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현

가은현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후백제시조 견훤의 출신지

일반정보

후백제시조 견훤의 출신지로 기록된 곳이며,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이며, 가은현은 상주와 함창 부근이었다고 비정된다.

가은현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견훤조에는 『삼국사(三國史)』본전을 인용하여 가은현을 후백제시조 견훤의 출신지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1 상주(尙州) 고령군(古寧郡)조에 따르면 “고령군(古寧郡)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또는 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녕군(咸寧郡)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가선현(嘉善縣)은 본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가은현(加恩縣)이다.(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 爲古冬攬郡一云古陵縣 景德王改名 今咸寧郡 領縣三 嘉善縣 本加害縣 景德王改名 今加恩縣)”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 속현조에는 “가은현(加恩縣) 현의 남쪽 4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이름을 가선(嘉善)이라 고쳐 고령군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이 현에 내속(來屬)되었다.(加恩縣 在縣四十一里 本新羅加害縣 景德王改名嘉善 爲古寧郡領縣 高麗改今名 顯宗屬尙州 恭讓王時來屬)”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시대에는 가은현이 상주 관내의 고령군(古寧郡)에 속해 있었으며, 그 지명이 가해현이었다가 경덕왕 때에 가선현으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가은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으로 삼았으며, 뒤에 공양왕이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겨 속하게 하였다. 신라시대의 고령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이며, 가은현은 상주와 함창 부근이었다고 비정된다.(강인구 외, 2002)

이 지역에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견훤산성(甄萱山城)이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표고 약 400m의 속칭 장바위산을 에워싼 성벽 길이 약 1㎞의 석성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산의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 해서 견훤산성이라 불린다. 가장 잘 남은 성벽은 너비 6m, 높이 15m나 되며,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를 정연하게 단을 이루며 쌓았는데 안팎을 동시에 구축한 협축법(夾築法)으로 되어 있다. 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네 귀퉁이에 높다란 망대(望臺)가 설치되었다. 현재 서쪽은 대부분 파괴되어 흔적만 남은 상태이고,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2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성벽 둘레는 650m이고, 높이는 7-15m이며, 너비는 4-7m이다. 이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한편 산성의 안쪽에서는 기와편이나 토기편 등이 다량 출토되고 있어서 제법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주읍지(尙州邑誌)』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하였으며,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산성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 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정영호, 1969)

참고문헌

정영호, 1969, 『尙州地區 古蹟調査 報告書』, 단국대학교출판부.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 『譯註 三國遺事』Ⅱ, 이회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後以甄爲氏 父阿慈个以農自活 光啓中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皆知名於世 萱號傑出多智略 李<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諡曰白□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珎 妻王咬巴里生角干元善 是爲阿慈个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盖 四子寶盖 五子將軍小盖 一女大主刀金 又古記云 昔一富人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刺其衣 從之 至明尋絲於北牆下 針刺於大蚯蚓之腰 後因姙生一男 年十五自稱甄萱 至景福元年壬子稱王 立都於完山郡 理四十三年 以淸泰元年甲午 萱之三子<簒>逆 萱投太祖 子金剛卽位 天福元年丙申 與高麗兵會戰於一善郡 百濟敗績國亡云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國權綱紀紊弛 加之以飢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於是萱竊有(叛)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 遂襲武珎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 龍<紀>元年己酉也 一云景福元年壬子 是時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喜得人心 謂左右曰 百濟開國六百餘年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舡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 卷土歷黃山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予今敢不立都以雪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貞明四年戊寅 鐵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陽和陰剋 獻驄馬於太祖 (同)(光)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 未決勝負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攻取居西[今未詳]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都督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疑故殺 卽囚王信 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天成二年丁亥九月 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燒之 新羅王求救於太祖 太祖將出<師> 萱襲取高鬱府[今蔚州] 進軍<於>始林[一云雞林西郊] 卒入新羅王都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時 由是甚敗 萱强引夫人亂之 以王之族弟金<傅>嗣位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之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而不與相抵 使盈其貫 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京山府康州攻缶谷城 又義成府之守洪述拒戰而死 太祖聞之曰 吾失右手矣 四十二年庚寅 萱欲攻古昌郡[今安東] 大擧而石山營寨 太祖隔百步而郡北甁山營寨 累戰萱敗 獲侍郞金渥 翌日萱收卒襲破順城 城主元逢不能禦棄城宵遁 太祖赫怒 貶爲下枝縣[今豊山縣 元逢本順城人故也] 新羅君臣以衰季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萱聞之 又欲入王都作惡 恐太祖先之寄書于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宗社丘墟 僕是以先著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奸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表弟 <憲>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都頭索湘束手星山陣下 月內左將金樂曝骸美利寺前 殺獲居多 追禽不小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久通和好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免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誡 無後悔之自貽 (天)(成)二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使班尙書所傳詔旨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爰到制書 尺素好音兼蒙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托廻軒 輒敷危袵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其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爲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癸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乃交兵 足下始輕敵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永世歡和 苟或渝盟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卽我有大德於南人也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侵害於生民 狼虎之狂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奸
후백제 견훤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咸通, 860-873) 8년 정해(丁亥, 867)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광계(光啓, 885-887)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이 뛰어났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하였다.『이제가기(李磾家記)』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夫人)이다. 그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인 각간(角干) 작진(酌珎)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며,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고 하고 있다. 또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光州) 북촌에 살았는데, 하나 있는 딸의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들어와 관계를 합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이르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꿰어 두어라.”라고 하여,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하였다. 경복(景福, 892-893) 원년 임자(892)에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3년 청태(淸泰, 934-936) 원년 갑오(934)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므로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가서 항복했다. 아들 금강(金剛)이 즉위한 후 천복(天福, 936-943) 원년 병신(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 패하니 후백제는 멸망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나르느라고 아기를 수풀 아래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주었다. 이 말을 듣자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집이 크고 외모가 기이하게 생겼으며, 기품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켰는데, 창을 베개 삼아 적군을 대비하였으니 그의 기상은 늘 사졸(士卒)의 선두에 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 원년은 신라의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있어 국권을 농간하므로 기강이 문란해졌다. 게다가 기근이 겹치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쪽 주현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려 5천의 무리가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珎州)를 습격하여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하였다. 이때가 용기(龍紀, 889) 원년 기유(889)였는데,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의 세력이 강성하니 궁예(弓裔)는 자진하여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자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며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백제가 개국한 후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 명으로 바다를 건너왔으며, 신라의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지나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내가 어찌 나라를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하니, 이때는 광화(光化, 898-901)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었다. 정명(貞明, 915-920) 4년 무인(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사자를 보내 경하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화살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표면상으로는 화친하는 체 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 되었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同光, 923-925) 3년(925) 겨울 10월에는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지금은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낼 수 없었다. 태조는 잠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청했다.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자 견훤도 역시 그의 외생질(外甥姪) 진호(眞虎)를 보내어 교환했다. (동광 3년)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지금은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자를 보내어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이에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 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 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을 2500호로 했다. (동광) 4년(926)에 갑자기 진호가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하여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청했다. 태조는 웃으며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926-930) 2년 정해(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서 빼앗고 그 성을 불사르니,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가 장차 출병하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울주(蔚州)]를 습격하여 빼앗고 시림(始林)[또는 계림(雞林)의 서쪽 교외]에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신라왕은 이 때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끌어다 강제로 욕보이고, 왕의 친족 아우인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을 잇게 하였다. 그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또 신라의 진귀한 보물과 병기를 빼앗고 자녀들과 각종 공인(工人) 중에서 우수한 자들을 끌고 갔다. 태조는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인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모든 군사들이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하여 견훤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많은 죄악을 범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이긴 기세를 몰아 견훤은 대목성(大木城)[지금의 약목(若木)]‧경산부(京山府)‧강주(康州)를 노략질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義成府)의 태수 홍술(洪述)은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듣자 태조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오른쪽 손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견훤이 즉위한 지) 42년 경인(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安東)]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켜서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태조는 100보 가량을 서로 떨어져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진을 쳤다. 여러 번 싸워서 견훤이 패했으며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 잡았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성(順城)을 습격하자, 이를 막지 못한 성주 원봉(元逢)은 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이에 몹시 노한 태조는 그 고을을 격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니, 원봉은 본래 순성 사람인 까닭이다.]으로 삼았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망해 가는 상황에서 부흥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후원을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이 다시 신라의 서울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足下, 고려 태조를 이름)를 장차 서울로 불러들이려 함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묘와 사직을 폐허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까닭에 먼저 진(晉)나라 사람인 조적(祖逖)의 말채찍을 쥐고, 단신으로 수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들에게 밝은 태양처럼 맹세했고, 6부 백성들에게는 옳은 교화로써 타일렀다. 뜻밖에 간신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나는 변고가 생겼다.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外從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을 잇게 하여 이제야 자리가 잡혔다. 그런데도 족하는 나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한갓 떠도는 말만을 믿어, 온갖 계책으로 틈을 노리고 여러 곳으로 침범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밑에서 항복했고, 또 그 달 안에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하였다. 이밖에도 죽은 자와 사로잡힌 자가 많았으며 추격을 받아 붙잡힌 자도 적지 않았다. 이렇듯 강함과 약함이 분명하니 누가 이기고 질 것인가는 알만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내 말에게 먹이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의 조서를 전하기를, ‘경은 오랫동안 고려와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이로서 함께 선린의 맹약을 맺은 줄 알았다. 근래에 양편의 볼모가 죽어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관계를 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을 멈추지 않으므로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나라로 가게하고 또한 고려에도 글을 보냈으니 마땅히 서로 친목하여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로서는 왕실을 높이는 데에 돈독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데에 전념해 오던 차에 이제 오월왕의 조칙을 듣고 즉시 받들려고 한다. 하지만 족하(고려 태조를 이름)가 싸움을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가 없어서,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는 것을 걱정하는 바이다. 이제 그 조서를 베껴 보내니 청컨대 유의하여 자세히 살피기 바란다. 토끼와 사냥개가 함께 지치면 마침내는 필시 남의 조롱을 받으며,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마땅히 미혹함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부르지 않도록 하라.” 천성 2년(927)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삼가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전한 조서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견훤을 이름)가 준 편지도 받아 보았다. 삼가건대 사신의 행차 편에 전달된 조서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편지에서 아울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고 보니 비록 감격이 더하였지만, 당신(견훤을 이름)의 편지를 펴보고서는 의심스러운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직권을 맡아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다. 지난번에 삼한(三韓)이 액운을 당하고, 모든 국토가 흉년으로 황폐해져서, 백성들이 모두 황건적에 들어가고, 논밭은 모두 거둘 곡식이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무릇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고자 이에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국토가 농사와 잠상(蠶桑)으로 생업을 즐기고, 사졸은 7,8년 동안은 한가로이 쉬었다. 계유년(癸酉年)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기므로 곧 싸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족하가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곧장 달려드는 것이 마치 버마재미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수레를 막으려 함과 같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감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도 같았다. 손을 모아 인사하고는 공손히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여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도 또한 창칼을 쓰지 않는 무(武)를 숭상하고, 생명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마침내 여러 겹으로 포위했던 것을 풀고 지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내는 일도 거절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이 편안해지도록 하려 하였다. 이는 내가 남쪽의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는데, 어찌 맹약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행동을 다시 할 줄 알았으랴! 벌과 전갈은 독이 있어 미물이면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쳤고, 이리나 범과 같은 광포한 행동은 서울 땅을 가로막았다. 금성(金城)이 궁색하여 위급해졌고, 왕실은 몹시 놀라 흔들렸으나, 누가 패도(覇道)를 이룬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처럼 대의에 의거하여 주(周)나라를 떠받들겠는가? 다만 기회를 보아 한(漢)나라를 도모하고자 하던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