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

혜공왕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제36대 왕
생몰년: 758-780
재위기간: 765-780

일반정보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건운(乾運)이다.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즉위시 왕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왕비는 위정( 魏正) 각간(角干)의 딸인 신파부인(혹은 이찬 유성의 딸인 신보부인)과 김장(金將) 각간(角干)의 딸인 창창부인(昌昌夫人)이다. 혜공왕 16년(780)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왕과 후비(后妃)가 시해되었다.

전문정보

신라 제36대 혜공왕의 이름은 건운(乾運)이다. 아버지는 제35대 경덕왕이고, 어머니는 만월부인이다. 첫째 왕비는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16년조(780)의 “원비 신보왕후는 이찬 유성의 딸(元妃新寶王后 伊湌維誠之女)”이라는 기록과 『삼국유사』 왕력의 “처음 왕비는 신파부인으로, 위정 각간의 딸이다.(先妃神巴夫人 魏正角干之女)”라는 기사를 통해 이찬 유성의 딸인 신보부인 혹은 위정 각간의 딸인 신파부인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왕비는 김장(金將) 혹은 김장(金璋) 각간의 딸인 창창부인이다.

혜공왕의 탄생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오.” 표훈은 명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하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이 다시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라고 하자,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청하니 천제가 “될 수는 있지만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워 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 왕께 아뢰자, 왕은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혜공왕을 낳았다.

이러한 기록은 비록 설화적인 것이기는 하나, 혜공왕의 출생이 어렵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혜공왕대 일어난 많은 반란들과 혼란들이 혜공왕의 비정상적인 출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찬자도 혜공왕 4년(768)에 있었던 대공의 난과 나라의 혼란과 표훈의 예언을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혜공왕조에 “7월3일에 각간 대공의 반란이 일어나고 왕도(王都) 및 5도주군(五道州郡)의 총 도합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보물과 비단 등 재산을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고, 사량(沙梁), 모량(牟梁) 등의 마을에 있던 역적의 보물과 곡식도 왕궁으로 실어 들였다. 난리는 석달만에 그쳤다. 상을 받은 사람이 많고 죽음을 당한 사람도 수없이 많았으니, 표훈(表訓)의 말에 나라가 위태하다 한 것이 이것이었다.”라고 하였다. 곧 혜공왕 4년에 대공의 반란이 일어나고 뒤이어 나라 안에서 96각간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하여 3달만에 그쳤는데, 표훈이 『삼국유사』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서 아들로 나으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한 것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즉위년조(765)의 “왕의 즉위시 나이가 8세라 태후가 섭정하였다.(王卽位 時年八歲 太后攝政)”의 기록에 따르면 혜공왕은 즉위시 어머니인 만월부인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이 때 만월부인 세력은 혜공왕대 대표적 왕당파(王黨派)로 파악되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경덕왕대~혜공왕대 활동했던 김옹(金邕), 김양상(金良相) 등은 이들과 대립되는 반전제적인 진골귀족세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혜공왕이 즉위한 후 왕당파들은 만월부인을 통해 경덕왕대 말기, 세력이 약화되었던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혜공왕 4년(768) 만월부인이 당(唐)으로부터 대비(大妃)로 책봉 받게 됨으로써 그들의 활동을 정식으로 인정받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왕당파의 세력화는 혜공왕의 혼인과도 연결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혜공왕의 첫째부인인 신파부인은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16년조(760)에 따르면 이찬(伊湌) 유성(維誠)의 딸인데, 유성은 경덕왕초 중시(中侍)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즉 그는 경덕왕대 왕당파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유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경덕왕으로 상징되는 전제왕권을 혜공왕대까지 유지, 회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대 일단의 세력을 구축한 김옹, 김양상 등 반전제주의 귀족세력은 만월부인 등의 왕당파 세력의 규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혜공왕 4년(768) 7월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난이라든지, 동왕 6년(770)에 일어난 김융(金融)의 모반 등이 반전제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모반을 일으켜 성공함으로써 세력을 공고히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혜공왕으로 하여금 새로이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고, 혜공왕 12년(776), 관직의 복호(復號)를 통해 경덕왕이 실시하였던 한화정책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혜공왕대의 정치적 성격은 전제주의적 왕당파와 반전제주의적 진골귀족세력의 대립으로 파악된다.(이기백, 1974; 김수태, 1996)

한편 만월부인의 세력을 성덕왕대 이후 형성된 외척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아울러 만월부인 이외에 대표적 외척세력으로 김옹을 들고 있는데, 이는 『속일본기(續日本紀)』 권33 보귀(寶龜) 5년(774) 3월조와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즉 김옹은 경덕왕의 첫째 왕비 삼모부인의 아버지인 김순정의 손자이자 혜공왕의 외삼촌이므로 경덕왕의 둘째 왕비인 만월부인과 남매간이 된다. 이렇게 볼 때 혜공왕 4년(768)의 대공과 96각간의 난은 그간 김옹으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에게 중요직이 집중되었던 상황에 대해 여타 귀족들의 불만이 표출되었던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박해현, 2003)

혜공왕대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김지정의 반란과 혜공왕의 죽음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혜공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에서는 “마침내 왕은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시해되었다.(修爲宣德與金良相所弑)”라고 하였는데, 이 때 김양상을 김경신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하고, 혹은 선덕왕인 김양상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16년조(786)의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경신과 더불어 병사를 일으켜 지정 등을 주살하였는데, 왕과 후비는 난병에 의해 살해되었다.(上大等金良相與伊湌敬信 擧兵誅志貞等 王與后妃爲亂兵所害)”라는 기록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의 사료는 혜공왕 시해의 주체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즉 전자에서는 선덕왕과 김경신, 혹은 선덕왕에 의해 혜공왕이 시해된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난병(亂兵)에 의해 시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료와 아울러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즉위년조(785)의 기록이 참고 되는데, 여기서는 “앞서 혜공왕 말년에 역신이 발호할 때에 선덕왕이 상대등의 직에 있어 군측의 악을 숙청하기를 선창하였다.(初 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라고 하여 지정을 군측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원성왕조의 기록을 신빙하여 김지정을 군측의 악, 즉 왕당파(王黨派)로 규정하고, 혜공왕이 왕당파세력의 정치적 불만을 해결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에 의해 시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4; 김수태, 1996) 반면 군측(君側)의 악(惡)이라는 뜻은 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왕권 행사를 저해하는 인물, 즉 반혜공왕적인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박해현, 2003)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김수태,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일조각.
박해현, 2003,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六 惠恭王 [金氏 名乾運 父景德 母<滿>月王后 先妃神巴夫人 魏正角干之女 妃昌昌夫人 金將角干之女 乙巳立 理十五年]
제36 혜공왕 [김씨이며, 이름은 건운이다. 아버지는 경덕왕이고, 어머니는 만월왕후이다. 처음 왕비는 신파부인으로, 위정 각간의 딸이다. 왕비는 창창부인으로, 김장 각간의 딸이다. 을사년(765)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혜공왕)
惠恭王
大曆之初 康州官署大堂之東 地漸陷成池[一本 大寺東小池] 從十三尺 橫七尺 忽有鯉魚五六 相繼而漸大 淵亦隨大 至二年丁未 又天狗墜於東樓南 頭如瓮 尾三尺許 色如烈火 天地亦振 又是年 今浦縣稻田五頃中 皆米顆成穗 是年七月 北宮庭中 先有二星墜地 又一星墜 三星皆沒入地 先時宮北厠圊中二莖 蓮生 又奉聖寺田中生蓮 虎入禁城中 追覓失之 角干大恭家梨木上雀集無數 據安國兵法下卷云 天下兵大亂 於是大赦修省 七月三日 大恭角干賊起 王都及五道州郡幷九十六角干相戰大亂 大恭角干家亡 輸其家資寶帛于王宮 新城長倉火燒 逆黨之寶穀在沙梁牟梁等里中者 亦輸入王宮 亂彌三朔乃息 被賞者頗多 誅死者無算也 表訓之言國殆是也
혜공왕(惠恭王)
대력연간(大曆年間, 766~779) 초에 강주(康州)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의 땅이 점점 꺼져서 못을 이루니[어떤 책에는 큰 절의 동쪽 조그만 못이라고 하였다.] 세로가 13척(尺), 가로가 7척(尺)이었다. 홀연히 잉어 5,6마리가 서로 연속하여 점점 커지며 못도 따라서 커졌다. 2년 정미(丁未)에는 또 천구(天狗)가 동루(東樓)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하고 꼬리는 3척(尺) 가량이나 되며, 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았고, 하늘과 땅도 진동하였다. 또 이해에 금포현(今浦縣)의 논 5경(頃)속에서 모든 쌀알이 이삭을 이루었으며, 이해 7월에는 북궁(北宮) 뜰 안에 먼저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별 한 개가 떨어지더니, 별 세 개가 모두 땅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궁 북쪽 뒷간 속에서 두 줄기 연(蓮)이 나고, 또 봉성사(奉聖寺) 밭 속에서도 연이 났다. 범이 궁성(宮城) 안에 들어온 것을 찾다가 놓쳤다.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수없이 모이었다. 『안국병법(安國兵法)』 하권(下卷)을 보면 (이러한 일이 있으면) 천하에 큰 병란이 일어난다 했으므로, 이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왕이 자숙반성하였다. 7월3일에 각간 대공의 반란이 일어나고 왕도(王都) 및 5도주군(五道州郡)의 총 도합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보물과 비단 등 재산을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고, 사량(沙梁), 모량(牟梁) 등의 마을에 있던 역적의 보물과 곡식도 왕궁으로 실어 들였다. 난리는 석달만에 그쳤다. 상을 받은 사람이 많고 죽음을 당한 사람도 수없이 많았으니, 표훈(表訓)의 말에 나라가 위태하다 한 것이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