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만파식적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의 신적(神笛).

일반정보

신라의 신적(神笛)으로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따르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으로부터 받은 피리라고 한다. 이후 효소왕대에 실례랑(失禮郞, 부례랑)이 다시 살아 돌아온 일로 인해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고쳐 불렀다.

만파식적 본문 이미지 1
만파식적 본문 이미지 2
만파식적 본문 이미지 3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용이 되었다는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짓고, 용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신무왕이 임오년(壬午, 682) 이견대에 행차한 후 산에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와 함께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으로부터 받은 대나무를 바쳤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를 불면 나라의 근심걱정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 피리가 곧 만파식적으로, 이후 효소왕대에 실례랑(失禮郞)이 다시 살아 돌아온 일로 인해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률사(栢栗寺)조에 자세히 전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제32대 효소왕 때 국보인 거문고와 피리를 잃어버렸는데, 적적(狄賊)에게 붙잡혀간 부례랑(夫禮郞,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조에서는 실례랑이라고 표기됨)이 이를 찾아 살아 돌아왔다. 이후 거문고와 피리에 작위를 봉하여 피리를 “만만파파식(萬萬波波息)”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 따르면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孝讓)이 선조(先祖) 때부터 지녀온 만파식적을 원성왕에게 전하였는데, 왕은 만파식적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다고 전한다.

만파식적에 대한 후대의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고적조에 『삼국유사』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하고 있는데, 그 끝에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항목에서 “옥적(玉笛)”이라 하여 길이는 한자 아홉치인데 동해의 용이 바친 물건으로 역대 임금이 보배로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20세기 초에 조사된 경주부고(慶州府庫)에서 옥적이 둘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의 옥적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今西龍, 1933) 한편 『동경통지(東京通志)』에 고려 태조가 이 옥적을 보려고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였는데, 옥적을 불었더니 소리가 나지 않으므로 태조는 그것이 신비물인 줄 알고 신라로 돌려보냈으며, 당시 물장고(物藏庫)에 간직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만파식적 설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된 바 있다. 첫 번째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이 설화를 불교설화로 보고, 통일 완성에 대한 감사와 통일 후의 태평구가 및 안일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 성대(聖代)를 가져다준 성왕(聖王, 문무왕)․성신(聖臣, 김유신)의 무한한 권능과 위덕을 숭봉하고 기리는 찬송 등을 담은 글로 본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문무왕의 호국용(護國龍)과 김유신의 호국천신(天神)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여 호국불교사상과 호국용사상을 연결시켜 호국이성(二聖) 사상을 고찰하고 있다.(김영태, 1973)

두 번째 민속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조에서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 어두웠다는 기록을 근거로, 당시 이 지방의 기상 변동이 심했다고 보고, 기상변동의 소리인 “거랑 끓는 소리(비오기 전에 들리는 소리)”를 만파식적 설화의 원형으로 파악하였다.(서정범, 1975)

세 번째 문학적 측면에서 만파식적 설화를 신라 호국불교사상의 전개로서 호국적 신화에 대한 신앙이 드러난 설화로 본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신라의 불교설화를 고찰한 가운데 만파식적 설화와 『고려사』 소재의 이견대가(利見臺歌)와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이견대가는 신라왕 부자가 상봉한 후 이를 기뻐하여 지어 불렀다는 노래인데, 이 두 가지 설화 모두 해룡에 얽힌 호국설화(護國說話)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왜구에 대한 호국이 새로운 관심사로 제기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고 보았다.(황패강, 1975)

네 번째로 미술사 관점에서 만파식적을 신라 범종의 특징인 음통에 비견한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만파식적 설화에서 나타나듯이 만파식적은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형태가 둥글고 속이 비었으며 마디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이와 같은 대나무 형태가 그대로 신라종의 원통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만파식적 설화가 성립되던 시기에 신라종의 특수양식이 창안된 것으로 보아, 신라인의 삼국통일 호국의지와 자신감이 만파식적 설화와 그것의 조형적인 음통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았다.(황수영, 1984)

다섯 번째 역사적 측면에서 만파식적 설화가 형성된 정치․사회적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본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만파식적 설화는 김흠돌의 난(682) 등으로 불거진 무열왕권에 대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신라 중대 무열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유교 정치이념과 예학사상을 도입하여 무열왕권의 정당화 및 중대 전제왕권을 확립해나가던 당시의 상황을 담은 글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신라에는 이미 호국의 기능을 가진 삼보(三寶: 천사옥대, 황룡사장륙존상, 황룡사9층탑)가 있었지만, 이는 중고기 성골왕실의 상징적인 보배였다. 이 때문에 신라 삼보를 대변할만한 새로운 보배의 기능을 하는 만파식적을 통해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높이고 지배층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만파식적 설화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았다.(김상현, 1999) 하지만 이와는 달리 신라 중고기의 삼보와 중대의 삼보(만파식적, 흑옥대, 현금)를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신라 하대가 되어도 중고기의 천사옥대와 중대의 만파식적이 함께 왕권의 상징으로 등장하므로 이는 곧 중고기의 보물과 중대의 보물을 함께 받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신종원, 2007)

여섯 번째로 만파식적 설화를 신화적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들이 있다. 우선 만파식적 설화는 신문왕의 성물(聖物) 획득을 목표로 하는 신비체험의 종교적 입사식을 나타낸다고 본 연구가 있다. 이것은 신문왕이 신화적 상황에서 용신과 접견하는 것을 신비체험 혹은 무당들의 성무(成巫)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장장식, 1986) 이외에도 만파식적 설화의 내용을 제의적 절차로 본 견해가 있다. 신문왕이 제의 공간인 대왕암에서 제의를 통하여 신적 존재인 용을 만나고, 용으로부터 세계의 질서를 운용할 수 있는 신물(神物)인 만파식적을 받아 나라를 신적 질서에 의해 통치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설화로 본 것이다.(한기호, 2001) 이밖에 만파식적 설화에서 건국신화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만파식적 설화는 통일신라 건국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문무왕의 신성성을 확인하는 신화이자 동시에 만파식적으로 상징되는 국가 안녕과 새로운 통치이념을 제시하는 신화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다만 이 설화는 새로운 통일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뿐 새롭게 국가의 구성원이 된 백제나 고구려의 유민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체계는 제시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서유석, 2005)

참고문헌

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김영태, 1973, 「萬波息笛說話攷」『東國大論文集』11.
서정범, 1975, 「方言에서 본 萬波息笛과 文武王陵」『韓國民俗學』8.
황패강, 1975, 『新羅佛敎說話硏究』, 일지사.
황수영, 1984, 「新羅梵鍾과 萬波息笛 說話」『新羅文化』1.
장장식, 1986, 「萬波息笛說話의 硏究」『國際語文』6․7合.
김상현, 1999,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한기호, 2001, 「<萬波息笛 說話> 硏究」『淵民學志』 9.
서유석, 2005, 「<萬波息笛>說話의 建國神話的 의미 연구」『人文學硏究』9,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신종원, 2007, 「신라의 세 보물과 만파식적․거문고」『일연과 삼국유사』, 일연학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
萬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 旋繞之備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飡>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占之 曰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 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晝爲二 夜合一[一云 山亦晝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振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 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如何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王驚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 時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吹此笛 則兵退病愈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至孝昭大王代天授四年癸巳 因失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를 파헤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내었으니,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하였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682) 5월 초하루에[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690)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또는 춘일(春日)]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그가 아뢰길 “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더니,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일설에는 산도 역시 밤낮으로 갈라지고 합침이 대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이 감은사로 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도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흑옥대(黑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이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같은 마음으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내어 저를 시켜 이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서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니 이 때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祇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보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대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癸巳, 693)에 실례랑(失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로 해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봉하여 이름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