 부는 성씨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 관해서는 신라 초기기사 부정론의 연장선에서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먼저 제기되었다. 기사에 보이는 6촌이 6부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사로국이 정복전쟁을 진행하면서 편재되는 소국의 지배씨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부(部)가 7세기까지 축차적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후대의 사실을 부회한 것으로 파악하였다.(末松保和, 1954)

이러한 부정적인 입장에서 더하여 『삼국지』 권30 위서30 한(韓)전에서 “노인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의 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처음에는 6국이었던 것이 점차 나누어져 12국이 되었다.(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 避秦役來適韓國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라는 기사를 주목한 연구가 있다. 여기서는 진한제국(辰韓諸國)으로 처음에 형성되었다는 6국과 사로국(斯盧國)의 6촌에 혼동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三品彰英, 1975) 또한 이러한 연구를 수용하여 6촌은 진한의 6국을 말하는 것이며, 6부와 다른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신라의 성립을 마립간기로 파악하면서, 유리이사금 시기의 기사는 후대의 조작이며, 6부도 행정구역으로 고정한 후에 행정구역화한 지명을 따서 윤색한 것으로 이해하였다.(문경현, 1983)

그리고 사로국이 6개의 정치집단으로 출발하였다고 상정하더라도,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상당한 변동이 예상되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변화 없이 6촌이 6부가 되었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6성(六姓)이 성립한 이후에 각각의 기원을 6부와 결합하여 부회된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주보돈, 1992) 이와 같이 6촌의 존재를 후대에 부회된 것으로 파악하면서 6부가 성립된 시기를 유리이사금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전덕재, 1996), 마립간(麻立干)시기까지 늦추어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강종훈, 2000)

이와 달리 6촌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면서, 신라 건국 이전의 6촌이 유리이사금시기에 6부로 개편되었다고 파악하여 사료에 보이는 기년을 그대로 신뢰하여 논의를 진행한 연구도 나왔다.(정중환, 1962; 이문기, 1981; 이종욱, 1982) 이와 조금 다르게,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조에서, “왕이 6부(六部)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라는 기사에 주목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이미 6부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 이사금 9년(32)조 기사는 6촌에서 6부로 고친 것이 아니라, 이미 혁거세거서간 시기에 고쳐진 부의 이름을 다시 고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최재석, 1987)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사를 신뢰하여,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의 6부는 육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이문기, 1989)

이렇게 6촌과 관련된 기사를 부정해 버리거나 그대로 신뢰하는 입장과 다르게 6촌의 존재를 인정하되 세부적인 기년과 내용을 수정하여 사실을 도출해 보고자 하는 견해가 있다. 우선 6촌은 일종의 씨족적인 취락으로 각 촌(村)은 각자의 족장 아래에 혈연이나 지연적으로 결합된 사회조직이고, 육부는 씨족 사회가 붕괴되고 행정조직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이해한 견해가 있다. 그런데『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2년(469) “서울에 행정구역인 방(坊)․리(里)의 이름을 정하였다.(定京都坊里名)”는 기사에 주목하여, 이때 6촌이 6부로 개편된 것으로 파악하여 기년을 조정하였다.(이병도, 1976) 또한 6촌을 12개의 촌으로 나누어 각각 이부체제(二部體制)를 이루었다는 입장에서 진행된 연구도 있다. 여기서는 6촌 중 알천 양산촌은 김씨족의 부락인 알천과 박씨족의 부락인 양산촌으로 나누어져 경주에 위치하고 있었고, 나머지 5개의 촌도 각각 둘로 나누어져서 총 10개의 촌은 경주 외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후 경주 외곽의 촌들이 경주에 위치한 세력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정복된 각 촌의 지배세력이 경주 지역에 이주되어 6부를 이루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특히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10년(488)조에서 “6월에 동양(東陽)에서 눈이 여섯 개인 거북을 바쳤는데, 배 밑에 글자가 있었다.(夏六月 東陽獻六眼龜 腹下有文字)”라는 기사가 확인되는데, 눈이 여섯 개인 거북 이야기를 6촌의 귀족들을 중앙귀족화한 것으로 이해하여 6부가 이 시기에 완비된 것으로 이해하였다.(김철준, 1975)

한편 6촌 집단의 기원이나 성격에 논의들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일찍이 6촌을 6개의 씨족(氏族)이며, 그 자체 부족동맹(部族同盟)으로 이해하였다.(백남운, 1933) 이러한 견해를 수용하여 6촌을 씨족집단으로 언급한 견해도 있다.(정중환, 1962; 이병도, 1976; 이기백․이기동, 1976; 천관우, 1989) 또한 6촌 중에서 박(朴), 석(昔), 김(金) 부족의 3촌은 경주의 토착족으로 경주 지역에, 나머지는 경우에는 기타 지역에 있었는데, 부족사회의 틀을 바탕으로 완만한 부족 연맹체 사회를 구성한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김철준, 1975)

이후에 인류학과 고고학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이 제기된다. 우선 기원전 10세기경에 경주 지역에 이주한 집단이 촌(村)을 형성하였고, 사로국(斯盧國)이 형성될 무렵에는 촌장(村長)이 중심이 된 사로 6촌사회(기원전 7세기-기원전 2세기)가 성립되었는데, 이를 추장사회(酋長社會, Chiefdom) 혹은 촌락사회(村落社會)로 설정한 견해가 있다.(이종욱, 1982) 또한 고고학적인 성과를 토대로 6촌을 사로국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읍락(邑落)집단으로 이해하면서 국읍(國邑)을 고허촌(高墟村)의 중심으로 비정한 연구도 있었다.(이현혜, 1984) 그리고 당시의 호수(戶數)를 기준으로 살펴 볼 때 사로국이 6개의 촌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촌(村) 중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6촌이 거론된 것이며, 6촌을 포함한 사로의 지배층은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유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 연구도 주목된다.(김정배, 1986)

그리고 사로육촌의 집단을 경주 일대의 지석묘사회와 연결해서 파악한 견해(이종욱, 1982; 강인구, 1997)를 비판하고, 이보다 다소 늦은 기원전 3-2세기경에 고조선 후기의 청동기문화를 경험한 유이민 세력이 경주 지역으로 들어와 기존의 지석묘 사회를 통합하면서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병곤, 2003)

마지막으로 6촌의 위치 비정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면 6촌의 성격, 6부와의 관계 설정 등의 견해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다. 일단 크게 경주 분지 내로 보는 견해, 경주시 외곽으로 확대해서 파악한 견해, 경주를 포함한 경상북도 일원으로 파악한 견해로 나누어진다.

첫째, 경주 분지 내로 보는 견해는 6촌의 위치를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편재된 6부와 동일하게 파악한 견해이다. 사료를 중심으로 6촌의 위치를 비정한 견해가 나왔는데(이병도, 1976; 이기동, 1984; 김정배, 1986), 이를 보완하여 고분의 위치를 통하여 6촌의 위치를 비정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김원룡, 1987) 그렇지만 6촌이 성립되는 시기와 현재 경주 분지 내에 위치한 고분군과의 편년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성곽을 중심으로 거주지와 연결하여 위치 파악을 시도한 연구가 나왔다.(오영훈, 1992) 또한 발굴 성과가 축적이 되면서 경주시 조양동, 황성동 등지에서 삼한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검토하여 경주 분지 내에서 6촌의 위치를 비정한 연구도 있었으며(권오영, 1997), 이후에 경주지역의 축적된 발굴 및 지표조사 성과와 지리적인 검토를 바탕으로 6촌을 경주 분지 지역 내에 비정한 견해도 있다.(박홍국․정상주․김지훈, 2003)

둘째, 경주시 외곽으로 확대해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인간의 경작 가능 공간을 참고한다면 각 촌은 10㎞ 정도의 범위를 가진 공간으로 구성되므로, 6촌의 위치를 경주분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현재의 경주시 안강읍․양남면․문무대왕면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으로 파악한 것이다.(이종욱, 1982) 또한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경주 지역의 수계, 지명 고증을 통해서 경주 외곽으로 약간 확대해서 파악한 견해도 있었다.(이기봉, 2007)

셋째, 경상북도 일대로 파악하는 견해는 이부체제(二部體制)로 구성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김씨족의 부락인 알천과 박씨족의 부락인 양산촌만 경주 분지내에 위치하고, 나머지는 경주 외곽에 넓게 위치하고 있었다고 파악하였다.(김철준, 1975) 이러한 입장을 인정하고, 견해를 보충하여 6촌의 위치를 경주 이북 지역에 비정하고, 각각의 명칭은 사로국의 여러 세력들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관련된 지명과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한 연구도 있다.(천관우, 1989).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진한육촌(辰韓六村)이라고 되어 있음에도, 사로육촌(斯盧六村)으로 이해하여 6촌의 위치를 사로국과 관련하여 경주 지역에서만 위치를 비정하는 입장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경상도 전역으로 시야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선석열, 2001; 서의식, 2003)

*. 6촌의 위치비정과 관련된 견해

지역
구분
연구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급량부)
(사량부)
(본피부)
(모량부)
(한기부)
(습비부)
경주분지
지역비정
이병도,1976
남천-남
남천-북
북천 남
효현동
인왕동
(황룡사남)
소금강산
(백률사일대)
보문동,
남산
이기동,1984
남산-서
남천-북
북천-남
낭산서쪽
(황룡사남)
서악동
소금강산
일대
보문동
(명활산서)
김정배,1986
남천-남
효현리일대
창림사일대
낭산지역
모량리일대
소금강산
일대?
보문동?
김원룡,1987
남산-서북
월성
서악동
낭산일대
모량리일대
금척리일대
소금강산
일대
보문동
오영훈,1992
남천-이북
남산 북악
조양동
대곡리
(건천지역)
보문동
황성동
권오영,1997

조양동
사라리
황성동

박홍국 외,
2003
인왕동고분
황남동고분
월성-동남
남산-서북
조양동
구정동-서남
금척리
건천일대
헌덕왕릉서북
황성동
명활산-서
낭산-동
경주외곽
확대비정
이종욱,1982
월성
5릉
산내면
외동면
서면
모량천
천북면
문무대왕면 등
명활산
이기봉,2007
경주시내
현곡면
5릉남쪽
내남면
월성-낭산
명활산남
서면
건천읍
감포
문무대왕면 등
천북면
경북일대
비정
김철준,1975
경주 북천
충북 옥천
경북 상주
경북 성주
충북 제천
경북 예천
경북 김천
경북 고령
경주
경북 영천
천관우,1989

경북 포항
경북 울진
경북 의성
경북 예천

경북 경산
경북 영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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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旀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