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포

율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지금의 울산광역시 지역으로 신라시대의 지명

일반정보

지금의 울산광역시 지역으로 신라시대의 지명이다. 경덕왕 때 율포현(栗浦縣)에서 동진현(東津縣)으로 바뀌었다.

율포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 김제상조에는 제상이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있던 보해(寶海)를 구출한 후, 왕이 왜에 인질로 잡혀 있던 또 다른 동생인 미해(美海)도 보기를 원하자 다시 미해를 구해오기 위해 율포(栗浦)에서 출발하여 왜국으로 향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율포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지역으로 『삼국사기』권34 지리지1 임관군(臨關郡)조에는 “동진현은 본래 율포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울주에 합하였다(東津縣本栗浦縣 景德王改名 今合屬蔚州)”라고 하였다. 율포현은 경덕왕대에 동진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고려 때에는 하곡현(河曲縣)과 더불어 울주(蔚州)에 속하였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 김제상)
奈勿王[一作那密王] 金堤上
第十七那密王 卽位三十六年庚寅 倭王遣使來朝曰 寡君聞大王之神聖 使臣等以告百濟之罪於大王也 願大王遣一王子 表誠心於寡君也 於是王使第三子美海[一作未<叱>喜] 以聘於倭 美海年十歲 言辭動止猶未備具 故以內臣朴娑覽爲副使而遣之 倭王留而不送三十年 至訥祗王卽位三年己未 句麗長壽王 遣使來朝云 寡君聞大王之弟寶海 秀智才藝 願與相親 特遣小臣懇請 王聞之幸甚 因此和通 命其弟寶海 道於句麗 以內臣金武謁爲輔而送之 長壽王又留而不送 至十年乙丑 王召集群臣及國中豪俠 親賜御宴 進酒三行 衆樂初作 王垂涕而謂群臣曰 昔我聖考 誠心民事 故使愛子東聘於倭 不見而崩 又朕卽位已來 隣兵甚熾 戰爭不息 句麗獨有結親之言 朕信其言 以其親弟聘於句麗 句麗亦留而不送 朕雖處富貴 而未嘗一日暫<忘>而不哭 若得見二弟 共謝於先主之廟 則能報恩於國人 誰能成其謀策 時百官咸奏曰 此事固非易也 必有智勇方可 臣等以爲歃羅郡太守堤上可也 於是王召問焉 堤上再拜對曰 臣聞 主憂臣辱 主辱臣死 若論難易而後行 謂之不忠 圖死生而後動 謂之無勇 臣雖不肖 願受命行矣 王甚嘉之 分觴而飮 握手而別 堤上簾前受命 徑趨北海之路 變服入句麗 進於寶海所 共謀逸期 先以五月十五日 歸泊於高城水口而待 期日將至 寶海稱病 數日不朝 乃夜中逃出 行到高城海濱 王知之 使數十人追之 至高城而及之 然寶海在句麗 常施恩於左右 故其軍士憫傷之 皆拔箭鏃而射之 遂免而歸 王旣見寶海 益思美海 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時堤上聞此言 再拜辭朝 而騎馬不入家 而行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行至倭國 詐言曰 雞林王以不罪殺我父兄 故逃來至此矣 倭王信之 賜室家而安之 時堤上常陪美海遊海濱 逐捕魚鳥 以其所獲 每獻於倭王 王甚喜之 而無疑焉 適曉霧濛晦 堤上曰 可行矣 美<海>曰 然則偕行 堤上曰 臣若行 恐倭人覺而追之 願臣留而止其追也 美海曰 今我與汝如父兄焉 何得棄汝而獨歸 堤上曰 臣能救公之命 而慰大王之情 則足矣 何願生乎 取酒獻美海 時雞林人康仇麗在倭國 以其人從而送之 堤上入美海房 至於明旦 左右欲入見之 堤上出止之曰 昨日馳走於捕獵 病甚未起 及乎日昃 左右怪之 而更問焉 對曰 美海行已久矣 左右奔告於王 王使騎兵逐之 不及 於是囚堤上問曰 汝何竊遣汝國王子耶 對曰 臣是雞林之臣 非倭國之臣 今欲成吾君之志耳 何敢言於君乎 倭王怒曰 今汝已爲我臣 而言雞林之臣 則必具五刑 若言倭國之臣者 必賞重祿 對曰 寧爲雞林之犬imagefont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雞林之箠楚 不受倭國之爵祿 王怒 命屠剝堤上脚下之皮 刈蕪葭使趨其上[今蕪葭上 有血<痕> 俗云 堤上之血] 更問曰 汝何國臣乎 曰 雞林之臣也 又使立於熱鐵上 問 何國之臣乎 曰 雞林之臣也 倭王知不可屈 燒殺於木島中 美海渡而來 使康仇麗先告於國中 王驚喜 命百官迎於屈歇驛 王與親弟寶海迎於南郊 入闕設宴 大赦國內 冊其妻爲國大夫人 以其女子爲美海公夫人 識者曰 昔漢臣周苛在榮陽 爲楚兵所虜 <項>羽謂周苛曰汝爲我臣 封爲萬祿<侯> 周苛罵而不屈 爲楚王所殺 堤上之忠烈 無怪於周苛矣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나물왕(奈勿王)[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한다] 김제상(金堤上)
제17대 나밀왕이 즉위한 지 36년 경인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와 내조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신성함을 듣고 신들에게 백제의 죄를 대왕에게 아뢰도록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은 왕자 한 명을 보내 저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셋째 아들 미해[미질희라고도 한다]를 시켜 왜를 방문하게 하였다. 미해는 나이가 10살이라 말이나 행동이 아직 갖춰지지 못하여 내신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같이 보냈는데, 왜왕이 억류하여 30년 동안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즉위 3년 기미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아우인 노해가 지혜롭고 재주가 있음을 듣고 서로 친하기를 원해서 특별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이라고 여겨 이로 인하여 화친을 맺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가게하고,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장수왕도 또한 억류하여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 을축에 이르러 왕이 신하들과 국내의 호걸·협객을 불러 모아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번 돌고 여러 음악이 시작되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전에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한 정사를 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으로 왜국에 사절로 보냈다가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즉위한 이래 이웃 나라의 군사가 심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만이 친교를 맺자는 말을 하므로 내가 그 말을 믿고 내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더니, 고구려 역시 억류해두고 보내지 않았다. 내가 비록 부귀를 누리지만 하루라도 잊고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서 함께 선왕의 사당에 참배할 수 있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것이니 누가 능히 그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때 백관이 모두 아뢰기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들은 삽라군의 태수 제상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불러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이 어렵고 쉬운 것을 헤아린 후에 행한다면 그것은 충성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도모한 후에 움직인다면 그것은 용기가 없다고 할 것이니, 신은 비록 불초하오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심히 가상히 여겨 술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고 작별하였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령을 받고 곧장 북해의 길로 가서 변복을 하고 고구려에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함께 도망할 날짜를 모의하고, 먼저 5월 15일 고성의 수구로 돌아와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지자 보해가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다가 밤중에 몰래 도망쳐 고성의 해변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시켜 뒤쫓게 하여 고성에 이르러 따라 잡았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에 항상 상종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를 매우 동정하여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았으므로 마침내 살아서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보게 되자 더욱 미해의 생각이 나서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좌우에게 말하기를 “마치 한 몸에 팔 하나와 한 얼굴에 눈 하나만 있는 것만 같아서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다른 하나가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재배하여 조정과 하직하고 말을 타고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길을 떠나 곧장 율포의 해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소문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지만, 남편은 이미 배를 타고 있었다. 아내가 안타깝게 불렀으나 남편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멈추지 않았다. 왜국에 이르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이 나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기로 도망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왜왕은 그 말을 믿고 집을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 때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서 놀면서 새와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잡은 것을 매번 왜왕에게 바치니, 왕이 무척 기뻐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제상이 말하기를 “떠나가실만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미해가 “그러면 같이 가자”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이 알고 쫓아올까 염려되오니, 원컨대 신은 이 곳에 남아서 그들이 쫓는 것을 막을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미해가 “지금 나와 그대의 사이는 부형과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혼자만 돌아가겠는가?” 라고 하니, 제상이 말하길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고 술을 따라 미해에게 바쳤다. 이 때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으므로, 그에게 미해를 따라 호송하게 하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좌우의 왜인들이 들어가 미해를 보고자 하니, 제상이 나와서 그들을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제 사냥을 하면서 쏘다녔기 때문에 몹시 고단하여 일어나지 못하십니다”라고 하였다. 한낮이 지나자 왜인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미해가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왜인들이 급히 왕에게 아뢰니, 왕이 기병으로 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의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지금 내 임금의 뜻을 이루려 한 것뿐이니, 감히 무엇을 그대에게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오형을 받을 것이다.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후한 녹으로 상을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장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걸어가게 하였다.[지금 갈대 위에 핏자국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한다.] 다시 묻기를 “어느 나라의 신하냐?”라고 하니,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뜨겁게 달군 쇠 위에 세워 놓고 묻기를, “어느 나라 신하냐?”고 하니,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왜왕이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란 곳에서 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와 강구려에게 먼저 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왕은 놀랍고 기뻐서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에서 맞이하고, 대궐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제상의 아내를 책봉하여 국대부인으로 삼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논자가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신하 주가가 형양에 있다가 초나라 병사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항우가 주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면 만호의 녹을 받는 제후로 책봉하리라’고 하니, 주가가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다가 초왕에게 살해되었는데, 제상의 충렬은 주가에 못지않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었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