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

원측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의 승려

생몰년 : 613-696

일반정보

원측은 신라의 고승으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모량리 사람이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후 죽을 때까지 당나라에 머물렀다.

원측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원측(圓測)은 신라의 고승이다. 『삼국유사』권2 기이2 효소왕대죽지랑(孝昭王代竹旨郞)조에 따르면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를 모량리의 익선 아간이 차출하여 부역을 시키고 득오를 석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는 등 악행을 저지르자, 왕이 모량리 출신 사람들의 관직을 빼앗고 승려가 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승려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큰 종과 북을 단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원측은 해동(海東)의 고승이었으나, 역시 모량리 사람이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과 「고번경증의대덕원측화상휘일문(故翻經證義大德圓測和尙諱日文)」,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원측법사의 휘는 문아(文雅)이며 신라국왕의 자손이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로 가서 유식학(唯識學) 연구의 개척자인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으로부터 유식학을 배웠다. 특히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하였다.

『삼국유사』의 원측과 서명사의 원측은 일반적으로 동일 인물로 보지만 두 원측을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효소왕대 죽지랑조의 이야기는 진평왕대 청년이었던 죽지랑의 은혜를 입은 득오가 시간이 지나 효소왕대가 되어서 지난날을 회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해동고승 원측(园測)도 진평왕 당시의 고승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한편 문아 원측(圓測)은 언제 당으로 건너갔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당 태종으로부터 도승(度僧)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문아 원측(圓測)은 진평왕 말년까지도 고승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없는 젊은 스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진평왕대에 해동의 고승이었던 원측(园測)과 신문왕 때에 귀국 요청한 서명사 대덕 문아 원측(圓測)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라는 것이다.(김영태, 1994) 그러나 『삼국유사』 원문에 기록된 원측(园測)의 “원(园)”과 “원(圓)”은 서로 통하는 글자로 보아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삼국유사』의 원측과 효소왕 5년(696)에 입적한 원측과는 그 활동연대도 비슷하다.

한편 그는 중국에 알려진 고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에서는 승직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잘못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당에 유학을 갔다가 잠시 귀국하였으나 모량리 출신이었던 까닭에 승직을 받지 못하고 다시 입당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신무왕대에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받았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그를 부처인양 존중하여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종욱, 1986)

원측이 효소왕 5년(696)에 84세로 입적하자 제자들이 다비를 마치고 사리 49과를 얻어 용문산(龍門山)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제자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서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지금 중국 서안 함녕현(西安府咸寧縣)의 번천(樊川)에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이 있으며, 그곳에 원측의 탑묘(塔廟)가 있다.

참고문헌

이종욱, 1986, 「三國遺事 竹旨郞條에 대한 一考察」『韓國傳統文化硏究』2.
김영태, 1994, 「佛國寺의 華嚴法師 圓測에 대하여」『韓國佛敎學』1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
孝昭王代 竹旨郞[亦作竹曼 亦名智官]
第三十二孝昭王代 竹曼郞之徒 有得烏[一云谷]級干 隷名於風流黃卷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郞喚其母問 爾子何在 母曰 幢典牟梁益宣阿干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行急 未暇告辭於郞 郞曰 汝子若私事適彼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須歸享矣 乃以舌餠一合酒一缸,<率>左人[鄕云 皆叱知言奴僕也]而行 郞徒百三十七人亦具儀侍從 到富山城問閽人 得烏失奚在 人曰 今在益宣田 隨例赴役 郞歸田 以所將酒餠饗之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時有使吏侃珍 管收推火郡能節租三十石輸送城中 美郞之重士風味 鄙宣暗塞不通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助請猶不許 又以珍節舍知騎馬鞍具貽之乃許 朝廷花主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時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內池中仍合凍死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竝合黜遣 更不接公署 不著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勅史上侃珍子孫 爲枰定戶孫 標異之 <圓>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梁里人 故不授僧職 初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治>所 時三韓兵亂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旨嶺 有一居士平理其嶺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治>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驚怪尤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與庾信公爲副帥統三韓 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冡宰 安定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 哭屋尸以憂音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 宿尸夜音有叱下是
효소왕대 죽지랑[또는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또는 곡(谷)] 급간(級干)이 있었다.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출근하였다. 열흘 동안 보이지 않기에 낭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당전(幢典)인 모량(牟粱)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으로 뽑아갔는데, 빨리 가느라고 미처 낭에게 말씀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당신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이제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라고 하고, 이에 설병(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갔다. 낭의 무리 1백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답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져간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고 함께 돌아가려고 했으나 익선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어리석은 고집과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기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그때는 중동(仲冬)의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쫓아내어 다시는 관서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도 종고(鐘鼓)를 단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에게 명하여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고 그를 표창하였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장차 임지로 가려 하는데, 이때 삼한에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송하였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그 고개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이를 보고 찬탄하였고,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성함을 존대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주의 치소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더 되던 때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꿈꾸던 바로 그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불 한 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봉안하였다. 부인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부수(副帥)가 되어 유신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무(神武)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간 봄 그리워하매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더이다. 애달픔 나토시던 모습이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가이더이다. 눈 돌이킬새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다봊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