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

강주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된 행정구역

일반정보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晉州)에 해당한다.

강주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晉州)에 해당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혜공왕조에서는 “대력연간(大曆年間, 766-779) 초에 강주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의 땅이 점점 꺼져서 못을 이루었다[어떤 책에는 큰 절의 동쪽 조그만 못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여, 당시의 이적(異蹟)을 전한다. 같은 일이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2년(766)조에 “강주(康州)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길이와 넓이가 50여 자나 되고 물빛은 검푸른 색이었다.(康州地陷成池 縱廣五十餘尺 水色靑黑)”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5 감통7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에서는 경덕왕대 강주에 선사(善士) 수십인이 서방(西方)을 구하려는 뜻으로 그 고을 경계에 미타사(彌陁寺)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세주에 강주를 진주(晉州), 혹은 강주(剛州)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에 순안(順安)이라고 하였다. 이외에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견훤조와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서도 강주(康州)을 언급하였다.

강주에 대한 연혁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강주(新羅康州)조에서 “강주(康州)는 신문왕 5년, 당나라 수공(垂拱) 원년(685)에 거타주(居陁州)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설치한 것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진주(晉州)이다. 영현(領縣)이 둘이었다. 가수현(嘉壽縣)은 본래 가주화현(加主火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굴촌현(屈村縣)은 지금(고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康州 神文王五年唐垂拱元年 分居州 置菁州 景德王改名 今晉州 領縣二 嘉壽縣 本加主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屈村縣 今未詳)”라고 하였다. 곧 강주는 본래 거타주의 일부로 경덕왕대에 이름을 강주로 고쳤으며 고려의 진주라는 것이다. 또 강주의 영현으로 가수현과 굴촌현이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신문왕 5년(685)조에는 “거열주(居列州)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고 하여 거타가 아니라 거열주로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경상도 진주목 건치연혁조에서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거타(居陁)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라고 하였다. 곧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과 지리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거거열성은 거타라고 세주를 달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의 거타는 거열주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거열주(居列州)는 현재의 전북 및 서부 경남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신문왕 5년에 완산주(完山州) 및 청주(菁州)의 2주를 설치하면서 거열주를 해체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정구복 외, 1997)

반면, 강주의 치소(治所)는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해당하는데, 진주는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 23년조에서 “가야의 자타국(子他國)이 있었는데, 562년 신라에게 멸망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강주거창군(新羅康州居昌郡)조에 “거창군(居昌郡)은 본래 거열군(居烈郡)[혹은 거타(居陁)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本居烈郡[或云居]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라고 하여 거열주의 치소는 거창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타와 거열이 같은 곳인 것으로 세주에 설명하여, 거타가 두 곳으로 기록된 것은 동명이지(同名異地)를 기록한 것이거나 치소의 이동을 보이는 기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三品彰英, 1979)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9, 『三國遺事考証(中)』, 塙書房.
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1997, 『譯註 三國史記』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惠恭王
大曆之初 康州官署大堂之東 地漸陷成池[一本 大寺東小池] 從十三尺 橫七尺 忽有鯉魚五六 相繼而漸大 淵亦隨大 至二年丁未 又天狗墜於東樓南 頭如瓮 尾三尺許 色如烈火 天地亦振 又是年 今浦縣稻田五頃中 皆米顆成穗 是年七月 北宮庭中 先有二星墜地 又一星墜 三星皆沒入地 先時宮北厠圊中二莖 蓮生 又奉聖寺田中生蓮 虎入禁城中 追覓失之 角干大恭家梨木上雀集無數 據安國兵法下卷云 天下兵大亂 於是大赦修省 七月三日 大恭角干賊起 王都及五道州郡幷九十六角干相戰大亂 大恭角干家亡 輸其家資寶帛于王宮 新城長倉火燒 逆黨之寶穀在沙梁牟梁等里中者 亦輸入王宮 亂彌三朔乃息 被賞者頗多 誅死者無算也 表訓之言國殆是也
혜공왕(惠恭王)
대력연간(大曆年間, 766~779) 초에 강주(康州)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의 땅이 점점 꺼져서 못을 이루니[어떤 책에는 큰 절의 동쪽 조그만 못이라고 하였다.] 세로가 13척(尺), 가로가 7척(尺)이었다. 홀연히 잉어 5,6마리가 서로 연속하여 점점 커지며 못도 따라서 커졌다. 2년 정미(丁未)에는 또 천구(天狗)가 동루(東樓)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하고 꼬리는 3척(尺) 가량이나 되며, 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았고, 하늘과 땅도 진동하였다. 또 이해에 금포현(今浦縣)의 논 5경(頃)속에서 모든 쌀알이 이삭을 이루었으며, 이해 7월에는 북궁(北宮) 뜰 안에 먼저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별 한 개가 떨어지더니, 별 세 개가 모두 땅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궁 북쪽 뒷간 속에서 두 줄기 연(蓮)이 나고, 또 봉성사(奉聖寺) 밭 속에서도 연이 났다. 범이 궁성(宮城) 안에 들어온 것을 찾다가 놓쳤다.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수없이 모이었다. 『안국병법(安國兵法)』 하권(下卷)을 보면 (이러한 일이 있으면) 천하에 큰 병란이 일어난다 했으므로, 이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왕이 자숙반성하였다. 7월3일에 각간 대공의 반란이 일어나고 왕도(王都) 및 5도주군(五道州郡)의 총 도합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보물과 비단 등 재산을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고, 사량(沙梁), 모량(牟梁) 등의 마을에 있던 역적의 보물과 곡식도 왕궁으로 실어 들였다. 난리는 석달만에 그쳤다. 상을 받은 사람이 많고 죽음을 당한 사람도 수없이 많았으니, 표훈(表訓)의 말에 나라가 위태하다 한 것이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