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울주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현재 울산광역시 일대의 옛 명칭

일반정보

현재 울산광역시 일대의 옛 명칭이다

울주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는, 개운포(開雲浦)가 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울주(蔚州)라는 세주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신라(新羅) 양주(良州) 임관군(臨關郡)조에 의하면, “하곡현(河曲縣)은 파사왕 때 굴아화촌(屈阿火村)을 빼앗아 현(縣)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 울주(蔚州)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권57 지(志)11 지리(地理)2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울주(蔚州)는 원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서 신라 파사왕이 이것을 탈취하여 현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은 이것을 하곡(河曲)으로 고쳐서 임관군(臨關郡)의 관할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방어사를 두었다.[경덕왕은 우화현(于火縣)을 우풍현(虞風縣)으로, 율포현(栗浦縣)을 동진현(東津縣)으로 고쳐서 다 이 주에 합쳤다. 태조 때에 이 군 사람인 박윤옹(朴允雄)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하곡(河曲), 동진(東津), 우풍(虞風) 등 현을 합하여 흥례부(興禮府)를 설치하였고 후에 낮추어서 공화현(恭化縣)으로 하였다가 다시 지울주사(知蔚州事)로 고쳤다. 신라 말에 학이 날아 와서 울었으므로 신학성(神鶴城)이라고도 하며 계변성(戒邊城), 개지변(皆知邊) 또는 화성군(火城郡)이라고도 한다.] 학성(鶴城)[성종이 정한 명칭이다]이라고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경상도(慶尙道) 울산군(蔚山郡) 건치연혁조에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파사왕(婆娑王)이 처음으로 현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하곡(河曲)이라 이름을 고쳐서 임관군(臨關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태조가 그 고을 사람 박윤웅(朴允雄)이 공이 있다 해서 동진(東津)과 우풍(虞風)의 두 고을을 가져다가 합쳐서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낮추어서 공화현(恭化縣)을 만들었고, 또 지울주사(知蔚州事)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이 방어사를 두었다. 조선 태조(太祖) 6년(1397)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서 지주사를 겸하게 했다. 태종 13년(1413)에 진을 없애고 지금 부르는 지군사(知郡事)로 이름을 고쳤다. 15년(1415)에 군의 치소를 좌도병마도절제사(左道兵馬都節制使)의 영(營)으로 삼았다. 세종(世宗) 8년(1426)에 군의 치소를 영 서쪽 7리 밖으로 옮겼고, 뒤에 영을 없애고 다시 진을 두었으며, 병마첨절제사로서 지군사를 겸하게 했다. 19년(1437)에 도호부로 승격시켜 다시 좌도절제사 겸 판부사로서 판관을 두었으며, 이해에 다시 낮추어서 군으로 만들었다.”

이들 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신라 때에는 하곡현(河曲縣)이었는데, 고려 태조 때에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이 있다는 이유로 하곡현, 동진현, 우풍현을 아울러 흥례부(興禮府)를 설치하였으며, 후에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울주(蔚州)로 고쳤다. 조선 태종이 울산군(蔚山郡)으로 이름을 고치고 군치(郡治)를 좌도병마도절제사영(左道兵馬都節制使營)으로 만들었으며, 세종이 군치(郡治)를 영(營)의 서쪽 7리로 옮겼다.

이 울산지방 호족(豪族)의 자제가 처용이라는 설이 있다.(이우성, 1969) 이 설은 나말여초의 역사적 대세를 잘 설명해 주고 있으나, 울산에 동해용(東海龍)으로 여겨질 만한 호족(豪族)이 헌강왕대에 있었는지 의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곧, 울산(蔚山)은 탈해(脫解) 이래로 신라와 긴밀하였고, 법흥왕대에는 그곳 서석곡(書石谷)으로 피서를 갈 만큼 왕실이 친근하게 여기던 지방이다. 따라서 울산에 대한 신라 정부의 장악력은 매우 높았다고 생각되며, 치안상 문제가 없으므로 현지에 왕의 행재소(行在所)를 설치하여 숙식을 하며 해변을 유람했을 것이다. 헌강왕대까지는 국왕의 통치기능이 대체로 제대로 확보되어 있었고, 호족이 드러내놓고 세력을 떨치는 시기는 아니므로, 경주의 앞마당이라고 할 울산에 왕의 행차를 혼란케 할 만한 저항적인 대호족이 웅거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김기흥, 2001)

참고문헌

이우성, 1969, 「三國遺事 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 -高麗 其人制度의 起源과의 關聯에서-」『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김기흥, 2001, 「新羅 處容說話의 역사적 진실」『歷史敎育』8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創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辟>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大王)은 개운포(開雲浦)[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 유람하였다. 왕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여,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용(東海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뜻이 머무르게 하고자 하였고, 또 급간(級干)의 관직(官職)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것을 피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돌아와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점지하여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는데,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이름하였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는 보지 못했으나, 왕만 홀로 그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이 몸소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神)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혹은 이미 신(神)이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본떠 새겨서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 한다고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는 그 형상으로 그를 일컬은 것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신(北岳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므로, 옥도검(玉刀鈐)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이름하였다.『어법집(語法集)』에 이르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 등이라고 하였다.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都邑)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이른다. 이에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여겨 탐락(耽樂)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