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경애왕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제55대 왕
생몰년 : ?-927
재위 : 924-927

일반정보

신라 제55대 경애왕(924-927)은 박씨이며 이름은 위응이다. 아버지는 신덕왕(神德王)이며 어머니는 자성왕후(資成王后)로, 경명왕(景明王)의 동생이다. 고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대내외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927년 견훤의 침입을 받아 자살하였다.

경애왕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신라 제55대 경애왕(924-927)은 박씨이며 이름은 위응이다. 아버지는 신덕왕(神德王)이며 어머니는 자성왕후(資成王后)로 경명왕(景明王)의 동생이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원년조를 살펴보면 경애왕은 924년 9월에 즉위하자마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遣使聘於太祖).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경명왕이 죽었을 때, 고려의 왕건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한 것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경명왕 때 고려와 맺은 수호동맹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리고 신라왕실에서 왕의 교체는 있었지만 고려와 친선관계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경애왕은 거의 매년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경애왕 2년(925)에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질자교환(質子交換)을 하게 되자 이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또 다음 해에는 고려와 후백제 간의 화친관계가 깨어지자, 이에 신라에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후백제의 공격을 바라기도 하였다. 또한 경애왕 4년(927)에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자 경애왕은 직접 군대를 보내어 왕건의 군사를 돕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애왕이 고려와 맺은 수호동맹을 이용하여 견훤의 군사적 행동에 대처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범환, 1991)

경애왕은 『삼국유사』권2 기이2 경애왕조에 의하면 즉위 후 바로 황룡사에서 백좌(百座)를 베풀어 불경을 풀이하고 선교(禪敎)의 삼백여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이것으로 선교를 통솔했다고 한다. 이것은 백좌강설(百座講說)을 통하여 선교를 통합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일면도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교의 강설이라는 사상적 통일을 통하여 정치적인 화해를 모색하고자 했을 것이다. (신호철, 1989)

한편 경애왕의 이러한 대내외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견훤의 침입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와 결합하려는 신라왕실에 대한 견훤의 견제로 보는 견해가 있다.(음선혁, 1997)

또한 박씨 왕족의 집권에 대해 불만을 가진 김씨 왕족이 견훤과 결탁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즉 견훤의 침입은 경애왕의 반대세력인 김씨 왕족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견훤의 침입이 충분히 예견되던 위기상황인 당시에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희를 베풀고 있었다는 사실과 신라 도성에의 급속한 침입, 침입 후의 결과가 신라의 병합이 아니라 김씨 왕족을 통한 왕을 교체하는 사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호철, 1989 ; 조범환 1991)

경애왕은 4년(927) 견훤의 침입을 받아 자살하였으며 왕비는 견훤에 의해 강제로 욕을 보였다는 기록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金傅大王)조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가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김부대왕조에는 견훤의 강요로 왕이 자결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신호철, 1989,「新羅의 衰亡과 甄萱」『忠北史學』2.
조범환, 1991,「新羅末 朴氏王의 登場과 그 政治的 性格」『歷史學報』128.
음선혁, 1997,「新羅 敬順王의 卽位와 高麗 歸附의 政治的 性格」『全南史學』1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五十五 景哀王 [朴氏 名魏膺 景明之母弟也 母資成 甲申立 理<三>年]
제55대 경애왕 [박씨이며 이름은 위응이다. 경명왕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자성이다. 갑신년에 즉위하여 3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애왕)
景哀王
第五十五景哀王卽位同光二年甲<申>二月十九日 皇龍寺<設>百座說經 兼飯禪僧三百 大王親行香致供 此百座通說禪敎之始
경애왕
제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 갑신(924) 2월 19일에 황룡사에서 백좌를 열어 불경을 풀이하였다. 겸하여 선승 3백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대왕이 직접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에서 선과 교를 함께 설한 시초였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
金傅大王
第五十六金傅大王 諡敬順 天成二年丁亥九月 百濟甄萱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太祖 命將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爲王 王爲萱所擧 卽位 前王尸殯於西堂 與群下慟哭 我太祖遣使弔祭 明年戊子春三月 太祖率五十餘騎巡到京畿 王與百官郊迎 入相對曲盡情禮 置宴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侵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如之 因泫然涕泣 左右莫不鳴咽 太祖亦流涕 因留數旬乃廻駕 麾下肅靜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 如見父母 八月 太祖遣使遺王錦衫鞍馬 幷賜群僚將士有差 淸泰二年乙未十月 以四方地盡爲他有 國弱勢孤 不已自安 乃與群下謀擧土降太祖 群臣可否紛然不已 王太子曰 國之存亡必有天命 當與忠臣義士收合心 力盡而後已 豈可以一千年之社稷 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齎書 請降於太祖 太子哭泣辭王 徑往皆骨山 麻衣草食以終其身 季子祝髮 隷華嚴爲浮圖 名梵空 後住法水海印寺云 太祖受書 送太相王鐵迎之 王率百僚歸我太祖 香車寶馬連亙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一區[今正承院] 以長女樂浪公主妻之 以王謝自國居他國 故以鸞喩之 改號神鸞公主 諡孝穆 封爲正承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王納土來降 太祖喜甚 待之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婚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王答曰 我伯父億廉[王之考孝宗角干追封神興大王之弟也]有女子 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 太祖娶之 是爲神成王后金氏[本朝登仕郞金寬毅所撰王代宗錄云 神成王后李氏 本慶州大尉李正言爲俠州守時 太祖幸此州 納爲妃 故或云俠州君 願堂玄化寺 三月二十五日立忌 葬貞陵 生一子 安宗也 此外二十五妃主中 不載金氏之事 未詳 然而史臣之論 亦以安宗爲新羅外孫 當以史傳爲是]
김부대왕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鬱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고려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러 가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겨울 11월에 서울로 쳐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갑작스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기며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관청과 개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거처하였다. 이에 좌우에게 명하여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영 가운데로 잡아서 왕에게 자결하도록 명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바가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서 조상하였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 신라의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가 서로에게 정성과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을 불러들였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라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일을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왕경의 사녀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 왕에게 금삼과 안장 갖춘 말을 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사들에게도 차등있게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고립되어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자 왕태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천년의 사직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하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범공(梵空)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는 국서를 받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의하니, 향차(香車)와 보물과 말들이 30여 리에 이르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고 해서 이를 난새에 비유하여 신란공주(神鸞公主)로 칭호를 고치고, 시호를 효목(孝穆)이라고 하였다. 왕을 봉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의 위이며 녹봉 1천 석을 주었다. 시종과 관원․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고 하여 이를 공(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해서 장인과 사위의 좋은 의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우리 백부 억렴(億廉)[왕의 아버지 효종(孝宗) 각간(角干),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을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이다.[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태조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 25비주(妃主) 중에 김씨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論)에 또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하겠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後以甄爲氏 父阿慈个以農自活 光啓中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皆知名於世 萱號傑出多智略 李<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諡曰白□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珎 妻王咬巴里生角干元善 是爲阿慈个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盖 四子寶盖 五子將軍小盖 一女大主刀金 又古記云 昔一富人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刺其衣 從之 至明尋絲於北牆下 針刺於大蚯蚓之腰 後因姙生一男 年十五自稱甄萱 至景福元年壬子稱王 立都於完山郡 理四十三年 以淸泰元年甲午 萱之三子<簒>逆 萱投太祖 子金剛卽位 天福元年丙申 與高麗兵會戰於一善郡 百濟敗績國亡云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國權綱紀紊弛 加之以飢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於是萱竊有(叛)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 遂襲武珎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 龍<紀>元年己酉也 一云景福元年壬子 是時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喜得人心 謂左右曰 百濟開國六百餘年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舡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 卷土歷黃山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予今敢不立都以雪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貞明四年戊寅 鐵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陽和陰剋 獻驄馬於太祖 (同)(光)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 未決勝負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攻取居西[今未詳]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都督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疑故殺 卽囚王信 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天成二年丁亥九月 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燒之 新羅王求救於太祖 太祖將出<師> 萱襲取高鬱府[今蔚州] 進軍<於>始林[一云雞林西郊] 卒入新羅王都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時 由是甚敗 萱强引夫人亂之 以王之族弟金<傅>嗣位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之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而不與相抵 使盈其貫 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京山府康州攻缶谷城 又義成府之守洪述拒戰而死 太祖聞之曰 吾失右手矣 四十二年庚寅 萱欲攻古昌郡[今安東] 大擧而石山營寨 太祖隔百步而郡北甁山營寨 累戰萱敗 獲侍郞金渥 翌日萱收卒襲破順城 城主元逢不能禦棄城宵遁 太祖赫怒 貶爲下枝縣[今豊山縣 元逢本順城人故也]
후백제 견훤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咸通, 860-873) 8년 정해(丁亥, 867)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광계(光啓, 885-887)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이 뛰어났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하였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夫人)이다. 그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인 각간(角干) 작진(酌珎)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며,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고 하고 있다.
또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光州) 북촌에 살았는데, 하나 있는 딸의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들어와 관계를 합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이르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꿰어 두어라.”라고 하여,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하였다. 경복(景福, 892-893) 원년 임자(892)에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3년 청태(淸泰, 934-936) 원년 갑오(934)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므로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가서 항복했다. 아들 금강(金剛)이 즉위한 후 천복(天福, 936-943) 원년 병신(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 패하니 후백제는 멸망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나르느라고 아기를 수풀 아래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주었다. 이 말을 듣자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집이 크고 외모가 기이하게 생겼으며, 기품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켰는데, 창을 베개 삼아 적군을 대비하였으니 그의 기상은 늘 사졸(士卒)의 선두에 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 원년은 신라의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있어 국권을 농간하므로 기강이 문란해졌다. 게다가 기근이 겹치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쪽 주현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려 5천의 무리가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珎州)를 습격하여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하였다. 이때가 용기(龍紀, 889) 원년 기유(889)였는데,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의 세력이 강성하니 궁예(弓裔)는 자진하여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자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며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백제가 개국한 후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 명으로 바다를 건너왔으며, 신라의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지나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내가 어찌 나라를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하니, 이때는 광화(光化, 898-901)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었다.
정명(貞明, 915-920) 4년 무인(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사자를 보내 경하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화살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표면상으로는 화친하는 체 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 되었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同光, 923-925) 3년(925) 겨울 10월에는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지금은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낼 수 없었다. 태조는 잠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청했다.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자 견훤도 역시 그의 외생질(外甥姪) 진호(眞虎)를 보내어 교환했다. (동광 3년)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지금은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자를 보내어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이에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 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 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을 2500호로 했다.
(동광) 4년(926)에 갑자기 진호가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하여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청했다. 태조는 웃으며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926-930) 2년 정해(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서 빼앗고 그 성을 불사르니,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가 장차 출병하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울주(蔚州)]를 습격하여 빼앗고 시림(始林)[또는 계림(雞林)의 서쪽 교외]에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신라왕은 이 때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끌어다 강제로 욕보이고, 왕의 친족 아우인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을 잇게 하였다. 그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또 신라의 진귀한 보물과 병기를 빼앗고 자녀들과 각종 공인(工人) 중에서 우수한 자들을 끌고 갔다.
태조는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인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모든 군사들이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하여 견훤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많은 죄악을 범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이긴 기세를 몰아 견훤은 대목성(大木城)[지금의 약목(若木)]‧경산부(京山府)‧강주(康州)를 노략질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義成府)의 태수 홍술(洪述)은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듣자 태조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오른쪽 손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견훤이 즉위한 지) 42년 경인(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安東)]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켜서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태조는 100보 가량을 서로 떨어져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진을 쳤다. 여러 번 싸워서 견훤이 패했으며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 잡았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성(順城)을 습격하자, 이를 막지 못한 성주 원봉(元逢)은 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이에 몹시 노한 태조는 그 고을을 격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니, 원봉은 본래 순성 사람인 까닭이다.]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