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양

긍양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생몰년: 878-956

일반정보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로, 희양산 봉암사를 중창한 선사였다. 속성은 왕씨이고 공주 출신이다. 공주 남혈원 여해선사 밑에서 삭발하고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계를 받았으며, 서혈원 양부선사를 만난 뒤 광화 3년(900) 중국으로 유학하였다. 후당 동광 2년(924) 7월 귀국하여 강주 백엄사에 머물다가, 폐허가 되어 있던 희양산 봉암사를 중창하여 이후 그곳에 머물렀다. 신라 경애왕에게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별호를 받았고, 고려 건국 후에는 태조, 혜종, 정종, 광종 등 4대에 걸쳐 존숭을 받았으며, 광종에게는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받았다. 고려 광종 7년(956) 입적하였으며 시호는 정진대사(靜眞大師), 탑명은 원오(圓悟)이다. 현재 경북 문경 봉암사에 그의 탑과 탑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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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긍양(兢讓)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따르면, 강주(康州)의 백엄사를 고쳐 짓고 주지를 하던 양부화상(陽孚和尙)이 917년 입적하자, 그 뒤 925년에 희양산(曦陽山) 긍양이 백엄사에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긍양의 뒤를 이어서는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의 신탁화상(神卓和尙)이 백엄사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긍양에 대해 백엄사 관련 내용만 짧게 기록하였지만, 긍양은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를 중창한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禪師)였다. 시호는 정진대사(靜眞大師), 탑명은 원오(圓悟)이며, 현재 문경 봉암사에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보물 제171호)과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이하 「정진대사비」)가 남아 있다. 이 비에 따라 긍양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긍양의 속성은 왕씨(王氏)로 공주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숙장(淑長), 아버지는 양길(亮吉)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긍양의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군읍(郡邑)의 토호였으므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여 긍양을 낳았는데, 그는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든 사람과 같이 점잖았다.

긍양은 공주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선사(如解禪師) 밑에서 삭발하였으며, 건녕(乾寧) 4년(897, 진성왕 10)에 계룡산 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계를 받았다. 이후 서혈원(西穴院) 양부선사(楊孚禪師)를 만났는데, 양부선사는 긍양을 반갑게 맞이하고 진심으로 접대했다고 한다. 광화(光化) 3년(900, 효공왕 3) 중국으로 건너가 석상경저(石霜慶諸, 807-888)의 제자 곡산(谷山) 도연화상(道緣和尙)에게 법을 묻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청량산(淸凉山, 오대산), 운개산(雲盖山), 동산(洞山) 등을 돌아보고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924) 7월 전주(全州) 희안현(喜安縣, 전북 부안군) 포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성(天成) 2년(927)에는 스승인 양부선사(楊孚禪師)가 주석하던 강주 백엄사에 머물렀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이 사신을 보내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별호를 올렸다.

긍양은 청태(淸泰) 2년(935) 희양산으로 가서 봉암사를 중창하였고, 이곳에 머물면서 선실(禪室)을 구축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희양산문을 확립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긍양은 스스로 개경에 가서 태조를 만났다. 이때 태조는 긍양과 더불어 대장경(大藏經)을 사경하여 개경과 서경에 나누어 안치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긍양은 제3대 정종(定宗, 재위 945-949)에게 마납가사(磨衲袈裟) 1벌과 사경한 의희본(義熙本) 『화엄경(華嚴經)』 8질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긍양이 봉암사에서 주로 한 일이 바로 대장경에 대한 연구였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이인재, 2005)

고려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 2년(951) 봄에는 왕의 친서를 받고 다시 개경에 갔다. 광종은 긍양을 영접하여 호국제석원(護國帝釋院)에 모신 뒤 특별히 공양을 올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도(政道)에 대해 물었고, 그 해 4월에는 사나선원(舍那禪院)으로 이주하게 하고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올렸다. 또한 「정진대사비」에는 광종이 그를 스승으로 삼는 예를 폈다는 내용이 있고, 비문의 서두에는 “고려국상주희양산봉암사왕사증시정진대사원오지탑비명병서(高麗國尙州曦陽山鳳巖寺王師贈諡靜眞大師圓悟之塔碑銘幷序)”라고 하였으므로 긍양이 광종대의 왕사였음을 알 수 있다.(박윤진, 2006) 긍양은 광순(廣順) 3년(953, 광종 4) 가을 봉암사로 돌아갔다고, 3년 후인 현덕(顯德) 3년(956, 광종 7) 8월 19일에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이상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긍양은 공주 남혈원 여해선사 밑에서 삭발하고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계를 받았으며, 서혈원 양부선사를 만난 뒤 중국으로 유학했다가 24년 만에 귀국하여 강주 백엄사에 머물렀고, 이후 폐허가 되어 있던 희양산 봉암사를 중창한 후 계속 그곳에 주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긍양의 문하에는 형초선사(逈超禪師)가 있었으며, 형초의 법맥을 이은 원공(圓空) 지종(智宗, 930-1018)은 법안종(法眼宗)을 크게 일으켰다.

그런데 『삼국유사』와 「정진대사비」의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긍양이 강주 백엄사로 들어온 연도에 대해, 『삼국유사』는 925년, 「정진대사비」에는 927년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긍양이 925년 백엄사로 가고자 하였으나 어떠한 사정으로 927년에야 그곳에 주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된 바 있다.(김두진, 2003) 또한 『삼국유사』에는 “희양산(曦陽山)” 긍양이 백엄사에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긍양이 925년에 희양산에서 백엄사로 들어왔다가 935년 무렵 다시 희양산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진대사비」에서는 긍양이 935년에 처음 희양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서술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정진대사비」의 내용을 신뢰하여 긍양이 935년에 희양산으로 처음 들어갔으므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후대의 착오라는 견해가 있었다.(추만호, 1992)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중시하면서, 긍양이 사상적으로 도헌을 추모하여 먼저 희양산에 머물렀다가 나중에 백엄사로 들어갔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한기문, 2007)

한편 『삼국유사』와 「정진대사비」에는 보이지 않지만, 긍양이 남원 백암수에서도 얼마간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이 견해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7에 보이는 “신라박암화상(新羅泊岩和尙)” 기록과 『염송설화(拈頌說話)』 권26에 보이는 “박암은 곧 지금의 박암개산조(泊巖開山祖) 긍양이며 또한 희양산(曦陽山) 조사(祖師)이다.”라는 설명을 참고하고 있다. 이 기록의 박암과 남원 백암수를 같은 곳으로 보면서 긍양이 이와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긍양이 입당하기 직전이나 귀국한 직후 남원 백암수에 있었거나 혹은 그 절을 창건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던 것이다.(김영태, 1979) 이후 이 의견을 참고하면서 긍양이 처음 중국에서 돌아와 백암수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본 견해(추만호, 1992)와 긍양이 유학 전 남원 백암사(백암수)에 머물면서 유학에 관해 준비하였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이인재, 2005) 등이 나왔다.

긍양이 중국에서 귀국한 후 강주 백엄사로 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먼저 이를 신라 공략의 전략적 교두보였던 강주 지역에 대한 견훤의 대종교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추만호, 1992) 이와 달리 긍양이 왕봉규(王逢規)를 비롯한 강주 호족의 초빙으로 백엄사에 왔다고 보기도 한다. 왕봉규는 신라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8년(924) 후당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경애왕 4년(927) 3월 후당 명종(明宗)으로부터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작을 받은 바 있다. 이 무렵 긍양은 신라로부터 봉종대사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으므로, 긍양이 강주 호족의 후원과 신라 왕실의 지원을 동시에 수용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이인재, 2005)

이 외 긍양에 대해 주목할 점은 법계(法系) 개정(改訂)에 관한 논의이다. 긍양은 도헌의 손제자(孫弟子)인데, 이 도헌의 법계가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이하 「지증대사비」)와 「정진대사비」에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지증대사비」에는 지증대사 도헌의 법계가 쌍봉도신(雙峰道信, 580-651)-법랑(法郞)-신행(愼行, 704-779)-준범(遵範)-혜은(慧隱)-지증(智證, 824-882)으로 이어져, 도헌이 북종선(北宗禪)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진대사비」에는 조계혜능(曺溪惠能, 638-713)-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강서도일(江西道一, 709-788)-창주신감(凔州神鑒)-쌍계혜소(雙磎慧昭, 774-850)-지증도헌(智證道憲)으로 이어져, 도헌이 남종선(南宗禪)의 법맥을 이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지증대사 도헌이 혜은에게서도 법을 받고 혜소에게서도 법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은 것이라고 이해된 바 있었다.(김영수, 1938) 또한 긍양이 북종선의 법계에 혜소를 추존하고 있는 것은, 원래 혜소가 북종선의 선사들을 자기의 제자로 많이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김정권, 1999)

그러나 「정진대사비」에 보이는 지증대사 도헌의 법계는 긍양에 의해 의도적으로 바뀐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긍양 자신이 중국에 가서 남종선법을 받아왔으므로, 남종선 계보를 강조하고 봉암사의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법계의 개정을 꾀했다는 것이다.(김영태, 1979) 또한 긍양이 고려 건국 후 왕실의 비위에도 맞고 자신의 명분에도 맞는 법맥을 제시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 측면에서 법계를 개정했다는 의견도 있다.(추만호, 1992) 최근에는 긍양에 의해 희양산문의 사상적 전통이 새로 수립되면서 남종선 계통의 법맥이 모색되었고, 또한 고려 초 교선융합의 사상경향이 나타나면서 다른 교파의 사상을 융합하기 위해 남종 조사선(祖師禪)을 보다 뚜렷이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긍양이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종계를 변화시킨 것이라고 이해된 바 있다.(김두진, 2003)

참고문헌

김영수, 1938, 「曺溪禪宗에 就하야-五敎兩宗의 一派, 朝鮮佛敎의 根源」『震檀學報』9.
김영태, 1979, 「曦陽山禪派의 成立과 그 法系에 대하여」『韓國佛敎學』4, 한국불교학회.
추만호, 1992, 「선종 법계 승계의 특징과 북종의 법계 변신」『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 실천.
김정권, 1999, 「新羅 下代 眞鑑禪師 慧昭의 身分과 活動-雙鷄山門의 成立과 관련하여」『湖西史學』27.
김두진, 2003, 「曦陽山門의 성립과 宗系의 변화」『淸溪史學』18.
이인재, 2005, 「선사(禪師) 긍양(兢讓; 878-956)의 생애와 대장경(大藏經)」『韓國史硏究』131.
박윤진, 2006, 『高麗時代 王師·國師 硏究』, 경인문화사.
한기문, 2007, 「新羅 下代 眞鑑禪師의 活動과 梵唄 敎化의 意義」『大丘史學』8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