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

감은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때에 완성된 사찰이다.

일반정보

감은사(感恩寺)는 현재의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었던 신라시대 사찰이다. 지금은 절터에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 두 개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인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의 뜻을 받들어 682년에 완성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쌍탑식 가람 양식으로 남북의 길이가 거의 유사한 정방형(正方形)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금당(金堂) 아래에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文武王)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상징적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감은사 본문 이미지 1
감은사 본문 이미지 2
감은사 본문 이미지 3
감은사 본문 이미지 4
감은사 본문 이미지 5
감은사 본문 이미지 6

전문정보

감은사(感恩寺)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위치해 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폐사되어 절터와 두 개의 탑만이 남아있다. 절터는 1959년 1차 발굴조사에서 대략적인 성격이 밝혀졌고, 1979년과 1980년의 2차 발굴조사로 전체적인 범위가 밝혀졌다. 조사결과 사찰은 처음 창건된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중건되었으며, 조선시대 초에서 중기 사이 어느 시기에 폐사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절터는 사적 제31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인용된 사중기(寺中記)에는 “문무왕(文武王)께서 왜병(倭兵)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어 해룡(海龍)이 되셨고, 그 아드님이신 신문왕(神文王)께서 즉위하시어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마쳤다.(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排)”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감은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불력(佛力)을 빌어 왜병을 격퇴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사찰로 그의 아들인 제31대 신문왕대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감은사의 건립에 참여한 승려에 관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다만 감은사의 창건이 용신(龍神)이라는 수호신 신앙에 바탕하고 있었으며 그 입지적 조건도 군사적인 요충지라는 점을 참고하여 신인종(神印宗)과의 관련성을 추측하기도 한다.(문명대, 1976) 또한 『삼국사기』 권38 잡지3 직관(職官) 상(上)에는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이라는 관부의 명칭이 보여 신라시대의 감은사가 성전사원(成典寺院)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감은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혜공왕 12년(776)과 경문왕 4년(864)에 각각 한 차례씩 신라 국왕이 거동하여 바다를 바라보고 제(祭)를 지내는 장소로 등장한다.

창건 당시의 절터는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쌍탑(雙塔), 금당(金堂), 강당(講堂) 순으로 배열된 전형적인 쌍탑식가람(雙塔式伽藍)이다. 중문과 강당을 잇는 사방에 회랑(回廊)을 돌렸고 금당과 양측 동서 회랑 사이로 익랑(翼廊)을 두었다. 이와 같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람 중심부의 크기는 남북 길이가 74m, 동서너비가 76m로 거의 정방형(正方形)에 가깝다. 금당은 정연하게 쌓아올린 2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의 사방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기단은 턱이 있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면석(面石)을 세우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架構式)이다.

금당의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유구(石造遺構)가 조사되었다. 이 구조물은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여 귀틀로 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다.(김재원·윤무병, 1961)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인용된 사중기(寺中記)에는 “금당(金堂) 섬돌 아래에는 동향(東向)으로 구멍 하나를 열었으니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릴 수 있는 설비라고 한다.(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당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수직으로 쌓은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으나 후대에는 서쪽 3칸이 축소되어 정면 5칸, 측면 4칸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좌우에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는 회랑(回廊)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중문 역시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면 3칸에 각각 2짝씩의 출입문을 달았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 전후면에 모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랑 중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20칸으로 되어 있으며,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인데, 남단에서 12번째 칸에 금당에서 연결되는 각각 7칸의 익랑(翼廊)이 연결된다. 이 회랑들도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으로 꾸며졌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시, 1997)

금당 앞 좌우에 남아 있는 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들은 2중기단 밖으로 탑구(塔區)가 돌려져 있는 3중기단의 형식을 취한 삼층석탑이다. 각 부분의 구성이 백제의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였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을 5단의 층으로 표현한 것 등이 목조가구를 모방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건립연대가 확실하여 현존하는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은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지정(至正) 11년(1351) 명문이 있는 청동반자(靑銅飯子),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2구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류, 벽돌류, 토기류, 자기류 등이 4,268점 출토되었다. 그리고 서쪽 석탑의 해체 복원시에는 그 내부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에 새겨진 조각양식이 특이하여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참고문헌

김재원·윤무병, 1961, 『感恩寺』, 국립박물관.
문명대, 1976, 「新羅 神印宗의 硏究」 『震檀學報』4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시, 1997,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 文武王 [名法敏 大宗之子也 母訓帝夫人 妃慈義一作訥王后 善品海干之女 辛酉立 治二十年 陵在感恩寺東海中]
제30 문무왕 [이름은 법민으로 태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훈제부인이다. 비는 자의, 혹은 자눌왕후라고 하는데 선품 해간의 딸이다. 신유년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 능은 감은사 동쪽 바다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