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

양부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하대의 승려
생몰년: ?-917

일반정보

신라 하대의 승려로 『삼국유사』 백엄사석탑사리조에 따르면 906년에 백엄사를 고쳐 짓고 주지를 하였으며, 917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 “양부령자”, “서혈원 양부선사”, “서혈고사”라고도 불렸다.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 도헌의 제자이며, 정진대사 긍양이 양부의 제자로 그의 법맥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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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양부(陽孚)는 신라 하대의 승려로, “양부(楊孚)”라고도 썼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따르면,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화상(陽孚和尙)이 오랫동안 폐사된 상태로 있던 백엄사를 고쳐 짓고 주지를 하였으며, 이후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희양산(曦陽山)의 긍양(兢讓)이 뒤를 이어 백엄사에서 10년을 머물렀다고 한다.

양부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이외에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이하 「지증대사비」)와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이하 「정진대사비」)에도 기록이 보인다. 먼저 「지증대사비」에 따르면,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은 “마침내 높이 도달할 적엔 혜은엄군(慧隱嚴君)에게서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였고, 양부령자(楊孚令子)에게 묵계(黙契)를 주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양부령자가 곧 양부이며, 이를 통해 양부가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한 지증대사 도헌의 법계를 이은 제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진대사비」에서는 “도헌은 강주(康州) 백엄사(伯嚴寺) 양부선사(楊孚禪師)에게 전수하였으니, 양부스님은 곧 우리 정진대사(靜眞大師)의 엄사(嚴師)이다.”라고 하여, 양부가 지증대사 도헌의 제자이며, 아울러 정진대사 긍양(兢讓, 878-956)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진대사 긍양은 봉암사를 중창하고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 및 고려의 태조(太祖, 재위 918-943), 혜종(惠宗, 재위 943-945), 정종(定宗, 재위 945-949),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존숭을 받은 선사였다. 또한 이 비문에서는 양부를 “서혈원(西穴院) 양부선사(楊孚禪師)” 혹은 “서혈고사(西穴故師)” 등으로도 기록하였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양부는 법계 상 지증대사와 정진대사의 사이에 위치하는 승려로, 사목곡 또는 서혈원에 있다가 906년 강주 백엄사를 고쳐 짓고 주석하였고 917년에 입적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진대사비」에 나오는 “서혈원(西穴院)”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충청도(忠淸道) 공주목(公州牧) 불우(佛宇)조에 보이는 서혈사(西穴寺)와 같은 곳으로 보아 공주에 있던 절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울러 양부를 유학승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정진대사비」에 보이는 “宛秀東林之境 堪傳西域之宗”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이 구절을 “우리나라(東林之境)에서도 빼어났을 터인데, 하물며 중국의 배운 종지(西域之宗)를 잘 전했음에랴.”라고 해석하여(이인재, 1996) 이를 양부의 업적을 칭송한 구절로 보고, 이를 통해 양부 역시 유학 경험이 있는 승려일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또한 「정진대사비」를 통해 긍양이 스승 양부를 찾아간 것은 20세 때인 건녕(乾寧, 당 소종의 연호) 4년(897)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때부터 양부가 입적하는 917년까지 약 20여 년을 양부의 국내 활동시기로 잡을 수 있다고 한다.(이인재, 2005) 그러나 이 구절을 양부가 아닌 강주 백엄사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고, “이곳은 마치 여산 동림(東林)의 수려함과 같아서 서역(西域)의 종지(宗旨)를 전수할 만한 곳이었다.”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이지관, 1994)

참고문헌

이지관, 1994, 「聞慶 鳳巖寺 靜眞大師 圓悟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인재, 1996, 「鳳巖寺 靜眞大師 圓悟塔碑」 『譯註 羅末麗初金石文』(下), 혜안.
이인재, 2005, 「선사(禪師) 긍양(兢讓; 878-956)의 생애와 대장경(大藏經)」 『韓國史硏究』13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