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훈

표훈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고승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고승으로, 『삼국유사』에는 제35대 경덕왕(景德王)대 대덕(大德)이었으며, 경덕왕의 부탁으로 천제(天帝)에게 왕의 후사를 청했고, 흥륜사(興輪寺)의 금당에 그려진 신라 10성(聖) 중 하나로, 의상의 제자였다고 전한다. 『화엄경』에 대해 나름의 주석을 붙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아울러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해석에서도 독특한 교학으로 일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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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표훈(表訓)은 화엄종(華嚴宗)의 고승으로,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에 따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대의 대덕(大德)이었으며 경덕왕의 부탁으로 천제(天帝)에게 왕의 후사를 청했다고 한다. 표훈은 하늘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왕에게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불가능하다는 천제의 말을 전했으나, 왕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다시 부탁하였다. 이에 표훈은 재차 하늘로 올라가 이를 청했는데, 이 때 천제는 딸을 아들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표훈에게도 다시는 하늘과 인간을 혼란시키면서 천기를 누설하는 일을 하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왕에게 이를 깨우쳤으나, 왕은 다만 나라가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게 된 것을 만족하였고, 후사로 태어난 혜공왕(惠恭王)은 여자가 남자로 된 것이기에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할 뿐이었다. 경덕왕은 태자가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이에 태후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정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하였고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혜공왕은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경신(金敬信: 원성왕)에 의해 시해되었고, 표훈 이후에 신라에는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외에도 권3 흥법3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조에 흥륜사 금당에 그려진 10성 중에 하나로 표훈이 등장하며, 권4 의해5 의상전교(義湘傳敎)조에는 표훈이 의상의 도제(徒弟) 즉 제자인 10대덕(大德) 중에 한 사람이었고,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있으면서 항상 천궁(天宮)에 왕래하였다.(訓曾住佛國寺 常往來天宮)”라고 전하고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표훈은 신라 경덕왕대의 승려로 의상의 10대 제자였으며 혜공왕의 탄생 문제에 깊이 관여한 것을 볼 때 경덕왕대 왕위 계승에 개입되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隨錄)』 권상지일(上之一)에서는 「대기(大記)」를 인용하여 표훈, 진정(眞定) 등 10여 덕(德)이 의상으로부터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배우고 난 후 표훈이 오관석(五觀釋) 사만의(四滿義) 등을 지었으며, 이는 표훈이 상원(上元) 원년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라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표훈의 생몰연대가 상원 연간과 관련 된다는 점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상원 연호는 당 고종(高宗, 재위 649-683)과 숙종(肅宗, 재위 756-762) 시기에 두 번 사용되었으며, 각각 674년과 760년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그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게 되었다. 먼저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隨錄)』의 내용과 표훈이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하나라는 기록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그가 의상의 제자인 점을 감안하면 표훈은 의상의 생존 연대인 625년부터 702년 사이에 황복사에 있었어야 하므로 상원 원년은 674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김상현, 1991) 즉 이 견해에서는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표훈의 생존연대와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가 가장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보면서, 상원 원년을 76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의 대덕은 나이 50세가 되면 7년의 기한을 정해 임명했다고 하므로, 표훈이 경덕왕대(742-765)에 대덕(大德)의 직에 있으려면 그의 생존 시기는 700년-760년 정도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가 황복사에 있었다는 상원 원년은 760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4의 의상전교조에는 표훈이 불국사에 있으면서 천궁을 왕래했다고 했으므로 그 상한은 불국사가 창건되기 시작하는 경덕왕 10년(751) 이후로 보아야 하고, 그 하한은 혜공왕이 태어나는 경덕왕 17년(758)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표훈이 대덕으로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표훈은 의상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으며 의상의 법손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김복순, 2002)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의 설화 내용을 보면 표훈은 혜공왕의 탄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표훈이 천제에게 청해 경덕왕이 아들을 얻도록 도와준 것은 표훈이 경덕왕의 전제주의를 도와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이기백, 1974) 그러나 이 설화의 내용은 표훈이 천제의 권위를 빌려 왕이 아들 얻기를 고집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일깨워주었음에도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다는 것이므로, 표훈은 경덕왕의 전제주의와는 관계가 없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표훈이 천궁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신라의 천신 신앙이 표훈에게 부회된 것으로, 이는 표훈이 당대에 천상을 왕래하는 법력이 있는 성인으로까지 이름나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김상현, 1991)

또는 표훈이 찾아갔다는 천제(天帝)는 곧 민심(民心)을 달리 나타낸 말이라고 보면서, 경덕왕의 입장에서 당시 신라 불교계의 대표격이었던 표훈에게 민심을 회유할 것을 부탁했던 내용이 이러한 설화로 표현된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표훈은 이를 받아들여 경덕왕을 도왔으나, 결국 경덕왕의 왕권강화 정책은 실패하고 표훈이 민심을 회유하는 일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최호석, 1998)

이외에 표훈이 혜공왕의 탄생에 깊숙이 관련하여 조야에 물의를 일으키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 황복사에 주석하게 되었으며, 이 때 그간의 행적에 회의를 품고 당시 새롭게 퍼지고 있던 의상계 화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표훈은 본래 황복사의 승려로써 유가(瑜伽) 계통이었는데 혜공왕의 탄생을 계기로 화엄종으로 전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표훈의 화엄교학에 대해서는 이를 알려주는 관련 저술이 따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사상을 알려주는 몇 가지 글이 있으며, 특히 균여(均如)가 지은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에는 표훈이 설한 삼본정(三本定)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표훈이 황복사에 있을 때 대정(大正) 각간이 삼본정(三本定)을 배우기를 청하자 “일시불(一時拂)이라는 것은 불화엄정(佛華嚴定)의 경문(經文)이고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는 것은 해인정(海印定)의 경문이며 좌사자좌(坐獅子座)라는 것은 사자분신정(獅子奮迅定)의 경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깨달아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점을 중생에게 교화하고자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켰다는 것으로, 위의 삼본정은 『화엄경(華嚴經)』에 대한 그의 요약된 설명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표훈이 『화엄경』에 대해 나름의 주석을 붙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해석에서도 독특한 교학으로 일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김복순, 2002)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김상현, 1991, 『新羅華嚴思想史硏究』, 민족사.
전해주, 1993, 『義湘華嚴思想史硏究』, 민족사.
최호석, 1998, 「경덕왕 설화 연구 -<삼국유사>의 서술 방식과 역사 인식을 중심으로-」『한국민속학』30.
김복순, 2002, 『한국 고대불교사 연구』, 민족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