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령

삼화령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경주 남산에 있는 고개

일반정보

경주 남산에 있는 고개로 신라 제28대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생의라는 중이 현몽(現夢)에 의해 남산의 남동(南洞)에서 석미륵을 찾아 삼화령(三花嶺)에 옮겨 안치하고는 선덕왕 13년 갑진(甲辰, 644)에 절을 짓고 후에 생의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대에는 충담사(忠談師)라는 스님이 이곳에 있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공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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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화령(三花嶺)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하나는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의 내용으로, 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는 해(765) 3월 3일에 귀정문에 행차하여 때마침 남쪽에서 오고 있던 충담사를 맞이해 차를 마시고 안민가를 받았는데, 이 때 충담사는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공양하고 오던 길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권3 탑상4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생의라는 중이 현몽(現夢)에 의해 남산의 남동(南洞)에서 석미륵을 찾아 삼화령에 옮겨 안치하고는 선덕왕 13년 갑진(甲辰, 644)에 절을 짓고 후에 생의사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또한 생의사라는 절 이름에 대한 『삼국유사』 찬자의 주기에 의하면 이 생의사석미륵이 바로 충담사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차를 공양하던 존상(尊像)이라는 것이다. 두 기록을 연결해 보면 충담사가 차를 공양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은 곧 생의사 석미륵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삼화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기록에 보이는 삼화령 미륵세존과 관련하여 일찍이 논의된 바 있다. 즉 이 미륵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장창골석조미륵삼존불상((長倉谷石造彌勒三尊佛像)과 같은 것으로 보고 이 불상이 출토된 장창골 산릉(山稜)의 석실 소재지를 삼화령이라고 이름붙였던 것이다. 이 불상은 의좌형(倚坐形) 여래상과 좌․우 협시보살입상이 각각 따로 발견되었는데, 여래상은 경주 남산의 장창골을 동북으로 따라 올라간 산릉(山稜)의 석실 안에서 발견되어 1925년 4월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와 비슷한 때에 경주 내남면 월남리(현 경주시 탑동)의 민가에서 보살입상 2구를 발견하여 또한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민가에서 찾아낸 두 보살입상은 먼저 박물관으로 옮겨진 여래상과 조각 수법이 동일하며, 처음 이 불상을 발견한 사람들 역시 본래 여래상의 좌우에 협시보살이 각 1구씩 서있던 것을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고 증언하여, 여래상과 협시보살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삼존불로 판명되었다.(황수영, 1989) 이 불상은 그동안 “삼화령 미륵삼존불” 또는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이 불상을 『삼국유사』의 삼화령 미륵세존 및 충담사가 차를 공양했다는 존상(尊像)과 동일시하는 위의 견해를 따른 것이었다.

이 장창골 석조미륵삼존불을 『삼국유사』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의 삼화령 미륵세존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그 조성연대를 선덕여왕 13년(644)으로 추정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미륵세존이 안치된 남산의 (삼화) “영상(嶺上)”은 충담사가 차를 공양하고 “남쪽으로부터 왔다(從南而來)”는 표현으로 보아 신라 왕궁인 반월성의 서쪽인 귀정문(歸正門)의 누각에서 보아 남쪽으로 생각되며, 남산에서도 도성과 가까운 남산의 북쪽 봉우리 부근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통일 이전의 고신라 불상은 도성에서 멀지 않은 북쪽 봉우리 일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남산의 남동에서 파내어 “영상(嶺上)”에 안치하였다는 기록 내용으로 보아 이 석상은 마애불이 아니라 운반 가능한 석상이며 남산에서 고개 위에 안치된 삼국시대의 고석불은 장창골 석조삼존불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이다. 3)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 이 불상의 명칭을 “미륵세존”이라 하였는데, 세존은 곧 여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장창골 석조삼존불의 본존이 여래라는 점과 일치하며, 본존이 여래형인 경우 나아가 양협시의 보살을 넣어 삼존을 이루는 것은 당시의 정형이며 유행이기 때문이다. 4) 삼존에 보이는 양식이 육조(六朝) 말인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조상양식과 유사하며 그 위에 다시 수(隋)의 양식을 농후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 4)의 양식 문제는 불상의 연대 추정에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나, 사실 『삼국유사』의 삼화령 기록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양식비교를 통해서는 불상 조성의 절대 연대(644년)를 추정할 수 없다. 그리고 1)의 경우 선덕왕 13년 미륵세존이 안치된 곳이 도성에서 가까운 남산의 북쪽 봉우리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분명히 남산의 “남동(南洞)”에 매장되어 있던 미륵세존을 파내어 “영상(嶺上)”에 안치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차이가 있다. 또한 2)에서 남산의 고개 위에 안치된 삼국시대의 고석불은 장창골 삼존석불이 유일하다고 하였지만 이 또한 현존하는 석불의 경우일 뿐이며 그 사이에 조성되었다가 산실된 석불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삼화령 미륵세존을 장창골에서 출토된 삼존불과 같은 것으로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삼화령의 위치를 기존의 장창골 고갯마루가 아닌 금오산정 남쪽 봉우리인 용장계의 13사지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곳은 우선 남산의 남쪽 고개로써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의 “(남)산의 남동(南洞)” 기록과 연결되며, 그 형세가 삼화령(三花嶺)이라는 명칭과도 부합한다고 한다. 즉 이곳은 금오산(남산)과 고위산 사이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이 봉우리는 용장사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과 남으로 뻗어내려 수리산으로 연결되는 산맥, 금오산에서 굽이쳐오는 산맥 등 세 갈래의 산맥이 모여져 꽃봉오리처럼 솟아오른 모양이므로 삼화령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지름 2m가 넘는 대연화대좌(大蓮花臺座)가 새겨져 있으며 대좌에서 동남쪽으로 70m 떨어진 곳에 비석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고 대좌의 남쪽 계곡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축대도 있다. 따라서 이 연화대좌에 미륵세존이 모셔졌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곳을 생의사가 창건되었던 『삼국유사』의 삼화령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제시대의 사진을 보면 1940년대까지 연화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석불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小場恒吉, 1940), 다만 그 불상이 대좌에 비해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에 원래 이 대좌와 쌍을 이뤘던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윤경렬, 1979)

참고문헌

小場恒吉, 1940, 『慶州南山の佛蹟』, 조선총독부.
윤경렬, 1979, 『慶州南山古蹟巡禮』, 경주시.
황수영, 1989, 『韓國의 佛像』, 文藝出版社.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