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사

영흥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경주에 있던 신라 최초의 비구니 사찰

일반정보

영흥사(永興寺)는 신라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이 건립한 사찰로, 신라 최초의 비구니(比丘尼) 사찰(寺刹)이다. 이 사찰의 위치와 폐사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전문정보

영흥사는 『삼국유사』 권3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原宗興法厭髑滅身條)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22년인 535년에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조에 의하면, 영흥사는 조선시대까지도 경주부의 성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흥법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 의하면, 전불시대 칠처가람지 가운데 두 번째 가람터로 삼천기(三川岐)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곳이 영흥사라고 하였다. 삼천기는 글자 그대로 동에서 오는 문천(蚊川), 서에서 오는 모량천(牟梁川), 남에서 오는 인천(麟川)의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영흥사는 최초의 비구니(比丘尼) 사찰로서 유명하다. 특히 왕비가 출가하여 머물렀던 곳이었다. 『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의하면, “처음 역사를 일으켰던 을묘년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를 세우고 사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법명을 묘법이라 하였다.(初興役之乙卯歲 王妃亦創永興寺 慕史氏之遺風 同王落彩爲尼 名妙法)”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조에는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피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고 하였다. 그리고 진평왕 36년인 614년에는 “영흥사의 소불(塑佛)이 저절로 헐어지더니 얼마 안되어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돌아 가셨다”고 하므로, 법흥왕비와 진흥왕비가 모두 이 절과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김복순, 2002)

참고문헌

김복순, 2002, 「興輪寺와 七處 伽藍」『新羅文化』20.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三法興王 [名原宗 金氏 <冊>府<元>龜云 姓募 名秦 父智訂 母迎帝夫人 法興諡 諡號乎此 甲午立 理二十六年 陵在哀公寺北 妃<巴刀>夫人 出家名法流住永興寺 始行律令始行十<齋>日禁殺度□爲僧尼] 建元[丙辰 是年始置年號始此]
제23대 법흥왕 [이름은 원종이고, 김씨이다. 『책부원귀』에는 성을 모(募), 이름을 진(秦)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지정이고, 어머니는 영제부인이다. 법흥은 시호인데, 시호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오(514)에 즉위하여 26년간 다스렸다. 능은 애공사북쪽에 있다. 왕비는 파도부인으로 출가한 법명은 법류이고 영흥사에서 살았다. 처음으로 율령을 시행하였으며, 처음으로 십재일을 시행하여 살생을 금하고 승니가 됨을 허락하였다.] 건원 [병진(536) 이 해에 처음으로 연호를 설치하였는데, 연호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